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표현기법은 알아보기가 힘들다. 오랜 세월 풍화작용으로 인해 그 형체조차 식별이 어려운 까닭이다.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이런 모습을 보게 되면, 괜히 마음 한편이 우울해지기도 한다. 충남 보령시 내항동 767-10에 소재한 충남 문화재자료 제317호인 ‘대천 왕대사 마애불’은 그렇게 바위 암벽에 오랜 시간 서 있었다.


바위 암벽에 음각을 한 왕대사 마애불은 조성시기를 통일신라시대로 추정하고 있다. 이곳 왕대사가 있는 산을 ‘왕대산’이라고 부르는데,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이 이곳에 머물렀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절의 이름도 ‘왕대사’라 한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미륵정토를 꿈꾸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

 

 


더운 날씨에 답사를 한다는 것은 그만큼 어렵다. 땀도 땀이지만 걸음걸음이 천군만근이기 때문이다. 미쳐 물이라도 준비하지 못하면, 이것은 답사가 아닌 극기훈련에 속한다. 그 정도로 한 여름철의 답사는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왕대사 마애불은 왕대사 대웅전을 바라보고 좌측 바위에 조성하였다.


자세히 보지 않는다면 그 형체조차 파악하기가 힘들다. 그저 단순하게 절집을 찾았다고 하면, 마애불이 어디에 있는지 조차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많이 윤곽이 뚜렷하지 않다. 바위에 새겨진 거대마애불이 속하는 이 마애불은, 그 형태로 보아 통일신라 때 조성한 것으로 보이지만 정확한 형태를 알 수 없다는 것이 아쉽다.


선각으로 조성한 왕대사 마애불


왕대사 마애불은 선각으로 조성을 하였다. 커다란 바위암벽의 평평한 면을 이용하여 전체에 차게 조성을 하였는데, 안면의 윤곽은 제대로 파악조차 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미륵불로 조성을 한 이 왕대사 마애불은 법의의 형태와 몸의 뒤에 새겨진 신광 등을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이다.


용화세상의 기원하는 민초들의 염원이 깃들어 있는 미륵불로 알려진 왕대사 마애불. 나발과 두광, 상호 등은 마멸이 심해 알아볼 수조차 없다. 하지만 목에는 희미하지만 투박하게 표현한 삼도가 보이고, 광배는 배 모양의 주형거신광배로 보인다.


이 왕대사 마애불은 경순왕과의 관계로 인해, 통일신라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전체적인 형태나 거대마애불인 점 등으로 볼 때, 오히려 고려 초기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왕대사 경내에서 한 숨을 돌리다.


 

 

마애불을 돌아보고 난 뒤, 왕대사 경내를 찬찬히 돌아본다. 움직일 때마다 이마에서는 굵은 땀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이런 날 대웅전에 들어가 참례라도 한다면, 대웅전 마루에 땀방울로 흥건히 젖을 듯하다. 그저 어간문 앞에서 잠시 목례를 하고, 낮은 담장 너머로 펼쳐지는 앞을 바라본다.


잘 조성이 된 논에는 한 여름의 열기에도 벼들이 파랗게 자라있다. 아마도 저 논에도 부지런한 농부들의 땀이 물이 되어 흘렸을 것이다.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 한 점이 땀을 식힌다. 그저 바람이라도 시원하게 불어주는 것이 고마울 뿐이다. 남들은 피서를 간다고 난리들인데, 어쩌자고 이 무더위에 답사를 하는 것인지. 그것도 팔자려니 하면, 무엇이 더 행복할 것인가? 바람 길을 따라 또 길을 나서보련다.

 

‘마애불’이란 커다란 바위 암벽의 면에, 부조나 선각 등으로 불상을 새긴 것을 말한다. 마애불이야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그러나 마애종이 있다는 것은 그리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 않은 듯하다. 마애종이란 암벽에 새긴 종을 말하는 것이다. 안양시 만안구 석수1동 산32에는 바로 이 마애종이 있다.

