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학정(天鶴亭), 동해안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다소곳이 숨을 죽이고 있는 작은 정자 하나. 밑으로는 동해안의 여울 파도가 암반을 두드리는 소리가 정겹다. 이 작은 정자를 벌써 너 댓 번은 찾아간 듯하다. 왜 그리 이곳을 찾을 때마다 느끼는 감흥은 달라지는 것인지. 아마도 그 계절이 다르기 때문인가 보다.

 

속초에서 7번 국도를 따라 고성으로 향하다가 보면, 길가에 천학정이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교암리 마을에서 동해안 쪽으로 낮은 산이 하나 서 있다. 그리고 계단을 잠시 오르면 거기 절벽 위에 납작하게 숨죽이고 있는 천학정을 만나게 된다. 이름 그대로 이 천학정은 하늘과 더 가까이 가려고 뛰어 오를 듯 절벽 위에 자리한다.

 

 

500년 역사, 숨죽이고 있는 정자

 

천학정은 1520년인 중종 15년에 군수 최청이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 기록으로 보면 이미 지금 만나는 정자 이전에, 이 자리에 천학정이 있었다는 이야기니 500년이 넘었다는 것이다. 고성군 토성면 교암리 바닷가에 서 있는 고성팔경 중 한 곳인 천학정은 기암괴석의 해안 절벽에 정면 2, 측면 2칸의 겹처마 팔각지붕의 단층 구조로 지어졌다.

 

천학정 북쪽으로는 능파대(凌波臺)가 자리한다. 천학정과 아우러지는 능파대. 아마도 파도를 굽어보고 있으니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능파대 위에 올라 천학정을 바라다본다. 어느 곳에서 바라다보아도 아름다운 정자이긴 하지만, 능파대에서 바라보는 천학정은 그야말로 선계에 있는 정자를 보는 듯하다.

 

 

동해안 일출의 명소 중 한 곳인 천학정. 전학정은 그동안 전해지던 역사가 깊은 옛 정자는 어떤 이유로 사라진 것일까? 다만 1884년 소실되었던 것을, 1928년 당시 면장의 발기로 1931년 교암리에 사는 마을 유지 세 사람이 재건을 하였다고 한다. 아마도 옛 기억을 더듬어 지어냈겠지만, 그래도 옛 모습을 보았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자연과 하나가 된 정자 천학정

 

22, 통일전망대를 거쳐 속초로 길을 잡아 내려가다가, 문득 천학정에 오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한 겨울의 찬바람이 부는 날, 천학정은 또 어떤 모습으로 나그네를 맞이할 것이지? 교암리 마을 안 천학정을 오르는 길목주변에는 얼음이 가득 얼었다. 미끄러지는 길을 피해 바닷가로 난 산책로를 오른다. 천학정으로 오르는 좌측으로는 능파대가 높다라니 솟아있다.

 

 

천학정에 올라 동해를 굽어본다. 그저 절로 글 한 수 지을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렇게 절경에 자리하고 있으면서도, 굳이 자랑을 하지 않는 정자라서 더욱 좋다. 멀리 여울파도가 벼랑을 항해 치닫는다. 금새 벼랑에 부딪친 파도는 하얀 물보라를 남기고 사라져버린다. 이런 아름다움이 있어 이곳에 천학정을 마련했나보다.

 

천학정은 자연과 하나가 되어 서 있다. 정자가 곧 자연이요, 자연이 곧 정자가 아닐런가? 그 속에 때에 절은 속인(俗人) 하나 앉아있기가 미안하다. 밖으로 나와 능파대로 오른다. 동행을 한 스님이 정자에 앉아 경치에 취한다. 그 또한 자연이다. 그렇게 천학정은 동해를 바라보며, 스스로 동해와 어우러진다.

