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으로 기억을 한다. 태풍 매미가 한반도를 할퀴고 자나갔다. 당시 인명피해는 사망과 실종 132명에 이재민이 61천 명에 달했다. 재산피해만도 당시 화폐기준으로 47천 억 여원에 달하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태풍 매미가 지나갈 즈음을 전 후로 해 난 강원도 지역을 다녀왔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201398일 경에 태풍 매미가 생성되었다는 발표를 들으면서 강원도로 향했던 기억이 난다. 난 강원도 속초나 양양을 갈 때는 원주에서 고속도로를 내려 회성으로 가쳐 청일면과 서석을 지나게 되는 19번 국도를 늘 이용한다. 서석에서 오대산을 지나는 명개를 거쳐 구룡령을 넘어 속초비행장 앞을 지나는 길을 이용하고는 했다.

 

이 길은 아마 나처럼 많이 다닌 사람은 사업을 하는 사람이거나 그 곳에 거주하는 사람 말고는 없을 것이다. 그만큼 이 길을 자주 다녔다. 우선은 길이 아름다워서 좋고, 가다가 계곡을 들어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에 즐겨 다녔다. 매미가 영동지방에 하루에 400mm가 넘는 폭우를 쏟고 가기 전에도 이 길을 이용했다.

 

 

달라진 마을들에 놀랐던 기억이

 

지금은 그때의 악몽이 다 지워진 듯하다. 당시 매미가 휩쓸고 지나간 며칠 후 다시 이길을 들어섰다. 그런데 산사태로 인해 집이 완파가 된 집들과 물에 떠내려 온 차량들이 구겨진 휴지조각처럼 변해 있었다. 개울가에 서 있는 아름다운 집이 몇 채가 다 사라졌다. 길은 끊어지고 전신주는 자빠져 개울 가운데 처박혀 있었다.

 

지금도 그 당시를 기억하면 온 몸에 소름이 돋는다. 그처럼 처참하게 변해버린 길을 지나갔다. 그런데 그 길 가운데 닥 한 마음이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누군가 이야기를 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하고 생각을 했지만, “저 마을(춘당리)은 피해를 당하지 않았데요. 아마 장승님들이 도왔나 봐요라는 말을 들었다.

 

그 당시에도 춘당리를 지날 때는 당집 앞에 잠시 차를 세우고 그 발치 아래서 잠시 고개를 숙이고는 했다. 그리고 서낭당을 지나오다가 다시 길 우편에 있는 장승 앞에서 또 한 번 고개를 조아리고는 했다. 오랫동안 민속을 연구해 온 나로서는 당연한 행동을 한 것이다. 특이할 것이 없는.

 

 

춘당리 장승과 서낭당을 돌아보다.

 

그런데 이번 길에서는 이상한 것을 보았다. 서낭당 아래 장승과 누석탑이 있다. 분명 따로 있던 것인데 말이다. 내 기억이 잘 못 된 것인지, 정말 헷갈린다. 계단을 따라 서낭당 위로 올라가 보았다. 문이 걸려있다. 예전에는 이렇게 갈려있던 적이 없었는데. 문 앞에 걸어놓은 안내문구를 적은 쪽지를 보니 이해가 간다. 한 마디로 무당들이 이곳에 들려 함부로 서낭을 더럽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안내문 - 성황당은 마을에서 신성시하는 곳으로 예의를 다해야 함에도 개인적으로 활용함에 여러 문제가 있어 통제하오니 정성을 드리고 싶은 분은 아래 연락처로 전화주세요. 춘당2리 이장 010-53○○-10○○>이라고 적어놓았다. 전화를 걸어 안을 들여다보고 싶었지만 이렇게 비기 오는 날 이장님께 폐를 끼치고 싶지가 않아 발길을 돌렸다.

 

 

2011년에 장승을 옮겨 한 자리에 모아

 

장승공원을 조성한 것은 현 춘당2리 함영길 이장이다. 이장으로 부임하고 난 후 장승과 서낭을 한 곳으로 모아 놓는 것이 바람직하단 생각에 떨어져 있던 탑과 장승을 서낭당 앞으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18일 춘당리를 지났지만 함영길 이장과 연락을 못하고 있다가, 22일이 되어서야 겨우 전화로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저희 춘당2리는 정말 태풍 매미 때 산에서 집중 호우에 떠내려 온 나무들로 조금 벽들이 망가지기는 했어도 큰 피해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저희 장승공원에는 서낭당과 장승을 모셨는데 서낭당에 제의는 매년 음력 2월 초하루에 마을 부락계에서 주관을 합니다. 그리고 장승제는 머슴날이라고 하는 음력 백중일(음력 715)에 마을에서 주관을 하여 잔치를 벌입니다.”