석수동 산 32번지라고 해서 산을 연상할 필요는 없다. 석수동 마애종은 주차장이 있는 평지에 남서쪽을 향한 암벽에, 장방형의 목조 가구와 그 안의 종을 새긴 것이다. 현재 누각을 지어 이 마애종을 보호하고 있으며, 그 앞을 지나는 사람들마다 안내판을 유심히 들여다보고는 한다. 아마도 이들에게도 마애종이라는 것이 낯설기 때문인가 보다.


종의 모양을 세밀하게 표현 해

누각 안 바위 암벽 면에 새겨진 마애종의 모양은 오랜 세월 풍화로 그리 선명하지는 않다. 상단의 보 중앙에는 쇠사슬을 달아 종을 걸어 둔 모양을 새겨 표현하였다. 그런데 그 모양이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동종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굵은 쇠사슬로 매단 종의 상단은 용뉴와 음통이 확연하게 표현을 하였다.

종의 상단에는 장방형 유곽을 2개소에 배치하였는데, 그 안에 각각 9개의 원형 유두가 양각되어 있다. 이 또한 일반적인 종에서 볼 수 있는 모습 그대로이다. 종신의 중단에는 연화문이 새겨진 당좌를 표현하고, 하단에는 음각선으로 하대를 표시하였다. 아마도 이 마애종을 새긴 장인이 종에 대한 많은 지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종을 치고 있는 승려, 생동감 있게 표현 해

종의 오른쪽에는 종을 치고 있는 승려상을 조각하였다. 이 승려상의 모습은 지금의 승려들과 다를 바가 없다. 이 마애종을 조각하였을 당시의 모습도 지금과 같았던 것일까? 다만 그 법의의 형태가 현재의 승려복이기 보다는 흔히 부처상에서 보이는 그런 법의와 흡사하게 표현을 하였다. 긴 막대를 사용하여 종을 치는 모습은 당장이라도 종소리가 울려 퍼질 듯하다. 목조 가구의 위쪽에는 3개소에 화반을 표시하였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2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안양시 석수동의 마애종은 현존하는 마애종으로는 유일한 것이다. 종의 세부 표현에 있어 청동제와 다를 바 없어, 종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주변의 중초사지 유적과 연관성을 생각해 볼 때, 고려시대 초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이 곳은 이 마애종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인근에는 고려시대의 절터인 중초사지가 자리하고 있으며, 이 중초사지는 그동안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문헌자료에만 남아 있던, 안양사 7층 전탑 터가 2010년에 확인되기도 했다. 그 이전 2009년에는 이 일대의 발굴조사 과정에서 안양사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기도 헸다. 이곳 일대에 고려시대에 안양사가 위치한 곳이라는 것이다.

저 마애종이 울리면 새 세상이 올까?

한참 마애종을 이리저리 다니면서 돌아보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이야기를 하는 말소리가 들린다.

“저 마애종이 울리면 세상이 바뀌려나? 제발 좀 그랬으면 좋겠네. 사람들이 좀 편하게 사는 세상이 왔으면”



뒤를 돌아다보니 등산객인 듯한 사람들이 안내판을 보면서 하는 소리이다. 속으로 그 말에 백배 공감을 한다. ‘제발 좀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아마도 이 마애종을 바위에 새긴 장인도 그런 마음으로 새긴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고 보니 저 종을 치고 있는 스님의 모습이, 지금이라도 종을 칠 듯한 자세이다.

경상북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에 소재한, 우리나라 3보 사찰 중 한 곳인 통도사 관음전 앞에는 석등 한 기가 서 있다. 이 석등은 등불을 밝히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아래는 팔각의 받침돌을 삼단으로 쌓았다.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 장식을 얹고 있는 이 석등은, 현재 경상남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70호이다.

