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체구이긴 하지만 풍물패의 맨 앞에 서서 꽹과리를 열심히 두드려댄다. 풍물패가 들어오는 것을 기다렸다는 듯 사람들은 어깨를 들썩인다. 2일 오전 수원시 권선구 고색동 381 - 4에 소재한 수원시 향토유적 제9호인 고색동 도당앞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매년 가을이면 열리는 고색동 도당굿의 당제 날이기 때문이다.

 

넓지 않은 고색동 도당 안에 들어 온 풍물패들이 열심히 풍장을 울려댄다. 그 앞에선 상쇠 김현주(, 49. 오목천동)씨가 풍물패를 인솔해 도당을 한 바퀴 돈다. 그리고 도당 앞에서 한 바탕 놀이판을 벌린다. 고색동 도당굿은 이렇게 풍물패와 굿을 주관하는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98호 경기도당굿 회원들이 이끌어 간다.

 

 

작은 체구에 15년 된 당당한 쇠잽이

 

김현주씨는 어려서부터 춤을 배웠다고 한다. 그런데 중간에 춤을 잠시 중단을 했다고.

어려서부터 춤을 배웠어요. 중학교 1학년 때까지 추다가 춤을 중단했는데 지금은 다시 배우고 있죠. 결혼을 하고나서 고색동으로 이사를 왔는데 사물을 가르친다는 거예요. 그래서 처음으로 시작을 했죠. 아줌마들이 모여서 1년 만에 정월 대보름에 여는 고색동 줄다리기에 나가서 호남우도 농악으로 마당놀이를 했어요. 그런대 고색동에서 저희들을 보고 고색농악에 들어오라는 거예요. 그때부터 고색농악대로 많은 행사에 동참하게 된 것이죠.”

 

20015월부터 고색동에 있는 새마을금고에서 연습을 하던 농악팀은 지금은 노인회관으로 자리를 옮겼다고 한다. 마을에서 적극 지원을 해주기 때문에 연습을 편하게 할 수 있다고. 처음에는 일주일에 한 번 연습을 했으나, 지금은 일주일에 목요일을 뺀 나머지는 매일 연습을 한단다.

 

 

월요일은 기초반 연습이 있고요. 화요일은 중급반이 모여서 연습을 해요. 수요일은 북반이 연습을 하고 금요일은 전체적으로 다 모여서 연습을 하는데. 요즈음은 중보뜰 공원으로 나가서 야외에서 신나게 연습을 하죠. 그만큼 40여 명 정도의 단원들이 열심을 내고 있어요.”

 

쇠잽이와 천성적으로 맞아 떨어져

 

고색농악이 일 년에 담당하는 행사만 해도 적지 않단다. 정월 대보름에는 근동 사람들이 다 모여드는 줄다리기를 하고, 5월에는 어버이날 행사에서 판굿을 벌인다고. 그런가하면 매년 10월에 열리는 고색동 도당굿에서 한마탕 질펀하게 놀기도 하고, 지금은 중단되었지만 고색동 체육대회에서도 빠지지 않았다고 한다.

 

올해는 9일에 열리는 화성문화제 시민퍼레이드에 허수아비를 들고 나가려고 준비하고 있어요. 그동안 줄다리기도 하고 지난해는 모심기 노래를 하면서 퍼레이드도 해보았는데, 올해는 오목천동에서 허수아비 축제를 하잖아요. 그래서 허수아비를 들고 시민퍼레이드에 참가를 하려고요.”

 

이날 마당놀이에서는 상쇠노릇을 했지만 자신은 부쇠라고 한다. 상쇠를 담당하시는 분이 바쁜 일이 있어 이날만 상쇠를 맡은 것이라고. 여자가 쇠를 치는 것이 쉽지가 않았을 텐데 어떻게 쇠를 치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처음에 사물놀이반에 들어갔는데 저는 장구를 치고 싶었어요. 그런데 장구는 이미 사람들이 다 차고 쇠잽이 자리가 비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꽹과리를 맡았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게 더 잘된 일인 듯해요. 제 적성에도 딱 맞고요.”

 

대담을 하고 있는데 농악대 단원들이 찾는다. 그 소리를 듣고 곁에 있던 마을 어르신들이 한마디 거드신다. “상쇠 찾는데 얼른 가봐. 저 사람은 재주가 좋아. 그리고 어떻게 늙지도 않아.”

 

한 해의 안녕을 기원하는 고색동 줄다리기

 

줄다리기는 흔히 삭전(索戰)’이라고 해서 정월 대보름을 기해 마을과 마을이 서로 힘겨룸을 하는 대동의 놀이이다. <동국세시기>에는 충청도 풍속이 거전(炬戰)이라는 횃불싸움이 있다. 또 편을 갈라 줄을 서로 잡아당긴다. 그래서 끌려가지 않는 편이 이기는 것으로 풍년을 차지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전국적으로 줄다리기가 행해졌다. 지역마다 줄의 형태나 줄의 처리방법, 줄다리기가 갖고 있는 내적사고는 다르다고 해도, 하나의 공통적인 습속은 여자가 이겨야 풍년이 든다.’거나 줄은 액막이의 상징으로 줄을 다리고 난 뒤 그것을 잘라 대문 앞에 걸어놓거나, 줄을 마을 입구에 놓으면 액이 들어오지 못한다.’는 등의 사고를 갖고 있다.

