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뻥입니다. 귀 막으세요

 

어릴 적 마을 안에 있는 장거리나, 시골의 5일 장 등을 찾아가면 반드시 만나게 되는 것이 있다. 바로 뻥튀기이다. 옥수수알이나 쌀, 보리, 혹은 누룽지 같은 것을 기계 안에 넣고 열을 가하다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압력으로 인해 튀겨낸다. 튀기는 소리가 마치 대포가 터지는 듯 하고 소리가 나기 때문에 뻥튀기라고 했는가 보다.

 

뻥튀기는 과거 아이들의 간식거리가 마땅치 않을 때는 최고의 간식이었다. 어릴 적 기억으로는 뻥튀기를 해오면 다락에 놓고 잠가 놓는 일이 허다했다. 중독성이 있는 것 같은 이 뻥튀기가 곁에 있으면 배가 부른데도 불구하고 자꾸만 손이 가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럴진 데 마땅히 먹을 것이 없던 옛날이야 오죽했을까?

 

 

5일장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뻥튀기

 

경기도의 한 지자체에서 5일장 책을 써 달라는 주문을 받고 어느 군의 5일장을 돌아본 적이 있다. 5일장은 5일마다 한 번씩 열리는 장으로 한 달이면 6번이 열린다. 1일과 6, 혹은 2일과 7. 3일과 8, 4일과 9일 등으로 5일 간격으로 장이 서는 것이다. 장이 크거나 작거나 이것은 관계없이 정해진 날짜에 장이 서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장마다 시간이 가면 한 번씩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이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사람이 지나가다 보면 놀라기도 한다. ‘하고 터지는 소리 때문이다. 그렇게 10분마다 한 번씩 터지는 뻥튀기는 하루 종일 이어진다. 뻥을 튀기는 기계 앞에는 줄을 지어 그릇에 쌀이면 옥수수 등이 들어 있다.

 

이런 뻥튀기를 좋아하는 것은 먹을 것이 도시만큼 없는 시골이기 때문은 아니다. 요즈음은 웬만한 시골에는 대형마트들이 자리를 하고 있어, 아이들의 먹거리는 도심과 별로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이렇게 뻥튀기가 인기가 좋은 이유는 손쉽게 집안에 저장을 해놓고 먹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소리에 깜짝 놀랐네.

 

15일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못골시장에 들렸다. 필요한 것이 있어서 구입을 한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 복잡한 차도가 싫어서 일부러 미나리광으로 통하는 뒷길을 택했다. 조금 비좁기는 하지만 차와 사람에 부대끼지 않으니 늘 이 길을 이용한다.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있는데 하는 소리와 김이 하얗게 피어오른다.

 

그리고 보니 그동안 지나면서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던 집이 있다. 바로 남문 뻥튀기 집이다. 이 집은 날마다 문전성시다. 넓지 않은 골목길에는 항상 사람들이 서성이고 있다. 뻥튀기 기계가 3대인가를 놓고 쉴 새 없이 튀겨낸다. 기다리는 사람들도 많고 바쁘기도 하지만, 뻥을 튀기러 온 사람들이니 일부러 주의를 주지 않아도 알아서 조심을 한다.

 

그런데 그 길을 아무 생각 없이 걷던 나로서는 놀랄 수밖에. 사람들이 그런 나를 보고 웃는다. 하지만 그렇게 예고도 없이 뻥을 튀겼다고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그저 멋쩍게 함께 웃을 수밖에. 그렇다고 그런 장면을 그냥 지나칠 수야 없지 않은가? 조금만 기다리면 다시 뻥을 튀길 테고, 좋은 기사거리가 하나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

 

 

믿을 수 있는 간식거리인 뻥튀기

 

잠시 기다리고 있다가 시진촬영을 하니, 뻥을 튀기러 오신 분이 한 마디 하신다. ‘별 것을 다 찍는다.’. 하지만 이 추억의 장면이 어디 별것이겠는가? 이왕 사진까지 찍었으니 그 중 가장 젊은 분한테 질문을 한다.

 

뻥튀기 자주 튀겨가세요?”

, 한 달에 한 두 번은 꼭 와요

집에서 누가 뻥튀기를 좋아하시나 봐요?”

, 우리 아이들이 잘 먹어요

아이들은 이런 것 잘 안 먹지 않나요?”

