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고택을 답사하다가 보면 가끔은 비밀스런 곳을 발견할 수가 있다. 그 비밀스런 곳이라는 것이 다름이 아니라, 집안에서 움직일 수 있는 동선이다. 대개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가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랑채에서 안채를 들어가려면 중문을 이용하게 된다. 중문을 이용하지 않고 안채로 가는 길은, 그 중간에 쪽문인 일각문을 두어 출입을 한다.

그러나 고택 중에는 그런 쪽문을 사용하지 않고, 사랑채의 뒤쪽에서 바로 안채로 들어갈 수 있는 샛길을 마련한 곳도 있다. 그런 집들을 보면 괜히 즐거워지는 지는 힘든 답사 길에서 가끔은 혼자 멋대로의 상상을 즐겨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샛길의 용도가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 외에도 샛길은 다양한 용도로 사용이 되기 때문이다.

조선조 사대부가의 건축을 알 수 있는 거창 정온선생 생가의 사랑채

조선후기 사대부가의 원형

경남 거창군 위천면 강천리 50-1에 소재한 정온선생 생가는, 처음 지은 지가 500여 년 정도가 지난 것으로 생각이 된다. 정온선생의 생가였고 종택이었다는 하는 이 집은 현재 중요민속자료 제205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선생의 생몰연대가 조선조 때인 1569~1641년임을 감안한다면, 줄잡아 5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집이다.

순조 20년인 1820년에 후손들이 중창을 한 후로 줄곧 자리를 지켜 온 집이다. 이 집은 조선후기 사대부가의 원형을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건축사의 중요한 자리를 하고 있다. 정온선생 생가의 구성은 대문채, 사랑채, 중문채, 안채, 아래채, 곳간채,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느 사대부가나 그러하듯 하나 정도의 특징을 갖고 있는데, 이 정온선생의 생가는 지역의 기후에 맞게 북부지방의 보편적인 결집형태와, 남부지방의 특징인 높은 툇마루를 두어 두 지역의 특징적인 요소들을 조화를 시키고 있다.



남부지방 사랑채의 전형을 보다.

대문을 들어서면 앞으로 정원이 있고, 그 뒤편에 사랑채가 자리하고 있다. ㄱ 자형인 사랑채는 7칸인 사랑채는 바라보면서 좌측으로 방을 두고, 연이어 두 칸 대청을 두고 있다. 그리고 방과 누정을 두었다. 누정의 경우에는 기단을 쌓지 않고 그대로 기둥을 놓아 올린점이 특이하다.

난간을 두른 누정의 지붕은 길게 내달아 겹처마로 꾸며졌으며, 바깥으로 기둥을 받치고 있다. 좌측의 방 앞에 툇마루에도 난간을 두른 것이 사랑채의 멋이다. 전체적으로 짜임새가 특이하며 남부지방 특유의 사랑채 구성을 하고 있다. 사랑채의 주금 비켜선 뒤편으로는 중문채가 자리를 하고 있어, 사랑과 안채의 연결구실을 하고 있다.


중문과 광채

정온선생은 조선조에서 충절로 이름이 높은 분이다. 대사간, 경상도 관찰사, 이조참판 등을 지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하다가, 화의가 이루어지자 자결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 뜻을 이루지 못하자 덕유산 모리에 은거하다가 생을 마감하였다. 사후에는 영의정과 홍문관 대제학에 추증이 되었다. 선생은 함양 남계서원, 제주 귤림서원 등에 배향이 되었다.

높임마루를 놓은 안채의 여유

중문을 들어서면 안채로 들어갈 수가 있지만, 안채를 막는 바람벽 등이 보이지는 않는다. 그대신 안채를 조금 비켜서 구성한 것이 이 집의 특징이다. 중문 앞으로는 길게 광채를 놓고, 그 옆으로 - 자 형으로 된 안채가 자리하고 있다. 안채는 두 칸의 부엌에 이어 방과 대청, 그리고 맨 끝에는 한 칸의 높임마루를 둔 방이 있다.



안채의 건넌방 앞에 높임마루는 남부지방의 특징이다.

