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4일 거창군을 답사하는 날은 비가 참 많이도 뿌려댔다. 종잡을 수 없는 날씨로 인해 답사를 그만둘까도 생각을 했지만, 그래도 이왕 나선 길이니 비를 맞고도 강행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인가 비가 내리는 날 답사치고는, 상당한 양을 일궈낼 수 있었다. 이 날의 답사 중에서 가장 기뻤던 것은 금원산에서 만난 마애여래삼존입상이다.

경남 거창군 위천면 상천리 산 6 - 2에 소재한 보물 제530호 ‘거창 가섭암지 마애여래삼존입상’. 금원산 북쪽 골짜기 큰 바위굴 안에 새겨져 있는 마애불이다. 이 마애불은 바위면 전체를 배 모양으로 판 후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를 만들고, 그 안에 삼존불 입상을 부조로 얇게 새기고 있다.

보물 제530호 거창군 위천면 금원산 바위 암벽 굴에 새겨진 마애여래삼존입상


마애불까지 오르는 길, 평탄치가 않다.

금원산은 차량의 출입이 제한되는 곳이다. 입구를 들어서면 장사치들이 각종 음식을 판다치고 시끄럽게 만들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그리고 그 안에까지 차들이 들어와 있다. 마애불이 있다는 산으로 오르는 길은 비교적 평탄하다. 그런데 이런 낭패가 있나? 비로 인해 늘어난 물이 도로 위로 흐르고 있다. 그 양이 많아 물을 건너기가 만만치가 않아 보인다.

그렇다고 오르는 길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 신발을 벗고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린 후 건너간다. 그런데 이렇게 도로 위로 흐르는 물을 건너야 하는 곳이 세 곳이나 된다. 그렇게 오른 금원산. 마애불의 있는 바위벽 입구라는 곳에는 ‘문바위’라는 바위가 우뚝 서 있다. 우리나라의 바위 중 한 개의 바위로는 가장 큰 바위라고 한다.(이 문바위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기로 한다)


마애불을 찾아 오르는 금원산 산길에는 계곡물이 길 위로 흐르게 되어있다. 몇 군데나 이런 곳이 있어 바짓가랑이를 걷어부쳐야 했다.(위) 단일 바위 중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는 문바위이다


훼손되지 않은 마애부처님들, 정말 고맙습니다.

문바위 뒤편으로 돌아가니 산 위로 오르는 돌계단이 있다. 계단 입구에는 50m만 올라가면 마애불이 있다는 안내판이 서 있다. 천천히 계단을 오르면서 위를 본다. 역시 커다란 바위가 서 있고, 그 바위 사이로 좁은 계단이 나 있다. 아마도 예전에는 저 계단이 없었을 텐데, 어떻게 저 비좁은 사이로 들어갈 수가 있었을까?

계단을 오르면 안에 의외로 넓은 공간이 나타난다. 그리고 남향을 한 바위에 마애여래삼존입상이 새겨져 있다. 삼존불은 위로 삼각형으로 획을 그은 부분이 있다. 그리고 그 안에 보주형으로 다듬어 중앙에는 아미타여래, 오른쪽은 관음보살, 왼쪽은 지장보살을 새긴 듯하다. 중앙에 있는 본존불이 좌우에 협시보살을 거느린 형태이다.



마애불로 오르는 게단 입구부터 마애불로 오르는 계단이다. 맨 위에는 좁은 바위틈으로 계단이 이어진다


삼존불은 굴 안에 자리를 해서인가 훼손이 되지 않았다. 전체적으로는 상태가 좋지만, 조각을 한 형태를 보면 그리 뛰어난 것은 아니다. 중앙의 본존불은 얼굴이 비교적 넓적하게 표현을 하였다. 얼굴에 비하여 눈과 코, 입은 작고 밋밋하다. 긴 귀 등을 보면 약간은 둔탁한 것이 토속적인 맛을 풍긴다. 어깨는 굴곡이 없이 각이 지게 표현이 되었으며, 법의는 양 어깨에 걸쳐 가슴부분에서 타원형으로 표현을 하였다. 이 지역의 불상들이 잦은 주름을 보이는데 비해, 주름 역시 도식화된 느낌이다.

