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 한 달간이나 답사를 나가지 못했다. 축제를 맡아하면서, 휴일이면 섭외와 이런저런 일로 바삐 다녔기 때문이다. 6일, 대전에 일을 보러갔다가 아이에게 진안을 거쳐 남원으로 데려다 달라고 했다. 아이와 함께 잠시 짬을 내어 달려간 진안군 마령면 강정리 산57번지. 이곳에는 지은 지가 315년이 지난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6호인 수선루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선루, 이 누정은 숙종12년인 1686년에 연안 송씨의 사형제인 진유, 명유, 철유, 서유 등이 힘을 합해 건립 하였다고 전한다. 선조의 덕을 기리고 심신을 단련하기 위해 지었다는 이 누각은, 그 뒤 고종21년인 1888년에 그의 후손 송석노가 중수하였고, 연재 송병선등이 재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자연바위 암굴에 축조한 수선루

<진안군지>를 보면 송병선이 지은 수선루 중수기가 게재되어 있다. 수선루 사변에는 '延安宋氏睡仙樓洞門' 이라는 아홉 자가 새겨져 있다. '수선루' 라는 명칭은 목사 최계옹이 이들 사형제가 우애와 학식이 두텁고 효심이 지극하며, 마치 신선이 노니는 것 같다고 하여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이들 4형제는 나이 80이 넘어서도 이 정자에 올라 학문을 논하고, 바둑을 두기를 즐겼다는 것이다.

수선루는 자연암굴을 이용하여 2층으로 세워져 있고, 2층의 중앙에는 '수선루(睡仙樓)'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수선루를 오르는 길은 우측으로는 숲이 우거져 있고, 좌측으로는 섬진강 줄기가 흐른다. 돌 축대를 쌓은 곳을 오르다가 보면 절로 입이 벌어진다. 어떻게 이런 곳에 누각을 지을 수가 있었을까? 2층으로 지어진 수선루는 1층의 문을 통하여 오르게 되어 있다.



앞으로는 나무들이 가려 밖에서는 수선루가 보이지를 않는다. 언젠가 이 누각을 찾아왔다가 결국 찾지 못하고 돌아간 적이 있다. 이번에는 사전에 수선루에 대해 조사를 하고 온 길이라, 머뭇거림 없이 수선루를 찾을 수가 있었다.

자연암벽을 이용해 지은 수선루. 그 앞에서 문을 열고 들어가지를 못한다. 밖에서 보는 경치만으로도 절경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암벽을 이용해 정자를 지을 수가 있었을까? 한참을 밖에서 서성이다가, 열려있는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다. 머리에 닿을 듯 누마루의 바닥이 위에 놓여있다. 바위를 주춧돌로 이용해 멋대로 늘어선 기둥들. 그 또한 세상 격식에 매이지 않은 송씨 4형제의 마음을 닮았다.




한 철을 이곳에서 머물고 싶다

정자의 보이지 않는 뒤편은 바위 면과 처마가 맞닿을 듯하다. 그래도 꾸밀 것은 다 꾸며놓았다. 비스듬히 깎아진 바위 면에도 ‘송씨수선루’라고 음각을 해놓았다. 그 밑으로는 바위 틈에서 솟는 물이 고여 있다. 물을 떠 입안에 넣어본다. 싸한 기운이 목을 타고 흐른다. 이 물을 마시면서 4형제는 이곳에서 신선과 같은 생활을 한 것일까?

아마 나라도 이곳에서 떠나기 싫었을 것이다. 누마루 위로 올라본다. 앞으로 보이는 섬진강과 누렇게 익은 벼가 한 눈에 들어온다.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누각이, 그 위로 오르면 이런 아름다운 절경을 만들어 내다니. 이곳이야 말로 비경이 아니겠는가? 한 철 이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절로 80수를 누릴 수 있는 곳아 아니겠나?