앞으로는 사랑채의 뒤편이 보이게 지어진 이 안채는 대청을 지나 구성된 건넌방의 툇마루를 높이고, 그 앞을 난간을 둘렀다. 남부지방 특유의 높임마루의 형태로 꾸며진 것이다. 이러한 집의 구성이 색다른 정온선생의 생가는 북부와 남부의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집의 꾸밈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를 받는다.

은밀한 동선인가? 사랑채 뒤편 터진 담

그런데 안채에서 사랑채 쪽으로 보니 담장이 트여있는 곳이 있다. 대개는 사랑채와 연결을 할 때는 일각문을 두는 법인데, 그대로 담장의 한 편 끝이 떨어져 있는 것이 보인다. 사랑채 방 뒤편에서 바로 안채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런 동선은 대개 어른들이 기거를 하는 사랑에서, 집안의 젊은 남정네들이 안채에 있는 젊은 새댁을 보러가기 편하게 꾸미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우물과 사랑채 뒤편에서 안채로 이어지는 동선이 있다.
 
더구나 안방에 안주인이 기거를 한다면, 건넌방을 새댁이 사용하기 때문이다. 사랑채의 뒤편에서 중문채에 기거하는 식솔들을 피해, 바로 안채 건넌방으로 갈 수가 있다. 옛 사대부가에 보면 가끔 이런 동선을 발견 할 수가 있다. 정온선생 생가의 사랑채 뒤편으로 난 방문에서 댓돌을 찾아보는 것은 그런 은밀함을 즐기기 위해서이다.

전국에는 수많은 석불이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다. 그 중에는 여래불, 아미타불, 미륵불 등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석조관음상은 그리 흔하지가 않다. 많은 석불 중 통영 용화사 관음암의 석조관음보살좌상은 경남유형문화재 제438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증평군에는 충북 유형문화재 제198호로 지정된 미암리 사지 석조관음보살입상이 있고, 경북 김천시 봉산면 덕천리에는 경북 유형문화재 제250호인 금릉 덕천리 석조관음보살 입상이 있다.

그 외에도 몇 기의 문화재로 지정된 석조관음상이 있을 뿐이다. 이렇게 석조관음상이 귀한 것은 아마 그 조각을 하는 공정이, 딴 석불에 비해 까다롭기 때문으로 보인다. 경남 거창군 거창읍 상림리에는 고려시대에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석조관음입상이 한 기 서 있다. 이곳은 예전에 건흥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이 관음입상은 건흥사에 모셔졌던 것으로 보인다.

보물 제378호 거창 상림리 석조관음입상

낯선 관음입상에 매료당하다.

12월 11일 찾아간 상림리 석조관음입상은, 처음 볼 때부터 사람을 들뜨게 만들었다. 그동안 수많은 석불들을 보아왔지만, 이런 형태는 낯이 설기 때문이다. 보물 제378호 거창 상림리 석조관음입상의 전체 높이는 3.5m 정도에 석불의 높이는 3,05m 정도이다. 이 석불이 관음입상이라는 것은 그 몸에 두른 법의나 손에 들고 있는 정병 등을 보아서 알 수가 있다.

석조관음입상의 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보개가 솟아 있으며, 관음상에서 보이는 보관은 없어진 상태이다. 일반적으로 관음상은 석가모니불을 새긴 보관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직사각형에 가까운 얼굴은 가늘고 긴 눈을 반쯤 뜨고 있다. 얼굴의 가운데 길게 새겨진 코는 약간 손상이 되었다. 손상된 코로 인해서 얼굴의 윤곽이 조금은 불투명하게 보인다.


보개는 높이 솟아있고, 보관은 사라졌다. 목에는 10개의 고리로 된 목걸이가 있다.

특이한 조형미를 자랑하는 석조관음상

이 석조관음입상은 일반적으로 신라 때의 석조물에 비해, 미소가 줄어든 형태로 표현이 되었다. 하기에 그 모습이 인자하기 보다는, 조금은 엄숙해 보이기까지 한다. 어깨는 약간 각이 져 있으며, 평범한 가슴에는 10개의 고리로 된 목걸이 장식이 느리어져 있다. 이런 꾸밈으로 인해 장방형의 모습과 더해져 보살상 특유의 유연함이 부족한 듯하다.

