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천을 굽어보는 한벽당 앞 다리 쪽에서 올려다보면, 산마루 가까이 7부 능선쯤에 커다란 입석불상이 서 있는데 이곳이 동고사다. 동고사는 전주의 사방에 세워진 절 중 하나로, 남고사, 서고사, 진북사와 더불어 사방에 세운 절 중 한 곳이다.


차를 타고 올라도 힘든 길이다. 6월 7일 5시가 넘어 카메라를 들고 길을 나섰다. 기온이 30도를 오르내리는 날이라 숨이 턱에 닿는다. 전주의 남고산성과 더불어 마주하고 있는 동고산성을 오르기 위해서다. 동고산성은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된 성으로, 조선 순조 때 건너편에 있는 산성을 '남고산성'이라 부르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신라 헌강왕 때 도선스님이 창건한 동고사


현재 동고사는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2호로 지정이 되어 있으며, 전주의 동쪽에 자리한 절이라 하여 '동고사'라 칭했다고 한다. 동고사는 임진왜란 때 소실이 되었던 것을 조선조 헌종 10년인 1844년에 허주 스님이 재건을 하고, 그 후 1946년에 영담스님이 대웅전 등을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른다.


동고사는 신라 경순왕의 둘째아들이 '범공'이라는 이름의 스님이 되어, 도를 닦으며 나라를 잃은 설움을 달랬던 곳이라고도 한다. 동고사를 오르니 전주 시내가 아래로 내려다보인다. 그만큼 동고산성 인근 위편에 자리한 절이다. 절에는 대웅전과 종각, 산신각, 염불원 등의 전각이 있다. 전각 아래로는 언제 쌓은 것인지 돌을 쌓아 탑을 여러 개 조성하였는데, 담장이가 타고 올라 고찰의 운치를 더하고 있다.

 

 


견훤의 왕궁 터엔 주추만 남아


동고사 인근에 견훤의 왕궁 터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찾아 나섰다. 동고사에서 내려오다가 단군성전 조금 못 미쳐 우측으로 난 길을 돌아 올라가면 동고산성의 안내판이 있다. 동고산성은 전라북도 기념물 제44호로 전주시 완산구 교동과 대성동에 걸쳐 있다. 이곳은 예로부터 후백제를 세운 견훤의 왕궁 터라고 전해진다.


견훤은 신라 효공왕 4년인 900년에 완산주(현재의 전주)에 '전주성'을 쌓고 도읍지로 정했다. 그 후 936년까지 37년간 존속을 했다. 1990년 이곳을 발굴할 때 전면 22칸 84.4m, 측면 3칸 16.1m, 총 66칸의 건물지가 발견이 되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발굴된 단일 건물지로는 최대의 크기고, 이곳이 견훤왕의 궁성이었던 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잡초가 우거진 궁궐터에는 커다란 돌 들이 나란히 놓여있다. 다듬지 않은 넓적한 이 돌들이 당시의 주초였는가 보다. 앞으로는 축대를 쌓았던 흔적인지 가지런히 돌들이 남아있다. 세월이 변해 이곳을 근거지로 삼아 백제부흥을 꾀했던 견훤은 37년 만에 사라지고 말았지만, 그 역사의 흔적은 고스란히 남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가슴 뭉클하게 만든다.


발굴된 자료에서 견훤의 궁터임을 알 수 있어


이곳을 견훤의 궁터로 추정하는 것은 이곳에서 발견된 자료와 여러 가지 기록에 의해서다. '전주성황사중창기'에는 이곳을 <견훤고궁허>라 하였고, 1980년 발굴된 건물지의 기와 명문에서 '전주성'이라는 글자가 발견이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성(城)'자가 박힌 기와는 왕궁 터에서나 쓰던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 이 기와의 연꽃무늬는 신라 말 고려 초기에 것으로, 견훤이 이곳에 도읍을 정한 시기와 일치한다.

 

 


역사는 비정한 것인지. 잃어버린 나라를 다시 세우기 위해 갖은 고생을 하며 이곳 완산주에 후백제를 일으킨 견훤은, 불과 37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동고산성 안에는 여기저기 건물지가 보이는데, 아마 궁을 중앙에 두고 앞으로는 군막들이 있었고, 뒤편으로는 또 다른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길을 따라 내려오면서 보니 이곳이 천혜의 조건을 가진 성터로 보여진다. 하지만 37년이라는 길지 않은 시간을 보낸 후 사라진 후백제. 그러나 이곳은 영원한 백제인들의 정신적인 지주가 아닐는지. 그 넓은 왕궁터에 남은 주춧돌만 보아도, 당시 견훤의 마음을 조금은 읽을 수 있을 듯하다.