 

 

전국에 산재한 많은 정자들이 나름대로 자연과 동화되어서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주인의 마음을 닮는다고 한다. 처음 이 천학정을 지은이도 자연과 닮아 살았을 것이다. 천학정이라는 이름만 보아도 알 수가 있다. 아마도 신선이 되어 한 마리 학의 등에 올라 파도치는 동해 위로 훨훨 날고 싶었을 것이다. 2월의 찬바람이 이는 날 찾아간 천학정. 동해안 작은 정자는 그렇게 자연을 닮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돈황 막고굴의 문화재는 일체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막고굴은 모두 철문으로 굳게 닫혀있으며. 안내자의 인도에 따라서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막고굴에는 비천상의 그림들이 있는데, 우리나라의 범종에 새겨진 그림들과 흡사한 모습이다.

 

오대산 동종과 흡사한 비천상

 

오대산 상원사에 있는 국보 제36호 동종은 신라 성덕왕 24년(725)에 만들어졌다. 경주 성덕대왕신종(국보 제29호)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완형의 통일신라시대 범종 3구 중 하나이며, 크기는 높이 167cm, 입지름 91cm이다.

 

 

종 몸체의 아래 위에 있는 넓은 띠와 사각형의 유곽은 구슬 장식으로 테두리를 하고 그 안쪽에 덩굴을 새긴 다음 드문드문 1∼4구의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상(奏樂像)을 두었다. 네 곳의 유곽 안에는 연꽃 모양의 유두를 9개씩 두었다. 그 밑으로 마주보는 2곳에 구름 위에서 무릎을 꿇고 하늘을 날며 악기를 연주하는 비천상(飛天像)을 새겼다.

 

입구에서 막고굴의 비천인상을 팔아

 

돈황 막고굴에서 입장권을 끊어 안으로 들어가다가 보면, 돈황의 문을 들어가기 전에 상점이 한 동이 있다. 그곳에서는 돈황 막고굴에 그려진 비천인상의 모습을 그려서 팔기도 한다. 그런데 그 비천인상의 그림이 우리에게도 전혀 낯설지가 않다. 아마 우리나라 절 어느 곳을 가도 볼 수 있는, 비천상을 보아왔기 때문인가 보다.

 

 

돈황은 불교의 성지로, 중국 역대 불교의 집산지다. 그리고 불교의 신앙 속에 나타나는 여러 세계를 조각과 조소, 회화 등을 종합적으로 시각화한 박물관이기도 하다. 2,500년이라는 오랜 시간을 눈으로 불교를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막고굴의 불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불교도나 승려뿐이 아니었다.

 

막고굴의 불사에는 조각가, 화사, 역경사, 석공, 도공, 칠공, 목공까지 수많은 그 분야의 거장이라는 사람들이 오랜 시간을 두고 이루어낸 작품이다. 오랜 역사를 통해서 조성된 돈황 막고굴은 한나라 서하, 원, 명, 청대에 이르기까지 이것을 보존해 왔다는데도 그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오아시스 안에 숨겨진 막고굴

 

돈황 막고굴은 돈황 시가지에서 25km 떨어진 사막 속의 작은 오아시스에 숨겨져 있다. 492개소의 석굴로 되어있으며, 4세기경부터 14세기경까지 1,000년 동안에 하나 둘 씩 뚫은 것이다. 기록에는 1,000여개의 굴이 있다고 하나, 현재는 492개소의 굴이 정리되어 보존되고 있다. 현재 굴속에 소상되어 있는 소상수는 3천여 점이며, 전면을 세로로 연결하면 그 길이가 45km에 달한다고 한다.

 

막고굴은 각 시대별로 특색이 있다. 막고굴은 사방 벽면에 벽화로 메워져 있으며, 대체로 서역취향적이다. 인도의 여러 형식을 갖고 있으며, 벽화속의 불상이나 비천상들이 많은 것도 특색이다. 이렇게 세계 최대의 불교의 보고라는 막고굴은 엄격하게 보호가 되고 있어, 그 외형만 담을 수밖에 없음이 안타깝다.

청천마을은 단일 성씨인 달성 배씨들의 집성촌이다. 100여 호가 살고 있다는 청천마을은 40대를 이어졌다. 마을 앞을 줄지어 선 고목들이 서 있는 청천마을. 이곳에 왜 이토록 오래 묵은 나무들이 줄을 지어 서 있는 것일까?

