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한옥마을 일원에서 열리는 전주한지문화축제에 가면, 우리 전통의 한지를 이용한 다양한 상품들을 만날 수가 있다. 더욱 축제가 열리고 있는 곳이 한옥마을이기 때문인가 외국인들도 상당수 보인다. 많은 행사가 있는 축제 초에는 사람들도 붐벼 제대로 구경을 할 수 없을 듯 해, 일부러 편안한 날로 잡았다.

 

많은 사람들이 한옥마을을 다녀간다. 하지만 이 전주한지문화축제가 아니라고 해도, 한옥마을을 다니다가 보면 한지로 만든 많은 제품들을 늘 만날 수가 있다. 하지만 문화축제 때는 더 많은 한지 제품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일부러 한지 축제 때에 찾아가고는 한다. 시간이 지나기는 했지만, 그곳에서 만난 아름다운 벽지는 늘 머릿속을 맴돌고 있다.

 

 

다양한 한지 상품 선보여

 

오목대 방향에서 축제장 쪽으로 발길을 돌리니 사람들이 열을 지어 축제장을 향하고 있다. 이것저것을 보고 다녀보니 우리한지의 아름다움에 다시 한 번 빠져들게 된다. 전주한지문화축제는 전주한지의 경쟁력을 확보하고 전주한지의 산업화 및 관광객 유입효과를 통한 지역경제에 기여를 하고자 하는데 있다.

 

경기전 옆에는 꽃밭과 어우러진 한지로 만든 장승이 서 있기도 해 눈길을 끈다. 이 모든 것들이 한지를 이용해 만들어졌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많은 한지상품 들을 전시해 놓은 곳을 돌다가 눈이 번쩍 뜨인다. 아름다운 화조그림이 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게 꽃과 새, 나비 등이 그려진 종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벽지란다.

 

 

<민속한지벽지>라는 우리한지로 제작한 상품 앞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그만큼 아름답기 때문이다. 한지닥나무와 실물 낙옆, 단풍잎, 녹차임 등을 이용해 제작한다는 민속한지벽지. 그리고 찢어지지 않는 창호지와 각종 그림이 그려져 있는 한지 썬팅지 등. 그야말로 우리한지에 우리적인 것을 표현하였다.

 

이렇게 아름다운 민속한지벽지는 1933년 초대 오동섭의 가내수공업으로 시작한 한지장판지 생산이, 2대 오원석으로 이어지고 그리고 현재 3대 오기연까지, 대를 이어 한지 장판과 한지 벽지 등의 생산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3대째 한지벽지 생산을 하는 오기연 대표 대담

 

- 3대째 한지제품 생산을 하셨다는데?

예. 완주 송광사 앞에서 가내공업으로 장판을 생산하기 시작한 것이 오늘까지 오게 되었죠. 아직도 장판을 생산하는 공장은 송광사 앞에 있습니다.

 

- 이렇게 한지로 다양한 제품을 만들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셨을 텐데?

그랬죠. 벽지를 개발하는 데만 17년이 걸렸습니다. 고생도 많이 했고요. 그래도 이렇게 우리한지로 좋은 상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뿌듯합니다.

 

- 민속한지벽지의 좋은 점이 무엇이 있나요?

요즈음은 많은 분들이 건강을 먼저 생각하십니다. 우리 민속한지벽지는 친환경적인 상품입니다. 2007년에는 대한민국 친환경건자재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고요. 요즈음 화학재료를 사용한 벽지 등에서도 발암물질이 있지 않는냐고 걱정을 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는데, 저희는 순수한 한지로 제작한 상품이기 때문에 그런 걱정을 전혀 안하셔도 됩니다.

 

 

-한지벽지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우선은 질기고 수명이 오래간다는 것이죠. 그리고 보온성과 통풍성이 뛰어나 습도조절 기능이 있습니다. 또한 탈취기능이 있어 실내공기를 쾌적하게 만들어 줍니다. 항균력도 갖고 있어 아토피 알레르기를 예방하는 것은 물론이고, 원적외선 방사율까지 있습니다.

 

- 가격은 일반 벽지에 비해서 많이 비쌀 것 같은데요?

그렇지 않습니다. 벽지 값은 일반벽지보다 20 ~ 30% 정도 고가지만, 수명이 길어서 오히려 한지벽지를 사용하면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 앞으로도 많은 제품을 개발하실 것인지?

