통일전망대에서 북녘 땅을 바라보다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난 민족주의자도 아니다. 그렇다고 태어난 고향이 이북도 아니다. 부모님들의 고양 역시 그곳이 아니다. 철책 너머 북녘 땅과는 전혀 무관한 사람이다. 그곳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왜 이곳에 와서 북녘 땅만 바라다보고 있노라면, 그렇게 눈물이 흘러 주체할 수가 없는 것일까?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22일과 3, 12일로 강원도 최북단인 고성과 속초를 다녀왔다. 모임이 있어 그곳에서 합동으로 다녀 온 답사 길이다. 그 첫 번째 돌아본 곳이 바로 통일전망대였다. 물론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전망대를 들어가기 위해 출입신고를 하고, 군인들이 차량을 일일이 조사하는 민통선을 넘었다.

 

 

통일전망대, 왜 가슴이 아픈 것일까?

 

통일전망대 앞에 섰다. 계단 밑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아마 안보교육이라도 받는 것인가 보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전망대를 피해 바닷가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북녘 땅을 바라다보고 있는 대불(大佛)과 성모상이 있기 때문이다. 늘 이곳을 올 때마다 이상하게 이곳에 서서 북녘 땅을 바라보고는 했다.

 

바닷물이 참으로 깨끗하다. 쪽빛바다라고 하던가? 그 깨끗한 물은 남북을 마음대로 오간다. 남쪽에서 날아온 새 한 무리가 북녘 땅으로 들어갔다. 철책을 넘어서. 저 새들은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남북을 오간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 자유로운 새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갈 수 없는 삼일포, 꿈이라도 꾸었다면

 

관동팔경, 통천의 총석정, 간성의 청간정, 양양의 낙산사, 고성의 삼일포, 강릉의 경포대, 삼척의 죽서루, 울진의 망양정, 평해의 월송정을 말한다. 이 중 북한 땅이 된 고성에는 삼일포가 있었다. 삼일포는 신라 효소왕 때 국선인 영랑, 술랑, 남석랑, 안상랑 네 명의 국선이 절경에 반해, 3일 동안 머물렀기 때문에 삼일포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금강산 관광이 이루어지던 때에는 금강산 관광을 통해 삼일포역으로 갈 수가 있었다. 하지만 2008년 금강산 관광객 피살사건으로 인해, 오고가는 길이 막혀버렸다. 지금 서 있는 이곳에서 500m 거리에 있다는 군사보호지역인 비무장지대, DMZ(demilitarized zone) 저편에 보이는 북한군의 초소가 지척이다.

 

고성을 저만큼 두고 삼일포를 찾아가니

그 남쪽 봉우리 벼랑에 ;영랑도 남석행이라 쓴

붉은 글씨가 뚜렷이 남아있구나.

이글을 쓴 사선은 어딜 갔는가?

여기서 사흘을 머무른 뒤에

또 어디 가서 머물렀던고?

선유담, 영랑호 거기나 가 있는가?

청간정, 만경대를 비롯하여 몇 군데서 앉아 놀았던고?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중 삼일포를 노래한 시이다. 그 경치가 얼마나 좋았기에 3일이나 그곳에서 묵었을까? 그런 절경을 지척에 두고도 갈 수 없는 분단의 아픔을 느끼는 이곳. 통일전망대 성모상 앞. 북녘 땅에서 넘어오는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차마 망원경을 못 보겠소.

 

그렇게 하염없이 지척에 있는 북녘 땅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양 볼에 눈물이 흐른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먼일 있소? 왜 눈물을 흘리고 그래요?”

 

함께 한 일행이 묻는다. 대답을 하지 못하고 그냥 주먹으로 눈물을 훔쳐낸다. 날이 좋은 날이면 일출봉, 신선봉, 옥녀봉 등을 육안으로도 바라다 볼 수 있다고 하는 이곳 통일전망대. 성모상 앞에서 그렇게 이리저리 마음대로 오가며 모래톱을 긁어대는 물길을 바라다보며,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쉰다. 성모상을 뒤로하고 돌아 나오는 길에 뒤에서 장사를 하시는 분의 한마디 말이 오장을 긁는다.

