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은 그 꽃이 피는 시기에 따라 추백(秋栢), 동백(冬栢), 춘백(春栢) 등으로 구분이 된다. 난 개인적으로는 추백이나 동백보다 봄철에 꽃을 피우는 춘백이 좋다. 겨우내 꽃을 피우고도 모자라 5월까지도 꽃을 피우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많은 나무가 함께 뒤엉켜 있는 모습을 보면, 그 꽃에서 민초들의 어우러진 삶을 연상할 수 있어서 더욱 좋다.

내가 서천군 서면 마량리 산 14번지 일대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169호인 ‘마량리 동백나무 숲’을 좋아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우선은 아름답게 꽃을 피우는 동백 숲도 있지만, 당집과 동백정, 그리고 서해바다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많은 볼거리가 한꺼번에 모여 있는 곳은 찾아보기가 쉽지가 않다.


5월을 아름답게 꾸미는 마량리 동백

지난 5월 4일 서천군 마량리 동백나무숲을 찾았다. 이곳은 80주가 넘는 동백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100주도 채 안 되는 동백나무 군락이지만, 주변을 덮고 있는 모습을 보면 장관이 따로 없다. 이곳의 나무들은 강한 해풍으로 인해 키는 그리 크지 않다. 하지만 옆으로 퍼져나간 나뭇가지들은 오히려 무성한 숲을 이루며 아름다운 모습으로 자라나고 있다.

요즈음은 작은 나무들을 키워 더 넓은 지역에 동백 숲이 조성이 되고 있어 그도 볼만하다. 이곳에 동백나무를 처음 심은 것은 약 500여 년 전이라고 한다. 전설에는 마량리에 주둔하던 수군첨사가 꿈에 바닷가에 있는 꽃 뭉치를 많이 증식시키면, 마을에 항상 웃음꽃이 가시지를 않을 것이란 계시를 받았다는 것이다.



수군첨사는 진감인가 하여 바닷가에 나가보니, 정말로 꽃이 있었단다. 그것을 증식시킨 것이 바로 현재의 마량리 동백나무숲이라는 것이다. 동백나무숲 옆으로는 해송이 자라고 있는데, 이 두 숲이 방풍림 역할을 하고 있다.

서해를 내려다보는 동백정의 정취

사람들은 동백나무가지가 터널을 이루고 있는 계단을 오르며,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연신 웃음소리가 그치지를 않는다. 아마도 500여 년 전 이곳에 동백을 심은 수군첨사의 꿈대로, 이곳을 찾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이 가시지를 않기 때문인가 보다. 동백꽃이 땅에 떨어져 그림처럼 아름답다. 떨어져 내린 꽃도 이렇게 아름다운 줄은 예전에 미처 몰랐다.



바닷가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오르면 누각으로 된 동백정이 있다. 지난해인가 이곳을 찾았을 때는 보수공사 중이라 미쳐 정자에는 오르지를 못했다. 정자에 올라 서해를 내려다본다. 5월의 시원한 해풍에 몸을 맡긴 채, 한 없이 이곳에 머무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마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이 절경에 세월이 가는 것을 모르고 머물지 않았을까?

연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

나이 지긋한 연인들도 이곳을 오면 젊은이가 되나보다. 젊은 연인들보다 오히려 나이가 든 부부들이 더 많이 찾는 듯하다. 아마도 동백나무숲과 동백정의 정취 때문은 아닐는지. 동백나무숲만으로도 족하거늘, 동백정이 그 풍취를 더하고 있다.



멀리 작은 배 하나가 지나간다. 그런 모습을 보고도 글 한자 남길 수 없는 마음이 안타깝다. 정자에서 내려 동백나무숲 안을 들여다본다. 가지가 이리저리 서로 맞물리며 자라고 있다. 그저 이곳을 오면 민초들의 얼크러진 삶이 연상되는 것도, 이렇게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가지 때문이다.