석등의 용도는 절 안의 어두움을 밝히는 것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자비광명을 온 누리에 비추어 중생을 깨우쳐 선한 길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등불은 수미산과 같고, 등을 밝히는 기름은 넓은 바다를 상징한다고 한다. 이는 등에서 나간 불빛이 고루 퍼져나가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공양구 중에서도 으뜸인 등불

석등은 언제나 석탑과 함께 전각의 앞에 자리한다. 이는 부처님께 드리는 공양물 중에서도 등불 공양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갖가지 형태의 많은 석등이 현재까지도 자리하고 있으며, 폐사지 등에도 석등이 남아있는 숫자가 많은 것을 보면, 석등을 그만큼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보인다.

통도사 관음전 앞에 자리하고 있는 석등은, 그 조형 양식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석등은 둥근 형태의 연꽃받침인 연화대 두 개를 아래 위로 놓고, 그 가운데를 팔각의 간주석을 세웠다. 그 윗부분에는 불을 밝히는 화사석과 지붕돌을 올려놓은 형태이다. 석등의 구성형태는 거의가 이런 형태로 꾸며진다.



연화대가 상징하고 있는 뜻은?

이 통도사 석등은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따르고는 있으나, 귀꽃 양식 등이 세밀하지 않다는 점을 보아 고려 초기 작품으로 추정한다. 아래받침돌인 연화대의 옆면에는 안상을 얕게 새겼고, 윗면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조각하였다. 이 아래에 있는 연꽃받침은 물속에 있는 탁한 진흙과 같은 세상을 뜻한다. 아래 위 연화대 가운데에 있는 간주석인 기둥은 중앙에 세 줄의 테를 둘렀다.

이 세 줄은 천, 지, 인을 상징한다고도 하고, 불가에서 부처님의 목에 난 삼도와 같은 의미라고도 한다. 하지만 이 세 줄에 대한 정확한 풀이는 알 수가 없다. 이 팔각의 기둥은 이상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불교의 올바른 길인 팔정도를 상징한다. 깨달음과 열반으로 이끄는 올바른 여덟 가지 길인 팔정도는,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을 말한다.



간주석 위에 있는 윗받침돌에는 위로 솟은 연꽃무늬를 장식하였다. 위로 향한 연꽃을 조각한 연화대는, 광명, 청정, 부처, 보살의 세계를 상징한다. 이렇듯 석등 하나가 갖는 뜻은 상당히 깊은 것이다.

흔치 않은 부등변 팔각석등

4개의 커다란 불창이 있는 화사석은, 파손이 된 것을 후에 새로 교체한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인 석등의 조화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석등은 언뜻 보면 4각처럼 보이지만, 부등변 팔각석등으로 우리나라 석등의 변천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꼽히고 있다.



화사석의 위에 얹은 지붕돌은 귀퉁이마다 꽃장식인 귀꽃을 달았다. 지붕돌 위에는 머리장식의 받침인 노반과, 꼭대기에는 꽃봉오리 모양의 장식인 보주를 놓았다.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석등. 크고 작은 모형의 이 석등을 볼 때마다 더욱 그 가치를 높이 사는 것은, 바로 이런 깊은 뜻이 있기 때문이다.


돌로 만든 석불대좌. 그 위에는 석불좌상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었을 것이다. 석불대좌 하나만으로도 감탄을 불러 올 수 있다면, 그 위에 좌상이 함께 있었다고 한다면 아마도 최고의 석조 예술품이 아닐까 생각한다.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에 위치한 고달사지. 그 고달사지 높지 않은 축대위에 자리한 석불대좌는, 그야말로 대단한 작품이었다.

고달사지 석불대좌는 사각으로 구성되었다. 전국에 산재한 많은 사각 대좌뿐이 아니라, 그 어떤 대좌보다도 뛰어난 수작이다. 고달사지 석불대좌는 장방형의 석재를 상, 중, 하대 3중으로 겹쳐 놓았다. 이른바 방형대좌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석불대좌이다. 보물 제8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석불대좌는, 고려 초기의 역작이라 할 수 있다.


