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잔뜩 흐렸다. 하늘에는 검은 구름이 몰려와, 금방이라도 한 줄기 비를 쏟아부을 듯한 기세이다. 이런 날 문화재 답사를 한다는 것은, 평소보다 두 배는 어렵다. 그것도 포장이 되어있는 도로로 다니는 것이 아니다. 질퍽한 맨 땅을 밝고 다녀야 하니, 그 고통은 답사를 해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리 설명을 해도, 선뜻 이해하기가 힘들다.

 

경북 경주시 구황동 315-2에 소재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2호 ‘경주구황동당간지주 (慶州九黃洞幢竿支柱)’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설치하는 것으로, 절에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면 이곳에 당이라는 깃발을 걸게 되는데, 이 깃발을 꽂는 높이 장대를 당간이라 하고, 당간을 양 쪽에서 지탱해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받침돌을 거북이인 당간지주, 이런 받침돌 처음이야

 

당간이야 절마다 볼 수가 있다. 대개는 절 입구에 세워 절에 큰 행사가 있을 때 이곳에 당을 걸어둔다. 그런 당간은 특별한 형태를 보이지 않는다. 거의 보편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 시대나 지역에 따라서 조형하는 방법은 약간씩 차이가 난다. 구황동 벌판에 외롭게 서 있는 당간지주 한 기.

 

분황사의 것으로 보이는 이 당간지주는, 양 기둥에 별다른 조각을 두지 않은 간결한 모습이다. 그런데 이 당간지주는 다른 면이 있다. 훼손이 되어 처음에는 무엇인지 잘 몰랐다. 그러나 기둥사이에 놓인 당간의 받침돌을 들여다보니 특이하게도 거북모양이다. 동편을 바라보고 있는 당간지주 사이의 간대가 돌거북이라니 놀랍다. 전국을 다니면서 수많은 당간지주를 보았지만, 이렇게 받침돌이 거북의 형상을 한 것은 처음 만났다.

 

하긴 아직 우리나라에 있는 문화재의 10% 정도나 보았을까? 20년이 넘는 세월을 전국을 다니면서 문화재 답사를 하였지만, 이제 겨우 눈을 떠가고 있는 정도이다. 그리고 그 많은 문화재들의 아주 작은 일부분을 보았을 뿐이다. 마음이 바빠진다는 것은 바로 이렇게 많은 문화재들이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분황사 것으로 추정되는 당간

 

분황사 바로 남쪽에 자리하고 있는 당간지주. 기둥의 안쪽 면에는 아래와 중간, 윗부분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구멍을 뚫어 놓았다. 이 구멍은 당간지주를 관통해 당간을 단단히 고정시킬 수 있도록 하였다. 밋밋한 형태로 조성을 한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한다.

 

 

천년 세월을 그렇게 서 있었을 당간지주 한 기. 분황사당간지주는 아마도 숱한 신라의 역사를 지켜보았을 것이다. 문화재를 답사하면서 만나게 되는 전국에 산재한 수많은 문화재들이 발길을 붙들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런 문화재들이 안고 있을 이야기 때문이다. 아마도 대화를 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한 맺힌 역사를 더 많이 들을 수 있으련만.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걸음을 재촉해 당간지주를 떠난다.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으로 이동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걸음을 옮기면서도 뒤를 자꾸만 돌아보게 되는 것은, 그 오랜 세월 저렇게 비바람에 씻기면서도, 그 자리를 지키기 있다는 굳건함 때문이다. 오늘 따라 조금만 더워도 답사를 미루고 있는 나 자신이 무척이나 초라하게 느껴진다.

서원은 조선시대 성리학의 연구와 교육을 목적으로 지방에 세운 사학을 말한다. 16세기 후반부터 세워지기 시작한 서원은 려말선초에 존재하던 서재의 전통을 잇는 것이었다. 서재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서재는 학문을 연마하던 곳인 데 비해, 서원은 학문만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선현을 모시는 사묘로서의 기능을 함께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향교에 비해서 서원은 그 규모 등에서 작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각처에 산재한 서원에는 어린 학동들이 학문의 터득을 위해 모여들었다. 서원은 대원군 때 전국에 있는 것들이 대부분 헐리게 된다. 아마도 서원철폐령이 내리지 않았다고 하면, 지금보다 몇 배나 되는 서원이 남아있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계절이 배어있는 곳, 거북이와 대면하다.