늘 찾아오는 곳이지만, 늘 새로움을 느낄 수 있는 곳. 마량이 동백나무숲은 주변 절경과 어우러져 늘 미소를 머금게 한다. 아마도 500년 전의 이 전설은 앞으로도 영원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힘들고 지쳤을 때 이렇게 찾아와 새 힘을 얻을 수 있도록. 뒤돌아 오는 길에 누군가 동백꽃 세 송이를 울타리에 올려놓았다. 그것을 바라다보며 괜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는다. ‘저 것만 보고도 글 하나는 쓸 수 있다’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하면서.



섬진강이 아래로 굽이쳐 흐르고 있고, 강 건너편에는 전라북도인 남원시 대강면 방산리가 된다. 뛰어난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함허정은, 전남 곡성군 입면 제월리 1016번지에 소재한다. 현재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60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2월 26일에 들려 본 함허정은 여기저기 보수를 한 흔적이 보인다.

정자 위에 오르니 시원한 섬진강의 바람이 땀을 식혀준다. 2월 말이라고는 하지만, 오랜만에 날이 푸근했다. 바삐 몰아 친 답사 길이 땀이 배어나게 만들었다. 이미 시간이 꽤 되어서 오늘의 마지막 답사장소로 택한 곳이다. 함허정은 조선조 중종 38년인 1543년에 심광형이 지었다고 하니, 벌써 500년 가까이 섬진강 가에 자리를 잡고 있는 셈이다.

전남 곡성군 입면 제월리 섬진강 가에 자리하고 있는 함허정. 전남 유형문화재 제160호로 지은지가 500년 가까이 되었다.

섬진강을 가슴으로 느끼다

심광형은 조선 중기에 광양과 곡성 등 여러 곳에서 훈도를 지낸 바 있는 당대의 문사로 이름을 떨쳤다. 이곳에 함허정을 지은 것은, 지역의 유림들과 풍류를 즐기기 위해서란다. 그래서인가 이 정자를 일명 ‘호연정’이라고도 불렀다는데, 아마도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뜻하는 것인가 보다.

함허정은 심광형의 증손자인 심민각이, 오래된 정자를 옛 터 아래쪽으로 옮겨 다시 지었다. 그리고 5대손인 심세익이 고쳤으며, 현재의 함허정은 1980년에 수리를 했다고 한다. 이번 답사에서도 함허정은 여기저기 손을 본 흔적이 있다. 팔작지붕인 함허정은 정면 네 칸에 측면 두 칸이다. 마루 한 칸을 3면을 트고 두 칸 반에 방을 드렸다. 현재 함허정을 오르는 계단 위에 놓인 일각문 앞으로는, 한단을 높인 높임 쪽마루를 놓았다.




멀리 무등산이 그림처럼 펼쳐 보인다. 그리고 정자 주변에는 고목이 된 나무들이 병풍처럼 둘러치고 있다. 이곳에서 시원한 섬진강의 바람을 맞으며, 논객들과 세상을 논하고 시를 읊었을 것이다. 섬진강 흐르는 물에 마음껏 여유도 부려보았을 정자 함허정. 그곳에 서면 섬진강을 느낄 수가 있다.

수많은 편액들이 심광형의 됨됨이를 알게 해

안으로 들어가 정자를 한 바퀴 돌아본다. 한 단의 기단을 놓고 그 위에 정자를 지었다. 정자의 기둥은 원형기둥으로 세웠는데, 바르게 다듬지를 않았다. 약간 굽은 것도 그대로 기둥을 세워 인위적이지가 않다. 거기다가 섬진강 쪽으로 세운 기둥들은 안쪽의 기둥들보다 더 많이 갈라져 있다. 아마도 비바람에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신을 벗고 새로 보수를 한 마루 위에 오른다. 누마루 바닥의 찬 기운이 발바닥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나간다. 여기저기 사진을 찍다가 위를 올려다보니, 수많은 편액들이 걸려 있다. 이 많은 편액들이, 함허정을 세운 주인의 심성을 일러준다. 많은 사람들과 교류를 했다는 것을 뜻한다.