 

춘당2리는 현재 83호 정도가 되는 마을이다. 19번 국도를 따라 조성된 마을 중에서는 적지 않은 마을이다. 아직도 장승제와 서낭제를 끔찍하게 모시고 있는 강원도 횡성군 청일면 춘당2. 다음 이 19번 국도를 달려 구룡령으로 향할 때는 반드시 서낭당 문을 열고 제대로 서낭신에게 예를 올려야 할 것 같다.

 

이상하게도 고성에 있는 건봉사의 능파교를 찾을 때는 꼭 날씨가 추웠다. 지난 118일부터 23일 일정으로 돌아 본 강원도. 그 첫날 건봉사를 찾은 날도 갑자기 날이 쌀쌀해졌다. 바람까지 불어 체감온도는 더 떨어졌는데도 불구하고, 통일전망대를 돌아본 후 건봉사로 향했다. 그곳에서 불이문을 건너 산영루로 들어가는 길에 만나는 다리가 바로 능파교이다.

 

금강산의 한 봉우리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절의 앞 계곡으로 맑은 물을 흘려보낸다. 그 위에 석재로 된 다리는 우리나라의 많은 홍예교 중에서도 아름답다고 소문이 나 있다. 보물 제1336호인 능파교’.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이 다리는,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38 건봉사 경내로 들어가는 다리이다.

 

 

다리가 있는 곳은 신라 법흥왕 7년인 520년에 아도스님이 창건을 해 원각사라고 이름을 붙였다는 절이다. 그 뒤 신라 말에 도선국사가 절 서쪽에 봉황새처럼 생긴 돌이 있다고 하여, 서봉사라고도 불렀다. 현재의 명칭인 건봉사는 고려 공민왕 7년인 1358년에 나옹스님이 붙인 이름이다.

 

여러 번 수난을 당한 능파교

 

118일 찾아간 고성에서 만난 다리. 능파교는 건봉사의 대웅전 지역과 극락전 지역을 연결하는 무지개 모양의 다리이다. 다리는 한 칸의 홍예를 조성한 것으로는, 그 규모가 상당히 크다. 폭이 3m에 길이는 14.3m에 이른다. 다리 중앙부의 높이는 5.4m이다.

 

능파교는 조선 숙종 34년인 1708년에 건립된 능파교신창기비(凌波橋新創記碑)가 남아있어, 축조된 시기 및 내력에 관해 자세히 알 수 있다. 비문에 따르면 숙종 30년인 1704년부터 숙종 33년인 1707년 사이에 처음으로 축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영조 21년인 1745년에 대홍수로 인해 붕괴가 된 것을, 영조 25년인 1749년에 중수하였다. 고종 17년인 1880년에 다시 무너져, 그 석재를 대웅전의 돌층계와 산영루를 고쳐 쌓는 데에 이용하기도 하였다.

 

2003년에는 능파교 홍예틀과 접하는 호안석 중 변형을 해체하여 원형을 찾아 보수를 하였다. 그러나 보수를 하던 중에 능파교가 훼손되어, 문화재 전문가의 도움으로 200510월에 원형 복원을 하여 오늘에 이른다.

 

 

뛰어난 조형미를 보이는 홍예교

 

능파교는 다리의 중앙부분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를 틀고, 그 좌우에는 장대석으로 쌓아서 다리를 구성하였다. 홍예는 하부 지름이 7.8m이고 높이는 기석의 하단에서 4.5m이므로, 실제 높이는 이보다 조금 더 높다.

