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가장 쓰기 싫은 글은 ‘문화재가 훼손이 되었다’ 혹은 ‘복원이 잘못 되었다’라는 글 등이다. 나는 그냥 우리 문화재가 소중하고, 그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한 사람의 여행자일 뿐이다. 그런데 전국을 발품을 팔며 다니는 것도 힘이 버거운데, 문화재의 잘못된 모습이라도 보게 되면 자연 열이 뻗칠 수밖에 없다.

경상남도 함양군은 문화재가 많기로 유명하다. 거기다가 내가 좋아하는 고택과 정자가 많은 곳이니, 들려보지 않을 수가 없다.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는 한옥마을이다. 고려 때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니, 그 역사 또한 만만찮다. 잘만 관리를 했다고 하면, 전국 어디에서도 빠지지 않을 그러한 마을이다.


아름다운 정원과 솟을대문의 안쪽

하동정씨 고가의 아름다움

지곡마을이라고 하는 개평리에 들어서자,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카메라를 옷 안에 감추고라도 답사를 다닐 수밖에. 이 마을에는 경남 문화재자료 제361호로 지정이 된 하동정씨 고가가 있다. 솟을대문 안으로 들여다보이는 너른 정원이 눈길을 끈다. 보기에도 아름다운 집이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넓게 펼쳐진 정원에 나무 몇 그루가 운치 있게 서 있다.

뒤편에 멀찍이 서 있는 - 자형의 고택이 바로 이 집의 안채이다. 1880년에 지은 이집은 사대부가의 저택답게 사랑채를 비롯한 여러 건물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이 안채만 남아있다. 보존상태도 양호한 이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의 - 자형으로, 남도의 특징인 개방형 건물이다. 지붕은 맞배지붕이지만 한편에 부섭지붕을 달아 멋을 더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팔작지붕으로 오해를 살만도 하다.



- 자형의 6칸 안채와 벽에 달아낸 부섭지붕(가운데), 그리고 부섭지붕 아래 툇마루(아래) 


부섭지붕은 서까래의 윗머리를 다른 벽에 지지시켜 달아낸 지붕을 말한다. 대개 부섭지붕은 측면에 놓고 그 밑을 좁은 마루를 놓는다. 하지만 이 부섭지붕을 달아 전체적인 집의 모양새를 아름답게 꾸민다. 지곡마을에는 이 부섭지붕을 단 집들이 보인다.


정말 울고 싶은 심정입니다.

집을 한 바퀴 돌아본다. 참으로 정갈하게 정리가 된 집이다. 툇돌 아래에는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수에 땅이 패지 않도록, 기와로 마감을 한 것이 정겨워 보인다. 시원한 두 칸 대청은 뒷문이 열려 돌담이 보이는 것이 운치가 있다. 집은 좌측에 건넌방을 두고 두 칸 대청을 내었다. 그리고 두 칸 방과 한 칸 부엌이 있다. 간결하게 꾸며진 집이 선비의 단아함을 보는 듯하다.



대청 뒷벽에 시원하게 낸 문과 툇돌아래 낙수가 떨어지는 곳(가운데) 그리고 안방의 외벽(아래)

뒤로 돌아가 본다. 안방의 벽이 남다르다. 기둥을 여러 겹으로 가로 질러, 그것이 그대로 문양이 되었다. 어떻게 집을 지을 때 이런 생각을 한 것일까? 동편 부섭지붕 밑으로는 마루를 놓아 시원하게 바람을 쏘일 수 있도록 하였다. 이 또한 남부지역의 특징 있는 가옥구조이다.

반대편 서편 벽에도 부섭지붕이 달려있다. 그런데 무엇인가 조금은 어색해 보이기까지 한다. 벽 위로 까치구멍이 있는데, 안을 모두 발라놓았다. 사람이 사는 것 같지는 않은데, 왜 까치구멍을 막아놓았을까? 문을 열고 보니 그 안을 보일러실로 개조를 하였다. 그리고 안에는 부엌의 벽이 보인다. 그렇다면 이 부섭지붕은 후에 달아낸 것일까?



세상에 이럴 수가. 부엌문 안을 벽으로 발라버렸다.
그리고 부엌 밖 부섭지붕은 언제부터 있었을까?
 
부엌문을 열어본다. 이게 무슨 일인가? 부엌문 안에 담이 있고, 위는 창으로 막혀있다. 그렇다면 이 부엌은 어떻게 출입을 할 수 있을까? 방 앞으로 난 툇마루 끝에 달린 문으로 출입은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부엌문의 안이 벽으로 막혀있다니. 말이 안 나온다. 이렇게 아름다운 집에 이게 무슨 황당한 일인가? 집을 고친지가 얼마되지 않은 듯한데, 이렇게 된 곳이 있다면 제대로 해 놓아야 하지 않았을까?

