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치기' 또는 '얼레공치기', '짱치기'라는 놀이가 있다. 이 놀이는 1930년대까지 전국적으로 연희가 되어왔던 놀이니, 중단된 지가 그리 오래지 않다. 이 장치기를 시합으로 할 때는 '장치기'라 하고, 놀이로 할 때는 '장채놀이'로 부르기도 한다.

 

1931년 2월 1일자 <동아일보>는 서탄면 황구지천에서 전국의 32개 남여 팀이 참가한, '전 조선 얼레공대회'가 열렸다고 보도했다. 또 <동아일보> 사보 1월 24일자부터 30일자까지에는 수원군 양감면 용소리 앞 냇가에서 얼레공대회를 개최한다는 예고가 실렸으며, 참가할 각 팀의 선수는 5명으로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장치기는 우리 민속 중 유일하게 나타난 구기종목이기도 하다. 장치기는 놀이방법이나, 놀이를 할 때 사용하는 기구 등이 간단하다. 놀이를 하기 위해선 짚이나 나무공이를 이용해 만든 '공'과, '장'이라고 하는 나무로 만든 채만 있으면 된다. 공은 짚을 엮어서 만드는 방법을 택했으며, 장은 물푸레나무 등을 이용해 길이가 3~5자 정도에, 끝이 45도 앞으로 휘어져 10~15cm 정도 되는 것을 사용한다.

 

모두가 즐겨하던 전통 공놀이

 

 

. 얼레공은 짚을 꼬아 둥굴게 만들고. 장은 물푸레 나무 등으로 만든다

 

 

 

장치기는 1950년대만 해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놀이였다고 한다. 어른들은 정월 대보름을 전후해 넓은 논바닥에서 마을끼리 대항을 하기도 했단다. 장치기 놀이에는 특별한 규칙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몇 명이라도 모이면 편을 갈라 하는 놀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치기가 꼭 놀이로서만 전승되어 온 것은 아니다. 장치기는 겨울에 운동량이 부족할 때, 몸을 움직여 원활한 신진대사를 돕기위해 하는 '운동'이 되기도 한다. 또 일부 마을에서는 얼레공을 자신의 마을로 몰고 가기도 한다. 이는 자신의 마을로 복을 끌고 가는 것이라고 한다. 즉 얼레공을 짚으로 만들기 때문에, 그것이 풍농과 연결이 된다는 것이다.

 

간단한 도구를 갖고도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공놀이. 장치기는 그저 공터만 있으면 연희가 가능한 놀이다. 1932년 전국에서 남녀 32개 팀이 모였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우리나라 전역에서 보편화 된 놀이였음을 방증한다.

 

장치기는 어떻게 전해졌을까?

 

 
장을 이용해 짚을 꼬아만든 장을 쳐낸다
 
 
장은 끝이 구부러져 얼레공을 몰아가기에 편하다. 필드하키와 흡사하다.

 

어떠한 놀이든지 갑자기 생겨날 수는 없다. 장치기도 예외는 아니다. 장치기의 원조는 삼국시대부터 전해진 '격구'로 본다. 고려 태조 1년인 937년 기록에 격구장이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격구는 그 이전부터 성행한 놀이임을 알 수 있다. 고려 때는 여자들이 말을 타면서 하는 마상격구를 할 때, 그 치장의 화려함이 지나쳐 한 때 금지시키기도 했다.

 

조선조에 들어서는 태조와 정종이 격구를 즐겼으며, 세종 7년인 1425년엔 무예연습의 필수과목으로 격구를 선택하기도 했다. 정조는 격구를 24기 무예의 한 종목으로 택해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안에 수록하였다. 이러한 반가의 대표적 놀이인 격구가, 언제부터 민간으로 전해져 장치기가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조선조 중기 이후에 급격히 쇠퇴한 반가의 놀이인 격구가 이때를 전후해 민간으로 전해졌을 것으로 본다.     

 

우리 놀이를 되살릴 수는 없을까?

