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제3호, 그리고 세계문화유산. 사적 안에 또 보물을 간직한 곳, 화성은 서쪽으로는 팔달산을 끼고, 동쪽으로는 낮은 구릉의 평지를 따라 쌓은 평산성이다. 정조는 그의 아버지 장헌세자에 대한 효심에서 화성으로 수도를 옮길 계획을 세우고, 정조 18년인 1794년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2년 뒤인 1796년에 완성하였다.

실학자인 유형원과 정약용이 성을 설계하고, 거중기 등의 신기재를 이용하여 과학적이고 실용적으로 쌓았다. 화성은 다른 성곽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동문인 창룡문, 북문인 장안문, 서문인 화서문, 남문인 팔달문의 4대문을 비롯한 각종 방어시설들과 돌과 벽돌을 섞어서 쌓은 특이한 성이다.


까치 한 마리가 총안에 앉았다. 자연을 자연이 알아본 것이다. 화성은 그대로 자연이란 생각이다  


자연을 이용한 거대한 예술품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된 수원 화성. 이번에 화성을 돌아본 것이 벌써 7번째이다. 화성을 걸을 때마다 느끼는 것은, 한 마디로 싸움을 하기 위한 성곽이긴 하나, 그것이 다가 아니란 생각이다.

성은 쌓은 후 약 200여년이 흐르는 동안 성곽과 시설물이 무너지기도 하였다. 한국전쟁 때는 많은 파손을 가져왔으며, 여기저기 탄흔이 보이기도 한다. 1975년부터 보수,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수원 화성.

효심에서 시작되어 당파정치의 근절과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해 그 결실을 보기 위해 축성을 한 화성. 국방의 요새로 활용하기 위해 쌓은 화성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



화성의 외곽 저지선인 용머리길에서 바라다 본 화성의 모습이다


많은 소개가 된 화성, 난 마음으로 걷는다

화성은 자연을 닮았다. 자연의 지형지물을 이용해 축성한 화성은, 자연과 하나가 되어 거대한 미술품처럼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화성을 노래한다. 사진 또한 훌륭하다. 사진을 찍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거의 화성을 다녀간다고 한다. 그만큼 화성은 자연과 하나가 된 소재로 유명하다.

하지만 벌써 7번째 화성을 돌아 본 나는, 오늘도 화성을 걷는다. 사진을 찍기 위해 걷는 것이 아니고, 거대한 걸작품을 마음에 담기 위해 걷는다. 성곽의 둘레는 약 5.7km, 어른 걸음으로 걸으면 한 시간 반 남짓하다. 그러나 화성을 느끼면서 안팎을 돌아다니면서 걷다보면, 그 세배인 15km 정도를 걷는 꼴이 된다.


여장과 총안이다. 총안에서 구멍으로 밖을 보면 적들이 성벽으로 오르는 것이 보인다 


그 화성을 마음에 담아 걷는다. 아직은 한 낮의 더위가 살인적이다. 오랜 비 끝에 맑은 날씨는 폭염주의보까지 내렸다고 할 정도이다. 5시간 동안 그 뙤약볕에서 화성을 담아낸다. 마음속으로.

화성 이렇게 담아낸다.

마음으로 느끼며 걸어본 화성. 그 하나하나를 열거하기에는 역부족이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모습을 이렇게나마 보여주고 싶다.

1. 화성을 걷다(프롤로그) - 거대한 미술품 화성
2. 문을 열어라 - 창룡문(동문)과 화서문(서문)
3. 대로의 적을 섬멸하라 - 팔달문(남문)과 장안문(북문)
4. 치의 숨은 힘 - 열 개의 치를 돌아보다
5. 적의 배후를 노려 - 암문
6. 절대로 적을 살리지 마라 - 암문과 용도
7. 발사하라 적을 향해 - 포루와 각루
8. 진격하라 장용위 군사여 - 서장대와 동장대
9. 수로를 지켜라 - 북수문과 남수문
10. 수많은 적을 일시에 소탕하라 - 노대와 적대
11. 지금 접전중입니다. - 봉돈
12. 오늘 하루 쉬어간들 어떠하리 - 방화수류정과 연지
13. 저기 공심돈이 보인다 - 공심돈
14. 화성을 걷다(에필로그) - 용머리길의 애환


많은 관광객들이 모여드는 화성. 네시간 반 동안 화성을 걷고나서 동문 풀밭에 주저앉았다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네 시간 반을 쉬지 않고 걸었다. 평지를 걸은 것이 아니다. 팔달산을 오르락거렸다. 땀이 비 오듯 한다. 얼음물을 네 병이나 마셨다. 그리고 성 밖 풀밭에 주저앉고 말았다. 지금 화성은 보수중이다. 그런 곳은 2004년이 자료를 이용한다.