그래야죠. 벽지 한 제품을 개발하고 생산하는 데만 3년 이상이 걸립니다. 하지만 우리 한지제품을 더 많이 개발해 세계화를 시키는 것이 저희 바람이기도 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건강에 좋은 벽지를 만드는 것이죠.

 

- 고맙습니다.

‘하마비(下馬碑)’라는 것이 있다. 하마비는 궁궐이나 향교, 혹은 사찰이나 옛 고택 등의 앞에도 서 있다. 이 하마비가 서 있으면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타고 가던 말에서 내리라는 뜻이다. 하마비의 한편이나 뒤쪽을 보면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고 적혀있다.

 

여기서 ‘대소인’이란 당하관인 종 3품 이하의 관원을 뜻한다. 또한 원(員)이란 당상관을 말한다. 우리가 옛 각판 등에서 볼 수 있는 정3품 통정대부 이상을 말하는 것이다. ‘개(皆)’는 ‘모두 다’ 라는 뜻이니, 결국은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 말에서 내리라는 뜻이다. 이 하마비가 서 있는 곳에서는 누구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려 걸어가란 뜻이다.

 

자연석을 이용한 하마비도 있어

 

물론 전국에 있는 하마비는 거의 위와 같은 ‘대소인원개하마’라고 각자를 했다. 하지만 가끔은 예외도 있다. 고을의 방백 등이 자신의 위치를 과시하기 위함인지는 몰라도, 자신의 직급을 적고 그 밑으로는 다 말에서 내리라고 적은 글귀도 보인다. 이런 예외인 하마비는 고을의 수령이 근무를 하는 입구에 놓여있기도 하다.

 

이러한 하마비는 어디를 가나 흔히 볼 수가 있다. 하마비는 대개 일석으로 조성을 한다. 길게 세운 위를 둥그렇게 조형을 해 세우는 것이 일반적인 하마비의 모습이다. 하지만 특별하게 만든 하마비도 있다.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해 하마비를 만든 곳도 있고, 돌에다가 하마비라고 각자를 해 놓은 것들도 보인다.

 

 

하마비는 조선조 태종 3년인 1413에 종묘의 궐문 입구에 표목을 세운 것이 처음이다. 이곳에는 ‘대소관리과차개하마(大小官吏過此皆下馬)’라고 적어, ‘이곳을 지나는 사람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말에서 내려야 한다.’ 라는 뜻이다. 조선시대에는 궁이나 종묘, 문묘, 왕장이나 성현, 고관의 출생지나 분묘 앞에 세워졌다.

 

전주 경기전 앞의 하마비는 특이해

 

전북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 3가 102번지에 소재한 경기전은 ‘어용전(御容殿)’이다. 어용전은 조선 태종 10년인 1410년에 완산과 계림, 평양에 건물을 짓고 태조의 어진을 모신 곳으로 세종 24년인 1442년부터 지역마다 이름을 달리 불렀다고 한다. 경기전은 전주에 있던 어용전을 가리키는데 선조 31년인 1598년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광해군 6년인 1614년에 고쳐지었다.

 

경기전 입구에 보면 특이하게 생긴 하마비가 서 있다. 일반적으로 하마비는 일석으로 조성을 하는 것에 비해, 경기전 앞의 하마비는 밑에 두 마리의 행태가 비를 받치고 있는 형태이다. 두 마리의 해태가 사각형의 넓은 판석을 이고 있으며. 그 위에 하마비를 세웠다. 판석에는 사방에 안상을 새겨 넣었다.

 

 

하마비의 표석에는 ‘지차개하마 잡인무득입(至此皆下馬 雜人毋得入)’이라고 적혀있다. 즉 이곳에 이르거든 누구나 다 말에서 내려야 하며, 잡인을 일체 들이지 말라는 뜻이다. 이 하마비는 1614년에 세웠으며, 그 후 1856년에 증각을 하였다.

 

하마비라고 해서 다 같지는 않다. 대개는 비의 중앙에 ‘하마비’라고 음각을 한 후, 한 편에 대소인원개하마란 글귀를 적어 놓는 방법을 택한다. 하지만 경기전 앞에 서 있는 하마비는 하마비라는 글자를 음각하지 않고, 양편으로 나누어 글귀를 내리 음각했다. 아마도 이 경기전이 태조의 어진을 모셔놓은 곳이기 때문에, 이렇게 특별한 하마비를 세운 듯하다.