 

얼른 통일이 되던지, 금강산이 열리던지. 정말 장사 안 돼 못살겠네.”

고성군 현내면은 예전에 열산현의 소재지가 있던 곳이다. 현재 현의 터는 화진포에 잠겨있지만 거진읍 화포리와 현내면 죽정리 등에는 10여 개의 선사시대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어, 이곳은 아주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임을 알 수 있다. 또한 현내면 송현리와 죽정리 등에서는 돌토끼와 민무늬토기 같은 청동기 유물이 발견이 되기도 했다.

 

이 현내면은 지역적으로 군사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곳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금강산을 들어가는 길목이라는 현내면은 명파리와 죽정리 등에서 신라고분 6기가 발견이 되기도 했다. 현내면에는 고성산이라는 산이 산학리에 솟아있어, 이곳이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군사적 요충지인 산학리

 

고성군 현내면 산학리는 원래 두 마을로 나뉘어져 있었다. 옛 운근리를 나누어 산학리(山鶴里)와 열산리(烈山里)로 구분했다. 고려 때는 열산현(烈山縣)의 소재지가 열산리에 있었으나 조선시대 관제개혁으로 폐현되는 동시에 간성군에 속했으며, 현내면으로 개칭된 후 1915년 행정구역 폐합으로 두 부락의 '()'자와 '()'자를 따서 산학리로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까지는 현내면 소재지이기도 하였던 산학리는, 마을 뒤편에 고려 초에 만든 것으로 전하는 약 12m정도의 성지(城址)의 흔적이 남아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쑥고개의 봉화봉에서 횃불로 신호하면, 이곳에서 간성 고성산으로 연락하였다고 한다. 이 성터를 산학리성터 혹은 고성산성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산학리의 지명을 보면 죽정리, 산학리 경계지점인 길모퉁이에 조선시대에 현령을 지낸 권모의 공덕비라고 전하는 비가 고송과 함께 남아 있어, 외솔배기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산학리에서 고성산을 끼고 화진포로 넘어가는 낮은 구릉에는 고려 초에 축성한 것으로 보이는 토성의 흔적이 보이는데, 주둔군부대의 방호시설로 인해 훼손이 되었다.

 

옛 토성에 오르다.

 

23, 고성군 현내면의 2차 답사를 나섰다. 일행이 많아 두 대의 차량을 이용해 답사 길에 나섰다. 산학리에서 빠른 길로 화진포로 낮은 등성이를 넘다가 보니, 우측에 노송 몇 그루가 모여 있는 곳이 있다. 소나무의 굵기로 보아 수령 300년은 족히 넘었을 것 같은 소나무들이 모여 있어 그곳을 올라보았다.

 

 

석비 1기가 서 있는데, 그곳에 고성 산학리산성이라고 음각을 해 놓았다. 앞면에는 산성에 대한 설명이 적혀있다.

 

이곳은 옛날 이곳을 지키려는 선인들의 호국이 얼이 깃든 산성의 옛 터다. 처음 이곳에 성을 쌓은 시대와 성에 대한 내력은 전하는바 없어 자세하지 않으니, 고려시대 빈번하던 동여진족과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하야 쌓은 산성이라 한다.

 

1033(고려 덕종 2) 이 고장에 침입한 왜구의 무리와 1217(고려 고종4)에 침입한 거란 무리를 이 산성에서 막아 싸운 곳이라 전한다. 세월이 가고 옛 성은 허물어졌으나, 향토를 수호하려는 이 고장 선민들의 얼이 깃든 호국유적으로 이를 보호하고자 표석을 세운다.

1984, 9 고성군수라고 적고 있다.