 

 

줄의 효능과 처리방법

 

우리 민족은 짚으로 꼬아 만든 줄이라는 조형물에 대해 깊은 뜻을 내재하여 왔다. 짚으로 꼬아 만든 줄은 왼새끼로 꼬아 대문에 걸어두면 금줄이 된다. 집안에 큰 일이 있거나 산모가 있을 때도 이 줄을 늘여 잡인의 접근을 막았다. 또한 장을 담가도 줄을 둘러 액을 막았다. 이렇게 우리민족과 짚으로 꼬아 만든 줄은 깊은 관계를 맺어왔다.

 

정월 보름을 맞이하기 전에 사람들은 짚을 준비하고 줄을 꼬기 시작한다. 줄의 형태는 암줄과 수줄을 만드는데, 이것은 남녀를 상징한다. 줄다리기를 할 때는 암수줄이 한데 엉키게 되며 이를 비녀라고 하는 장목으로 고정시킨다. 줄의 용두를 만들 때는 암줄은 넓게 하고 수줄은 좁게 하여, 암줄의 용두에 수줄의 용두가 들어가게 만든다.

 

이러한 줄의 결합상태가 주는 내적사고는 바로 다산과 풍농이다. 남녀가 결합을 해서 다산을 기원하고, 짚으로 만든 줄을 결합시킴으로써 풍농을 구가하는 것이다. 줄을 당기는 이유는 마을마다 다르다. 그 마을이 처해있는 환경이나 지리적인 여건 등에 따라 내적 사고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여자 쪽이 이기면 3년간 풍년이 들고 마을전체가 평안하게 살아간다.’(성남 판교)

승자는 공동으로 이용해 보를 막기 때문에 풍년이 든다’(안양)

강물이 풀려 액송기를 꽂은 줄이 떠내려가면 모든 재앙과 액운이 소멸된다’(여주 흔암리)

 

이렇게 지역마다 줄을 다리고 난 뒤에 마을에 전하는 속설이 차이가 난다. 그것은 그 마을이 처해있는 환경에 따라 적당한 속설을 창출하기 때문이다. 수원시 권선구 고색동 큰말 일원에서는 매년 정월 대보름을 전후해 줄다리기를 해왔다. 고색동의 줄다리기는 그 유래가 아주 오래인 것으로 전해진다.

 

9일 오후 고색동 줄달리기 이루어져

 

고색동의 줄다리기는 매년 음력 정월 보름에 행해졌으나, 요즈음은 보름 전후의 날을 잡아 일요일에 줄을 당긴다. 고색동 줄다리기는 1900년대만 해도 근동 30여 개 마을에서 풍장패를 끌고 나와 참여를 하는 큰 줄다리기였다. 일제의 문화말살정책 때는 줄을 다리지 못하자 마을에 흉사가 끼고 평안하지가 않아, 몰래 줄을 다리고는 했다고 한다.

 

 

1987년까지도 고색동의 줄다리기는 연이어져 왔다, 그 후 줄이 불에 타서 소실이 되고 마을이 급격히 도시화하면서 줄다리기가 중단이 되었다가, 고색동 청년회가 전통문화의 승계를 위해 1995년 줄을 새로 제작하고 복원하여 보름을 전후로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고색동 줄다리기는 마을에 있는 당집에서 당고사를 지내는 것으로 시작이 된다. 9일 아침 10시 수원시 향토유적 제9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고색동 당집에서 풍물패들이 먼저 당고사를 올린다. 그리고 길놀이를 하면서 당주네 집으로 몰려간다. 당주네 집에 도착하면 마당놀이를 하는데, 이때는 근동의 풍물패(화성시)들도 함께 와 풍물을 주고받는다.

 

암줄이 이겨야 마을이 안과태평해

 

예전 같으면 당주집에서 마당놀이를 하고나면 바로 줄을 메고 마을을 한 바퀴 돌면서 길놀이를 하겠지만, 지금은 중간에 문화행사 등 많은 행사가 이루어진다. 마을잔치로 하다 보니 더 많은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다. 오후 2시가 되어서 줄다리기가 시작이 되었는데, 여자와 아이들은 암줄을 남자들은 수줄을 잡고 다린다.

 

 

줄 위에는 각각 남장과 여장을 한 편장이 타게 되고, 편장의 지시에 의해 줄을 밀고 당긴다. 양편의 줄이 합해지면 수줄의 용두를 암줄에 밀어 넣고 빠지지 않게 장목으로 비녀를 끼운다. 징소리에 맞추어 세 번을 다리게 되는데, 암줄이 이겨야 마을에 풍년이 들고 마을이 평안하다고 한다.

 

풍물패의 빠른 가락에 이어 사람들의 함성소리. 그리고 줄을 당기는 사람들의 고함소리 등이 한데 어우러져 마을이 떠나갈 듯한 고색동 줄다리기 한 판. 줄다리기는 그 내재되어 있는 사고 외에도 겨우내 침체되었던 몸을 줄다리기를 하면서 기운을 써 몸을 푸는 효과도 가져오는 전승놀이이다. 그렇게 마음껏 소리치고 힘을 쓰면서 일 년의 안과태평을 빌었으니 마을이 편안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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