함허정의 슬픈 모습이 보여

함허정 앞으로 보이는 섬진강은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이다. 아름다운 섬진강의 강바닥을 고르고 한편으로는 돌로 축대를 쌓는 공사다. 이곳도 강을 정리하고 있는 것일까? 함허정을 돌아내려오다가 밭일을 하고 있는 분에게 물어보았다.



“저 공사는 무슨 공사예요?”
“모르겠어요. 저렇게 강을 골라 한편에 자전거 길을 만든다고 하네요.”
“섬진강 긴 곳 중에 하필이면 이곳에만 그런 공사를 하나 봐요?”
“작년에 이곳에 물난리가 났는데, 그것 때문인가 보네요.”
“물난리가 나다니요. 장마 때 그랬나요?”
“아뇨. 날짜도 안 잊어버리네요. 작년 8월 16일에 이곳에 물이 범람했어요. 차도까지 물이 넘쳐서 통행이 제한되었으니까요”
“홍수가 매년 그렇게 나요?”
“아닙니다. 작년에만 비가 많이 오는 바람에 물이 넘쳤는데, 그러고 나서 공사를 시작했어요. 저렇게 강폭을 좁혀놓으면 더 큰 물난리가 날텐데, 동네에서는 아무도 말 한마디를 안하고 있어요”

저렇게 강바닥을 고르고 축대를 쌓아버리면, 함허정은 무엇을 보게 될까? 물론 자전거 길을 내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 곳에서 여가를 즐길 수가 있다면 그도 새로운 풍속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연적으로 굽이치며 흐르던 섬진강을 저렇게 만들어 놓으면, 함허정에서 바라보며 시심을 일깨우던 지난 시간은 모두 사라져 버리지나 않을는지.


아마도 함허정에 올라 섬진강을 노래하던 수많은 시인묵객들은, 저런 모습을 반기지는 않을 것만 같다. 그보다 500년 섬진강을 노래하던 그 소리가, 이제 저 돌로 쌓은 인위적인 축대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그 모습을 보면서 이제는 함허정의 강노래도 끝났다는 생각이 든다.

500년이면 강산이 50번이나 변하는 시간이다. 이 긴 시간 동안 한 자리에 뿌리를 박고 사는 나무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하다. 그 나무가 꼭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되지 않았다고 해도, 소중한 천연자원임에는 강조할 필요가 없다. 강원도 원주시 호저면 용곡리 407-1에 소재한 수령 520년의 느티나무. 보기에는 그리 오래된 나무는 아닌 듯하다. 그러나 나무를 한 바퀴 돌아보면, 괴이한 모습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이 나무는 보호수로 지정이 되어있으며, 고유번호는 강원 원주 10호이다. 1984년 6월 13일에 보호수로 지정이 되었다. 나무의 높이는 20m에 이르고, 둘레는 6,2m나 되는 거목이다. 나무 밑동에서 윗부분의 줄기에는 여기저기 외과수술을 한 흔적이 보인다. 나무는 일반적인 느티나무들이 가지를 위로 뻗는데 비해, 마치 춤을 추듯 둥긇게 뻗기도 해 기괴한 느낌마져 준다.



호저면 용운사지 곁에 서식해

호저면은 칠봉과 용운사지가 있어 유명하다. 여름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흐르는 물가를 찾아 모여든다. 칠봉은 섬강상류에 위치하고 있으며, 일곱개의 봉우리가 나란히 물가에 서 있어 절경이다. 이 칠봉을 지나 들어가면 용곡리가 나오며, 이곳은 예전에 용운사지가 있던 곳이다. 현재 이곳에는 탑과 석불이 나란히 있는데, 이 느티나무는 그 옆에 서식하고 있다.

느티나무의 옆으로는 맑은 하천이 흐르고 있어, 늘 풍부한 수분이 나무를 자라게 하고 있다. 느티나무는 그 모습에서 알 수 있듯, 줄기에 가득한 이끼들을 보아도 깊은 세월을 느낄 수가 있다. 나무를 올려다보면서 나도 몰래 침을 삼킨다. 그것은 이 나무가 살아온 세월이 인간들이 상상할 수 없는 오랜 세월이기 때문이다. 이 나무가 처음으로 싹을 티었을 당시는 조선조 성종 때였으니, 그 세월이 짐작조차 가질 않는다.