 

고성지역을 답사하면서 찾아간 능파교. 날이 쌀쌀한데도 많은 사람들이 능파교를 건너 산영루 밑을 통과한다. 능파교 밑으로 흐르는 물은 맑기만 하다. 능파교의 교각 밑으로 들어가 본다. 밑에서 바라보니 능파교의 양편으로 삐죽이 고개를 내민 산영루의 처마가, 마치 능파교에 날개를 달아놓은 듯하다. 장대석으로 고르게 쌓은 홍예를 바라보고 있자니, 과거 석재를 이용한 조상들의 조형술에 감탄이 절로 터져 나온다. 어떻게 이렇게 반듯하니 돌을 쌓아올려 서로 버티는 힘을 이용할 수가 있었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그 다리를 지나 대웅전을 향하고 있지만, 그 많은 무게를 버틸 수 있도록 축조를 하였다니 그저 놀랍기만 하다. 다리 밑으로 흐르는 맑은 물에 손을 넣어본다. 폐부 깊숙이 한기가 전해진다. 한 여름에도 이곳은 물이 차가워 오래 물속에 있지를 못하는 곳이다. 그만큼 자연이 살아 숨 쉬는 곳이기도 하다.

 

 

자연을 벗어나지 않는 석조조형물

 

석재를 이용해 조성한 다리 하나가 갖는 의미. 그저 다리라는 것이 사람들이 건너기 위한 조형물이려니 생각을 하겠지만, 그 다리가 결코 자연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과거 우리의 모든 건축물은 결코 자연을 넘어선 적이 없다. 그것이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될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능파교를 건너본다. 그저 그 위에서 11월의 찬바람을 맞으며 한 없이 서 있고 싶다. 오랜 세월 그렇게 자리를 지켰을 능파교에 대한 예의를 차리고자 함이다. 사람들에게는 다리이겠지만 30년 세월 문화재를 찾아 전국을 돌아본 나에게는, 능파교는 다리가 아닌 그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내년 봄 산수유가 계곡에 흐드러지게 필 때, 다시 한 번 찾아보아야겠다.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무릉리 산139에 소재한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4호인 영월무릉리마애여래좌상은 영월군 수주면의 주천강(酒泉江)이 흐르는 곳에 요선정이라는 정자 옆 커다란 바위에 조각을 한 마애불이다. 이 마애불은 요선정 동쪽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 새겨진 높이 3.5m의 여래좌상이다.

 

마애불 옆에 지은 요선정(邀僊亭)은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41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1915년에 무릉리에 거주하는 요선계 회원들이 지은 이 정자는, 앞으로는 저 아래 계곡으로 남한강의 지류인 주천강이 흐르고 있다. 경관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정자 앞 바위에는 마애불이 새겨져 있고, 석탑 1기가 있어 이 정자가 예사롭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박진감이 넘치는 마애여래좌상

 

하나의 바위에 부조로 새겨진 마애여래좌상은, 타원형의 얼굴에 양감이 풍부하여 박진감이 넘치고 있다. 법의는 묵직하게 표현을 하였는데 옷은 양 어깨에 걸쳐 입고 있으며, 간략한 옷 주름을 선각으로 표현을 하고 있다. 두 손은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는데, 가슴까지 올린 오른손은 자연스럽게 펴서 손등을 보이고, 왼손은 오른손과 평행하게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있다.

 

바위에 3.5m나 되는 크기로 돋을새김과 선각으로 처리를 한 마애여래좌상은 주천강을 내려다보고 있는 형태로 새겨져 있다. , , 입 등이 큼직하게 표현이 되어, 상당히 힘이 넘치지만 균형이 제대로 맞지 않아 조금은 부자연스럽게 보인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는 연꽃무늬가 도드라지게 새겨진 머리광배와, 두줄의 선으로 표현된 몸 광배를 갖추고 있다. 하체는 지나치게 크게 표현하여 전체적인 균형을 잃고 있으며, 불상이 앉아 있는 좌대에는 연꽃무늬가 도드라지게 새겨져 있다. 상체의 표현이 사실적이고 박진감이 넘쳐나지만, 지나치게 커진 무릎이 균형이 잘 맞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무릉리마애여래좌상은 고려시대 영월지방의 대표적인 마애불상으로 보인다.

 

숙종의 어제시를 봉안한 요선정

 

어제시란 임금님의 시를 말한다. 조선조 숙종의 어제시를 봉안한 정자인 요선정. 마애불이 조각되어 있는 커다란 바위 하나가 주천강이 흐르는 절벽 위에 자리를 잡고 있고, 작은 정자에는 요선정이란 현판과 함께, 모성헌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아마도 임금을 그린다는 뜻인가 보다.

