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에 있는 탑이라고 해서 모두 부처의 사리를 보관하거나, 부처를 상징하는 것은 아니다. 사찰 경내에 소재하고 있는 탑 중에서도 여러 가지 이유로 조성한 것이 있다. 공주 갑사에는 갑사를 이룩할 때 노역을 하다가 목숨을 잃은 소를 위한 공우탑도 있다. 이와 같이 조금 특별한 탑이 바로 경기도 가평군 하면 하판리 산163 현등사경내에 자리하고 있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7호인 지진탑이다.

 

가평군 하면 하판리에 소재한 현등사는 운악산(해발 935m) 산등성이에 위치한 신라시대의 고찰이다. 신라 법흥왕 27년인 540년에 인도에서 불법을 전하기 위해 건너온 마라가미 스님을 위해 왕이 지어준 사찰로, 오랫동안 폐사 되었다가 신라 효공왕 2년에 도선국사가 다시 중창하였다.

 

현등사는 창건 이래 많은 중창을 하였다. 신라 말 효공왕 2년인 898년 도선국사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고 동쪽의 지세가 약해 이를 보강하기 위해 운악산을 돌아보던 중 옛 절터가 있는 것을 보고 이곳에 절을 지었다고 한다. 두 번째 중창은 고려 회종 6년인 1210년 보조국사 지눌이 운악산 중턱에서 불빛이 비쳐 이곳을 찾아오니, 석등과 마륵바위에서 불빛이 비치는 것을 보고 현등사라 이름 하였다고 한다.

 

보조국사 지눌은 수백 년 동안 폐허로 있었던 이 절터에 새로 절을 짓게 되었다. 이 때 터의 기를 진정시키고자 이 탑을 세워 두었다 한다. 이로 인해 지진탑(地鎭塔)’이라는 이름이 생겨났으며, 승려의 이름을 따서 보조국사탑이라 부르기도 한다.

 

 

삼층석탑의 1층 몸돌이 사라져

 

현등사 입구를 들어서면 위로 오르는 계단 한편에 지진탑이 서 있다. 지진탑은 원래 3층 석탑이었을 것으로 보이나, 기단의 일부와 탑신의 1층 몸돌이 없어져 본래의 모습을 잃고 있다. 바닥돌과 기단의 맨윗돌은 윗면에 경사가 흐르며 네 모서리 선이 뚜렷하다. 지붕돌과 몸돌이 교대로 올려진 탑신부는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인 양우주를 본떠 새겼다.

 

탑의 맨 아래 놓인 지대석은 2단의 괴임대가 마련되어 있다. 네 귀퉁이의 합각은 뚜렷하며 밑면에는 부연이 조각되어 있다. 위면에는 각각 2단의 받침이 조출되어 있다. 이 지진탑은 탑의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개의 돌로 조성하였다. 이 탑은 오랜 세월을 지내오면서 많이 훼손이 되었지만, 남아있는 2층과 3층의 몸돌에 좌상이 새겨져 있어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고려 중기에 조성한 지진탑

 

지붕돌은 느린 경사로 흐르는데 밑면에 받침은 1, 2층은 4, 3층은 3단으로 불규칙하다. 낙수면의 경사는 비교적 완만한데 .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추녀는 수평으로 흐르다가 전각에 다달아 급격한 반전을 이룬다.

 

상륜부에는 네모난 받침돌인 노반석만 남아 있다. 상면에는 지름이 5cm 정도인 찰주를 꼽기 위해 조성한 구멍이 뚫려있다. 이 탑은 현존하는 부재의 조각양식과 이름에 얽힌 이야기로 미루어 고려시대 중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한다.

 

 

탑은 사찰의 어디에나 존재한다. 하지만 그 많은 탑들은 제각각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 탑을 조성한 장인의 정신이 있다. 그래서 우리의 문화재들이 소중하다는 것이다. 비록 제 모습을 다 갖추고 있지 못한 지진탑을 보면서, 그래도 그렇게나마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이 고맙기만 하다.

 

지진탑을 찾아가는 날은 정말 살을 에이는 듯한 날씨였다. 하지만 그곳에 지진탑이 있어주어 그런 추위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소중한 문화재의 가치조차 제대로 모르는 한심한 인간들이 이 나라에는 너무나 많다는 것이 가슴 아플 뿐이다.