아뇨 우리 아이들은 정말 잘 먹어요. 그리고 전 아이들에게 과자를 잘 안 먹어요. 요즈음은 과자도 믿을 수 없다고 하잖아요. 세상이 하도 어지럽다보니 수입용 밀가루를 긎고 과자를 만든다고 하잖아요. 심지어는 유전자 변형이 된 것도 있다고 하고요. 뻥튀기는 제가 직접 우리땅에서 키운 쌀을 사서 갖고 오니까 믿을 수도 있고요. 주문을 하면 화학 첨가무로 섞지 않고요. 아침에 우유나 콩음료 등과 함께 아이들에게 먹이면 건강에도 좋고요

 

맛있고 비싼 과자를 먹이는 것조차 안심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세상에 우리 전래의 뻥튀기는 얼마나 믿을 만한 식품인가? 무심코 지나다가 놀란 뻥튀기 소리. 그 소리가 오늘 유난히 정감이 있게 들린다.

 

이유 없습니다.

그저 근처 5일 장에 가서 나 한 마리 사갖고 와서

앞으로 이야기나 쓰렵니다. 

날도 무지 더운데 돌아다닐 필요 없고

더구나 경비 들일 필요도 없고

길거리에 있는 는 주인있으면 골치 아프고

5일장에 나가 한 마리 사오는 것이 딱일 듯 하네요...

머 그렇다고 를 썩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한 마리 키우고 싶고, 답사 다니는 것보다는 훨 나을 것 같아서요.

 가끔 답사 나갔다가 만나는 이야기를 써보니 그도 재미있고요

 


 

지난 밤에 잔뜩 흐리더니, 아침부터 겨을비가 추적거리기 시작한다. 어제 밤늦게 여주장을 보러나갔다. 장을 본 것은 아니고, <여주중앙로 문화의 거리>라는 재래시장에 설치한 루미나리에를 촬영하기 위해서다. 화려한 갖가지 색을 자랑하는 입구부터 눈이 현란하다. 요즈음 재래시장이 변하고 있다. 물론 그 변화가 바람직하기도 하지만, 일부에서는 장에서 보이는 정감이 사라지고 있다고 볼멘소리를 하기도 한다.

 

비가 온다고 밥 안 먹간디?

 

어제 미리 연락을 취해놓고 장의 변화를 취재하기 위해 여주장으로 나갔다. '여주상권 살리기 추진위원회' 박흥수(남, 65세) 씨와 김동호씨를 만나보기 위해서다. 겨을비는 차다. 이 비가 오는데도 천막을 치고, 그 위에 비닐을 덧씌우는 사람들. 5일장이야 5일에 한번, 5일과 10일, 15일과 20일, 25일과 30일, 한 달에 여섯 번이 열리는 장이다. 매일 나오는 것도 아니고 5일에 한 번씩 장으로 오니, 오늘 일당은 벌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비가 오는데도 손님을 기다리는 할머니 한분. 작은 파라솔 하나를 의지해 나물과 곡물 몇 가지를 놓고 자리를 지키신다.

 

 

"할머니 비가 오는데 이렇게 앉아계세요"

"장날인데 어쩌겠어. 비가 와도 기다려봐야지"

"물건은 좀 파셨어요."

"비가 와서 그런지 도통 손님이 없네."

"오늘 같은 날은 손님도 없을 텐데, 일찍 들어가세요. 감기 걸리시겠네요."

"뭔 소리여. 비 온다고 밥 안 먹간디?"

 

할머니는 오늘 장에 나온 차비라도 끝내 벌어 가셔야 한단다. 저런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찡하다. 겨울비는 추적거리는데 오한이 오시는지, 몸을 으스스 떨고 계시다. 어머니의 마음이 저런 것일까?

 

'경기도에서 두 번째인 여주장 많이 변했죠'

 

약속한 장소에 가서 잠시 기다리고 있으려니 박흥수씨가 들어온다. 그동안 여주장을 취재하러 많은 언론사 사람들이 찾아왔었다고 한다.

 

  
점포위주의 장사를 하는 문화의 거리에 여주 5일장이 선 모습.