정읍시 북면 보림리에 위치한 남고서원은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76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그저 별다르지 않은 이 남고서원은 가을이 배어 있는 곳이다. 남고서원은 호남의 성리학자인 이항과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김천일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조선조 선조 10년인 1577년 처음으로 세워져 숙종 11년인 1685년에는 사액서원으로 선정이 되었다.


사액서원이긴 하지만 여느 서원과 마찬가지로, 고종 8년인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헐리고 말았다. 그 후 김천일의 후손들이 1899년에 다시 세웠다. 이항의 문집목판을 소장하고 있는 남고서원은 현재는 이항, 김천일을 비롯하여 김점, 김복억, 김승적, 소산복 등의 위패를 추가로 모시고 있다.


손을 맞는 두 마리의 거북이가 반기다.


가을이 되면 서원의 담 안에 가을빛이 아름답다는 남고서원. 외삼문을 들어서 뒤를 돌아보면 괜한 웃음을 짓는다. 문을 잠구는 빗장걸이가 두 마리의 거북이가 대신하고 있다. 그저 '별것이 아니다'라고 돌아설 수도 있겠지만 괜히 눈길을 끌고 싶은 것인지. 좌측 거북이는 머리를 쥐어박았는지 무엇이 보기 싫었는지 머리를 졸아들었다.

 

 


외삼문 곁 작은 쪽문도 재미있다. 돌담 사이에 난 쪽문은 그저 어른 한 사람이 통과할 만하다. 마음을 넉넉히 먹지 않으면 짜증이라도 날만한 그런 크기다. 왜 이렇게 작은 협문을 통해서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였을까? 아마도 자신을 이렇게 작게 내려놓으란 소리인가 보다. 남고서원이 재미있는 모습들이다.


가을빛이 아름다운 남고서원


올봄과 지난가을 두 차례 남고서원을 찾았다. 서원 안으로 들어가면 서원 강당건물이 있고, 뒤로는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가 서 있다. 서원의 뒤로는 이항 등의 위패를 모신 문경사가 자리하고 있다. 봄에 찾아갔을 때는 그리 아름답지는 않았다고 기억을 한다. 하지만 가을에 찾아가는 남고서원의 멋은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들이다.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우수수 떨어지는 노랑 은행잎들이 하늘거리며 떨어지는 것이 마치 춤을 추는 듯하다. 그런 가을 정취를 느끼며 글을 읽는 학동들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작은 시골에 소재한 서원이지만 이 남고서원이 왜 철폐령에서까지 제외가 되었는지, 나름대로 수긍이 간다.


유난히 서원이 많은 정읍이다. 아마 그만큼 이곳은 양반들이 선호하는 지역이었을 것이다. 곡창지대인 이곳에 모여들어 자녀들을 교육시키려다보니 그만큼 많은 서원이 있었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서원의 존폐를 떠나 노랑 가을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다.


문화재를 찾아본다는 것은 어느 때 찾아갈 것인가를 정하는 것도 중요하다. 남고서원이야 말로 가을 은행잎이 물드는 시기에 찾아가는 것이 가장 좋을 듯하다. 올 가을, 서원에 은행 빛이 아름답게 물이 들 때, 다시 한 번 여정을 잡아야겠다.

7월 15일, 여수시 돌산읍 율림리 산 7번지에 위치한 향일암으로 오르는 길. 주차장에 차를 댈 때부터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그 빗속에서 사람들은 꾸역꾸역 향일암으로 오르는 길을 걷는다. 도대체 무엇이 저들을 이 비를 맞으며 향일암에 오르도록 하는 것일까? 카메라가 신경이 쓰이지만, 그 인파 속에 나를 묻어 버린다.