문화재 답사를 다니다가 보면 가끔 문화재의 품격이 달라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대개는 격강이 되는 것이 원칙이지만, 어떤 때는 격하가 된 것들을 만나기도 한다. 그럴 때는 괜히 마음이 짠하다. 아마도 문화재에 문제가 있었던지 아니면 문화재 보관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기 때문이다.

 

경기도 가평군 하면 운악산에 있는 현등사의 동종은 예전에는 경기도 지정 유형문화재였다가 지난해 1227일 보물로 격상이 된 예이다. 이럴 때면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보물을 만났다는 것도 그렇지만, 그 문화재가 그만큼 소중하거나, 아니면 제작 연대 등이 밝혀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봉선사에 봉안되었던 동종

 

가평 현등사에 소재한 동종은 원래 현등사의 본사인 남양주 봉선사에 봉안되어 있었던 것이다. 봉선사에는 보물로 지정된 또 하나의 동종이 보관되어 있는데, 이 동종은 일제강점기에 현재의 현등사로 옮겨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등사 동종은 73.5cm의 아담한 크기로 종신을 여러 개의 구획선으로 나누고, 그 안에 연잎무늬, 당초무늬, 파도무늬 등을 화려하게 새겨 넣어 장식을 강조한 범종이다.

 

 

머리부분인 용뉴는 두 마리 용이 서로 등을 맞대어 몸을 꼬고 있어 안정감을 주고, 두발을 힘차게 내딛어 천판을 들어 올리는 모습에서 역동적인 표현력이 뛰어나다감. 비록 크기는 그리 크지 않지만, 둥근 곡면을 이루는 천판에서부터 종의 입으로 내려오면서 조금씩 그 폭을 넓힌 종의 형태도 아름답다.

 

주종기를 종에 기록한 소중한 자료

 

현등사 동종의 배 부분에 보면 해서체로 주종기를 돋을새김 하였다. 주종기는 광해군 11년인 1619년에 천보가 짓고 글을 새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이 동종을 만들게 된 연유와 종 제작에 사용된 재료의 양과 무게등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 뿐이 아니라 이종의 시용 용도와 참여한 사람 등도 함께 기록하고 있다.

 

 

주종기에 보면 주종장은 주종기를 작성한 천보로 보고 있는데, 그는 조선후기 승려 주종장 가운데 유일하게 임진왜란 이전부터 활동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어,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의 승장의 계보나 범종의 양식 흐름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인물이다.

 

현재 현등사에 보관되어 있는 이 종은 1619년에 조선 전기 궁중양식 범종의 전통을 계승하여 제작된 범종이며, 주조상태도 양호하고 역동적이다. 종에 새긴 문양은 생동감이 있는 무늬들을 조화롭게 배열한 점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조선후기 범종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중국종의 양식을 따른 종

 

현등사 동종은 고려 후기 연복사종에서 비롯된 중국 종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특히 종의 중심부를 세 개의 융기선으로 구획하고, 천판에서 종의 입 사이에 다양한 무늬를 시문하여 절로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작은 마름모꼴의 연곽에 구슬 모양의 연꽃봉우리라든가, 천판의 내림연꽃이 중앙을 향해 보상화문처럼 말려든 형태와 그 위로 표현된 구슬무늬 등이 아름답다.

 

 

또한 종의 블록한 배 부분에 크게 자리 잡은 역동적인 연화당초무늬와, 하대에 표현된 물거품이 일렁이는 파도무늬 등은 장엄의 극치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요소는 1469년 작 남양주 봉선사 동종(보물 제397)이나 흥천사명 동종(보물 제1460), 그리고 1491년 작 합천 해인사 동종(보물 제1253) 등 조선전기의 왕실발원 범종의 전통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원래 이 종을 소장했던 봉선사도 왕실의 원찰이었기 때문에, 이전에 만들어진 궁중양식 범종의 여러 가지 요소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경기도 가평군 하면 하판리의 현등사는 운악산(해발 935m) 산등성이에 위치한 신라시대의 고찰이다. 신라 법흥왕 27년인 540년에 인도에서 불법을 전하기 위해 건너온 마라가미 스님을 위해 왕이 지어준 사찰로, 오랫동안 폐사 되었다가 신라 효공왕 2년에 도선국사가 다시 중창하였다.