 

 

토성으로 쌓은 성을 알아볼 수 있는 곳은 10m에 불과하다. 토성은 4~5m 높이로 경사를 보이고 있다. 그 위에는 10여 그루의 소나무들이 서 있는데 둘레가 족히 2m는 넘을 듯하다. 아마 이런 굵기를 본다면 이미 수령에 300년은 족히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위는 군부대의 방호시설이 있으며, 서쪽 끝부분은 문지나 장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토축산성을 고성산성이라고도 부르는 것으로 보아, 고성산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저 지나다가 들린 옛 성터. 2월의 바람이 불어온다. 주변을 둘러보지만 표석이 없었다고 하면, 이곳이 성터인줄 그 누가 알 수 있을까?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 옛 이야기라도 한 자락 들었으면 좋았을 것을. 인적 없는 옛 성터가 더욱 쓸쓸하다.

속초에서 7번 국도를 이용해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을 향해 가다가 보면, 우측에 왕곡마을이라는 안내판이 있다. 고성군 죽왕면 송지호 뒤편에 위치한 왕곡마을은, 지금의 오봉1리의 옛날 명칭이다. 14세기경 강릉함씨, 강릉최씨가 용궁김씨와 함께 이 마을에 들어와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는 마을이다.

 

왕곡마을이 처음 생겨난 것은, 고려 말 함부열이 조선의 건국에 반대하여 은거한데서 비롯되었다. 그 후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후, 150여년에 걸쳐 형성된 마을이다. 왕곡리에는 함씨, 최씨, 진씨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 이밖에 이씨, 박씨, 김씨, 한씨, 윤씨 등이 살고 있다. 현대문화의 범람에도 변하지 않은 옛 모습 그대로의 전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왕곡마을을 둘러보았다.

 

 

19세기에 조성된 왕곡마을

 

왕곡마을을 찾았다. 모처럼 날씨가 푹해 답사하기에는 제격이다. 왕곡마을에는 19세기를 전후해 지어진 북방식 전총한옥 21채가 있다. 전국적으로 유일하게옛 모습을 그런데도 지켜오는 밀집된 전통한옥마을이다. 이 마을은 마을을 둘러쌓고 있는 5개의 봉우리로 인해, 6.25 한국동란 때에도 한 번도 폭격을 당하지 않았다.

 

왕곡마을의 가옥구조는 안방과 사랑방, 마루와 부엌을 20~30평 규모로 한 건물 내에 수용하고 있다. 이 마을에는 유난히 기와집들이 많다. 이 집들은 모두 강원도 북부지방에서만 볼 수 있는 양통집이다. 또한 부엌의 앞에 외양간을 덧붙여, 겨울이 긴 추운지방의 기온을 버틸 수 있도록 꾸며진 집들이다. 왕곡마을 동해안의 수려한 자연을 가까이 하고 있으며, 주변을 산이 둘러쳐진 병풍 안에 자리한 마을이기도 하다.

 

 

담장 위에 올린 항아리 무엇이지?

 

이렇게 왕곡마을에 기와집이 많은 이유는, 인접하고 있는 구성리에 기와를 굽는 곳이 있어서라고 한다. 그런데 왕곡마을을 돌다가 보면 두 가지 이상한 것이 있다. 첫 째는 담장에 낸 굴뚝이다. 마을의 집집마다 굴뚝이 서 있는데, 그 굴뚝을 담장에 붙여서 조성을 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굴뚝 위에 올려놓은 항아리들이다. 이 마을은 집집마다 굴뚝위에 항아리를 얹어 놓았는데 특별한 이유 없이 그저 예부터 내려오는 전통이기에 지키고 있다고 한다. 또한 이 마을엔 우물이 없는데 마을이 생긴 모양이 배의 모양이라 우물을 파면 마을이 망한다는 전설 때문이라고 한다. 예부터 이 마을은 모두 부자가 아니어도 기와집을 하고 있었는데 이는 인근 구성리 마을에 기와 굽는 가마가 있어서 였다고 한다.

