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나 무속에서는 윤달이 되면 여러 가지 행사를 한다. 절에서는 윤달이 들면 망자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생전예수재를 열고, 무속에서는 윤달에 삼사순례를 한다., 삼사순례란 말 그대로 하루에 절 세 곳을 돌아오는 일이다. 절 세 곳을 돌아보면서 자신이 염원하는 바를 서원하는 것이다.

 

9일 오전 7. 수원시 팔달구 지동 271-124에 소재한 고려암 신도들이 버스에 올랐다. 45명 정원인 버스는 빈자리가 하나도 없다. 지동을 오전 730분경에 출발해 서산 간월암과 예산 수덕사를 거쳐, 다시 서산 상왕산 개심사를 돌아오는 여정이다. 하루에 세 곳의 절을 돌아본다는 것은 사실 쉽지가 않은 여정이다.

 

 

웬 사람이 이렇게 많아?

 

서산 간월암에 도착한 시간이 9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그런데 간월암부터 사람들이 많다. 무슨 일일까? 1113()이 수능일이다. 그래서 절마다 사람들이 휴일을 맞아 찾아들어 서원을 하고 있다고 한다, 넓지 않은 간월암 대웅전에 사람들로 만원이다. 연신 나가고 또 들어오고. 아마도 윤달과 수능일이 겹치다보니 이렇게 사람들을 끌어드리는 것은 아닌지.

 

충남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에 소재한 간월암. 물이 만조가 되면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한다는 이 작은 암자는, 무학대사가 이곳에서 도를 닦던 중 달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여서 간월암이라는 암자 명칭을 붙였다고 한다. 무학스님은 20세 때 이곳에 들어와 토굴을 짓고 열심히 수도를 하다가 달을 보고 깨우침을 얻었다고 한다. 무학이라는 법호도 나옹스님이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하여 법호를 무학(無學)이라고 지어 주었다는 것이다.

 

 

불타는 수덕사, 이렇게 아름다웠었나?

 

충남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에 소재하는 수덕사는 백제 위덕왕(554 ~ 397) 때에 지명법사가 사비성 북부에 수덕사를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국불교의 5대 총림의 한 곳인 수덕사는 백제 위덕왕 때 지명법사가 창건을 하고, 고려 공민왕 때 중수를 하였다. 그리고 조선조 고종 2년인 1865년 만공스님이 중창을 하였다. 전설에는 세 번을 지은 것으로 전하고, 실제로 수덕사는 창건 이후 두 번을 중창을 해 세 번째 모습을 갖추었다.

 

수덕사 입구부터 사람들이 길을 빼곡하게 채웠다. 일주문을 지나 경내로 걷는 길이 온통 단풍으로 물들었다. 3 자녀를 둔 부모들부터 올 단풍의 절정을 맛보려는 관광객들까지 그야말로 북새통이다. 이 많은 사람들이 다 어디서 왔을까? 싶을 정도로 사람들이 북적인다. 사진을 어디서 찍어야 사람들을 피할 수가 없다.

 

 

문화재 사진촬영을 하고나서 경내를 한 바퀴 돌아본다. 그야말로 수덕사에 불이 붙었다. 그동안 수십 차례나 찾아 온 수덕사다. 그런데 이렇게 단풍이 아름다운 절인 것을 알지 못했다. 문화재 하나를 사계절 다 찾아보아야 한다고 늘 생각을 했지만, 이 계절에 수덕사를 찾은 것은 처음이다. 형형색색의 단풍에 그저 입을 다물지 못한다.

 

상왕산 개심사 여긴 또 왜 이래?

 

가을이면 상왕산 개심가로 가라고 했단다. 그동안 가을이면 빠트리지 않고 찾아왔던 서산 개심사. 그런데 예전의 그 화려했던 단풍이 아니다. 서산시 운산면 신창리 11-5에 소재한 개심사는, 아직도 백제 때의 기단이 남아있는 절이다. 개심사를 찾아가는 길을 굳이 가을을 고집했던 것은, 가을이 참 아름다운 절이기 때문이다.

 

 

개심사 명부전 앞 텃밭 가운데 있는 감나무 한 그루. 잎은 다 떨어지고 감만 주렁주렁 달려있다. 스님들이 이 감을 마다하고 까치밥으로 남겨놓은 것일까? 그 감을 바라다보다가 산신각으로 발길을 옮긴다. 그곳에서 진정한 가을을 만난다. 붉은 단풍이 아닌 색이 바란 나뭇잎들이 떨어져 만든 가을. 개심사는 그렇게 조용히 가을을 맞이하고 있었다.

 

저 사람도 손잡고 가는데 우리도 손잡고 가요.”