흡사 막대 같은 다리와 좌우로 벌린 발은 고려시대의 형식화된 면이 보인다. 좌우에 있는 협시보살은 본존불과 거의 같은 형식으로 조각되었지만, 어깨의 표현이 본존불보다는 부드러운 곡선으로 처리를 하고 있다.

마애불은 바위가 겹쳐진 안에 조성이 되어있다. 커다란 바위가 비바람을 막아냈다


끝이 날카로워진 연꽃무늬 대좌와 새의 날개깃처럼 옆으로 삐죽이 뻗어 나온 옷자락 등은, 그동안 보아 온 삼존불이나 마애불 등에서 본 것과는 차이가 난다. 이러한 형태는 삼국시대의 양식과 비슷하지만, 모습이 형식화되었다는 느낌이 든다. 삼존불의 곁에는 네모나게 조성을 하고 글을 새겼는데, 이 마애여래삼존입상의 조성 시기가 고려 16대 예종 6년인 1111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풀리지 않는 의문

결국 이 가섭암지 마애여래삼존불은 삼국시대 불상의 양식을 계승한, 고려시대적 요소가 반영된 마애불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마애불을 보고 난 후 몇 가지 의문이 든다. 첫째는 이곳을 어떻게 올랐을까 하는 점이다. 지금이야 계단을 놓았지만 당시는 비좁은 바위틈일 뿐이다. 그러데 높디높은 이 바위틈을 어떻게 오를 수가 있었을까? 이해가 가질 않는다.


두 번 째는 마애불을 조성한 방법이다. 굴속은 한낮인데도 밝지가 않다. 그런데 바위 아랫부분도 아니고, 바위의 중앙부분에 새겨져 있는 마애불. 그 당시 지금처럼 암벽에 그림을 새겨 넣기가 쉽지가 않았을 터인데, 도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을 공을 들여 저렇게 새길 수가 있었을까? 그리고 어떻게 어두운 이곳에서 작업을 했던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보니, 이 금원산 커다란 바위 굴속에 있는 세분의 부처님이 남달라 보인다. 머리 위에 광배며 옷자락이 흡사 외계인을 닮았다는 생각이 갑자기 든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나 스스로가 멋쩍어 피식 헛웃음을 날린다. 산을 오르느라 더위를 먹은 것인가? 금원산 굴속에 꽁꽁 숨겨져 있던 세 분의 부처님을, 그렇게 해후를 했다. 더위를 먹은 채로.


답사를 다니다가 보면 무덥고 힘들다. 그럴 때 청량제 역할을 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마을이나 산길을 다니다가 만나게 되는 동물들이다. 물론 마을에서는 주로 개나 고양이를 만나게 되고, 산길에서는 가끔은 멧돼지와 마주치기도 하지만 주로 고라니를 만나게 된다. 이런 짐승들이 무덥고 힘든 답사에 웃음을 준다.

거창군 답사를 하는 날은 지난 6월 24일이었다. 한 낮의 기온이 거의 30도를 육박했으니, 그 살인적인 더위를 피할 방법이란 없다. 차를 타고 이동을 할 때야 에어컨이라도 틀수가 있지만, 정작 답사를 하는 동안에는 있는 대로 땀을 흘리고 돌아다니는 수밖에.

거창군 가조면 장기리에는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재251호인 원천정이 있다. 이 원천정은 선조 20년인 1587년에 세운 정자로, 원천 전팔고 선생이 후학을 기르기 위해 세운 정자이다. 담장 너머로 들여다 본 정자는 맞배지붕으로 정면 네 칸, 측면 한 칸이다.


