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통영시 명정동에 소재한 사적 제236호인 충렬사. 이순신 장군의 제를 지내기 위해서 선조의 명에 의해, 1606년에 제7대 통제사인 이운룡이 세운 사당이다. 지난 10월 13일 아침 찾아간 충렬사. 입구를 들어서면서부터 많은 문화재들이 있어, 들어가면서부터 행복을 느낀 곳이다.

 

우선 충렬사의 입구를 들어서면 정당으로 올라가는 우측에 몇 그루의 동백나무가 보인다. 이 동백나무는 경상남도 기념물 제74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나무로, 수령이 400년 정도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곳에 동백꽃이 필 무렵이면 일 년 간의 어업의 안녕을 위해 풍신제(風神祭)를 지냈다고 한다,

 

 

 

강한루에서 아픔을 느끼다

 

정당으로 오르는 길에 이층 누각 한 채가 서 있다. 앞에서 보면 ‘강한루’요, 뒤로 올라가면 ‘영모문’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강위는 강한루에 올라 다음과 같이 이곳의 풍광을 읊었다.

 

물길 거슬러 신선의 꿈 어렸더니

강한루 다시 올라 흉금을 활쫙연다

외로운 달 먼 하늘 떠가고

개울물 모두 흘러 깊은 바다로 가는 구나

사람 만나서 옛 땅 물어보고

술 나누는 첫 마음 아련도 하여라

여기 충렬사 있어

찾아온 지 벌써 두 번째렸다.

 

 

 

강한루 누마루 밑으로 난 통로를 지나 계단을 지나야 정당으로 오를 수가 있다. 그런데 계단으로 오르다가 뒤를 돌아보니 강한루의 지붕에 기와들이 많이 흐트러져 있다. 아마도 이 일대를 강하게 휩쓸고 간 태풍 때, 저리 기와가 제 자리에서 벗어났는가 보다. 그 때가 언제인데 아직도 저렇게 볼썽사납게 놓아둔 것인지.

 

적어도 사적으로 지정이 되어있는 곳이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인데 좀 심하단 생각이 든다. 물론 문화재의 보수는 절차를 거쳐서 한다고 하지만, 이렇게 기왓장들이 흐트러져 있는 것을 보고도, 어찌 정리조차 하지 않았을까? 그런 모양새를 보면서 참으로 마음이 아파온다.

 

장군께 향을 올리다

 

강한루를 지나 외삼문을 들어서면서 좌우측을 보면 충렬묘비명을 비롯한 몇 기의 비석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제111대 통제사 이언상 사적비, 충무공 이후로 덕수 이씨 후손들 중에서 12명의 통제사가 있었는데, 그 중 121대 통제사 이태상, 138대 이한창, 143대 이한풍, 167대 이항권, 172대 통제사인 이승권 등 5명의 공적비 등이 서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계단 위에 내삼문이 서 있다. 내삼문에는 문의 처마를 받치고 있는 기둥인 활주는 육각형의 장초석을 사용하였는데, 그 밑에 해태상을 조각해 놓아 특별하다. 통용문인 양편에 협문을 낮게 만든 것은,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라는 뜻이라고 하니, 그 또한 선조들의 마음자세를 배워야 할 듯.

 

 

 

정당은 충렬사이다. 이춤무공의 영정을 모셔놓은 곳으로 선조의 명에 의해 1606년에 지어져, 300년이란 긴 시간동안 역대 통제사들이 봄, 가을로 제향을 모시던 곳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지어진 정당의 지붕 용마루에는, 주역의 팔괘를 기와로 그려내었다. 아마도 이런 충렬사이기 때문에 더 의미가 큰지도 모르겠다.

 

 

 

사당 앞에 향이 놓여있다. 장군께 향을 올린다. 뒤에서는 해설사의 장황한 설명이 이어진다. 그러나 그런 것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다. 들어올 때 본 강한루의 망가진 지붕이 내내 마음을 아프게 하기 때문이다. 벌써 이곳을 다녀온 지 보름이 지났는데, 이제는 말끔히 수리가 되었길 속으로 빌어본다.