양 어깨에는 단조로운 모양의 천의를 걸치고 있는데. 그 단조로움을 허리를 감아 도드라지게 표현한 띠로 인해 단조로움을 벗어나고 있다. 그 아래로는 양 다리에 걸쳐 U자형 옷주름이 엇갈리게 배치한 것도, 상림리 관음입상의 특징이다. 전체적인 천의의 형태가 매우 복잡한 듯 표현을 하였다. 얼핏 무사들이 입는 옛 갑옷을 연상케 하는 천의의 형태이다.


오른손에는 정병을 들고 있다. 대좌는 팔각으로 조성을 하여 연꽃무늬를 둘렀다.

이 관음입상은 오른손은 몸에 붙여 팔을 아래로 내려 정병을 들고 있고, 왼손은 가슴에 대어 연꽃송이를 쥐고 있다. 이런 모습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시대에 유행하였던 관음보살을 형상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관음입상을 받치고 있는 대좌는 아래는 팔각으로 조성을 했으며, 그 위를 원으로 조성해 연꽃을 새겨 넣었다. 답사를 다니면서 쉽게 만날 수 없는 석조관음입상이라는 점도 그렇지만, 천의의 꾸밈이나 정병, 목걸이 등이 당시에 유행하던 지방의 불교미술의 특징으로 보인다. 정병을 든 오른팔의 팔뚝에는 띠를 두르고 있는 점도 특이하다.


코가 훼손이 되 측면으로 보면 조금은 이상한 모습이다. 오른손 팔뚝에는 겹으로 된 띠를 둘렀다
 
답사를 다니면서 가장 즐거운 것은 역시 하나하나 우리 문화재를 알아간다는 점일 것이다. 수많은 문화재를 돌아보면서 나도 모르게 지식이 쌓여가고 있다는 것에, 그저 피곤한 줄을 모르고 돌아다닌다. 이 다음에 더 많은 자료가 쌓이는 날, 공부를 하는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남겨주고 싶은 욕심에 힘든 답사의 여정을 재촉하는지도 모르겠다.


목걸이와 정병


경남 거창군 북상면 농산리. 위천 가에는 용암정이라는 정자가 서 있다. 위천을 지나다가 만난 용암정을 찾아 들어가는 길은, 좁은 다리를 지나 농로를 따라 한참을 들어가야만 한다. 얼핏 보면 길이 없는 듯 보이지만, 빙 돌아 들어가는 길이 있다. 처음에는 지은 지가 얼마 되지 않은 듯해, 그냥 지나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정자가 냇가에 서 있고, 분위기 역시 괜찮다. 저런 정자라면 십중팔구는 역사를 지니고 있는 정자이다. 지나던 길을 되돌려 안으로 들어가니, 용암정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경남문화재자료 제253호라고 한다. 용암정은 순조 1년인 1801년에 용암 임석형이 위천 가에 처음으로 지었으니, 올해로 210년이 된 정자이다.



사방을 돌아보면 다른 정자가

1864년에 보수 공사를 했다는 용암정은 고색이 찬연한 정자이다. 정자 위에는 방을 한 칸 들이고, 아궁이를 두어 불을 땔 수 있도록 하였다.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팔작지붕으로 지어진 정자에는 용암정, 반선헌, 청원문, 황학란이라고 쓴 액자가 걸려있다. 아마도 풍류를 아는 용암 선생이 사방을 둘러 걸 맞는 이름을 지은 듯하다.

이 정자는 지붕의 끝이 날렵하게 치켜 올려져, 마치 한 마리 새가 날개를 펼치고 날아가는 듯하다. 누마루 아래의 기둥은 둥근 기둥을 썼으며, 누마루 위에 세운 기둥은 원형으로 다듬어 놓고, 마루방의 기둥은 사각으로 조성하였다. 난간은 간단하게 나무를 듬성듬성 대어, 시원한 느낌이 들게 조성을 하였다.