전북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산 80-1번지는 사적 제408호는 왕궁리 유적이다. 이곳은 ‘왕궁리성지’라고도 부른다. 이렇게 부르는 것은 이곳이 마한의 도읍지설, 백제 무왕의 천도설, 혹은 별도설 등이 이곳이라는 학설 때문이다. 또한 이곳은 안승의 보덕국설과 후백제 견훤의 도읍설이 전해지는 유적이기도 하다.

한창 발굴이 이루어지고 있는 왕궁리 유적지를 찾았다. 마침 공사를 쉬는 날이라 안내인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은 유적지를 한창 발굴하고 있는 중인데, 성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저기 표시를 한 곳은 아마 건물터인 듯하다. 유적지 앞쪽에 우뚝 서 있는 국보 289호인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백제석탑의 양식을 충실히 따른 통일신라 말, 또는 고려 초기의 석탑으로 보인다.


안정감 있는 형태의 왕궁리 석탑

오층석탑의 정확한 유래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탑 주변에서 「관궁사」,「대궁」등의 명문기와가 발견이 된 점으로 미루어, 궁성과 관련된 사찰이 있지는 않았을까 추정하고 있다. 왕궁리 석탑은 발굴, 복원 전까지만 해도 기단부가 땅속에 파묻혀, 토단을 쌓고 그 위에 탑을 세운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65년 11월∼1966년 5월의 해체 수리 때에 밑에 석물로 된 가단부가 발견이 되어 원형을 복원되었다.


발굴중인 사적 제408호 익산 왕궁리 유적

멀리서 보아도 왕궁리 오층석탑은 균형이 잘 잡혀있다. 돌 하나하나를 맞추어 쌓아올린 것이 빈틈이 보이지 않는다. 기단부의 네 모서리에 8각의 부등변 고주형 주춧돌이 놓고, 우주석 사이에는 길고 큰 돌을 몇 단 쌓아 올렸다. 탑은 옥신과·옥개석이 모두 몇 장의 돌로 구성되어 있다. 1층 몸돌은 우주가 새겨진 기둥모양의 우주석과, 탱주가 새겨진 중간석으로 되어 8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1층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몸돌은 작아지고, 옥개석도 그에 따라 넓이가 줄어들고 있다. 이렇게 5층까지 올라가면서 매우 안정적인 모습을 보인다.

옥개석은 매우 넓은데, 받침과 지붕이 각각 딴 돌로 되어 있다. 받침은 각 층 3단으로 4개씩의 돌로 짜여 있으며, 등분을 하지는 않았다. 옥개석은 1층부터 3층까지는 8개의 돌로 짜여져 있으며, 4층과·5층은 4개의 돌로 구성하였다. 추녀는 얇고 추녀 밑은 수평이며, 끝부분에는 종을 매달았던 풍령공이 뚫려있다.





발굴 중이기 때문에 출입을 제한하는 줄을 쳐놓아 가까이는 갈 수가 없다. 뒷면과 탑 주위를 돌아보고 싶었으나, 금지를 시킨 줄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해 쳐놓은 줄을 스스로 넘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탑이 높아 상륜부가 가려 잘 보이지는 않지만, 상륜부에는 노반과 부발, 앙화, 그리고 부서진 보륜 1개가 남아 있다.

왕궁리 석탑 국보라서 다르다. 그 아름다움이

전국을 다니면서 수많은 탑을 보아왔지만, 왕궁리 오층석탑 앞에서는 순간 숨이 막히는 듯하다. 어떻게 저렇게 안정감이 있게 조형물을 만들 수가 있었을까? 마치 거대한 틀에 부어 만든 것만 같은 정교함이 놀랍다. 국보로 지정이 된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그렇다고 국보로 지정된 여느 석탑처럼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 말로는 다 표현하기 어려운 고귀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마치 후원 한편에 꼭꼭 숨겨졌다가, 발을 걷고 버선코를 살며시 들고 나타나는 여인네와 같은 아름다움이 보인다. 그리고 그 단아한 자태는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있다. 한참이나 바라다보다가 ‘가자’는 일행의 목소리에 놀란다.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억지로 끌며 돌아서지만, 그 단아한 아름다움은 한참이나 남아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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