 

처음으로 이곳에 터를 잡은 배희는 이곳에서 자손들을 번창시키고자 했는데, 서해의 해풍이 불어와 농사에 피해를 주었다. 먹고 살아야하는데 해풍으로 인해 집과 농사가 피해를 입었으니, 자손들이 번창하기도 어려웠던 것이다. 별다른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지나가던 나그네가 마을 앞에 팽나무와 개서어나무를 심으면 될 것이라고 했단다.

 


무안읍으로 들어가다가 보면 우측에 커다란 고목들이 줄지어 서 있는 곳이 있다. 무안군 청계면 청천리 청천마을이다. 이 마을은 마을이 생긴 지가 550년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조 세조 2년인 1452년, 칠곡에 살던 배회가 이곳으로 이주해 터를 잡은 마을이라고 한다. 청천마을은 산세가 수려하고 물이 맑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입구에 서 있는 마을 유래비

 

팽나무는 느릅나무과에 속하는 낙엽교목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남쪽 지방에서 많이 자란다. 팽나무는 생육이 좋고 25 ~ 30m정도까지 자라나며 병충해에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팽나무를 심어 방풍림을 조성했던 것이 주효했는지, 그 뒤로 농사가 풍년이 들고 자손들이 번성했다는 것이다. 현재 청천마을에는 팽나무 54그루, 느티나무 60여 그루가 천연기념물 제82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팽나무는 생육이 좋고 25 ~ 30m정도까지 자라나며 병충해에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을에 만난 팽나무들이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팽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되어있는 곳이 상당 수 있다. 대개 남쪽에서 자라는 식물이기 때문에, 천연기념물의 분포지 역시 남쪽에 치우친다. 전라남도 함평군 대동면 향교리 팽나무는 천연기념물 제108호로 지정이 되었으며, 제주도 남제주군 표선면 성읍리 팽나무(제161호),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 팽나무(제309호), 전라남도 무안군 현경면 가입리 팽나무(제310호),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금남리의 황목근(제400호) 등이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된 팽나무들이다.

 

흔히 동구나무로도 많이 불리는 팽나무는 마을 앞에 정자목으로 많이 심는다. 팽나무는 바닷바람을 잘 버텨내기 때문에 방풍림을 조성할 때 많이 식재를 하기도 한다. 청천마을의 팽나무들이 줄을 지어 서있는 모습은 장관이다. 더욱 한 두 그루가 아닌, 50여 그루가 마을 앞을 일렬로 줄을 지어 서 있는 모습은, 어느 곳에서도 보기 힘든 광경이다. 철 늦은 가을에 만난 나무들은 잎을 떨어뜨리고 있었지만, 남은 것만으로도 장관이다. 그 나무 밑에서 아이들이 공을 차며 놀이를 한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전설이 생각이 난다. 자손이 번성했다는.

 


  
현재 청천마을에는 팽나무 54그루, 느티나무 60여 그루가 천연기념물 제82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청천마을의 팽나무들은 고유번호를 갖고 있다. 나무마다 걸린 번호표

 

500년 이상을 방풍림으로 마을을 지켜 준 청천마을의 팽나무군락. 나무마다 번호표를 달고 있다. 이미 고목이 되어 명을 다한 것들도 보인다. 외과수술을 한 나무들이 보여 이 팽나무 군락이 오래되었음을 알려준다. 높이 30여 m, 둘레가 평균 3m나 되는 팽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 마을. 청천마을에는 또 다른 전설 하나쯤은 있을만하다. 내년 여름 팽나무가 무성하게 잎을 달았을 때, 다시 한 번 찾아보아야겠다.

논산시 상월면 주곡리는 동주막리, 마근동, 술골, 용적골 등의 자연마을이 모여 이루어진 곳이다. 옛 주곡리 앞으로 큰 길이 나 있었는데, 이 길가에는 술집이 많이 모여 있어서 '주막거리' 또는 '주곡(酒谷)'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 이름을 따서 현재의 주곡리가 생겼다.