위천을 보고 시심을 불러일으키다

정자의 뒤편으로는 기암과 어우러진 위천 맑은 물이 흐른다. 누마루 한편에 마련한 한 칸의 방을 중앙에 두고 문을 내었다. 정자 안에 또 하나의 정자가 자리를 잡은 듯한 느낌이다. 격자문으로 짠 문틀 안에 작은 문짝을 달아, 방으로 들어가는 문지방을 높인 것도 이 정자의 색다른 멋이다.

정자에는 몇 개의 편액이 걸려있는데, 그 중 눈에 띠는 것은 정자의 이름을 적은 편액이다. 나무 판에 커다란 글씨로 양각을 한 용암정과, 반선헌 등의 글씨가 제각각 달라 글을 쓴 이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 이 용암정에 오른 뭇 사람들이 이렇게 편액의 글씨를 적어 기념을 하였나 보다.




사방에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초석을 세우고, 그 위에 기둥을 내어 처마 끝을 받치고 있는데, 이는 정자가 지어진 한참 뒤에 세운 듯하다. 이 용암정도 정자를 오르는 계단을 통나무로 찍어내어, 발을 디딜 수 있게 만들었다. 투박한 그 모습에 호화롭지 않은 정자의 모습이, 오히려 기품을 잊지 않은 선비의 흐트러짐 없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선생이 용암정에 오른 사연

용암 임석형 선생은 출사를 하지 않았다. 은진사람으로 자는 원경, 호는 용암이다. 함안에 살았으며, 영조 27년인 1751년에 태어나, 순조 16년인 1816년에 세상을 떠났다. 용암정을 짓고 나서 16년 만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16년이란 세월을 용암 선생은 이 용암정에 머물며, 이곳을 찾는 많은 시인묵객들과 교류를 한 것이다.



31책의 용암유집이 전하며, 그의 묘갈은 유만식이 찬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있다. 공의 초연한 취미와 락()은 만년의 용암정에서 볼 수 있다. 영호남 선비들이 여기를 지나면서 모두가 원학주인이라 그를 칭송하였다. 탁월한 기량과 의민한 재주를 갖고도 출사하지 못했음이 한스러울 뿐이다

정자의 주인인 용암 임석형 선생. 위천 맑은 물이 흐르는 것을 보면서, 이곳에 시심을 띠워 보냈던 것일까? 1211일의 찬바람이 용암정으로 몰려온다. 위천 맑은 물이 잔 파문을 일으킨다. 선생이 계셨더라면 시 한 편을 지필묵을 갈아 일필휘지로 써 내려가지 않았을까? 그 모습이 그리운 용암정이다.


부처상은 언제 최초로 만들어졌을까? 전하는 바에 의하면 석가모니가 성불 한 후, 한 때 도리천에 올라가 그곳에서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설법을 하였는데, 밧사국의 우드야나왕이 지상에 부처가 없는 것을 허전해 하였다고 한다. 우드야나왕은 그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150cm 정도의 여래상을 만들어 공양하였는데, 이것이 최초로 만들어진 불상이라는 것이다.

그 때 만들어진 여래상의 법의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여래상과는 다른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이런 최초의 여래상과 같은 법의를 걸친 석불입상이 우리나라에도 있다. 바로 보물 제1436호로 지정된 농산리 석불입상이다. 경남 거창군 북상면 농산리 산53번지에 소재한 이 석불입상은 통일신라 때 조성된 것이다.