 

 

요선정은 조선 19대 숙종임금이 쓴 어제시를 봉안하고 있다는 것이, 역사적 가치를 갖게 만든다. 그래서 이 작은 정자가 더욱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요선정에 걸린 어제시는 숙종 임금이 직접 하사한 것이다. 원래는 주천면 서북쪽으로 흐르는 주천강 북쪽 언덕에 위치하였던 청허루(淸虛樓)’에 봉안하였으나,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청허루가 붕괴되었다.

그 후 숙종의 어제시 현판을 일본인 주천면 경찰지소장이 소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요선계 회원들은 일본인이 숙종대왕의 어제시 현판을 소유하였다는데 거부감을 느끼고, 많은 대금을 지불하고 매입하였고, 이를 봉안하기 위하여 요선정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일개 촌부들이라고 하지만, 그만큼 나라사랑과 역사의식이 강했던 것이다. 자칫 일본으로 건너갈 뻔한 소중한 어제시 현판이, 수주면에 거주하는 원씨(元氏이씨(李氏곽씨(郭氏)3성이 조직한 요선계원들에 의해 지켜진 것이다.

수령 400년이 되어가는 역사를 간직한 느티나무 한 그루가 마을의 입구에 서 있다. 이 나무는 여름이면 마을 주민들이 논, 밭일을 할 때 잠시 동안이라도 쉬라고,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준다. 이 나무가 누군가가 속빈 곳에 불을 붙였다고 한다. 그래도 수술을 거쳐 끈질긴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 금산길 42(대안리)에서 자라고 있는 천연기념물 제279원성 대안리 느티나무이다. 말이 수령이 400년 가까이라고 하지만, 그 오랜 시간 동안 역사를 다 보면서 그 자리에 서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마을의 주민들이 10대가 넘게 바뀌는 것을 보아 온 느티나무, 어찌 경외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겠는가?

 

 

겉모양으로 만도 압도당해

 

느티나무는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일본, 대만, 중국 등의 따뜻한 지방에 분포하고 있다. 가지가 사방으로 퍼져 자라서 둥근 형태로 보이며, 꽃은 5월에 피고, 열매는 원반모양으로 10월에 익는다. 줄기가 굵고 수명이 길어서 쉼터역할을 하는 정자목(亭子木)으로 이용되거나, 마을을 보호하고 지켜주는 당산나무로 보호를 받아왔다.

 

대안천을 따라 난 도로를 대안리 방향으로 따라가다가 보면 대안교가 나온다. 다안교를 지나기 전이나 대안교를 지나 우측으로 길을 잡아 들어가면 좌측 마을입구에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멀리서 보기에도 쉽게 구별이 갈만큼 거대목이다. 높이가 24m 정도나 되니 원거리에서도 눈에 잘 띤다.

 

 

이 원성 대안리 느티나무는 나이가 400년 가까이 된 것으로 추정되며, 나무의 크기는 높이가 24m, 가슴높이의 둘레가 8.1m, 근원부의 둘레 10.11m, 가지 밑의 높이가 1.7m이고, 수관 폭은 동-26.4m, -21.3m이다. 마을로 들어가는 농로 옆에 서 있는 정자목으로 마을에서 위하고 있는 나무이다.

 

누군가 이 느티나무에 불을 질렀다고?

 

대안리 느티나무는 겉으로 보기에는 튼튼하게 보인다. 수세도 건전하고 수형도 실하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지상에서 6m 정도 올라간 부위의 밑 부분이 썩어 들어가서 밑 부분까지 공동(空洞)이 생겼다. 그 뿐만 아니라 누군가 이 비어있는 부분에 불을 질렀기 때문에, 불에 타 탄화된 부분을 1993년 수술을 하였다.

 

 

다행히 수술을 한 후에 수세가 좋아지긴 했지만, 이런 몰지각한 행동을 했다는 것에 노여움이 인다. 수백 년을 한 자리에 서서 마을의 온갖 역사를 다 보고 있었을 느티나무 한 그루. 숱한 비바람과 태풍, 추위를 이겨내고 살아남은 나무들이다. 이런 천연기념물을 해치려고 했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전국의 천연기념물을 돌아보면, 생각 밖으로 피해를 당한 나무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어딘가의 소나무는 땅 주인이 농약을 쳐서 죽이려고도 했고, 수령 500년이 넘은 소나무는 갑자기 이유 없는 고사를 하기도 했다. 고사를 한 나무가 이유가 없지는 않겠지만, 이유를 모르겠다고 한다. 이런 답답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원성 대안리 느티나무. 우리가 꼭 지켜주어야 할 소중한 천연기념물이다. 한 번의 아픔을 당했다면, 더 이상은 이 나무가 아픔을 당하게 해서는 안 된다. 앞으로도 더 많은 세월을 우리 자손들과 함께 살아가야 할 소중한 문화자산이기 때문이다.