경기도 여주읍 하리 200-1에는 강한사라는 곳이 있다. 이 강한사는 경기도유형문화재 제20호로 지정이 되어있으며, 조선 중기의 문신인 우암 송시열을 모신 사당이다. 강한사는 조선조 정조 9년인 1785년에 건립되었다. 이 강한사 안에는 강한루가 있다. 강한루는 남한강을 굽어보고 서 있는데, 가을 은행잎이 떨어져 마당 가득 노랑 물을 들이고 있었다.

 

손에 노랑 물이 들것 같은 곳

 

지난 가을, 마당 어디를 보아도 온통 노랗다. 주변에 서 있는 몇 그루의 은행나무들이 잎을 다 떨어뜨려 강한루를 장식하고 있는 듯하다. 강한루는 단지 누각으로만 사용했던 곳은 아니다. 그 앞쪽에 보면 대로서원이라는 현판이 붙어있어, 한 때는 이곳을 서원으로도 이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강한루는 그 자체만으로는 아름다운 정자가 아니다. 널찍한 평마루는 난간이 없다. 우측 한편에 붙어있는 조그만 방은 겨울철에 이용한 듯하다. 전체적으로는 넓은 마루에 한 쪽 편에 방을 드린 형태다. 마루 양편에는 기둥이 서 있어 정자라기보다는 객사 같은 형태로 조성이 되었다.

 

정조의 명으로 건립되었던 대로사

 

원래 이 강한사는 대로사였다. 정조대왕이 세종의 능인 영릉과, 효종의 능인 녕릉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김양행 등에 명하여 사당을 건립하도록 했다. 그리고 이름을 '대로사'라고 내려주었으나, 고종 10년인 1873년 10월에 지금의 '강한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강한루의 이름도 이때 같이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가을이 깊었을 때 강한루는 주변의 은행나무들과 어울려 아름답다.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기위해 찾아갔으나, 멀리서 보니 은행나무에 잎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다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허망한 생각에 그저 돌아갈까 하다가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런데 그 나무에서 떨어진 은행잎들이 모두 마당에 쌓여있다.

 

이런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다니. 은행잎이 달렸을 때보다 더 아름답다. 강한루 주변이 온통 노랗다. 마당, 담장, 지붕, 뒤뜰, 어느 곳 하나 빠짐이 없다. 모두가 다 노랗다. 그저 강한루를 노랑 물을 들인 듯하다.

 

 

 

가을의 장관을 기억해 내다

 

가을이 되면 강한루가 아름답다고 하더니 바로 이런 정경을 보았기 때문인가 보다. 무엇이 이보다 아름다울 것인가? 노랑 물을 들이고 남한강을 굽어보는 강한루. 강한루를 찾아본지 몇 번 만에 처음으로 보는 장관이다. 그래서 한곳을 여러 번, 그것도 계절마다 찾아보아야 한다는 것인가? 지난 가을 강한루에 올라, 그 빛에 취해 세월을 잊는다.

 

 

 

누군가 이야기를 했다. 가을 날 강한루를 보지 않았거든 남한강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지 말라고. 그만큼 온통 노랑 물을 이고 서 있는 강한루이다. 올 가을이 기다려지는 이유 또한 이 노랑물감 때문이다. 어디를 만져도 손끝에 노랑물이 들 것 같은 곳이다. 그 가을이 기다려진다.

여주장. 그냥 여주에 있는 장이 아니고, 500년 긴 성상을 한 자리에서 열리고 있는 여주 5일장에 대한 책이다. 2009년 10월 가을이 깊어갈 때부터 시작해, 2010년 6월 더위가 막바지로 치솟고 있을 때까지 9개월 동안을 5일장 바닥을 누비고 다녔다. 가을부터 여름까지 4계절을 장에서 지낸 셈이다. 그렇다고 장돌뱅이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적은 책이다.

여주문화원에서 의뢰를 받다

여주는 전통 있는 고장이다. 남한강을 끼고 발달한 여주는 예전부터 땅이 비옥하고 풍부한 농산물에 한강을 이용한 수운이 발달한 곳이다. 주변의 도시와는 달리 여주는 목(牧)을 둘 정도로 큰 도시에 해당했다. 한강의 4대 나루인 마포나루, 광나루와 함께 이포와 조포나루가 있었다. 이 중 여주에 이포와 조포가 있을 만큼 여주는 수운을 통한 교류가 활발했던 곳이다.