어이가 없어 정말로 울고 싶은 심정이다. 어째 이런 일이 있을까? 온몸에 힘이 다 빠진다. 돌아서 나오려는데 솟을대문 안에 새로 지은 집이 있다. 뒤편을 보니 굴뚝이 이상하다. 이건 또 무슨 굴뚝일까? 굴뚝이야 마음대로 형태를 할 수 있으니, ‘이렇게도 하나보다’라며 스스로를 위안한다. 우진각지붕을 올린 세 칸짜리 집 한 채. 이 자리에 서 있어야 했을까? 집안의 전체적인 분위기로 보아도 사랑채가 있을 장소는 아닌 듯하다.


솟을대문 안 우측에 새로지은 우진각 지붕의 집. 사랑채인 듯하다. 뒤편의 굴뚝

문화재의 복원은 철저한 고증을 거쳐, 제 모습을 찾아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이 아름다운 고가가 이렇게 여기저기 제 모습을 잃어버린 것에 대해, 어떻게 마음의 위로를 받아야만 할까?

경남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에는 수령 500년이 지난 커다란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마을을 흐르는 개울을 내려다보는 이 소나무는, 경상남도 기념물 제211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이 소나무는 처진 소나무로 높이는 16m이며, 둘레는 2.95m에 가지의 폭은 21m 정도이다.

이 소나무는 마치 등 굽은 사람처럼 서 있는데, 목 부분이 굽어져 가지가 마을 쪽으로 뻗쳐 처져있다. 마을에 전하는 이야기로는 풍천 노씨들이 처음으로 이 마을에 들어와 자리를 잡을 때 심었다고 전한다. 조국의 광복 이후에도 마을 주민들은 이 소나무 아래에 모여, 마을의 안녕과 가내의 안과태평을 비는 지신밟기를 했다고 한다.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에 있는 수령 500년의 처진소나무

죽은 아들이 아이를 점지해준 종암우물

소나무 아래에는 마치 계란같이 생긴 바위와 우물이 있다. 이 바위를 종암이라고 부르며, 아래에 있는 우물을 종암우물이라고 한다. 이 우물에는 전설이 전한다. 고려 말엽 소나무가 서있는 개평마을에는 200호 정도가 모여 살고 있었다. 이 마을에 금씨 성을 가진 가난한 선비가 살았는데, 슬하에 자식이 없다가 40이 넘어서야 아들을 낳았다.



목 부분이 굽어진 처진 소나무는 노씨들이 지곡마을에 자리를 잡으면서 심었다고 전한다

살림살이가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두 부부는 귀한 아들이라 정성을 다해 키웠다. 그런데 아이가 8살이 되던 해에, 앞 개울가에서 물고기를 잡고 놀다가 그만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50이 다 된 부인은 자식을 잃은 슬픔으로 병이 들어,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몸이 약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부인이 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아들이 꿈에 나타나 하는 말이 ‘어머니 나 종암우물에 있어. 왜 데리러 안와’라고 했다. 부인은 집 가까이에 또 다른 우물이 있어, 종암우물까지는 물을 길러 가지 않았으나, 아들이 보고 싶은 생각으로 혹시나 해서 종암우물로 가서 우물주위를 돌았다. 몸이 약해진 부인은 우물을 돌다가 쓰러졌으나, 종암우물의 물을 먹고 기운을 차려 다시 우물을 돌고는 했다.


아들을 점지한다는 전설을 간직한 종암과 우물

먼 곳이지만 아들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로, 부인은 날마다 종암우물을 떠다 먹으며 그 주위를 돌았다. 그런데 도저히 완쾌할 것 같지 않았던 병약한 부인이, 3개월 후에는 완쾌가 되었으며 임신까지 하게 되었다. 임신이 된 선비의 부인은 49세라는 늦은 나이에 다시 아들을 낳았다. 지성이면 감천일까? 오직 아들을 보기를 바란 부인의 정성이 하늘을 닿아 아들을 본 것이다.

이 소문은 인근마을로 퍼져 나갔다. 그 뒤로부터 마을에는 낯선 여인들이 찾아와 종암을 안고 도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바로 아이를 낳지 못한 여인들이 아들을 낳을 것을 간절히 빌며 종암 주위를 돌면서, 우물 물을 마시고는 했다는 것이다.

지곡마을은 한옥이 즐비한 전통마을이다.

지곡마을은 한옥들이 즐비한 곳이다. 이 마을은 일두 정여창의 고택을 비롯한 많은 고택들이 자리를 하고 있다. 수령 500년이 된 처진 소나무와 종암. 아마 이 외에도 이 마을을 돌면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을 것만 같다. 등굽은 소나무는 마을을 향해 옛날 옛적 전설이라도 들려주려는 것인지. 마을을 향한 가지들이 사람들을 불러 모으려고 손짓을 하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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