 

일행 중 부부가 하는 말이다. 그러고 보니 부부끼리 모두 손을 잡고 걷고 있다. 그럼 난 누구 손을 잡아? 괜히 퉁명스런 말 한마디 한다. “여자들 많이 있네요. 아무나 골라잡아요.”라는 대답에 갑자기 옆구리가 시리다. “그럴까라는 대답으로 말을 막는다. 하지만 이 가을에 불붙는 단풍을 보고도 쓸쓸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 옆구리는 왜 이리 시린 것이고.

 

충남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에 소재한 간월암. 물이 만조가 되면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한다는 이 작은 암자는, 무학대사가 이곳에서 도를 닦던 중 달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여서 간월암이라는 암자 명칭을 붙였다고 한다. 무학스님은 20세 때 이곳에 들어와 토굴을 짓고 열심히 수도를 하다가 달을 보고 깨우침을 얻었다고 한다. 무학이라는 법호도 나옹스님이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하여 법호를 무학(無學)이라고 지어 주었다는 것이다.

 

무학스님은 왜 이 작은 암자에서 깨달음을 얻은 것일까? 간월암은 처음에는 피안도 피안사(被岸寺)’로 불리다가, 밀물 때가 되면 마치 섬이 연꽃과 비슷하다고 하여 연화대또는 낙가산 원통대라고 부르기도 했단다. 이렇게 부르던 것이 결국 고려 말에 이곳에서 수도를 하다가 깨우침을 얻은 무학대사로 인해 간월암이 되었다.

 

 

한 때 폐사가 되었던 간월암

 

이성계가 나라를 세울 꿈을 꾸고 있을 때 무학대사는 이성계의 꿈을 해몽하면서, 이성계가 나라를 세울 큰 인물임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이성계에게 500일 기도를 시키고, 한양의 도읍터를 잡아주기도 했다. 더구나 한양의 도읍터를 잡을 때 그 문을 창여문이라 부르고 28칸을 지었으니, 조선이 28대로 마친다는 것을 예견했다는 것이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고 난 뒤, 간월암과 황도(태안) 등을 사폐지(절에 소유된 토지로 실질적인 절의 땅이다)로 주었다. 하지만 조선은 억불정책을 펴면서 수많은 절이 곤욕을 치렀다. 비록 무학대사가 조선의 개국에 커다란 힘이 되었지만, 조선은 500년 동안 수없이 억불정책이 이어졌던 것이다.

 

 

그러한 억불정책으로 인해 간월암도 한때 폐사가 되었었다. 그 후 1941년에 이르러 만공선사가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간월암에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만공선사는 이곳에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 천일기도를 드리고 난 뒤, 다음 날 광복이 되었다고 하니 간월암은 기도를 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절인 듯하다.

 

추석 전에 찾아갔던 간월암

 

날이 덥다. 추석이 가까워진 가을로 접어든 절기인데도 불구하고, 한 낮 더위는 30도 가까이 오른다고 한다. 그 무더운 날씨에 서산 해미읍성을 오전에 돌아보고 난 후 간월암으로 향했다. 추석을 맞이하기 전에 무엇인가 간구할 일이 생긴 것은 아니다. 그저 세상이 하도 험난하다고 하니, 그래도 명절을 마음 아프게 보내는 사람들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에서이다.

 

 

물이 빠진 간월암을 향했다. 828, 평일이라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지는 않았다. 대웅전을 들린 후에 모처럼 바다면에 붙여 지은 용왕각 앞에 섰다. 한 낮의 따가운 햇살에 덥혀진 바닥에 서니 발바닥이 뜨겁다 못해 댈 것만 같다. 그래도 이곳에 서서 한꺼번에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세월호의 아픔들을 위한 기도를 하고 싶다.

 

무학스님이 그랬고 만공선사가 그랬다. 한 사람은 나라의 개국을, 한 사람은 나라의 광복을 이끌어냈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이렇게 간절함을 보이면 아직도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시신들이 가족과 만날 수 있지는 않을까하는 마음에서이다. 뜨거움을 참고 겨우 삼배를 마친다. 참기 힘든 발바닥의 뜨거움이 머리 위에서 땀이 흐르게 만든다.

 

 

이 작은 암자도 찾아보지 않은 시간동안 변화를 가져왔다. 지난 해 728일 이 작은 암자를 찾았을 때 자리를 지키고 있던 전각 하나가 사라진 것이다. 빈자리는 시원하게 바다가 보여 암자 경내의 경관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무엇인가 하나가 빠진 듯한 허전함이 드는 이유는 무엇인지.

 

매년 한 번씩은 거르지 않고 찾아간 간월암이지만, 이번 답사 길은 마음이 남다르다. 세월호라는 커다란 아픔이 이곳으로 향하는 발길을 편치 않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제 다녀온 지 10여일이 훌쩍 지났다. 앞으로 간월암을 다시 찾을 때는 가슴 아픈 사연은 털어버리고 기분 좋은 발길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무학대사가 이곳에서 도를 닦고, 달을 보고 깨우쳤다고 하여서 ‘간월암’이라는 붙였다는 서산 간월도의 간월암. 무학스님은 20세 때 이곳이 들어와 토굴을 짓고 열심히 수도를 하다가 달을 보고 깨우침을 얻었다고 한다. 나옹스님이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하여 법호를 무학(無學)이라고 지어 주었다는 것이다.