‘향일(向日)’이란 말 그대로 해를 바라본다는 뜻이다. 일출의 명소로 알려진 향일암은 대한불교 조계종 제 19교구본사인 화엄사의 말사이다. 금오산 향일암은 남해 제일의 관음기도 도량으로, 관세음보살이 중생들이 그 이름을 부르면 음성을 듣고(=觀音)서 중생을 구제한다는 곳으로 참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좁은 바위틈을 빠져나가다


향일암을 오르는 길은 한 사람이 겨우 빠져 나갈 수 있는 바위틈을 지나야 한다. 향일암의 전각들은 하나같이 바위와 함께 어우러져 있다. 그 바위가 전각을 맞이한 것인지, 전각이 바위를 찾아간 것인지. 그렇게 언제까지라도 하나가 되어 있을 전각과 바위들이 비에 젖은 나그네를 맞이한다.


카메라는 이미 비에 젖어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렌즈를 닦아보지만 뿌옇게 김이 서린다. 그래도 어쩔 것이냐? 이 먼 길을 달려왔는데 그냥 갈 수는 없다. 바닷가로 향해보지만, 한치 앞도 보이지가 않는다. 동행을 한 사람들은 연신 사진을 찍어달라고 졸라대지만, 그럴 수가 없음이 참 답답하다.

 

 


사진만 찍으려고 하면 세차게 부는 바람과 쏟아지는 비가 사람을 곤란하게 만든다. 금방 렌즈에 가득한 빗물이다. 그래도 몇 번을 천으로 렌즈를 닦아가면서 겨우겨우 여기저기 찍어보지만, 이런 날은 참 불가항력이다.


주변의 돌까지 거북등의 무늬가 있다는 향일암


원통보전 앞에 섰다. 우측으로는 산신각이 있고, 좌측으로는 종각과 그 아래 하관음전이라는 용왕전이 있다. 원통보전 안으로 들어가 삼배라도 하고 싶지만 몰골이 말이 아니다. 신발을 벗으려고 하니 바짓가랑이에서 물이 줄줄 흐른다. 오르는 길에 갑자기 넘쳐흐르는 물이 발을 치고 지나갔게 때문이다.

 

 


안에서는 스님의 예불이 한참이다. 할 수 없이 수미단 위에 좌정하신 세분 부처님께 마음의 염원을 고해본다. ‘나로 인해 상처받은 중생들, 그리고 나와 인연이 있는 모든 사람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그러고 나서 하관음전을 향한다. 하관음전을 내려가는 길 바위 위에는 거북이인지 석물들이 줄지어 바다를 향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십 수년 전 이곳에 들렸을 때, 한 노장스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난다. “여기 향일암은 우리나라 최고의 관음성지인데, 관음보살이 이곳에 오실 때는 거북이를 타고 오시지. 그래서 이곳에는 바위와 심지어는 축대를 쌓은 돌에도 모두 육각형의 거북 등과 같은 문양이 보인다.”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이 많은 거북이들이 있는가 보다. 관음보살님을 모셔오기 위해서.

 

 


바위틈으로 다니는 길, 모든 곳이 바로 기도처라고


산신각을 둘러보고 난 후 상관음전으로 향한다. 원통보전 뒤로 난 길을 따라 오르면 좁은 바위틈으로 계단이 있다. 그곳을 빠져나가 상관음전이 있다. 오르고 내려오는 사람들로 인해, 길을 비켜서 기다려야만 한다. 그렇게 찾아간 상관음전. 그러나 여기도 역시 어간문 앞에서 손을 모을 뿐이다.

 

 


장맛비 속에서 찾아간 금오산 향일암. 이곳은 온통 어디에 앉아도 기도처라고 한다. 그만큼 따로 기도처가 필요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그곳에서 난 수많은 관음보살을 만난다. 이 빗속에서 여기 오른 사람들. 그들 모두가 관음보살은 아니었을까? 향일암을 뒤로하고 내려오는 길에 다시 거세진 빗줄기가 그리 싫지가 않다. 나도 이미 관음의 마음을 얻었는지.