 

 
양팀의 사람들이 서로 얼레공을 빼앗기 위해 채로 얼레공을 쳐내고 있다.

 

나는 오래 전에 수원에서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장치기를 가르쳐 재현시킨 적이 있다. 경기도민속경연대회와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까지 참가를 시키기도 했는데, 장치기는 누구나 손쉽게 배울 수가 있어서, 청소년들의 놀이로 장착을 시켜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필드하키와 비슷한 놀이인 장치기는 장이라는 나무막대기를 이용하기 때문에, 때로는 격한 몸싸움으로 부상을 입기도 한다. 그러니 그런 부상을 막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만 보완한다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우리 전통의 놀이다.

 

연세가 80세 이상이신 분들 중에는 아직도 장치기를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다. 장치기 놀이에는 별도의 골문이나 골키퍼가 있진 않다. 그저 넓은 공터 양편에 돌을 놓아 문을 만들고, 편을 갈라 얼레공을 몰고 가 그 문 안으로 들여보내면 된다. 사라지는 우리 전통놀이인 장치기. 비교적 간단하면서도 아이들의 체력을 위할 수 있는 우리 전통놀이를 되살릴 수만 있다면, 좀 더 건강한 정신과 육체를 갖게 되지 않을까?

 

일 년 내내, 계절에 구애를 받지 않고 들에서 뛰어놀던 장치기. 우리의 전통 공놀이인 장치기를 학생들에게 가르쳐, 예전과 같이 전국의 남녀 팀이 모여 함성을 지르는 모습을 볼 수 있기를 고대해본다.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한다. ‘우리는 한이 많은 민족이라 새도 울고, 바람도 운다고 표현을 한다.’ 정말로 그런 표현을 한다. 모든 것을 운다고 표현을 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운다는 표현이 정말로 눈물을 흘리면서 우는 것을 표현하는 것일까? 그런 표현으로 인해 우리민족이 한의 민족이라는 것이다.

또 한 예는 요즈음 성시를 누리고 있는 노래방을 이야기한다. 가슴 속에 맺힌 한이 많아서 그것을 풀기 위해 노래를 하다가 보니, 그렇게 노래방이 수도 없이 들어차게 된 것이라는 설명이다.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노래를 좋아하는 민족들은 흔하지 않은 듯하다. 하지만 그것이 한이 많아서일까?

2010년 남한강 정월대보름 한마당에서 기싸움을 펼치고 있다. 이렇게 역동적인 놀이가 바로 우리의 민족성이다.

우리민족은 원래 강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민족처럼 강한 민족도 드물다, 이웃 나라들과 숱한 전쟁을 치르면서도 꿋꿋하게 지켜온 나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세월에 따라 통치자에 의해 명칭은 바뀌었지만, 그 본질이 바뀐 것은 아니다. 딴 나라들처럼 이민족에게 나라를 넘겨주지는 않았으니까. 그런 것 하나를 보아도 참 끈질긴 생명력을 갖고 있는 민족이다.

이러한 우리민족의 성정은 늘 강해야만 했다. 그 강함이 잘 나타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전래놀이들이다. 그 놀이 안에 보면 공동체가 살아있다. 나를 위하기보다는 남을 위하는 그런 마음가짐이 보이는 것이다. 그런 민족성이 놀이 안에도 잘 나타난다. 우리 놀이들을 보면 경쟁이 심하다. 말은 경쟁이라고 할지 몰라도 그 안에는 보이지 않는 투쟁의 심성이 포함되어 있다.

고려 때는 여자들이 말을 타고 격구를 즐겼다. 그 사치가 지나쳐 나라에서 금지를 시키기도 했지만, 적어도 고려 때까지는 우리민족이 그런 한을 갖고 사는 민족이 아니었다. 고대에 나타나는 고구려의 동맹, 예의 무천 등을 보아도 알 수 있다. 3일 밤낮을 술을 마시고 춤을 추고 노래를 했다. 그 노래가, 그 춤이 과연 한이었을까? 아니다. 그저 즐거운 마음으로 하늘에 감사하는 의식을 올렸을 것이다. 한이 아닌 흥이란 뜻이다.