3단으로 꾸며진 방형의 석불대좌

대좌의 상대에는 앙련을 조각하였는데, 그 형태가 시원하다. 뚜렷한 조각솜씨는 당대 최고의 석공에 의해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고려 때 고달사지는 나라에서 관리를 하는 사찰이었던 점을 보아도, 이 석불대좌를 조각한 공인은 최고의 기능을 갖춘 석공이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중대는 사면을 돌아가면서 큼직한 안상을 하나씩 조각하였다. 음각으로 새긴 안상은 바라만 보아도 명쾌하다. 하대는 상대와 같은 연꽃을 앙련으로 새겨 넣고, 그 아래에는 작은 안상을 한 면에 4개씩 새겨 넣었다. 상하의 조각을 앙련으로 마무리를 해, 방형의 사각형에 중첩과 안상, 연꽃을 교체하여 뛰어난 조화를 엿볼 수가 있다.



보면 볼수록 빠져들어

설을 지내고 난 다음날인 2월 4일. 눈길을 걸어 찾아간 고달사지에는 인적이 없다. 정초이기도 하지만, 황량한 이곳을 정초부터 찾아오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한적한 고달사지를 둘러본다. 저만큼 석조며 귀부와 이수, 그리고 낯선 석조각들이 보인다. 그 고달사지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석불대좌. 낮은 축대 한편으로는 돌계단이 보인다.

그 돌계단을 올라 석불대좌 주변을 돌아보면 잘 다듬은 초석들이 보인다. 아마도 이곳이 금당이었을 것이라고 추측을 해본다. 이 석불대좌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던 석불은, 아마도 이 고달사의 주불이었을 것이다. 대좌 주위를 몇 번이고 돌아본다. 볼 때마다 감탄을 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대좌 위에 사라진 석불을 그려보다

석불대좌가 자리하고 있는 곳은 장대석으로 축대를 쌓았다. 그 장대석의 크기도 예사롭지가 않다. 고달사지 안에서도 가장 잘 다듬은 장대석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주변에는 기둥을 세웠던 초석이 가지런히 자리를 하고 있다. 그 중앙에 석불대좌가 놓여있는 것이다. 대좌를 앉힌 기단석은 원래는 커다란 바위를 네모나게 조형을 한 것 같다. 반이 금이 가 있으나, 동서가 갈라진 곳이 다르다. 그리고 그 위에 일석으로 하대를 조성했다. 네모나게 층을 만들고, 사방에는 네 개의 안상을 음각했다. 그 위를 덮고 있는 앙련이 부드러움을 느낄 만큼 정교하다.

중대는 상대와 하대에 비해 좁게 만들었다. 각 면에 하나씩의 커다란 안상을 음각하였는데, 그저 밋밋한 그 안상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그리고 맨 위 상대는 일석으로 조성하였는데, 아래는 앙련을 위에는 꽃잎을 조각하였다. 상대의 위는 석불이 앉았던 자리이다. 그저 평평하게 조성을 하였다.



도대체 이 방형의 거대 석불대좌 위에 올려 졌던 석불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아무리 그림을 그려보려고 하지만, 딱히 그 모습이 생각나지 않는다. 아마도 머리에는 큼직한 육계가 솟아있고, 좁고 길게 찢어진 눈에, 입가에는 엷은 미소를 띠고 있을 것이다. 어깨에 걸친 법의는 자연스럽게 흘러내렸을 테고, 발은 편안하게 가부좌를 틀지 않았을까?

세상의 모든 고통을 받는 중생들에게, 그 미소로 아픔을 가시게 해주었을 것만 같다. 이렇게 수작인 석불대좌 위에, 조악한 작품이 올라앉았을 수는 없었을 테니까? 바람에 밀려 고달사지를 떠나면서 내내 뒤를 돌아다본다. 석불대좌 위에 금방이라도 석불이 나타나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할 것만 같다.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덕전리에는 고담사라는 절이 있다. 이 절 뒤편에는 화강암 바위를 그대로 깎아 불상을 새긴 마애불이 자리하고 있다. 한 눈에 보아도 거대마애불이다. 이런 거대 마애불은 고려시대의 작품에 많이 나타나는데, 이 마애불 역시 고려 초기인 10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전통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왜 이렇게 거대한 마애불을 조성했을까? 아마 그것은 국운의 융성함과 더불어, 고려라는 나라의 국권을 상징한 것인지도 모른다. 보물 제375호로 지정된 함양 덕전리 마애여래입상은 바위 면을 다듬어 조각한, 전체 높이 6.4m에 불상 높이가 5.8m나 되는 거대한 마애여래불이다.