누각 안에는 수선루 중수기를 비롯한 게판들이 걸려있다. 작은 방 앞으로는 난간을 두른 쪽마루를 내었다. 방은 천정이 낮아 서서는 들어갈 수가 없다. 아궁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 겨울철에도 이곳에서 사방 경계를 바라보며 즐겼음을 알 수 있다. 그야말로 신선이 노니는 곳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 위에 서니 절로 신선이 되는 듯하다.



누마루에 철버덕 주저앉는다. 세상 모든 시름을 다 털어버릴 수 있는 곳이다. 인적 없는 이곳에서 한 철을 살면 안 되려나? 사람들은 어찌 이런 곳을 두고, 답답한 세상 속으로 들어간단 말인가? 이 수선루가 내 조상들의 것이 아님을 한탄한다. 떠나고 싶지 않은 수선루. 난 이 누각을 ‘호남제일암루’라고 이름하고 싶다. 아마 이곳에서 한 철을 난다고 하면, 절로 60수를 누릴 수 있으려니.


전북 진안군 마령면 강정리. 이곳의 길을 따라가다가 보면, 깎아지른 듯한 절벽 가운데 정자가 보인다. 이 정자를 몇 년 전인가 한번 들렸던 적이 있다. 그 때는 일각문은 다 무너지고 정자도 낡고 퇴락해, 바라보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번 5월 3일 진안군을 답사하면서 다시 찾은 쌍벽루. 무너져 내렸던 일각문은 사라지고, 오르는 길과 정자가 말끔하게 정비가 되어 있다.

도로에서 바라다 보이는 쌍벽루는 말 그대로 바위가 벽인 듯하다. 정자는 바위 위에 올라 앉았으며, 뒤편으로도 바위 절벽이 있다. 밭을 지나 정자로 오르는 길에는 바위가 움푹 파여 있다. 그곳에는 ‘강정대(江亭臺)’라는 글씨를 음각으로 깊이 파 놓았다. 아마도 이 정자가 있는 곳이 강정리이기 때문에 붙인 명칭으로 보인다.



정자 위에 올라보니 쌍벽루가 맞네

정자는 그런대로 풍취가 있다. 우진각지붕으로 지어진 정자는 기둥을 받치기 위한 보조기둥인 활주를 세웠다. 정자의 누마루 밑을 받치는 기둥은 둥글게 조성한 주추를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올렸다. 사방에는 난간을 둘렀으며, 뒤편으로 정자를 오를 수 있도록 하였다. 정자에 오르면 앞으로 펼쳐진 들판이 시원하게 보인다.

쌍벽루는 아래편으로 바위벽을 두고, 뒤편으로도 바위벽을 두고 있다. 뒤편에 있는 이 바위는 구멍이 숭숭 뚫려있어, 조금은 괴기한 기분까지 들게 만든다. 아마도 오랜 풍화작용으로 인해 이렇게 색다른 모습으로 보이는가 보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이 정자가 문화재가 아니기 때문인가, 그 어디에도 정자의 내력을 알 수 있는 글 하나가 적혀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정자는 1942년 참봉 전영선이 지었다고 전한다. 예전에 이 정자에 올랐을 때는 주변을 벽돌 담장으로 쌓고, 오르는 길목에 일각문을 두었던 기억이 난다.

두 마리의 용이 나그네를 반기고

정자에 오르니 두 마리의 용이 나그네를 반긴다. 청룡과 황룡의 반김이 유일하게 이 정자에서 만나볼 수 있는 것이다. 정자마다 걸려있는 그 흔한 게판 한 개가 걸리지 않았다. 그런 현판이라도 있었으면, 정자의 내용이라도 알아볼 수가 있었을 텐데.



이제 정자를 지은지가 70년이 지난 쌍벽루. 새롭게 조성을 마친 정자에 올라 하늘을 올려다본다. 맑은 5월의 하늘에는 몇 점 구름이 떠 있다. 쌍벽루 위에 올라 바라다 본 들판에는, 봄철 농사일을 하는 사람들의 바쁜 모습이 눈에 띤다. 저렇게 바쁜 삶의 모습에서 잠시 쉴 참에 이 정자에 올라 쉬어감직도 하련만. 무심한 한 낮의 바람 한 점만 누마루를 지나 쉬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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