장과 얼레공을 갖고 하는 장치기는 승부성 민속이다. 격구가 변해서 민속 장치기로 변했다고 한다.

왜 한(恨)스런 민족으로 바뀌었을까?

고려 때까지만 해도 역동적이던 우리민족은, 조선조에 들어서 여성들이 집안으로 들어가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한 마디로 개방적이던 여성들이 울안에서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반상의 차가 커지면서 양반가의 여인들은 ‘남존여비’라는 논리에 얽매어 문밖출입을 삼가고, 담장 안 생활에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조선조에 들어 민초들은 양반가의 수탈로 인해 하루하루를 지탱하기가 어려웠다. 그런 양반가의 수탈이 결국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키게 한 요인이기도 하다.

또한 힘든 삶의 연속이다 보니, 여인들이 살림을 꾸려가기가 점점 버거워졌다. 그런 연유로 여인들은 점점 늘어간 것이 한숨이었다. 새벽부터 일어나 많은 노동을 감당해야 하는 여인들로서는, 나오느니 한숨이요 생활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시집살이’ ‘꼬댁각시‘ 등 한탄조의 노래가 절로 흘러나오고. 작업요의 대부분이 한탄조의 가사와 음률로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다가 보니 생활의 고통, 여자를 천시하는 풍조, 이런 것들이 자연 ’흥‘에서 ’한‘으로 변화가 될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인 민속놀이인 줄다리기 역시 역동적이다. 그리고 승부성 민속이기도 하다.

우리민족은 원래 역동적이다

우리민족이 ‘흥겨운 민족이냐?’ 아니면 ‘한스런 민족이냐?’는 간단하다. 원래는 지극히 흥겨운 민족이었고, 그 흥이 곧 삶이었다고 본다. 우리들의 각종 놀이에서 나타나는 동작이나 내용을 보면, 지극히 역동적이다. 그러한 놀이문화는 정월 대보름에 나타나는 줄다리기, 장치기, 기싸움 등 모두가 승부성 민속이라는 점이다. 물론 그 내면을 보면 풍농의 기원이나, 겨우내 사용하지 않던 힘을 비축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우리의 전통 민속놀이의 대부분이 승부성 놀이라는 것은, 그만큼 우리민족의 삶이 강하고 패기가 넘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민족이 왜 그렇게 한스런 민족으로 변한 것일까? 그것은 조선조에 들어 양반의 세에 억눌리고, 오랜 외침에 찌들어버렸기 때문으로 보인다. 조선조에 들어서 수없이 많은 외침과, 당쟁, 그리고 남존여비 사상. 이런 것들이 총체적으로 불안한 나날을 보내게 만들었고, 수없는 환란 속에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자연 소심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결국 그러한 소심함이 한과 연결이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외부적인 조건에 의해 성정이 바뀐다고 한다. 불안한 환경이 바로 우리민족이 한의 민족이 되게 만든 요인이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혹은 “밤새 안녕하십니까?” 라는 인사말은, 바로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안감에서 나타난 인사라고 본다. 밤이 지나고 나면 주변 상황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런 환경에서 불안한 나날을 보내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런 상태에서는 “흥”이 사라지고 만다.

때로는 격한 승부로 인해 부상자가 속출하기도 한다. 바로 우리 민속이 갖는 흥의 결정체이다.

한은 외적인 영향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그런 영향을 이겨내지 못할 때, 스스로 한을 도출하게 되는 것이다. 국가적인 것도 마찬가지이다. 수많은 외침과 내란, 그리고 일제의 침탈과 한국전쟁, 그리고 불안하기만한 삶의 연속. 이런 것들이 바로 한을 만들어 낸 요인이다. 이런 것을 배제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언제라도 우리의 본 모습인 ‘흥겨운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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