함양군 마천면 덕전리 고담사 뒤편 암벽에 새겨진 보물 제375호 마애여래입상

염주와 화염의 문양으로 돌린 두광

고담사 뒤편 바위에 새겨진 마애여래입상은, 훼손이 되지 않은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 오랜 풍광에도 아름답게 보존이 되고 있는 모습에서 고마움을 느낀다. 이 마애불의 특징은 바로 광배와 대좌까지 온전히 옛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배 모양의 광배는 두광과 신광까지 모두 볼록하게 조각을 하였다. 연주와 화염의 문양을 돌려 조각을 한 마애불은 보기에도 화려하다.

불상을 받치고 있는 대좌는 연꽃 봉우리처럼 조각을 한 상좌가 있고, 그 밑에는 탑의 기단부와 같은 모습으로 하대로 구분이 되어있다. 특히 하대에는 석탑에서 보이는 우주와 탱화가 표현되어 있으며, 고려시대 탑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안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렇게 하나하나 세세하게 표현을 하였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받침에는 상좌와 하대가 표현이 되어있다. 하대에는 석탑의 기단부와 같이 우주와 탱주, 안상 등이 나타난다. 두광와 신광은 연주와 화염의 문양을 조각해 화려하다.

조금은 균형이 안맞는 덜 세련된 조각수법

길고 큰 전신에 비해 나발과 육계는 작은 편이다. 하지만 가늘게 감은 듯한 눈과 두툼한 꼭 다문 입등은 강력한 인상을 풍긴다. 적당히 표현된 코와, 어깨까지 늘어진 귀 등은 위엄스러움을 담고 있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며 넓은 어깨에는 대의를 걸쳤는데, 가슴에서 한 번 꼬여 양편으로 늘어진 것이 망토와 같은 모습이다. 

이러한 모습은 인도에서 시작이 되어 중국을 거쳐, 통일신라시대로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전체적인 형태의 조각기법에서 덕전리 마애여래입상이 통일신라의 마애불 조각기법을 따른, 고려 초기의 작품이라고 보는 이유다. 발은 크고 두툼한데 비해 손은 작은 편이다. 그런데 손을 조각한 수법이 색다르다. 몸에 비해 도드라지게 조각이 되어 있다. 아마 손이 작게 조각이 된 것도 저렇게 위로 도드라지게 조각을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조금은 비례가 맞지 않는 손과 발

덕전리 마애불 앞에서 세상을 위해 참배를 하다.

전국 이곳저곳을 답사하면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문화재들. 이렇게 온전히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덕전리 마애여래입상 앞에 서서 고개를 숙인다. 세상을 구하자고 하는 것이 아니다. 아직도 문화재 지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수많은 문화유산들. 그리고 훼손되고 도난당한 문화재들. 이런 아픔을 위한 반성의 참배다. 누구 하나 돌아보지 않은 이 산 중 깊은 곳에서 천년 세월을 꿋꿋하게 지켜졌다면, 무엇인가 신비스런 힘이 있지나 않을까하는 생각에서다.


그 굳게 다문 눈이며 입이, 그리고 왼손을 들어 무엇인가를 알려주고자 하는 모습이 덕전리 마애여래입상 앞에서 고개를 숙이게 만든다. 뒤돌아 산을 내려오면서도 몇 번이고 돌아보게 되는 마애불. 아픔을 당하고 있는 세상의 모든 이들을 위해 기원을 해본다. 이제는 제발 몇 사람들을 위한 세상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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