 

현등사는 창건 이래 많은 중창을 하였다. 신라 말 효공왕 2년인 898년 도선국사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고 동쪽의 지세가 약해 이를 보강하기 위해 운악산을 돌아보던 중 옛 절터가 있는 것을 보고 이곳에 절을 지었다고 한다. 두 번째 중창은 고려 회종 6년인 1210년 보조국사 지눌이 운악산 중턱에서 불빛이 비쳐 이곳을 찾아오니 석등과 마륵바위에서 불빛이 비치는 것을 보고 현등사라 이름 하였다고 한다.

 

 

그 후 조선 태종 11년인 1411년 함허득통화상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현등사 경내에는 1619년 봉선사에서 조성한 보물 제1793호인 현등사 동종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3호인 삼층석탑, 183호인 목조아미타좌상, 184호 청동지장보살좌상 등 12점의 문화재가 전해지고 있다.

 

2km를 걷는 길 겨울경치도 아름다워

 

날이 차다. 입구에서 현등사까지의 거리는 2km 남짓. 하지만 주변 경관을 들러보고 가노라면 언제 다 왔는지 일주문이 보인다. 운악산 현등사라고 현판을 단 일주문을 지나면 계단을 오르는 초입에 불이문이 서 있다. 불이문 한 옆 커다란 바위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기원을 담은 작은 돌들이 빼곡히 쌓여있다.

 

 

천천히 계단을 오른다. 바쁜 일이라고는 없지 않은가? 그저 오늘은 세상 시름 이곳에 다 버리고 훌훌 털고 가야겠다는 생각이다. 조금은 안쓰럽게도 보이지만, 그래도 온갖 세월의 풍상을 다 이겨낸 지진탑이 보인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 앞에 머리를 숙인다. 그 탑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오래 전 그 탑을 조성한 장인에게 죄스런 마음 때문이다. 제대로 지켜내지 못했음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경내로 들어서는 입구에 삼층석탑이 보인다. 이 탑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했다고 한다. 하지만 도굴을 당한 것을 2006년 삼성문화재단으로부터 되돌려 받아, 다시 제 자리에 모셨다고 하니 탑이 더 빛을 발하는 듯하다.

 

응진전 앞에서 걸음을 멈추다

 

절이라는 곳이 명소 아닌 곳이 어디 있겠는가? 곳곳의 전각마다 부처가 아니 계신 곳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나에게 가장 눈에 띤 것은 바로 커다란 소나무 밑에 한 칸으로 조성을 한 응진전이었다. 그 모습이 왜 그리 눈물겨웠을까? 아마도 그 안에 들어가 머리를 조아려 절을 하고 있는 저 보살도 나와 같은 생각이 아니었을까?

 

 

전국에 산재한 수많은 고찰들을 찾아다니다가 보니, 이제는 그 분위기만 보아도 대충은 그 절의 세를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웅장하고 사람이 많다고 해서 좋은 절일까? 아니면 일 년의 수입이 많다고 해서 좋은 절일까? 물론 요즈음같은 물질만능시대에 그런 것으로 절의 가치를 정하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절에서 고승들이 득도를 했을까? 왜 역사에 남을만한 고승들은 모두 사람의 발길이 미치지 못하는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었을까? 인간의 오욕이 보이지 않는 곳을 찾아 부처의 참 마음을 깨우치기 위해서는 아니었을까? 현등사 경내를 돌아보면서 온갖 질문을 하고 그 해답을 얻으려고 애를 써본다.

 

하지만 무슨 소용이 있으랴. 이미 내 마음과 몸이 속세의 찌들어있는데. 그저 바람 한 점이 불어 내 몸에 묻은 속세의 먼지를 훌훌 털고 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눈은 녹았지만 찬바람은 그대로인 한 겨울의 현등사. 그곳에서 난 잠시 동안이나마 속세를 떠나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본다.