보물 제1436호 농산리 석불입상은 석불과 강배가 일석으로 조형되었다

최초의 밧사국 여래상과 같은 법의

이 석불입상의 법의는 양쪽 어깨에 걸쳐, 가슴 위로 몇 갈래의 U자형 주름을 그리면서 내려온다. 이 법의는 허리부분에서 Y자 형으로 갈라졌다가, 두 다리에 밀착되어 작은 U자를 그린다. 그리고 종아리 부분에서 다시 큰 V자를 그리며 마무리를 짓는다. 바로 이런 형태의 법의가 밧사국의 우드야나왕이 최초로 조성한 여래상과 같은 형태라는 것이다,

이런 법의의 표현법의 형태를 보고, 인도 우드야나왕의 여래상 형식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우드야나상의 법의 형태는 몇 곳에서 보이고 있는 석불입상의 법의 형태이다. 통일신라 때 조성된 석불입상에서 이런 법의의 형태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이것은 당시의 특징적인 석불입상의 조형 형태라고 것을 알 수가 있다.



인도 밧사국의 우드야나왕이 최초로 만든 여래상과 같은 법의를 입고 있다.

비교적 보존상태가 양호한 석불입상

농산리 석불입상은 산 속에 자리하고 있다. 길을 가다가 자세히 보지 않으면, 이정표조차 찾을 수가 없다. 도로에서 산속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몇 개의 이정표가 길 안내를 하고 있다. 자칫 딴 곳으로 빠지기 쉬운 산길이기 때문이다. 농산리 석불입상을 들어가기 전에는 커다란 바위들이 보인다. 그리고 넓게 마련한 공지에 석불입상이 서 있다. 석불입상을 찾아간 날은 아직 눈이 녹지 않아, 여기저기 흰 눈이 보인다.

농산리 석불입상은 광배와 받침대까지 모두 갖추고 있는 완전한 형태의 모습이다. 바위를 원추형으로 쪼아서 불상과 광배를 하나의 돌에 조각을 하였다. 알맞은 형태의 이목구비와 상투가 듬직하게 자리하고 있다. 얼굴은 온화한 미소를 띠우고 있으며, 적당히 벌어진 가슴으로 인해 날렵한 인상을 준다.



받침돌은 마모기 되었다.

당당한 어깨에 잘록한 허리, 그리고 법의 속에 드러난 사실적인 몸매 등이 이 석불입상의 조각이 뛰어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조형미는 뛰어난 입체감을 보여주고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광배의 한편 쪽이 떨어져 나갔다는 것이다.

통일신라시대 뛰어난 예술성이 돋보여

이 석불입상의 광배는 몸 전체를 감싸고 있다. 광배에는 불꽃 무늬를 새겼으며, 석불입상이 딛고 서 있는 받침대에는, 연꽃잎이 아래로 행하고 있으나 심하게 마멸이 되었다. 이 석불입상에서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바로 발이다. 발은 몸과 광배를 조각한 돌과 떨어져, 받침돌에 발을 조각하였다. 그래서 발과 몸이 떨어져 있다.


발은 몸에서 떨어져 받침돌 위에 조각하였다. 뒤편은 자연석 그대로 놓아두었다.

통일신라 사대에 조성된 농산리 석불입상. 전날 내린 눈으로 인해 여기저기 눈에 쌓이고, 12월 11일의 날씨는 차갑다. 더구나 숲속에 있는 석불입상을 만나기 위해 들어간 곳에는 주변 나무에 가려 햇볕조차 들지 않는다. 옷자락을 여미게 하는 산바람이 차갑지만, 쉽게 석불입상 주변을 떠날 수가 없다.

한 해에 몇 명이나 이곳을 찾아오려나. 그래도 누군가 관리하고 있는 듯하다. 주변이 말끔히 청소가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인도 첫 여래상과 같은 형태의 법의를 입고 있는 농산리 석불입상 앞에서 잠시 머리를 숙인다.


옛 고분에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특별한 경우인 것 같다. 거창군 남하면 둔마리에 소재한 사적 제239호 거창 둔마리 벽화고분은 고려시대의 무덤이다. 금귀봉이 동남쪽으로 뻗어내린 산등성이에 무덤 한 기가 자리를 하고 있는데, 이 무덤 안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무덤을 원래의 모습대로 폐쇄를 해놓아 안을 볼 수는 없다. 다만 그 앞에 그려져 있는 자료를 통해 무덤 속을 유추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이 고려시대의 고분은 산등성이에 자리를 하고 있는데, 무덤 한 기만이 자리를 할 수 있는 좁은 터에 자리하고 있다. 양 옆으로는 급한 경사로 계곡으로 이어진다, 풍수지리적으로 이런 지형에 자리를 잡고 있는 묘가 명당이라는 것이다. 이 고분은 땅을 파서 판석으로 벽을 두르고, 그 안에 돌방을 마련한 횡혈식석실묘이다.