500년 성상을 살아온 나무답게 나무는 기이한 모습으로 서 있다.

나무를 보며 기운을 얻다

나무를 보면 무엇인가 기운을 얻는다고 한다. 무슨 기운을 얻을 수 있는 것일까? 그 오랜 세월을 한 자리에 서서 굳건히 자리를 지킨 용곡리 느티나무. 전국을 다니면서 보면 수 많은 보호수들이 있다. 이 나무도 그 중 한 나무일뿐이다. 그러나 용곡리 느티나무는 조금은 특이해보인다. 밑동서부터 여기저기 혹같은 것이 돌촐이 되어있다. 아마 오랜 역사의 흔적인 것만 같다.

줄기에는 푸른 이끼가 덮고있어, 이 나무가 얼만 오래되었는가를 가늠할 수 있다. 그 뿐이 아니다. 혹은 또 다른 혹을 만들어내며, 두껍잔등 같은 표피를 보호하는 듯하다. 자연적으로 스스로를 치유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보면 볼 수록 그 경이로움에 감탄을 한다. 수많은 천연기념물을 보아왔지만, 조금도 부족하지가 않다. 그래서 이 느티나무에게서 받는 기운이 남다르다.





어디를 가나 볼 수 있는 느티나무.  그러나 그 나무마다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호저면 용곡리의 느티나무는 스스로의 상처를 치유하는 힘을 보이면서, 500년이 넘는 오랜 시간을 그렇게 서 있다. 이러한 나무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자연의 위대함을 배운다.

자연은 스스로를 정화하고, 치유하는 힘을 갖고 있다. 하기에 오랜 세월을 한 자리에 서서 나름의 역사를 만들어 간다. 이 느티나무는 그 오랜 성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우리에게 주었다. 그것도 모자라 앞으로도 또 얼마나 오랜시간을 우리와 함께할 지 모른다. 그것이 바로 나무에게서 우리가 받아야 할 기운이란 생각이다.


여주장은 5, 10일 장이다. 아침 일찍 김장장을 취재하기 위해 여주장으로 향했다. 500여 년 전통을 자랑하는 여주장은 경기도 지역에서는 성남 모란장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장으로 알려져 있다. 1960년대만 해도 여주에는 11곳의 5일장이 있었으나, 5일장이 급격히 쇠퇴하면서 현재는 여주장을 비롯 가남장과 대신장만 그 명맥을 유지하는 실정이다.

 

예전과 같지 않은 5일장에는 한숨만 나돌아

 

김장장이라고 하지만 예전 같지가 않다. 예전 장이 들어섰던 골목에는 장사꾼의 노점 대신 차들이 주차가 되어 있다. 한편에서 깨며 조, 찹쌀, 기름 등을 파는 아주머니 한 분은 흥정을 하다가 말고 한숨을 내쉰다.

 

"이것들 다 집에서 농사 지으신 거예요?"

"아니지. 마을에서 사람들이 팔아달라는 것도 있고, 내가 농사를 지은 것도 있고."

"장사하신 지가 얼마나 되셨어요?"

"한 30년이 넘었네. 벌써 그렇게 지나버렸어."

"예전 같지가 않은가 봐요."

"턱도 없어. 그래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하루에 10만원은 쉽게 벌어갖고 들어갔어. 그런데 요즈음은 일당 벌기도 힘들어."

"일당을 얼마나 치세요?"

"3만원."

 

참 간단한 물음과 대답이다. 하지만 그 안에 예전과는 다른 장 분위기가 담겨 있다. 돈을 벌기 위해 눈속임은 하지 않는다는 아주머니는, 연신 지나는 사람들에게 물건을 사라고 소리를 지르지만 정작 물건을 흥정하는 사람들은 많지가 않다.