 

 

동해안의 수려한 자연환경 속에 자리한 전통 한옥마을로, 14세기 경 부터 강릉 함씨와 강릉 최씨, 용궁 김씨 등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왕곡마을은 강원도 동해안 송지호 해수욕장에서 0.5지점에 있으며 주변의 수려한 자연 환경 속에서 취락을 이루고 있는 전통한옥마을이다. 이 마을은 강릉함씨와 강릉최씨, 용궁김씨 등의 집성촌으로 고려말 두문동 72인 중의 한 분인 함부열이 조선왕조의 건국에 반대하여 간성에 은거한데서 연유되며 임진왜란으로 폐허화된 이래 150여 년 간 걸쳐 형성된 마을이다.

 

마을의 거주 현황은 함씨(25), 최씨(11), 진씨(4)가 주를 이루고 이밖에 이씨, 박씨, 김씨, 한씨, 윤씨 등이 있다. 이 마을은 14세기경부터 강릉함씨, 강릉최씨 등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아온 곳으로 수려한 자연 환경 속에 취락을 형성하고 19세기를 전후하여 건축된 북방식 전통가옥들이 군락을 이루어 원형대로 보존되고 있으며 현대 문화의 변화와 영향에도 불구하고 자연경관 주택 건축 농업위주의 생활 등이 원래의 모습대로 전래되고 있어 전통민속마을의 가치가 인정된다.

사실 2013년 새해 들어 첫 답사지를 강원도 최북단 고성군으로 잡은 것은 꼭 답사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곳에 새로 보금자리를 큰 지인도 만날 겸 문화재도 둘러볼 겸 한 걸음에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함이었다. 요즈음은 도통 답사를 자주 못나가니, 이렇게라도 짬을 내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고성에 도착한 15(), 추우도 정말 너무 추웠다. 그저 말을 할 때마다 입안으로 몰려드는 찬바람이 목을 아프게 할 정도였으니. 이렇게 추운 곳에서 한 겨울을 난다는 것이 쉽지가 않겠지만, 다행히 새로 보금자리를 튼 지인은 그것마저도 즐기고 있는 듯했다. 하기야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니, 살아가야 할 테지만 말이다.

 

 

함께 먹는 밥상이 최고라니

 

16일 일요일. 조금 늦은 아침을 먹고 시작한 답사는 다행히 전날과는 다르게 날이 춥지가 않았다. 바람도 잦아들어 답사를 하기에는 적당한 날인 듯하다. 전날 밤 어찌나 추웠던지 차 안에 있던 카메라가 얼어 아침에는 작동이 되지 않을 정도였는데. 그렇게 둘째 날의 답사가 시작되었다.

 

한 번 나가면 그래도 5~6개의 글거리를 들고 와야 하는 것이 답사 일정이다. 한 두 개 정도 글을 쓰기 위해서 많은 경비를 들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보면 자연히 걸음을 빨라지게 되고, 끼니때를 제대로 맞출 수가 없다. 항상 때 늦은 밥을 먹는 것이 답사 일정엔 그러려니 한다.

 

 

함께 동행을 한 지인들이 무엇을 먹을까를 고민을 하고 있는데, ‘장칼국수 어때요?’란다. 장칼국수에 대해서는 좋지 않은 기억이 있는 나이기 때문에 별로 달갑지가 않다. 한데 이 일행 모두가 맞장구를 치면서 좋다는 것이다.

 

처갓집에서 한 상 받았네.

 

혼자 우길 수도 없는 일이라, 옛날에 장칼국수에 안 좋은 기억이 있다고 이야기를 해도 일행은 들은 체도 하지 않는다. 이 정도면 일찍 포기하는 것이 상책. 무조건 따라 들어가야 다음 일정을 당길 수 있으니 어찌하랴. 고성군 거진읍 거진 6리에 소재한 처갓집 해물칼국수. 우리가 점심에 들어간 식당의 상호이다.