 

전국을 다니면서 보면 많은 곳에서 만날 수 있는 하마비. 때에 따라서는 하마비에 얽힌 재미있는 사연도 들을 수가 있다. 이제는 이와 같은 하마비도 훌륭한 하나의 문화유산으로 인정해야하지 않을까?

문화재란 참 기묘한 것이란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내가 문화재를 답사할 때는, 가급적이면 철마다 한 번씩 찾아간다. 물론 일부러 철마다 찾아가는 곳도 있으나, 대개는 그 지역을 지나칠 때 들려가는 경우가 많다. 10월 29일 전주에서 ‘오마이뉴스’ 전북지역 시민기자들의 모임이 있었다. 그곳 가까운 곳에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셔 놓은 경기전이 있다.

경기전은 가을마다 한 번씩은 꼭 들리는 곳이다. 가을경치가 그만큼 뛰어나기 때문이다. 한옥마을에는 주말을 맞아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경기전 역시 여기저기 사람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깊어진 가을의 정취를 느끼려고 북적인다. 경기전 안에는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26호인 ‘예종대왕 태실 및 비’가 자리하고 있다.


단풍과 어우러진 문화재, 분위기 정말 좋아

가을에 많은 문화재를 만나기 위해 답사일정을 많이 잡는 것은, 바로 아름다운 주변 경치와 아울리는 문화재들의 모습을 담아내기 위함이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철마다 왜 문화재의 모습이 그리 달라져 보이는 것인지. 그렇다고 문화재의 본질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문화재 주변의 경치가 달라지는 것이지.

29일 찾아간 경기전의 예종대왕 태실과 비도 마찬가지이다. 딴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아마도 주변을 아름답게 수놓은 형형색색의 단풍 때문이란 생각이다. 그냥 볼 때는 조금은 삭막한 석재들이 단풍과 어우러지면, 그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한다는 것이 신기하다.



가을에는 이런 모습을 보는 사람들이 문화재에 조금은 더 신경을 쓰기도 한다. 평소 같으면 그냥 지나칠 사람들도, 주변과 어우러진 모습을 보면서 한 번 들여다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든 문화재 주변에 단풍을 심을 수는 없을 테니, 예종대왕의 태실 및 비는 문화재 중에 복을 받았다고나 해야 할까?

태 항아리를 가져간 조선총독부, 좋아할 수 없는 이웃

이웃나라라고 한다. 그러나 난 일본이라는 나라를 한 번도 이웃이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 문화재를 답사하는 나로서는 일본은 죽어도 이웃이 될 수 없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수많은 우리의 문화재를 강탈해 갔다. 그 수많은 문화재가 아직도 일본 땅 곳곳에 있다니, 이런 나라를 어떻게 이웃이라고 생각을 할 수가 있겠는가?



한 두 사람이 태실의 돌난간에 앉아 사진을 찍는다. 그것마저 무엇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게라도 아름다운 사진을 찍어 홍보를 해주기만 한다면.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안내판이라도 한 번 더 보아주었으면 하는 생각뿐이다.

‘태실(胎室)’이란 왕가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그 태를 소중히 석실에 보관하여 땅에 묻는다. 우리나라의 지명에 ‘태실’ 혹은 ‘태봉’이란 지명은 태를 묻은 곳이란 뜻이다. 예종대왕의 태도 항아리에 담아 놓은 것이다. 원래 이 태실은 선조 11년인 1578년 현 완주군 구이면 원덕리 태실마을 뒷산에 묻었다가, 영조 10년인 1734년에 다시 고쳐 지은 것이다.

그러나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태 항아리를 가져가면서 태실이 파괴되어 구이초등학교 근처에 방치가 된 것을, 1970년 이곳으로 옮겨 온 것이다. 결국 이 태실 안에는 예종대왕의 태는 없고, 그 태를 감쌌던 석조물과 비만 남은 것이다.



화려하지 않은 태실과 비

예종대왕의 태실 및 비는 화려하지 않다. 태실은 팔각형으로 조성한 돌난간 안에 기단석을 놓고, 그 위에 배가 부른 원통형의 돌을 놓고 지붕돌을 올렸다. 전체적으로 보면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부도탑의 형태이다. 난간은 두 개의 6각형 장대석을 이용해 난간을 둘렀는데, 이음새 부분에는 문양을 한 받침돌을 놓았다.