이곳 원천정은 임진왜란 때는 의병들의 모의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그런데 담으로 둘러 쌓인 원천정은 굳게 잠겨 있었다. 주변을 아무리 돌아보아도 들어갈 방법이 없다. 관리인의 집인 듯한 곳을 통해서는 들어갈 수가 있지만, 그 집도 비어있다. 할 수 없이 원천정 주변을 돌면서, 들어갈 수 있는 방도를 생각해 본다.

문틈으로 얼굴을 내민 흰둥이

골목으로 들어갔는데 개가 짖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이어 낑낑거리는 소리가 난다. 길에는 개가 보이지를 않는데 어디서 나는 소리일까? 그런데 갑자기 무엇인가가 발목을 치는 듯한 기분이 든다. 놀라 밑을 보니, 이런 세상에나 개 한 마리가 문틈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다. 발을 앞으로 뻗쳤으니 뒤로 들어가기가 난감한가 보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51호인 원천정

그 모습이 너무나 재미있다. 이 녀석 이번에는 아주 얼굴을 더 바짝 앞으로 밀고 나오려는 듯하다. 그러나 덩치가 커서 좁은 문턱 아래로는 나오기가 힘든 듯. 손으로 잡어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런데 또 얼굴을 들이밀고 나오려고 한다.

“아저씨 나도 나가고 싶다고. 나 좀 어떻게 해줘봐”


이녀석 표정이 자꾸만 눈에 아른거린다

이렇게 말이라도 하는 듯하다. 이걸 어쩌나? 그래도 이 녀석을 잡아 끌어낼 수는 없는 일. 그 표정을 보다가 그만 웃고 말았다. 웃고 있는 나를 바라보는 녀석의 표정이 애처로워 보인다. 정말 나오고 싶은 것일까? 그리고 보니 녀석의 콧등이 까진 것도 같다. 좁은 문틈으로 나오려다가 까진 것일까? 녀석을 놓아두고 뒤돌아 나오는 길에 녀석이 자꾸만 눈에 아른거린다.

그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고택을 찾아다닌 것이, 벌써 100번 째 집을 소개하게 되었다. 찾아다닌 곳은 그 이상이지만 그 중에는 소개하기에는 좀 부족하다 싶은 집들도 있었으니, 아마도 150채 정도는 찾아보지 않았나 생각한다. 100번째의 글을 쓰면서 조금은 남다른 집을 소개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만난 집은, 거창군 남하면 양항리 573-1에 소재한 경남 유형문화재 제326호인 윤경남 생가이다.

윤경남(1556~1614) 선생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집하여, 의병활동을 하신 분이다. 이 고택은 선생이 태어난 집으로, 450년 전에 지어졌다고 전한다. 전체적으로 집의 형태는 깨끗하게 보존이 되어 있으며, 사랑채와 안채, 중문채와 대문채가 있다. 아마도 처음에 건립을 했을 때는 이보다 더 많은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때 군기를 비축했던 집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분연히 일어서 의병모집을 했던 선생은, 원래 과거 등에는 나아가지 않고 오직 학문에만 열중했다고 한다. 경사에 열중한 선생은 문외, 정온 등의 학자와 친분이 두터웠다. 그러나 나라가 위급해지자 이 집을 군기를 비축하는데 사용을 했고, 의병을 모집해 나라를 지키고자 노력을 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당시 벌인 의병 활동의 공을 인정받아, 장수 현감 등을 역임하였으며 사후에는 대사헌의 벼슬이 더해졌다. 도로가에 위치한 윤경남 생가는 한 마디로 자연을 넘어서지 않은 집이란 생각이 든다. 안채는 5칸으로 부엌위에 다락방이 위치하고 있으며, 사랑채는 누마루대청 양식을 갖추고 있다.



비탈진 곳을 이용해 건물을 지은 사랑채

솟을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좌측으로 ㄱ 자형의 사랑채가 자리하고 있다. 사랑채는 전체를 난간을 두르고 있으며 누정 형태로 집을 지었다. 비탈진 그대로를 이용하기 위해 뒤쪽으로는 축대를 쌓았으며, 앞으로는 누마루 밑에 기둥을 놓아 누각과 같은 형태로 구성을 하였다. 전체를 난간으로 둘러놓아 운치를 더했다.