고려시대의 고분 둔마리 묘

둔마리묘는 마을을 지나 산등성이로 올라가야 한다. 차가 들어갈 수 있는 곳에서 10여분 정도를 계곡을 끼고 걸어가면 비탈진 등성이에 묘가 몇 기 보인다. 주변에 있는 묘들은 모두 민묘라고 한다. 네모나게 판석으로 석실을 두른 묘는 옛 모습 그대로 복원을 해 놓았다. 인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문화재의 보존을 하기 위해서는 이렇게라도 볼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 생각한다.

석실 묘 한 기를 사적으로 지정할 정도로 가치가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둔마리 고분을 찾았을 때는 답사를 온 사람들이 묘 주변을 돌아보고 있었다. 석실은 네모난 판석으로 주변을 두르고, 그 위에 흙을 덮은 형태이다. 흙 속으로 손가락을 조금 밀어 넣어보니, 흙으로 덮은 봉분 안에도 판석으로 덮여 있다. 주변과 덮개를 모두 판석으로 처리를 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무덤 안에는 채색의 벽화가 그려져 있어

무덤 안에 그려진 채색의 벽화는 묘 앞에 서 있는 안내판을 참조할 수 있을 뿐이다. 전체적안 그림을 묘 앞에서 볼 수 없다는 것이 내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묘는 이중의 무덤으로 된 돌방무덤으로 서쪽 돌방에는 한 개의 나무관이 있었지만, 동쪽 돌방은 비어 있었다고 한다. 아마 서쪽 돌방에는 이미 사용을 했고, 동쪽의 돌방은 배후자를 모시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양쪽 돌방의 석실 벽은 모두 회칠을 하고 그 위에 흑,녹, 갈색으로 그림을 그렸다. 동쪽 돌방의 동쪽 벽에는 6명의 선녀가 그려져 있고, 서쪽 돌방의 서쪽 벽에는 여자 2명과 남자 1명의 그려져 있다고 한다. 벽화는 악기를 연주하는 그림으로 불교사상을 중심으로 도교적 요소가 가미 된 그림이라는 것이다.





안내판에 보이는 그림으로 생각을 해보다.

무덤 앞에 세운 안내판에 그려진 벽화그림.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는 그림을 찬찬히 훑어본다. 이 둔마리 고분은 고려시대의 종교관과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라는 것이다. 그림은 긴 장죽 같은 것을 입에 물고 오른손으로 붙들고 있다. 왼손은 머리 위로 치켜 올려 그릇 같은 것을 받치고 있는데, 그 안에는 과일 같은 것이 들어있다.

벽화를 사진으로 옮겨 놓은 것이라 정확한 모습을 볼 수 없어 아쉽지만, 이 그림의 형태로 보면 비천인을 그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이 고분이 고려시대의 것이라고 한다면, 악기를 연주하고 한 손에 공양물을 들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형태라면 단순히 남녀의 그림이 아니라 비천인을 그린 것이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발밑에 그려진 뭉실한 것이 구름과 같은 형태로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선녀들의 그림이 있었다는 것도 이 그림이 비천인일 가능성을 더욱 확신하게 한다.


그저 안을 볼 수 없다는 갓이 못내 아쉽다. 그러나 문화재를 보존하기 위해서 폐쇄를 시켜놓았다는 것에는 찬성이다. 고분 뒤로 돌아가 앞을 내다본다. 훤히 보이는 건너편 산자락이 아름답다. 영원히 머무는 유택이라 했던가? 그 안에서 천인들의 음악을 듣고 저 건너 피안의 세계를 그렸던 것은 아니었을까? 둔마리 고분 앞에 서 있는 석인이 오늘따라 정겨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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