강원도 고성군에 소재한 건봉사는, 6·25 한국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31본산의 하나였다. 현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속초 설악동 소재 신흥사의 말사이다. 건봉사는 신라 법흥왕 7년인 520년 아도화상이 창건하여 원각사라 불렀다. 그 후 경덕왕 17년인 758년에는 발징이 중건하고, ‘염불만일회를 베풀었는데 이것이 한국 만일회의 시초이다.

 

건봉사의 뒤편 금강산에는 등공대라는 곳이 있다. 바로 염불만일회를 열면서, 만일(275개월)을 하루도 빠짐없이 염불을 드렸다는 것이다. 신라 경덕왕 17년인 758년 무술년에 발징화상, 정신, 양순 등 31명의 스님들이 모여 염불을 드렸는데, 신도 1,820명이 환희심이 일어 동참을 하였다고 한다.

 

 

살아있는 그대로 허공으로 떠올라

 

등공이란 육신이 살아있는 그대로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것을 말한다. 허공으로 솟은 채 몸은 벗어버리고, 영혼만 부처님의 극락정토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건봉사 북쪽에 위치한 등공대는 만일동안 쉬지 않고 예불을 하시던 스님들이 원성왕 3년인 787년 회향을 할 때, 건봉사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몸이 떠올라 날아가는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위로 1.5km 정도를 날아오른 스님들은, 육신은 그대로 땅에 떨어트리고 맑고 정신만 등공을 하였다고 전한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흐른 뒤 광무 4년인 1900년에, 몸을 버리고 간 스님들의 다비식을 거행한 곳을 소신대(燒身臺)’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소신대 자리에 19155월에 등공탑을 세워, 그 뜻을 만천하에 알렸다. 최근 군사작전 지역으로 출입이 금지되어 있던 등공대가, 57년 만에 개방을 하기도 했다.

 

 

전쟁의 참화를 그대로 안고 있는 불이문

 

신라 말 도선국사가 건봉사를 중건한 뒤 절 뒤쪽에 봉황새와 같은 돌이 있다고 하여 서봉사라 했으나, 공민왕 7년인 1358년에 나옹이 중수하고 다시 건봉사로 바꾸었다. 건봉사는 1464년 세조가 행차하여 자신의 원당으로 삼은 뒤, 어실각을 짓게 되자 이때부터 역대 임금의 원당이 되었다.

 

건봉사는 6·25전쟁 이전에는 대찰이었다. 대웅전, 관음전, 사성전, 명부전, 어실각, 불이문 등 총 642칸에 이르는 전각이 있었으나, 6·25한국전쟁 때 거의 다 소실이 되고 유일하게 불이문만이 남았다. 이 불이문은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5호로 지정되어 있다.

 

불이문은 아픔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배흘림 형태로 조성이 된 석주에는 총탄을 맞은 자국들을 시멘트로 발라놓았다. 불이문은 1920년에 세운 건봉사의 출입문이다. 이 돌기둥에는 길이 90cm의 금강저가 음각되어 있는데, 이는 천왕문을 따로 축조하지 않고 불이문으로 하여금 사찰수호의 기능을 함께 한 것이다.

 

 

불이문은 1단의 낮은 기단을 놓고 그 위에 1.61m의 돌기둥을 세웠다. 다포양식에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불이문의 중앙에 걸려있는 현판은 해강 김규진의 글씨이다. 노송 숲길을 지나 주차장을 거쳐 만날 수 있는 건봉사 불이문. 불이문을 지나면 불국정토가 된다. ‘불이(不二)’란 둘이 아님을 뜻한다. 즉 생과 사가 둘이 아니고, 번뇌와 깨달음, 선과 불선 등 모든 상대적인 것이 둘이 아닌 경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 이 불이문이 이렇게 유일하게 남아있다는 것도, 어찌 보면 불이의 완전한 뜻을 이루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남아있고 사라지는 것이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건봉사에서 만난 불이문은 옛 모습 그대로 손을 맞이하고 있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