답사를 하다가보면 아주 가끔이지만, 주변을 찾지 못하고 엉뚱한 곳을 헤매는 수도 있다. 만일 그 문화재가 있는 곳이 산속 같다면, 이렇게 헤매다가는 날이 저물기 일쑤다. 그래서 답사를 나갈 때는 늘 비상용 손전등을 지참을 해야만 한다. 이번 원주 지역 답사는 비가 온 뒷날이라 힘도 들었지만, 보이지 않는 마애삼존불을 찾아 인근을 이 잡듯 뒤져야만 했다.

원주시 소초면 수암리에는 고려 전기에 조형된 마애삼존불상이 있다. 이 불상은 길에서 한참을 걸어 들어가야 만날 수가 있다. 큰 길에서 마애불을 찾아 걷는, 비가 온 뒤의 시골길은 기분이 좋다. 물기가 축축하게 젖은 풀들이 가끔 발길을 붙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진한 땀을 흘리지 않아도 좋기 때문이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18호 마애삼존불이 선각되어 있는 바위(우측)

갑자기 사라진 이정표

큰길가에 세워진 이정표에는 마애불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음을 알려준다. 몇 km 쯤이야 답사를 나가면 늘 걷는 길이다. 천천히 걸어가다가 보니 마을이 끝나는 곳에 이정표가 서 있다. ‘수암리 마애삼존불상’이라는. 가슴이 뛴다. 답사를 하면서 늘 새로운 문화재를 만날 때는 이렇게 가슴이 벅차다. 수암리 마애삼존불은 현재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18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길을 꺾어들어 작은 도로를 따라간다. 저수지가 보인다. 그런데 양 갈림길인 이곳에는 정작 이정표가 없다. 할 수 없이 앞으로 향하는데 길이 막혀있다. 원주시청에 전화를 걸어 길을 물어보고 다시 주변을 살핀다. 여기저기 한참 찾다가보니, 저 건너편 길 끝에 이정표가 보인다. 엉뚱한 곳에서 헤매고 있었다.


걷고 또 걸아야 하는 답사길. 과수원 길을 지나(위) 발이 빠지는 논둑길을 걸어 찾아갔다(아래)

젖은 길에 빠지며 찾아간 마애불


저수지를 끼고 논길을 따라 걷다가 보니 과수원이 나온다. 올해는 잦은 비로 과수농가가 피해를 많이 당했다고 하는데, 이곳은 그래도 열매가 실하게 달려있는 것 같다. 이정표에는 마애불이 100m 전방에 있다고 표시를 하였다. 그런데 마땅한 길이 없다. 할 수 없이 논둑 길을 올라서니 젖은 논둑은 발이 푹푹 빠진다. 그렇다고 물러설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빠지는 발을 이리저리 피하면서 마애불 안내판이 서 있는 곳까지 들어갔다. 근처에는 큰 돌이 없는데, 이곳만 큰 바위가 모여 있다. 여기저기 살펴보았지만 마애불이 눈에 뜨이지가 않는다. 한참을 주변을 돌다가 보니, 위쪽에 있는 바위에 선으로 죽죽 그은 것 같은 선각한 마애불이 보인다. 그저 얼핏 보아서는 누군가 바위에 날카로운 것으로 낙서를 한 것처럼 보인다.



마애불이 선각되어 있는 바위군과(위) 흐려서 찾기조차 힘든 마애불(가운데) 확대된 사진(아래)

형태를 알아볼 수조차 없는 마애삼존불

이 마애삼존불은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중앙에는 좌불상을 선각하고, 양편으로 보살상을 새겨 넣었다. 입상으로 처리된 불상의 좌측보살상은 알아보기도 힘들다. 아예 있었다는 자취를 찾기도 힘이 들 지경이다. 연화대 위에 좌정을 한 부처는 얼굴은 마모가 되었다. 아래쪽에 대좌를 그리고 그 위에 결가부좌를 하고 앉았는데, 손은 가슴께로 끌어 올렸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왼손은 아래로 오른손은 약간 위로 한 것으로 보아, 지권인을 하고 있다. 이러한 수인은 진리를 상징하는 비로자나불의 형태이다.

불상의 우측에 서 있는 보살상도 얼굴의 형체는 알아보기가 힘들다. 굳이 이 마애불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강원도 지역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삼존불이 선각으로 조성이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심하게 마모가 되어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법의를 나타낸 선이 유려하고, 전체적인 균형이 잘 맞아 뛰어난 마애불임을 알 수 있다.


중앙의 불상은 연화대 위에 앉아있고(위) 양편에는 보살입상이 선각되어 있다(아래)

걷고 또 걷고 한참을 헤매고 난 뒤에도, 발목까지 빠지는 길을 걸아 찾아간 마애삼존불. 비록 그 정확한 모습은 찾지 못했다고 하지만, 이렇게 하나의 문화재를 만날 때마다 가슴이 뛴다. 그런 가슴 벅찬 느낌이 좋아 답사를 계속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바위군에는 풍화작용으로 인한 바위와(위) 마애불을 새겨 넣을만한 벽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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