자연석으로 쌓은 기단 위에 높이 올라앉은 사랑채는, 계단을 놓아 오를 수 있도록 하였다. 크지 않은 사랑채의 구성이지만, 그 치목 등을 볼 때 자연을 벗해 살아가려고 했던 집주인의 마음이 엿보인다. 계단 위에 마련된 온돌방은 뒤편에서 불을 땔 수 있도록 한데 아궁이를 두고 있다.





자연석 기단위에 앉은 안채

자연석으로 축대를 쌓은 안채는 사랑채보다 높게 자리를 잡고 있다. 중문을 들어서면 중앙을 조금 비켜 서 좌측에 자리를 잡고 있는 안채는 모두 5칸으로 꾸며졌다. ㄱ 자 형으로 꾸며진 안채는 산을 등지고 안방과 두 칸의 대청, 그리고 건넌방이 있다. 그 밑으로 단을 낮춘 두 칸의 부엌과 한 칸의 아랫방이 자리한다. 아랫방의 끝에는 작은 마루를 놓았다.

이 안채 역시 비탈진 곳을 그대로 이용했다. 층이 진 건물은 안채로부터 사랑채에 이르기까지 비탈진 곳을 그대로 이용해, 자연석 기단을 쌓아 건물을 배치했다. 사대부가의 당당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화려하지 않은 윤경남 생가. 마침 문이 열려 있어 안으로 들어가니, 안주인 인 듯한 분이 집안 정리를 하고 계신다.



집과 주인의 심성은 닮는다고 했던가?

집을 좀 둘러보겠다고 허락을 받고 여기저기를 돌아보는데, 차나 한 잔 하고 가라고 권유를 하신다. 바깥어르신이 돌아가시고 난 후 서울로 올라가셨기 때문에, 한 달에 한번 정도 내려와 집을 정리하신단다. 마음 같아서는 오랜 시간 이야기라도 하고 싶었지만, 바쁜 답사 일정으로 감사하는 마음만 전하고 돌아서야 했다.

나오는 길에 중문채를 들여다보니 한 편에 디딜방아가 놓여있다. 대개 방아는 대문채에 두는 것이 일상적인데, 중문채에 디딜방아가 놓여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아마도 집안 정리를 하다가 이곳에 놓아 둔 것은 아니었을까?

돌아서 나오는 객을 대문 앞까지 따라나서 인사를 하시는 안주인. 집과 주인의 심성을 닮는다고 했단다. 100번째의 집은 그렇게 기분 좋게 사람을 떠나보낸다.

6월 24일.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장맛비라고 하더니 며칠 동안 참 사람을 움직일 수 없도록 뿌려댄다. 일기예보에서는 남부지방에 꽤 많은 비가 내릴 것이란 예보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진주에 볼일을 보아야하니, 후줄근하지만 길을 나서기로 마음을 먹었다. 출발은 했지만 이 빗길에 어찌해야 할지.

몇 곳을 들려 당동 당산을 찾아보기로 마음을 먹는다. 거창 가조면 소재지에서 가북면 방향 지방도 1099호 선을 타고 가다보면, 우측으로 사병리 당동마을이 나온다, 이리저리 찾아보았지만 당산은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아마도 외부인에게 그 속내를 보여주기 싫은가보다. 몇 분에게 길을 물어 겨우 마을 뒤편에 자리한 당산을 찾았다.



당산은 우리민족의 정신적인 거처

‘당산(堂山)’은 지역마다 부르는 명칭이 다르다. 경기도와 충청도 지방에서는 산신당· 산제당 혹은 서낭당이라고 부른다. 영남과 호남 지방에서는 주로 당산이라고 한다. 당산은 돌탑이나 신목, 혹은 조그마한 집을 지어서 신표로 삼는다. 집을 지었을 때는 그 안에 당신(堂神)을 상징하는 신표를 놓거나, ‘성황지신’이란 위패를 모셔 놓는다.

