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3() 여강길 걷기가 열렸다. 이날 여강길을 걷는 사람들은 우만리마을회관을 오전 10시에 출발하여, 부라우나루터-우만리나루터로 돌아오는 길을 걸었다. 우만리나루에는 서종훈(, 52. 전 민예총경기지회장)이 깎아 세운 장승과 솟대가 서 있고, 앞에는 간단한 고사상이 차려졌다.

 

장승제는 남한강 물을 정귀영(여주중학교)교사가 떠다가 그 물을 올리고 장승제를 지냈다. 장승제는 간단하게 20여분 만에 마쳤는데, 축문을 읽고 모인 사람들이 장승에 배례를 하고 그쳤다. 장승제에 여강길 걷기를 마친 사람들이 마을회관에 도착하자 풍물패(대표 김미진)들이 길놀이를 하면서 사람들을 인도를 했다.

 

 

1972년까지 나룻배가 다녔던 우만리나루

 

우만리나루는 여주읍 우만리 우만이마을에서 남한강 건너편의 강천면 가야리를 연결했던 나루이다. 우만리나루는 마을의 명칭에 따라 우만이나루라고도 불렀다. 나루터 입구에는 커다란 느티나무 보호수 1기가 있어 여름철이면 주민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1972년 홍수로 나루가 없어지기 전까지 우만이나루에는 20명이 탈 수 있는 나룻배와 최대 10명까지 승선할 수 있는 거룻배가 각각 1척씩 있었다고 한다.

 

이 나룻배는 우만이마을에서 관리하였으며, 강천면의 적금리와 굴암리, 가야리의 주민들이 여주장을 이용할 때 사용을 하였다. 또한 여주읍 우만리와 멱곡리 주민들이 강천면으로 땔감을 구하러 갈 때 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우만이나루는 원주장에서 소를 구입한 소장수들이 우만이나루를 경유하여 여주장과 장호원장으로 이동하였는데, 특히 여주장으로 가는 소들이 많았다고 한다.

 

 

우만이나루의 마지막 사공은 작고한 송부성씨였는데, 나룻배를 자주 이용하는 주민들에게서 1년에 겉보리 1말과 벼 1말을 거두었는데, 볏가마를 지고 다니면서 받았다고 한다. 곡식을 내지 않는 승객은 요금을 내었는데, 1970년경 배삯은 편도에 300원이었다고 한다.

 

배를 건조하고 수선하는 비용은 모두 사공이 부담하였다. 배의 수명은 약 10년이었으며, 여주장에서 송판을 구입하여 목수에게 맡겼다고 한다. 송부성 사공은 부라우에 거주하던 목수를 불러서 배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하루 세끼를 제공하고, 하루 일당으로 쌀 1말을 주었다고 한다. 거룻배의 경우 1주일 내외, 나룻배는 보름 이상 걸렸다고 한다.

 

 

붉은 바위가 있는 부라우나루

 

여주읍 단현리 60-7 일대에 고려 때부터 조성이 된 나루. 한 때는 소금배가 드나들기도 해서 강원도 지역으로 오가는 상인들이 줄을 잇던 곳이다. ‘부라우나루는 여주읍 단현리 부라우마을과 남한강 건너편의 강천면 가야리 지역을 연결하던 나루이다. 나루 주변에는 붉은 기운을 띤 바위들이 있어 단암(丹岩)’ 이라고 부른데서 부라우라는 명칭이 생겼다고 한다.

 

나루는 마을에서 약 25m의 나지막한 고개 너머 급경사를 이룬 강가에 위치하고 있다. 강가로 돌출한 바위가 거센 물결을 막아주지만 홍수가 나면 나루터 주변에 가까이 있던 가옥들이 침수 피해를 입었다고도 한다. 이 마을로 들어서는 고갯마루에는 민참판댁 외가가 있었다고 하는데, 인근의 능현리는 명성황후의 생가가 있는 여흥 민씨의 집성촌이었다.

 

지난 해 616일 무더운 날 찾아간 부라우 나루터. 강가 바위 위에는 육모정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까지도 주춧돌이 있었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정자 주변 암벽에는 단암(丹嵓)’ 이라고 새긴 각석이 남아 있다. 이곳을 기점으로 남한강을 오가는 나룻배는 단현리 부라우마을에서 관리하였는데, 길이는 15m 내외로 약 40명이 승선할 수 있었다고 한다.

 

지난 해 616일 부라우나루굿 모습

 

부라우나루는 1975년경부터 사용을 하지 않았다. 부라우나루는 주로 여주군 강천면 주민들이 여주장을 이용하기 위해 부라우나루를 건넜고, 단현리 부근 주민들은 남한강 건너 강천면에서 땔나무 채취를 하기 위해 나루를 이용하였다고 한다. 또한 소장수들이 원주장에서 소를 구입하여 부라우나루를 건너 여주장으로 이동하였다고 한다.

 

단현리 부라우마을의 고갯마루에는 99칸의 민참판댁이 있었다고 전한다. 민참판댁 옛터에서 조금만 걸으면 남한강이 나오는데, 강가의 바위 절벽위에 침석정지의 흔적이 남아 있다. 바위 위에는 침석정의 기둥자리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육각형 홈이 3개가 남아 있다. 이곳 남한강의 마을사람들은 단강(丹江)’이라고 부른다. 아마도 단암 때문인 듯하다.

 

 

장승, 엣 기억을 더듬다

 

우만이나루에 세워진 장승은 여주군에서 제작비를 대고, 북내면 서원리에서 작업을 하는 서종훈 작가가 제작을 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강길을 걷는 날에 맞추어 장승제를 지낸 것이다. 우만이나루에 서있는 장승은 장승4기와 솟대 12본이다. 아마도 이 장승과 솟대들은 우만이마을의 평화와 죽어가고 있는 여강을 살릴 수 있는 희망이 될 것이다.