이러한 여주의 5일장은 그 역사가 500년이나 된다. 그러나 아직 여주 5일장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 자료가 없는 상황에서, 여주문화원에서 의뢰를 받고 책을 쓰기위해 모든 자료를 찾아보았다. 그러나 자료라고 나온 것은 다만 몇 줄에 불과하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책을 쓴다는 것은 더욱 힘들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사람 사는 이야기를 쓰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게서 공감을 얻었다. 9개월의 여주 5일장 순례는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

여주 5일장은 독립운동의 시원지

여주 5일장. 그냥 장돌뱅이들이 모여드는 곳이 아니다. 여주 5일장에는 역사가 있다. 그리고 민족의 혼이 살아 숨 쉬는 곳이다. 명성황후가 시해를 당하고 난 뒤, 여주는 큰 소용돌이에 빠져든다. 유림을 위시한 많은 여주사람들은 일제에 항거를 시작한다. 한강을 거슬러 오르는 일본군을 습격하는가 하면, 여주장에 숨어들어 일본군 등 50여명을 척살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여주의 마을들이 일본군에 의해 쑥대밭이 되기도 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3, 1만세운동이 발발했으며, 13도 의병 총사령관을 여주 출신 이인영대장이 맡기도 했다. 결국 여주 5일장은 구국의 상징적인 곳이었다.

여주 5일장에서 만난 사람들

여주 5일장을 참으로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장에서 만나는 사람들. 물론 장사를 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그 외에도 함께 막걸리 잔을 부딪치며 세상 이야기를 한 사람들도 많았다. 주변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는 부부장꾼, 비가오나 눈이오나 제 자리를 지키면서 몇 명 안되는 단골들을 기다리는 할머니, 멀리 꿈을 안고 이국으로 와 피곤한 삶을 소주 한잔에 털어버리는 이주노동자들. 손톱이 다 뭉그러지도록 하루 종일 마늘을 까고 계시는 할머니. 대물림인 뻥튀기를 하는 어느 분의 이야기. 그 안에 삶의 모습이 있었다.



‘마을 사람은 장으로, 도독은 마을로’

5일장은 인정이 가장 많은 곳이다. ‘말만 잘하면 그냥도 준다’는 그런 곳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5일장으로 모여든다. 장날이 되면 마을은 텅 비어버린다. 장으로 다 나가기 때문이다. 꼭 물건을 사기 위해서 나가는 것은 아니다. 5일 동안 그리운 얼굴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친하지 않아도 친할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5일장이다.

여주 5일장에는 참 많은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그 많은 이야기를 접고 또 접었다. 한정된 페이지에 글을 옮겨야 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 그 중에서 이야기꺼리를 찾아내고, 그것을 정리하면서 많은 고민도 했다. 그 중 어느 이야기 하나 놓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9개월의 작업 끝에 작은 책자 하나를 펴들었다. 『500년 세월의 여주 5일장』 비록 책은 볼품이 없지만 땀으로 만들어진 책이다.

여주 5일장’ 책 안에는

이 책 안에는 5일장의 의미, 5일장의 역사, 5일장의 기능, 그리고 5일장에서 만난 사람들과 5일장 책을 집필하면서 느낀 한담을 적은 ‘강한루 마루에 땀을 식히다’로 되어 있다. 발품을 수도 없이 팔아 만들어 진 책이다. 예산이 풍족하지 않아 컬러사진 한 장 넣지 못했다. 한정판이기 때문에 그저 마음 내키는 대로 줄 수도 없다.



21번째 쓰는 책이지만 이번만큼 힘든 적은 없었다. 그만큼 다리품을 팔아야만 했다. 손이 얼어오고, 몸에서 쉰내가 날 때까지 걸었다. 그렇게 손에 받아 든 책이다. 이것이 여주 5일장의 모두는 아니다. 앞으로 또 다른 여주 5일장이 정리되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써내려갔기 때문이다.

‘500년 세월의 여주5일장’

발행일 : 2010년 6월 25일
발  행 : 여주문화원
발행인 : 이 난 우
지은이 : 하 주 성
디자인 : 김 금 자
비매품, 한정판 158쪽

(주) 이 책은 비매품 한정판이므로 많은 수량을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혹 꼭 필요하신 분이 계시면, 제 방명록에 비공개로 받으실 주소를 적어주시기 바랍니다. 6분께만 드릴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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