 

"경기도에서는 성남 모란장이 가장 크고, 그 다음이 여주장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비록 그 세가 많이 축소가 되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예전의 명성을 지키고 있는 장입니다. 근동에서는 가장 크죠. 40 ~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주 인구가 별 차이가 없으니, 그 전 생각을 하면 정말 큰 장이죠"

 

여주장은 두 곳으로 나눠진다. 한 곳은 <여주중앙로 문화의 거리>로 명명된 재래장으로, 여주농협부터 순화당 사거리까지 320m 구역이다. 이곳이 바로 밤이 되면 루미나리에 불빛이 아름다운 곳이다. 이곳은 점포가 있는 분들이 '여주 상권살리기 추진위원회'를 조직해 장의 발전을 도모한다. 그리고 여주읍 하리 쪽의 5일장이 서는 곳에는 또 다른 상인연합회가 관리를 한다. 문화의 거리 상인연합회는 현재 회원이 150명 정도다.  

 

"저 어릴 적에는 아버님이 이곳에서 시계도 고치시고, 심지어는 지퍼라이터도 고쳤어요. 원래 장을 돌아다니시면서 물건을 파는 장꾼이었는데, 이 자리에 좌판을 벌이시고 물건을 팔고 수리도 하셨죠. 그 가게를 제가 물려받은 겁니다."

 

김동호씨의 말이다. 그 말에 이어 박흥수씨도 자신의 가게도 어릴 적에 보면 작은 포목 몇 필을 파는 가게였다고 한다. 두 사람 모두 2대에 걸쳐 여주장을 지켜온 사람들이다. 박흥수씨는 장을 지키는 풍속도 바뀌어 가고 있다면서.

 

여주장의 변화를 이야기하는 박흥수씨(좌)와 김동호씨(우)

 

"지금은 장 사람들이 선진화가 되어 가는가 봐요. 전에는 연세가 드셔도 점포를 지키시는 분들이 많았는데, 요즈음은 연세가 좀 드시면 자식들에게 다 물려주시고는 장에 나오시지를 않아요. 그래서 연세 드신 분들이 자꾸만 보이시질 않으니 그도 한 걱정입니다. 혹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 해서요."

 

50년 전만 해도 장작도 팔고 물장수도 있던 여주장인데

 

여주장이 얼마나 변했느냐고 물었다. 50년 전만 해도 여주 장에는 나무를 해 갖고 와 파는 사람들이 길거리에 몇 십 미터씩 줄을 이었다고 한다. '그 장작도 돈이 없는 사람들은 사서 떼지를 못했다'는 것이다. 그것뿐이 아니라 물장수가 있었는데, 여주 남한강 물을 그대로 떠다가 팔았다는 것이다. 지금 같아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이야기다. 지금 우리가 보는 남한강물을 어찌 그대로 떠다가 식용수로 사용을 할 수 있을까?

 

"예전에는 강물이 상당히 맑았어요. 그래서 그냥 강물을 떠다가 그 물로 밥도 하고 그랬죠. 그때 물장수들이 있었는데, 그저 밥만 먹여주면 물은 얼마든지 길어왔으니까요. 밥이라도 먹는 것이 그 당시에는 최고였죠."

 

박흥수씨는 옛 생각이 나는지 눈을 지그시 감는다. 하기야 내가 살던 서울에서도 어린 시절 개울가를 흐르는 물에서 고기도 잡고 수영도 하고 놀았으니, 이곳이야 얼마나 맑았을까? 이야기를 끝내고 나무를 팔던 거리를 알려주겠다고 일어선다. 비는 아직도 추적거리고 온다.

 

 여주장에 비가온다. 상인들은 파라솔과 천막, 비닐 등으로 비를 피한다. 그래도 5일장은 파장이 될 때까지 기다린다. 장날마다 만나는 사람들 때문이다.

  
장작을 팔던 거리. 이 거리 수십미터에 나무장사들이 줄을 지었었다


"지금은 노점상을 하시는 분들 중에도 상당한 부자들이 많아요. 저분들 중에는 중국에 공장을 갖고 계신 분도 있고요. 장이 많이 변했죠. 다양한 물건을 접할 수 있으니까요. 예전에는 빈대떡 같은 먹거리가 많았는데. 심지어는 도롱뇽 알도 팔았어요. 눈이 좋아지는 약이라고 해서"

 

한바탕 웃고 만다. 하지만 옛 정취를 찾겠다고 발전 없는 장을 만들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게 많이 변해버린 장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풍물과 함께 깊은 정도 함께 사라졌다는 것이다. 비는 추적거리고 오는데, 할머니는 그때까지도 자리를 지키고 계시다. 5일장날마다 만나는 사람들이 있어, 파장 때까지 기다리셔야 한단다.