석비는 태실과 함께 옮겨온 것이다. 비석의 앞면에는 예종대왕의 태실임을 알리는 글귀가 적혀있고, 뒷면에는 비석의 건립연대를 음각하였다. 머릿돌은 뿔이 없는 용의 얼굴과 구름 등을 새겨 넣었다. 앞뒤로 새긴 용은 금방이라도 불을 뿜어날 듯하다. 받침돌인 귀부는 평범하게 조각이 되었다. 다만 거북의 귀갑문을 사용하지 않고, 다채로운 문양으로 꾸민 것이 특이하다.

가을이 되면 문화재도 분위기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그 본질이야 어디로 갈 것인가? 예종대왕의 태실과 비를 보면서, 이 가을에도 미움이 가시지 않을 것만 같다. 그 태를 훔쳐다가 도대체 어떻게 한 것일까? 이 아름다운 단풍도 그 마음을 어쩌지는 못하는 것 같다.

경술국치일, 1910년 8월 29일은 한일합방이라는 역사에 부끄러운 일을 당한 날이다. 이제 2010년 8월 29일은 국치를 당한지 꼭 100년이 되는 날이다. 전주 경기전 앞에서는 다시는 이러한 치욕적인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 국치일을 되새기기 전시회가 열려 눈길을 끌고 있다.
 
‘국치 100년 특별전. ’거대한 감옥, 식민지에 살다‘라는 타이틀로 8월 20일부터 29일까지 전시가 되는 이 특별전은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에서 주최를 한다. ’전주이기 때문에 이런 전시도 하네‘라는 관람자의 말대로, 전주는 바로 경기전이 있는 곳이다. 조선이라는 나라를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모신 어용전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성계의 조상들이 이곳 전주 이목대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경술국치 100주년을 맞아 당시를 그릴 수 있는 뜻 깊은 전시가 열리고 있다

항일과 반일을 캐리캐처로 그려

이 전시회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바로 캐리캐처로 그려진 사람들이다. ‘한 시대의 다른 삶, 항일과 친일’이라는 제목을 붙인 이 그림들은 각계의 사람들 중 친일인사와 항일운동을 한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다. 물론 이 인물들은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해서 친일과 항일을 구별한 것이다.



항일을 한 사람과 친일을 한 사람들이 캐리캐처로 그려져 있다

경기전을 관람하러 온 사람들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차분하게 들여다본다. 우리가 잘 아는 역사적 인물이지만 그들이 새삼 일본에 협조를 한 친일인사라는 것에 입맛이 씁쓰레해진다. 이 외에도 수탈의 현장, 항일운동을 한 의병들의 공개처형 장면 등 당시를 생각할 수 있는 사진들이 전시가 되어있다. 그 뒤 한편에는 한국의 대표언론이라는 신문사가 일장기를 제호 위에 달고 전쟁을 성전이라고 독려하는 사진도 보인다.



경기전 벽에 붙은 대형현수막 앞에서 사람들은 걸음을 멈춘다.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 달라’는 일본 후쿠다 총리와 이명박 대통령의 회담 내용의 진실을 알려달라는 것이다. 일본의 언론들도 그 말이 사실이라고 보도를 했다는 내용도 함께 전시가 되어있다. 사람들은 ‘설마’라는 말로 위안을 삼아보지만, 그 진실은 오직 당사자만이 알 일이다.


과연 무엇이 진실일까를 묻고 있다

돌아보던 어린이 ‘정말 나쁜놈들이예요’

‘해방,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라고 외친다. 과연 우리는 완전한 해방을 맞기는 했을까? 의문을 갖게 만든다. 일본의 대기업인 미쓰비시가 10만 명이나 되는 한국인들을 강제노역에 동원하고, 65년이나 밀린 임금을 후생연금이란 명목으로 고작 99엔(한화 1,300원)을 지불하겠다고 했다는 내용에 격분하고 있다. 그 한편에는 ‘성노예로 끌려간 소녀들’, ‘총알받이로 끌려간 조선 청년들’의 이야기와 창씨개명 등 조선말살정책을 편 일본의 만행을 적고 있다.