 

식당 안에는 이미 점심시간이 지난 뒤라 아무도 없다. 한편에 자리를 하고 앉아 장칼국수 네 그릇을 시켰다. 그리고 잠시 후 찬을 갖다 주는데 달랑 두 가지 밖에 없다. 무채무침과 김치, 그리고 접시 하나. 속으로 내 그럴 줄 알았지라며 혼지 투덜거린다. ‘그래도 반찬이 세 가지는 되어야 하는 것 아냐. 난 집에서 밥을 먹어도 서너 가지의 반찬은 꼭 챙기는데’. 혹 남들이 들을세라 입 밖으로는 내지도 못하지만 말이다.

 

 

잠시 후 갖다 준 장칼국수. 그런데 전에 먹던 것과는 모양새가 좀 다르다. 우선 국물을 한 숟갈 떠 먹어본다, 장맛이 깊다. 전에 먹은 것은 조미료를 많이 넣어 니글거렸는데, 이 장칼국수는 담백하다. 내용물을 좀 뒤집어 본다. 빈 그릇 하나가 바로 칼국수 안에 넣은 조개 껍질을 버리라는 것이었다.

 

조금 덜어서 맛을 본다. 깊은 맛이 있다. 역시 장맛이 좋아야 한다는 말이 이해가 간다. 그래서 이 집을 그렇게 가자고 했나보다. 사람들의 입맛이란 것이 결국에는 비슷한 것일까? 양도 적당하니 좋다. 한 가지가 마음에 들면 그 다음은 굳이 따지지 않아도 좋다. 오전 내내 돌아다녀서일까? 한 그릇 가지고는 조금 부족한 듯하다.

 

 

진한 국물이 남아있어 다행이란 생각을 한다. 밥을 한 공기 시켜 나누어 말았다. 그 맛 또한 이제까지 먹어보지 못한 맛이다. 우선은 먹고 나니 뒤끝이 개운하다. 꼭 많은 반찬을 차려 진수성찬을 받아야 맛이 좋다고 할까? 이렇게 단출하지만 입맛을 돋우는 장칼국수 한 그릇으로 행복을 느낄 수가 있다면, 이보다 좋은 음식이 어디 있겠는가?

 

바람 부는 날 장 칼국수 한 그릇 어때요?”

 

 주소 /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거진 6리

상호 / 처갓집 해물 칼국수

가격 / 장칼국수 6,000원

전화 / (033)682-4292

20131월 첫 번째 답사는 강원도 최북단의 고성군 현내면으로 정했다. 이곳은 아름다운 화진포를 비롯하여 김일성별장과 전 이승만, 이기붕의 별장 등이 있는 곳이다. 또한 이곳에는 인근에 건봉사를 비롯해, 여러 가지 문화재들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 중 둘째 날인 16일 오전에 찾아간 곳은, 바로 화진포 일대에 자리하고 있는 고인들 들이다.

 

강원도 고성군 화진포 일대에는 5기의 고인돌이 있다. 북방식 고인돌인 이 지석묘들은 문화재로 지정을 받지 못했지만, 그 규모가 크고 이 일대에서 많은 선사시대 유물이 발견이 된 것으로 보아 대단위의 주민들이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까지의 선사유적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모두 5기의 고인돌이 분포 해

 

화진포 일대에는 패총과 마제석기 등 유물이 주변 곳곳에 산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은 고대 집단 주거지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곳에 산재한 지석묘를 찾아보기 위해 화진포 콘도 지역 안으로 들어갔다. 첫 번째 만난 지석묘는 건물 출입문에서 30m거리에 있는, 이른바 '장평리 지석묘'라고 부르는 고인돌을 처음으로 만났다.