당산은 내륙지방과 해안지방의 부르는 명칭 또한 다르다. 내륙에서는 신당, 당집, 당산 등으로 부르지만, 해안이나 도서지방에서는 대개 ‘용신당’이라고 부른다. 이 당산에서는 매년 정월 초나 보름, 혹은 음력 10월 중에 길일을 택해 마을 주민들이 정성을 드린다. 당산제를 지낼 때는 집집마다 추렴을 하여 제물을 마련하는데, 이런 이유는 마을 사람 모두가 똑 같이 복을 받게 하기 위함이다.



당산제는 우리 민족의 정신적인 지주였다. 일제치하에서 문화말살정책을 편 것도, 그 한편에는 당산이 갖는 공동체의 정신을 말살하기 위함이었다. 사람들은 이 당산에 모여 정성을 드리고 음식을 나누면서, 서로의 끈끈한 정을 이어갔던 것이다. 마을의 안녕과 풍농과 풍어, 그리고 다산을 기원하던 곳인 당산. 그 당산에서 이루어지는 기원은 우리의 정신적인 지주였고, 당산은 우리의 마음의 거처이기도 했다.

당동마을 당산을 찾아가다

비는 잠시 멈춘 듯하다. 그러나 논둑길에 자란 풀들이 다리를 휘감는다. 빗물에 젖은 풀들을 헤치고 걷노라니 바짓가랑이가 축축이 젖어온다. 돌담을 쌓은 안에 작은 집 한 칸이 바로 당동마을 당집이다. 옆에는 소나무 두 그루가 나란히 서 있다. 아마도 할아버지 할머니 당산이라도 되는 듯.

당동마을 당산제는 삼국시대부터 전해졌다고 한다. 그 숱한 세월을 당동마을 사람들의 정신적인 지주로 자리를 잡아 온 것이다. 이 당산은 철종 9년인 1858년과 고종 15년인 1878년에 부분적인 중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1991년에 대대적으로 보수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은 1858년에 기록한 상량문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당동마을의 당산제는 정월 초하루에 마을 원로회의에서 제관을 정한다고 한다. 보름이 되면 마을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위치하고 있는 문수산, 금귀봉, 박유산, 장군봉의 산신께 제를 지내고 난 후 마을에 있는 당집에서 제를 올린다. 당동 당산은 경남 민속자료 제21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당산을 만나 마음을 내려놓다.

멈추었던 빗방울이 다시 떨어진다. 당집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문을 열어본다, 한 칸 남짓 돌과 흙으로 지어진 당집 주변에는 금줄이 여러 겹 쳐져있다. 이 당동 당산제에서는 닭피를 뿌린다고 한다. 당집 안에는 간소하다. 벽에 걸린 선반에는 ‘당사중수기’와 위패가 모셔져 있다.



밑에는 촛불과 향을 피웠던 그릇들이 있다. 당집을 한 바퀴 돌아본다. 마을 주민들만 아니라 아마도 무속인들도 이곳에 와서 정성을 드린 것인지. 소나무 가지와 금줄에 오색천에 걸려있다. 당집을 찬찬히 돌아본 후 머리를 조아린다. 마음 한 자락 이곳에 내려놓고 가고 싶다. 삼국시대부터 전해졌다는 당동마을 당산이다. 그 안에 마음 하나두고 빗길을 돌아선다.