 

밤에 만나는 여주 5일장은 어떤 모습일까? 30일(토) 날이 저물고 난 뒤 5일장을 찾아 나섰다. 한편에서는 파장 때라 짐을 챙기고 있는데, 아직도 장거리는 부산하다. 그 중에 눈에 띠는 것은 삼삼오오 무리를 이뤄, 5일장 거리를 누비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의 모습이다. 그들이 손에 봉지를 하나씩 들고 있는 것을 보니, 아마도 5일장에 나와 필요한 생필품을 구입한 것 같다.

 

'5일장의 분위기가 너무 좋아요'

 


태국에서 왔다는 한 이주노동자는 무엇인가를 열심히 먹고 있다. 다가가보니 닭발 볶음이다. 그것을 맛있게도 먹는다. 동료들과 함께 이야기를 하면서 먹는 모습이, 우리네와 별반 다르지 않다.

 

"한국말 할 줄 알아요?"

"저 잘해요"

"5일장은 자주 나와요?"

"자주는 못 나와요. 일 끝나고 이렇게 밤에 나와요"

"장에 나오면 주로 무엇을 하세요?"

"친구 만나고요. 맛있는 것 사먹고요. 그리고 구경도 하고요. 정말 좋아요. 5일장"

 

이주노동자들이니 당연히 일을 마치고 나올 것이다. 한국에 온지 2년째라는 이분. 우리말도 꽤 잘 하신다. 그리고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인다. 5일장이 최고라는 것이다.

 

5일장의 밤 거리에 모여있는 이주노동자들. 이제는 이들을 5일장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이주노동자들에게 또 다른 감흥을 주는 곳

 

돼지껍질 요리를 하는 집을 찾아들었다. 이곳에도 역시 몇 명의 이주노동자들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이제는 5일장 어디를 가도 이주노동자들이 자연스럽게 우리 가운데 끼어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가 있다.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고향을 떠나, 먼 타국으로 온 사람들. 돼지껍질 볶음을 앞에 놓고, 소주잔을 기울이는 그들은 이제는 딴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것 좋아하나 봐요"

"맛있어요"

"소주도 잘 드시네요"

"좋아요"

 

아직은 우리말이 서툰 사람이다. 나이가 25살이라고 하는 필리핀에서 왔다는 이주노동자. 그저 친구들과 만날 수 있는 날이 5일장 날이라는 것이다. 이날 나오면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가 있어, 이곳이 흡사 고향의 장 같다고 한다.

 

"저 사람들 장날마다 나와요"

"많이들 오시나 보죠"

"장날이면 우리 집에만 한 20여명 정도 오니까. 많은 사람들이 나오는 것 같아요. 5일장이 저 사람들한테는 고향과 같은가 봐요"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가족을 떠나 멀리 온 사람들. 그들에게 5일장은 아마도 고향의 분위기를 느끼기에 제일 좋은 곳이란 생각이다. 그리고 많은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만나, 서로가 밀린 이야기도 하고 소식을 들을 수도 있을 테니.

 

돼지껍질과 닭발을 파는 가게. 그 안에도 소주잔을 기울이는 이주노동자들이 즐겨 찾고 있다.

5일장은 또 다른 고향

 

5일장에서 마시는 막걸리 한잔은 분위기가 다르다. 오래 전 잊었던 친구를 만나는 그런 느낌이다. 돼지껍질과 닭발, 그리고 막창 모듬을 앞에 놓고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보면 시간이 훌쩍 지난다. 그래서 5일장은 늘 정겨운 곳인가 보다.

 

5일장에서 만난 많은 이주노동자들. 그들은 자연스럽게 5일장 속으로 스며들어 있다. 결국 그들도 같은 사람들이기에, 우리 5일장이 또 다른 고향이 되어가는 듯하다. 그곳에서 친구들을 만나고, 막걸리 한잔을 마시고 5일장의 분위기에 녹아든다. 우리가 하는 그대로를 하고 있다. 그래서 5일장에서 만나는 이주노동자들은 남 같지가 않다.

 

"아줌마 돼지껍데기 한 접시 더요"

 

5일장의 인심은 아직도 넉넉하다. 돼지껍질과 닭발, 그리고 막창 등을 놓고 막걸리를 한 잔 마시면, 그 무엇도 부럽지가 않다.