 

이 지석묘의 덮개돌은 긴 각진 타원형인데 동남쪽 일부가 파손되었다. 덮개돌의 길이는 2.5m×2,4m 정도이고 두께는 30~40cm 정도이다. 남북방향으로 자리를 하고 있는 이 지석묘는 석실의 장축인 동벽과 서벽 그리고 단벽인 남벽은 각각 1매의 판석으로 되어 있고, 북벽은 소실되었다. 남벽의 지석은 1m정도만 남아있고 북벽의 지석은 소실되어 없어졌다.

 

 

바닥에서 덮개돌까지의 높이는 약 50cm 정도이다. 석실 동쪽의 높이는 15cm밖에 되지 않고 고인돌 동쪽 바로 옆에 있는 나무뿌리에 돌이 박혀 있는 상태로 지상에 노출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이 지석묘는 묘실이 지하에 있다가 모래가 없어지면서 석실 지상에 노출되어 보이는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 석실 바닥과 주변 지역에는 천석(자갈돌)들이 산재하였다.

 

이승만 별장 기념관 주변에 3기가 있어

 

화진포 앞에서 만난 안내판에는 모두 5기의 고인돌이 있는 곳으로 표시가 되어있다. 그 하나는 앞서 언급한 화진포 콘도 옆에 1. 그리고 이승만 별장 기념관 위편 도로 양편에 3, 그리고 마지막 1기는 화포리에 자리하고 있다. 두 번째로 3기가 있는 이승만 별장 기념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장소를 확인하고도 정확하게 어디에 지석묘가 있는지를 알 수 없어, 이승만 별장 기념관 앞에 있는 매표소에 가서 고인돌이 어디에 있는가를 물어보았다. 그런데 돌아오는 답변이 의외였다.

 

가끔 사람들이 고인돌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는데 정확한 위치를 모르겠어요. 그분들도 찾아보다가 없다고 하고 그냥 돌아가셨거든요

 

어디에도 이곳에 고인돌이 있다는 안내판 하나가 없다. 할 수 없이 주변을 뒤져보는 수밖에. 도로를 따라 위로 오르는데 커다란 돌이 보인다. 얼핏 보아도 고인돌의 윗돌이다. 차에서 내려 올라가 보았더니 두 기의 고인돌이 자리하고 있다. 또 한 기는 길 건너편 비탈 위에 자리하고 있다. 안내판의 설명대로 그대로 자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곳에 고인돌을 찾지 못했을까? 아마도 여름철이라면 풀이 자라 고인돌이 가려져 있었을 수도 있다. 1월에는 다행히 풀이 마르고 쓰러져 있어 고인돌이 들어나 있는 것이다. 세 기의 고인돌은 모두 북방식의 고인돌로 그 규모가 상당히 크다.

 

비지정문화재는 이렇게 관리해도 되나?

 

매표소를 지나 길 좌측 위에 있는 두 기를 돌아보고 건너편 비탈 위에 있는 고인돌로 향했다. 길 좌측에 있는 고인돌은 밑에 굄돌이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에 비해 비탈 위에 고인돌은 그보다는 굄돌이 제대로 되어있다. 그런데 이것이 무엇인가? 소주병과 쓰레기들이 주변에 널려있다.

 

 

고인돌 사이에는 불을 놓은 흔적 같은 것도 보인다. 도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누가 이곳에 와서 술을 따라놓고 치성이라도 들인 것일까? 아니면 술을 먹으며 날이 추우니까 군불이라도 지핀 것일까? 고성군 지역은 유난히 선사유적인 지석묘가 많이 분포되어 있는 곳이다.

 

그런데 이 화진포 주변 다섯 기의 고인돌이 제대로 관리가 되어있지 않다. 문화재로 지정된 것만이 소중한 것이 아니다. 이 지역의 문화를 연구하는데 있어 소중한 자료인 고인돌이 이렇게 함부로 취급을 받는다는 것이 부아가 치민다. 이제라도 이 옛것의 소중함을 사람들에게 일깨 울 수 있는 안내판을 설치하고, 조금 더 많은 신경을 써야할 것만 같다. 첫 번 째 답사에서 만난 불쾌함은 오래도록 가시지 않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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