받침돌의 중대석에 나한의 안면을 새긴 독특한 석불좌상. 그런데 이 받침돌의 석재가 제 짝들인지는 정확하지가 않다. 만일 이 받침돌이 제 것들이라면 이런 독특한 석불좌상을 찾아보기가 그리 쉽지는 않을 것만 같다.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이 석조여래좌상은, 현재 경남 거창군 거창읍 김천리에 소재한 거창박물관 경내 야외에 자리하고 있다

경남 유형문화재 제311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송림사지 석조여래좌상’. 이 여래좌상은 마리면 말흘리 송림마을의 절터에서 발굴되었다. 처음에는 마리중학교에 보관되어 있다가, 박물관을 개관할 당시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석조여래좌상은 민머리인 소발에 머리위에는 무엇인가 두건 같은 것을 쓰고 있는 듯하며, 얼굴에 자비로운 미소를 머금고 있다.


훼손이 심한 통일신라시대의 석불

이 석불좌상은 얼굴도 심하게 훼손이 되어 제 모습을 알아보기가 힘들 정도이다. 그러나 귀가 어깨에 닿을 듯 길게 표현이 되었으며, 눈은 가늘고 옆으로 길게 표현을 해 눈초리가 약간 위로 치켜져 있다. 코와 입은 그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훼손이 되어 있다. 법의는 양어깨에 통견으로 걸쳐 길게 늘어트렸으며, 여러 가닥의 주름으로 표현을 하였다.

소매 부분에는 여러 갈래의 좁은 주름을 만들었으나 훼손이 심하다. 손은 가슴께로 끌어올려 두 손을 마주 합장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길게 늘어진 소매 끝으로 나온 팔의 모습이나 손의 형태는 심하게 훼손이 되어 알아보기가 힘들 정도이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두 손을 가슴위로 끌어올려 손바닥을 마주한 것처럼 보인다.




중대석에 나한을 새긴 독특한 기법

이 석불좌상은 연꽃받침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형태로 조형이 되었다. 그러나 두 다리는 앞면이 떨어져 나가 제대로 된 형태를 알기보기가 힘들다. 다만 가슴에 모은 손 밑이나 무릎 위에 보이는 법의의 형태로 볼 때 속옷을 입고 매듭을 묶은 듯하다. 이런 형태의 조형미를 보이고 있다면, 상당히 섬세하게 표현을 한 아름다운 석불좌상이었을 것이다.

이 석조여래좌상의 불상받침인 연화대는 송림마을에 있던 불상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짜 맞춘 것이라고 한다. 하기에 이 세 부분으로 나눠진 연화대가 제 것인지 확실치가 않다. 현재 연화대는 상, 중, 하 세 부분으로 구분이 되어있는데, 하대석의 경우에는 훼손이 심하여 제 모습을 알아보기가 힘든 상태이다.



상대석은 넓게 원형으로 조성을 하였는데, 위가 넓고 아래로 비스듬히 좁아지게 하였다. 위 받침돌에는 위를 향한 앙련을 큼지막하게 조각하였다. 하대석의 경우 심하게 훼손이 되어 재 모습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하지만 만일 이것이 제 짝이라고 한다면, 그 주변을 앙련의 꽃잎이 아래로 향하게 새겨 넣었을 것이다.

이 석조여래좌상의 특징은 바로 가운데 돌인 중대석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중대석에는 사람의 얼굴모양을 돋을새김 하였는데, 이 안면상은 나한상을 조각한 것이다. 이렇게 중대석에 나한상의 안면을 조각한 예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이 나한상을 조각한 중대석으로 인해, 이 석조여래좌상의 조형미가 한층 뛰어나 보인다.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송림사지 석조여래좌상. 전체적으로 훼손이 심하여 자세한 모습을 찾을 수는 없으나, 그 모습 하나하나에서 뛰어난 신라의 석조미술을 알아내기에는 그리 어렵지가 않다. 다만 천년이 넘는 세월을 비바람에 씻긴 채 방치가 되어있었다는 것이 마음이 아프다.

심하게 훼손이 된 모습으로 두 손을 마주하고 있는 석불좌상. 아마도 우리 후손들의 무지를 용서해 달라고 비는 것은 아니었을까? 6월 10일 거창군의 답사에서 만나본 많은 문화재 중, 가장 마음 아픈 사연을 지닌 석불좌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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