주인을 소리쳐 부르는 모습까지 우리를 닮았다. 피부색깔은 다르고, 사용하는 언어가 조금 다를 뿐. 5일장은 그들에게 고향을 느끼게 해주는가 보다. 아니 그들 스스로가 5일장의 구성원이 되어 가는가 보다. 그래서 5일장은 늘 많은 이야기를 쏟아놓는다. 막걸리 한잔 마시고 나온 5일장은, 어느새 파장이 되어 캄캄하게 변해 있다.

여주 장에 가면 꼭 들려야 할 집이 있다. 5일만에 서는 여주 5일장은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5일장 에서는 두 번째로 큰 장이다. 여주는 5일과 10일이 장날이다. 5일장은 어떤 것보다도 먹거리가 많다는 것이 즐거움이다. 장을 돌다가 보면 하루 종일 먹어도 먹을 것이 남는다고 한다. 그만큼 5일장은 풍성한 곳이다.  

 

그래도 5일장은 생명력이 있어

 

대목이 되면 5일장은 온통 난리 법석이다. 아마도 제수 준비를 하느라 나온 사람들이다. 5일장은 아무래도 대형 장  보다도 30% 정도 싼 가격에 물건을 살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 같다. 여주장은 서울 등 각처에서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도, 그만큼 많은 물건과 좋은 것을 싸게 살 수 있기 때문인 듯하다. 여주장에 나갈 때마다 뵙는 노점상 할머니는 오늘도 자리를 지키고 계시다.

 

매번 장에 나갈 때마다 뵙는 할머니다. 오늘도 빠지지 않고 장에 나오셨다. 이것저것 저렇게 챙겨서 나오시려면 힘도 드셨을 텐데. 사람들은 그래도 평소에 30% 정도의 장꾼들이 나온 5일장을 찾는다. 먼 길을 걸어서 나오셨다는 한 분은 '그래도 5일장이라 이렇게 장이 서지'라고 하신다. 끈질긴 5일장의 생명력이다. 비가 오고 날이 아무리 추워도, 5일장은 거르는 법이 없단다.


 

전 한 장에 1,000원이다.

 

2,000원의 행복, 빈대떡 한 장에 막걸리 한잔

 

5일장을 찾으면 가끔 들르는 집이 있다. 빈대떡도 있고, 돼지껍데기 볶음도 있다. 내가 이 집을 찾는 이유는 2,000원만 가지면 5일장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파전이나 메밀전 한 장에 단돈 1000원, 그리고 막걸리 한 잔에 1,000원이다. 2,000원만 가지면 허기도 면할 수 있고, 장 분위기를 혼자 다 느낄 수가 있다. 이렇게 싸게 장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5일장이다.

 

"많이 파셨어요?"

"손님이 없어서 팔지도 못했어."

"그런데 빈대떡 한 장에 1000원 받고, 막걸리 한잔에 1000원 받아도 남는 것이 있나요"

"남기는 하겠지. 그런 것은 계산 안 해보았어."

"그렇게 싸게 파시는 이유가 있으세요?"

"어르신들 때문이지. 요즈음은 장에 나와도 재미가 없다고들 하시거든. 이렇게 빈대떡 한 장에 막걸리 한잔이면 속이 든든하시다는데. 그 어르신들 때문에 이것은 빠트릴 수가 없어. 이게 다 정이지."

 


 양은 대접에 가득 떠 막걸리가 한 잔에 1,000원이다.

 

가족들과 함께 장에서 식당을 하시는 이종진옹(73세). 연세가 적지 않으신 분이 꼭 '어르신들'이라고 하신다. 평소에는 식당을 하시지만, 장날이 되면 식당 앞에 난전을 펴시고, 천 원짜리 빈대떡과 천 원짜리 막걸리를 파신다. 2000원의 행복을 파시는 셈이다. 늘 해오시던 것이라 오늘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혹 한 분이라도 장에 나오셨다면 막걸리 한잔 드시러 오셨는데, 드실 수가 없으면 서운하실까봐 오늘도 난장을 펴셨단다.

 

5일장의 훈훈한 인정이요, 끈질긴 생명력이다. 5일장 안에는 오늘따라 장사치들의 고함소리가 더욱 크게 들린다. '하나라도 팔고 들어가야지'라는 생선가게 아저씨의 외침소리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