남원 선원사에는 약사전 뒤편으로 조금 비켜선 곳에 자리한 칠성각. 칠성각에 모신 칠성은 수명과 재복을 관장하는 신격으로, 보통 아이들의 수명을 관장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칠성은 원래 도교에서 발달하였으나, 조선조에 들어 불교와 습합이 되면서 불교에서 이를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칠성각은 대개 경내의 위편에 자리한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산신, 칠성, 독성(혹은 용왕)을 모신 삼성각에 함께 봉안하기도 한다. 불교에서는 호법신의 일종으로 대부분 칠성각을 건립한다.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좌우에 두고 칠원성군을 그 아래에 둔다. 혹은 칠여래를 함께 모신 탱화를 제작하기도 한다.

선원사 칠성각 문 위에 조각된 거북이와 토끼

가신신앙에서도 중요한 칠성

우리 무속에서도 칠성은 중심적인 신격 중의 하나이다. 굿거리에는 칠성굿이 있으며, ‘칠성풀이’나 ‘칠성본풀이’ 등의 무가가 전해진다. 집안에서는 주부가 주체가 되어 자손들의 무병장수를 기원한다. 칠월칠석날 밤에 집 뒤편의 장독대에 백설기와 정화수를 떠 놓고, 촛불을 밝힌 다음 북두칠성을 향해 절을 하며 비손을 한다.

이렇게 비는 이유는 집안에 자손들이 병이 없이 무탈하게 자라기를 바라며, 장수를 하게 해 달라는 것이다. 이런 칠성이기 때문에 절 안에 자리한 칠성각에는 항상 주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어느 집이나 아이가 있으니, 당연히 자식이 무탈하게 잘 자라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선원사 칠성각은 세 칸 팔작집으로 150~200년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선원사 칠성각에는 왜 별주부가 있을까?

선원사 칠성각은 건축을 한지가 150 ~ 200년 정도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세 칸 팔작지붕으로 꾸며진 칠성각 양편 문 위에 보면 이상한 것이 보인다. 벽 밖으로 무엇인가 돌출이 된 것이 있다. 다가가 보니 밑에는 자라가 있고, 그 위에 토끼가 타고 있는 형상이다. 도대체 왜 이런 것이 칠성각 문 위에 있는 것일까? 양편에 똑 같이 만들어 놓았다.

주지스님께 이유를 물어보았지만 자세한 것을 알 수가 없다고 한다. 고민을 하기 시작한다. 칠성각에 별주부가 왜 있는 것일까? 자라를 거북이로 생각한다면 이유는 간단하다. 수명장수를 비는 칠성각에 장수동물인 거북이를 표현하였을 것이다. 십장생인 해와 달, 산과 물 그리고 돌과 소나무, 불로초와 거북, 학과 사슴 중에는 거북이가 포함된다.

문제는 그 위에 올라타고 있는 토끼의 존재다. 그 토끼가 왜 거북이의 등에 타고 있는 것일까 하는 점이다. 물론 이 칠성각에 거북을 형상화해서 벽에 올린 것은 장수를 기원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토끼가 그 등위에 올라타고 있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 토끼는 장수동물도 아니고, 칠성각과 뚜렷한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문 위 문틀에 붙인 거북이와 흙벽에 돌출된 토끼

판소리의 고장이기 때문은 아닐까?

혹 이런 생각을 해볼 수가 있다. 남원은 명창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다. 운봉에서는 가왕이라는 송흥록이 태어났고, 그 뒤를 이어 송광록, 송만갑 등 명창과 여류명창인 박초월 등이 바로 남원출신이다. 그런 명창들 때문에 남원은 어디서나 소리 한 대목을 들을 수 있었을 테고, 그 소리를 들은 대목이 칠성각을 짓다가, 수궁가(별주부전)에 나오는 한 대목을 형상화 한 것은 아닐까 생각도 든다.

도심에 자리하고 있는 선원사는 이래저래 많은 이야기꺼리를 간직하고 있는 고찰이다. 절집을 찾아 문화재 외에도 이런 재미있는 것들을 찾아보는 것도 좋다. 그래서 이런 재미에 절집을 찾아들어가는 것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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