 

  
▲ 깨, 팥, 기장, 보리 등 각종 곡물류 하루 종일 팔아도 일당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지나는 사람들을 불러보지만 흥정이 되지 않는다

  
▲ 기름 술병에 담은 기름. 들기름은 직접 짠 것이고, 콩기름은 수입 콩을 썼다고 하신다. 양심을 속이지는 않는다고 강조를 하시면서

 

그놈의 대형마트 때문에

 

장을 돌다가 김장거리를 파는 장사꾼에게 물어보았다. 어째 김장장인데도 물건이 많이 나오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팔리지 않는데 잔뜩 쌓아놓기만 하면 뭘 하겠느냐는 대답이다.

 

"예전 같지가 않네요. 김장장이라는데."

"말도 말아요. 요즈음 사람들 김장 잘 안하잖아요. 여기저기서 김치를 만들어 판매를 하지를 않나. 이젠 김장도 한 겨울 양식이 아닌가 봐요."

"그래도 김치들은 먹어야 되지 않나요?"

"요새는 대형마트인가 무엇인가에서 배추 몇 포기만 사도 다 배달을 해주는데, 굳이 장에 나오겠어요. 앞으로 이 장사도 집어치워야 할 것 같아요."

 

답답한 이야기를 듣다 보니 장 풍속도가 변해감을 알 만하다. 그 오랜 세월 서민들 먹을거리를 해결해 주던 5일장이 그나마 버티다 이제는 대형할인점에 밀려 더 빠르게 쇠퇴의 길을 걷고 있다.

 

  
▲ 김장장 예년에 비해 물량이 많이 줄었다

  
▲ 마늘 마늘을 팔고 있지만 정작 판매는 부진하다고 한다. 이젠 사람들이 집에서 김치를 담그는 것조차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란다

  
▲ 썰렁한 장거리 예전 장이 들어서 발디딜 틈이 없던 장거리는 주차장이 되어버렸다

 

마늘을 까는 손에서 어머니를 느끼다

 

철물점 앞을 지나는데 시끄럽다. 물건을 샀는데 중국 것이라며 바꾸어 달라고 할아버지 한분이 역정을 내신다. 요즘 중국 것 아닌 게 어딨냐는 말에 씁쓰레하다. 주변을 둘러본다. 정말 중국제 철물, 중국제 그릇, 중국제 옷, 중국제 신이다. 중국 어느 시장을 방불케 한다. 세상이 점점 우리 것을 잃어버린다는 생각에 두려움마저 느낀다.

 

할머니 한 분이 마늘을 까고 계시다. 남들은 장갑이라도 끼는데, 그나마 맨손으로 마늘을 까신다. 그 손을 보면서 갑자기 코끝이 찡해온다. 투박하기만한 손. 굳은 살이 박인 마디. 까맣게 때가 낀 손톱. 어릴 적 찬물에 손이 시린지 호호 불어가며 김장을 담그시던 어머니가 그 손에 계셨다. 아무리 둘러봐도 내가 살만한 물건은 없다.

 

"많이 파셨어요?"

"아직 개시도 못했어."

"언제 다 팔고 가신데."

"그러게 말야. 오후에는 비가 온다고 그러는데. 하나라도 팔아야지."

 

그 하나라도 말에 가슴이 답답하다. 연세가 꽤 드신 것 같은데, 새벽 일찍 장에 나오셔서 아직도 하나도 팔지 못하셨다니.

 

 

"좀 일찍 나오셔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셨으면 많이 파셨을 텐데."

"아무 자리나 차지할 수가 없어. 이 자리도 다 임자가 있는 것이니까."

 

눈물이 날 것만 같다. 집에서 만든 두부라고 하기에, 두부 두 모를 사들고 돌아선다. 속으로는 그저 '오늘 다 팔고 가세요'라고 생각하지만 밖으로는 말도 꺼내지 못한다. 어머니 생각이 나서다. 괜히 눈물이라도 왈칵 쏟아질 것만 같다. 정이 넘치던 5일장은 그렇게 어머니 모습만 느끼게 만들고 말았다. (출처 : 오마이뉴스 / 2009,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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