한편에는 나라를 일본에 팔아넘긴 을사오적(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 정미칠적(이완용, 송병준, 이병무, 고영희, 조중응, 이재곤, 임선준)과 한일병합 조약인 경술국적(이완용, 윤덕영, 민병석, 고영희, 박제순, 조중응, 이병무, 조민희) 등이 조선을 넘겨주고 일본에서 받은 상금과 직위 등을 소개하고 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국치의 잔재. 과연 완전한 해방은 무엇인가를 스스로 질문을 하게 만드는 이 전시를 보면서 마음 한편이 착잡하다. 언제라야 정신대 할머니들의 응어리진 속이 조금이나마 풀리려나? 하는 생각에서.

짚은 우리 생활에 아주 오래 전부터 요긴하게 쓰였다. 우선 짚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은 초가집의 이엉 엮기이다. 추수가 끝나는 가을이 되면 초가지붕을 새로 덮는데, 짚을 엮어 씌우고 맨 위에는 용마름을 얹는다. 그 외에도 소의 사료로 사용하는가 하면, 각종 도구 등을 만들기도 했다. 새끼를 꼬는가 하면 광주리, 짚신, 삼태기, 망태기, 다래끼, 채반, 멍석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짚으로 제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짚을 사용하는 것은 제작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사용을 하는 기간이 짧아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이 없지도 않아, 점차 짚을 이용해 제작한 도구 등이 사라지게 되었다. 또한 짚을 이용해 도구 등을 제작하려면 일일이 수공예품으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짚공예를 할 수 있는 어르신들이 세상을 떠나자 자연쇠퇴 되기도 했다.


‘호랑이 한 마리 사가시려우’

전주 경기전 안 서재마루. 열심히 짚을 이용해 무엇인가를 만들고 계시는 분들이 계시다. 한 분은 연신 판소리 한 대목을 불러가며 손을 놀린다. 그 옆에는 직접 만들었다는 짚공예품들이 나열이 되어있다. 일반적인 소품이 아니라 멧돼지, 호랑이 같은 동물들이다. 그 짚으로 만든 동물들을 보다가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이 우스워서 웃은 것이 아니고, 짚으로 만든 호랑이의 표현력 때문이다. 코털을 세우고 입을 쩍 벌린 호랑이는, 금방이라도 포효를 할 것만 같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이빨이 날카롭고 혓바닥까지 있다. 외국인들은 신기한 듯 들여다보다가 연신 카메라에 담아낸다. 어린 아이 하나가 호랑이가 무섭다고 칭얼댄다. 옛날이야기라도 들은 것일까?



짚을 만지면 손이 거칠어진다. 그러나 예전에는 이렇게 직접 제작을 했다. 멧돼지와 돼지의 표현이 재미있다.

‘호랑이 한 마리 사가시려우?’농으로 하는 이야기지만 가격이 만만치 않을 듯하다. 일일이 새끼를 꼬아, 그것으로 제작한 호랑이다. 몇 날을 저 호랑이 한 마리를 만들기 위해 소일을 했을 것이다. 그런 것을 가격으로 따질 수는 없다. 그저 그 호랑이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어르신의 미투리는 신어도 좋을 듯

그 옆에는 연세가 지긋하신 어르신 한 분이 연신 손을 놀리고 계시다. 앞에 보니 <김형철 할아버지의 수공예작품>이라고 쓰여 있다. 짚신이며 미투리, 소쿠리 등이 보인다. 비닐과 짚을 섞어 손수 제작하신 미투리가 눈길을 끈다. 당장 신어도 좋을 듯하다.


전주 경기전 안 서재마르에서 짚공예를 하시는 김형철 어르신과 수공예품인 미투리

짚공예의 역사는 상당히 길다. 『고려도경』에 보면 짚신을 만들 때는 삼이나 왕골 등을 섞어서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도경은 전 40권으로 송나라 사신 서긍이 고려 인종 1년인 1123년에 고려를 방문하여, 당대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 군사, 풍속, 예술, 기술, 복식 등을 정리한 책이다.

누구나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어 많은 실생활에 도움을 주는 짚공예. 이제는 실생활에 사용하기 보다는, 집안을 장식하는데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그만큼 짚공예가 점차 사양길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기전 서재 마루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 호랑이도, 어쩌면 너무 많은 것을 잃어가고 있는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 호랑이의 떡 벌린 입이 자꾸만 눈에 밟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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