 

우만이나루에 서 있는 장승. 그것은 잃어버린 우리의 정체성을 되찾고, 공동체를 되살리는데 일조를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정월이나 10월 상달이 되면 이곳에다 떡 한 시루와 물 한 동이 떠놓고 비손이라도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것이 우리들의 가슴 속 깊은 곳에서 고함치는 옛 기억이기 때문이다.

속초에 가면 반드시 들려야할 곳이 한 곳이 있다. 바로 아바이마을로 들어가는 갯배 도선장과 청호동인 아바이마을이다. 피난민들의 애환이 서린 아바이마을과 갯배는, 이제는 속초의 명물이 되었다. 드라마 가을동화의 촬영지이기도 한 청호동 아바이마을과 12일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갯배. 이 두 가지가 청호동 주민들의 짭짤한 소득원이 되고 있는 것이다.

 

속초시 청호동과 중앙동을 잇는 도선인 갯배는 거룻배이다. 이 갯배는 일제말 속초항이 개발되면서 운항이 되기 시작했다. 6,25 동란 이후에 함경도의 피난민들이 이곳에 움막형태의 집을 짓고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청호동에는 신포마을, 앵고치마을, 자꼬치마을, 신창마을, 정평마을 등 피난민들이 자신들의 거주하던 곳의 이름을 붙인 집단촌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연간 20만 명이 이용하는 갯배

 

현재 사용하고 있는 갯배는 1988년에 새로 FRP35인승으로 제작한 것으로, 청호동 주민들은 무료로 이용을 하고 있다. 갯배를 이용하는 관광객들은 년간 15 ~ 20만 명이 이용을 하고 있다. 이 갯배는 편도 200, 왕복 400원을 요금으로 받고 있다. 12일이 방영되고 난 후에는 주말이면 관광객들이 줄을 지어 갯배를 타고 아바이마을로 들어간다고 한다.

 

23(). 속초 중앙시장을 들러보고 난 후 갯배에 올랐다. 승객들이 갈고리를 들고 배를 움직이게 하는 철선을 잡아당기면서 이동을 하는 갯배에는, 항상 웃음이 그치지 않는다. 갯배의 운항을 지도하는 청호동 주민의 서슬 퍼런 야단이 있기 때문이다.

 

저쪽으로 붙어 똑바로. 그리고 거기 이리 나와 배 끌어

 

 

이건 상당히 강압적이다. 처음 배를 끄는 사람들은 잘 못해서 웃음을 자아낸다. 불과 단 몇분 안에 건너가지만, 그 사이에 연신 재미난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 재미로 아바이마을을 찾아가는가 보다.

 

아바이마을의 애환 갯배

 

사실 속칭 아바이마을로 불리는 청호동은 우리나라 최대의 피난민촌이다. 공산치하에서 억압을 받고 살고 있던 북한주민들이 자유를 찾아 남으로 내려오게 되었지만, 정든 고향을 잊지못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북진하는 국군을 따라 북으로 올라가던 사람들이 정착을 한 곳이다.

 

 

아무도 살지 않는 청초호 바닷가 모래톱에 자리를 잡은 이들은 빠르면 보름, 길어보았자 석달이라는 생각으로 이곳에 정착을 했다. 그리고 벌써 60년 세월을 그곳에서 고향을 그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갯배는 실향민들의 애환이 가득 담겨있다. 일제말기에 속초항이 개발되면서 생긴 도선인 갯배는 당시 부월리 2(청호동)과 속진(중앙동)이 맞닿아 있던 것을, 속초항의 개발을 위해 준설하면서 내항과 외항으로 구분이 되면서 수로가 생기게 되었다. 그 당시 속초읍에서 갯배 한척을 만들어 도선에 이용하였는데, 이것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처음 갯배를 운영할 때는 트럭 한 대와 우마차 한두 대를 실을 수 있는 크기였다고 한다. 아바이마을은 속초의 발전에도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어업에 주로 종사를 하던 아바이마을의 어민들이 수복 후 사용한 배는 피난 당시 타고 월남한 범선이 창이배와, 강원도와 경상도의 어민들이 주로 이용하던 오마리배가 주종이었다.

 

이들이 주로 사용하던 배는 19590년대에 들어 동력선으로 바뀌기 시작하였으며, 속초시의 인구 증가를 가져오게 하였다. 1963년에 양양군 속초읍에서 속초시로 승격이 되는데 이들 어민들이 크게 기여를 한 것이다.

 

주된 속초의 관광수입원이 된 아바이마을과 갯배

 

드라마 가을동화로 인해 일본인 관광객들이 크게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아바이마을은 새로운 변화를 시작했다. 거기다가 12일의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기도 하다. 12일이 이곳을 거친 후 사람들은 아바이마을을 찾기 시작했으며, 아바이마을에도 외형적인 변화만이 아닌 점차 관광객들로 인한 수입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일 년에 20만 명 가까운 관광객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자, 갯배를 이용하는 요금만 해도 연간 4,000만원이라는 수입이 생기게 된 것이다. 더욱 이곳은 점차 관광객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피난민의 애환이 서린 아바이마을과 갯배가, 이제는 속초시의 관광수입원이 되고 있는 것이다.

 

23일에 갯배를 타고 찾아간 아바이마을. 바닷가에는 젊은이들이 모여 사진을 찍느라 갖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조그맣게 꾸며진 찻집에는 연인들이 마주앉아 정담을 나누는 모습도 보인다. 골목에 들어서면 장사를 하는 분들이 손님을 불러들이느라 시끄럽다. 슬픔의 상징인 갯배와 아바마을이 이제는 희망의 아이콘으로 변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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