 

이 간월암이 처음부터 간월도나 간월암으로 불린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피안도 ‘피안사(被岸寺)’로 불리다가, 밀물 때가 되면 마치 섬이 연꽃과 비슷하다고 하여 ‘연화대’ 또는 낙가산 ‘원통대’라고 부르기도 했단다. 이렇게 부르던 것이 결국 고려 말에 이곳에서 수도를 하다가 깨우침을 얻은 무학대사로 인해 ‘간월암’이 되었다.

 

 

한 때 폐사가 되었던 간월암

 

세상은 참 이해하지 못할 일이 많다. 조선이 개국할 때 무학대사는 이성계의 끔을 해몽하면서 이미 이성계가 태조가 될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성계에게 500일 기조를 시키고, 한양의 도읍터를 잡아주기도 했다. 더구나 한양터를 바을 때 그 문을 창여문이라 부르고 28칸을 지었으니, 조선이 28대로 마친다는 것을 예견했다는 것이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고 난 뒤, 간월암과 황도(태안) 등을 사폐지(절에 소유된 토지로 실질적인 절의 땅이다)로 주었다. 하지만 조선조 때 배불정책을 펴, 얼마나 많은 고초를 당했는가는 알고 있는 바이다. 조선의 개국을 도운 무학대사. 그리고 이성계에게서 두 곳의 섬을 사폐지로 받은 무학대사. 하지만 조선은 500년 동안 수없이 배불정책이 이어졌다.

 

 

결국 무학대사가 토글을 짓고 이곳에서 깨달음을 얻어 조선이라는 나라까지 개국이 되는 것을 도왔지만, 그 억불정책으로 인해, 간월암이 폐사가 되었다. 아마 조선의 왕이 28대를 전해 질 것을 알았다는 무학대사인데, 간월암이 훗날 당한 고초를 알지는 못했던 것일까? 그 후 1941년 만공선사가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만공선사는 이곳에서 광복을 의해 천일기도를 드리고 해방이 되었다고 하니, 이 절에 기운이 남다른 모양이다.

 

삼사순례로 찾아간 간월암

 

삼사순례, 하루에 세 곳의 절을 돌아오는 불교의식이다. 7월 28일(일)아침 일찍 버스로 수원을 출발했다. 수원시 지동에 소재한 고려암의 신도들이 삼사순례를 떠난 것이다.  출발하기 전부터 내리던 빗줄기가, 막상 고속도로에 들어서자 더 세차게 퍼붓는다. 오늘 들릴 세 곳의 절에 나름 문화재가 많이 있어 기대를 하고 떠난 길이다. 홍성 나들목으로 나서 천수만 방조제를 지나 간월암이 보이는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비가 오는데도 바닷바람이 조금은 세찬 듯하다. 모자가 바람에 날려 몇 번이고 날아간다. 그래도 간월암으로 들어가는 길이 열려있어 다행이란 생각을 한다. 간월암은 조수의 차에 의해 섬도 되었다가, 육지와 연결이 되기도 하는 절집이기 때문이다. 물을 빠진 길에서는 사람들이 무엇인가 바위에 붙은 것들을 열심히 줍고 있다.

 

간월암으로 들어가니 마침 사시예불 중이다. 작은 섬 위에 옹기종기 앉은 전각들이 정겨운 곳. 벌써 몇 번째 이곳을 찾았지만, 올 때마다 늘 새로운 느낌을 받는다. 아마도 주변에 부는 바람과, 일렁이는 물살 때문인 듯하다. 잠시 예를 마치고 주변을 돌아본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바닷가 쪽으로 지어진 작은 전각 앞에서 열심히 잘을 하고 있다.

 

무학대사의 신통력이 절을 지키는 것일까?

 

아마도 이 작은 전각이 바다 쪽으로 조성을 한 것을 보니, 용왕각인 모양이다. 열심히 절을 한 사람들이 모여 기념촬영을 하고, 마치 썰물처럼 간월암을 빠져나간다. 나오는 길에 절 입구에 사람들이 쌓아올린 돌탑을 보면서 잠시 고개를 숙인다. 이 돌탑을 정성으로 쌓은 사람들도 마음에 다 서원이 있었을 것. 나도 잠시 고개를 숙여 행로의 무사함을 빌어본다.

 

고려 말의 무학대사가 이곳에서 깨들음 을 얻었고, 그 이전에도 이미 피안사라는 절이 잇었다고 하면, 간월암의 역사는 500년이 훌쩍 지난 고찰이다. 하지만 옛 흔적이 보이지 않아 조금은 아쉽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간월암이란 이름으로 또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는 절집이 있으니, 그도 다행이란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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