경기도 가평군 하면 대보리, 앞으로 흐르는 조종천을 내려다보며 서 있는 조종암(朝宗巖). 경기도 기념물 제28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조종암은, 어찌 보면 나라가 약한 탓에 느끼는 울분의 장소이기도 하다. 현재 조종암에는 바위에 글씨를 새긴 암각문과 비석, 그리고 단지 등의 유적을 합해 이르는 장소이다. 앞으로는 얼어붙은 조종천이 흐르는데, 찬바람이 옷깃으로 파고 들어온다. 조종암에는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

 

조종암에 스며든 슬픈 역사

 

효종임금은 인조의 둘째 아들이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난 다음 해 강화도로 있던 효종은 남한산성에서 인조가 청에 항복을 하자, 형인 소현세자와 오달제 등과 함께 청에 볼모로 잡혀갔다. 8년간이나 선양에 머물던 효종은, 1645년 2월에 먼저 귀국한 형 소현세자가 4월에 세상을 떠나자, 5월에 돌아왔다. 효종은 그 때부터 북벌계획을 강력히 추진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조선은 성리학의 명분론에 입각해 '숭명배청(崇明排靑)'의 의식이 높았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효종임금과 송시열이었다. 청에 볼모로 잡혀가 있던 효종으로서는, 그 치욕을 씻을 길이 오직 북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바위에는 朝宗巖(조종암), 思無邪(사무사), 日暮途遠 至通在心(일모도원 지통재심), 萬折必東 再造瀋邦(만절필동 재조심방) 등의 글씨가 여기저기 새겨져 있다. 그리고 솟은 바위 위에는 앞으로 흐르는 조종천을 굽어보는 비석이 1기 서있고, 그 밑으로는 제사를 지내던 단지가 보인다.

 

 

 

효종의 슬픔 마음이 새겨진 바위

 

조종암은 조선 숙종 10년인 1684년에 우암 송시열이 명나라 의종의 어필인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는 내용인 사무사를 새겨 넣었다. 또한 효종이 대신에게 내려준 '해는 저물고 갈 길이 먼데, 지극한 아픔이 마음속에 있네'라는 글인 <日暮途遠 至通在心(일모도원 지통재심)>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이를 당시 가평군수인 이제두에게 보내어, 깨끗한 장소를 정해 새기도록 부탁하였다고 한다.

 

 

8년간이나 청에 잡혀가 있으면서, 약한 나라에 태어났음을 슬퍼했을 효종. 얼마나 그 아픔이 마음속에 깊게 자리했을까? 그러한 효종의 명에 따라 이제두, 허격, 백해명 등 여러 선비가 힘을 합하여 위 글귀와, 임진왜란 때 몽진을 해야 하는 고통을 당한 선조의 어필인 '萬折必東 再造瀋邦(만절필동 재조심방)'이란 글씨를 새겨 넣었다. 그리고 선조의 후손인 낭선군 이우의 글로 임금을 뵙는다는 뜻인 '조종암'을 바위에 새기고 제사를 지냈다.

 

이런 북벌에 대한 굳은 의지를 담고 있는 조종암이지만, 그 내면에는 약한 나라의 슬픔이 깃든 곳이기도 하다. 효종은 청에 볼모로 잡혀갔던 아픔을 잊지 않기 위해 글을 새기라 했고. 선조의 글에는 스스로 나라를 지키지 못했음을 나타내고 있다. 더욱 '조종'이라는 뜻은 '제후가 천자를 알현한다'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의 장소로 삼아야 할 조종암

 

조종암은 단지 바위에 암각문을 새긴 곳이 아니다. 이곳에는 병자호란과 임진왜란을 통해 아픔을 당한 사연이 깃든 곳이다. 효종과 선조는 외침에 의한 고통을 당한 임금들이다. 이러한 마음을 함께 적어 놓은 조종암은, 약한 나라가 당해야하는 슬픔을 보여주고 있다. 약한 나라는 늘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역사의 장소로 삼아야 할 곳이다.

 

 

얼어붙은 조종천에서 부는 바람이 차다. 바위의 이곳저곳을 돌아보는 마음이 아프다. 지금이야 그저 '암각문이겠지, 역사를 기록한 한 장소이겠지' 하고 지나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다시는 외침에 의해서 나라가 겪는 수모가 없어야 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이러한 조종암을 역사의 장소로 삼아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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