 

500년 역사의 주곡리 장승

 

주곡리에는 큰 장승들이 서있다. 마을 입구 좌측에는 '천하대장군'이 우측 건물 담벼락에 가까이에는 '지하여장군'이 있다. 주곡리 장승의 특징은 늘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솟대와 함께 집단으로 모여 있다는 점이다. 매년 새로 장승을 깎아 솟대와 함께 새로 세우는데, 집단으로 뭉쳐있어 넓은 면적을 차지하지 않는다.

 

 

 

이 주곡리의 장승이 처음 세워진 것은 연산군 4년인 1498년이다. 청주 양씨 9세손인 첨정공 춘건이 낙향을 하여 이 마을에 정착을 한 후, 마을 주민들의 화합을 목적으로 마을 입구에 장승을 세웠다고 한다. 그 후 매년 정월 14일 밤에 장승제를 지내고 있으니, 500년이 지난 전통을 지닌 마을이다.

 

마을주민을 살린 장승

 

이 주곡리의 장승은 임진왜란 때 마을주민들을 살렸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 때 야습을 획책한 왜병들이 주곡리에 들어섰는데, 마을입구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총을 쏘아댔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총을 쏘아도 물러서지를 않고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시간 총소리에 놀라 잠을 깬 주민들은 왜군의 침입을 알고 서둘러 피신하였다. 아무리 총을 쏘아도 물러서지도, 쓰러지지도 않는 사람들을 괴이하게 여긴 왜병들이 다가가 확인을 해보니, 사람이 아니라 장승이었다. 결국 장승을 마을의 수호신으로 삼아 지성으로 정성을 드린 마을주민들의 목숨을 장승들이 지켜낸 것이다.

 

 

 

선조 32년인 1599년 임진왜란이 끝나고 난 뒤 선조는 '마을을 지킨 장승을 수호신으로 삼으라'고 했다. 그 후 논산지역에서는 각 마을마다 입구에 장승을 세웠다고 한다. 현재 주곡리의 장승은 논산시 향토유적으로 지정이 되었다.   

 

'로표장승' 역할을 하는 주곡리 장승

 

길을 가는 행인들이 먹을 것을 해결하고 피곤한 몸을 쉬기도 했던 주막거리에서 유래된 주곡리. 마을 입구에 세워진 장승은 자연스레 길을 안내하는 로표장승의 역할을 했다. 주곡리의 장승은 남장군인 천하대장군과 여장승인 지하대장군으로 구분이 되어 있으며, 아래에는 동방 신도내 20리, 서방 논산 30리, 남방 연산 20리, 북방 공주 40리라 적혀 있다.

 

 

 

 

주곡리의 남장승은 사모를 쓰고, 여장승은 족두리를 섰다. 나무의 면을 깎아 얼굴을 조성했는데 눈과 코는 돌출을 시키고 주변을 깎아냈다. 솟대도 매년 새로 깎아 장승군에 함께 묶어세우는데, 끝에는 새를 한 마리 올린다.

 

5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주곡리 마을을 지켜 온 수호신인 장승. 장승이 서 있는 마을 입구에는 장승의 내력이 적힌 안내판을 세워 후손들에게 알리고 있다. 이 장승으로 인해 마을의 공동체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의 전통이 한낱 시시콜콜한 옛 풍습으로 치부 되어가고 있는 요즘, 바람직한 마을의 모습을 본 듯하다.

전북 임실군 오수면 둔덕리 456-1에는,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12호인 이웅재 고가가 자리하고 있다. ‘아이패드2’의 성능을 알아보기 위해 6월 7일 오후 6시가 다 되어서 찾아간 집이다. 이웅재 고가는 현 소유자의 16대 선조이며 마을의 전주이씨 향조이기도 한, 춘성전 이담손(1490년생)이 지은 것이라고 전한다.


처음으로 이 집을 지은 것은 연산군 6년인 1500년경에 지었으니, 벌써 500년이란 오랜 세월이 지난 고택이다. 그 뒤 여러 번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른 것이다. 장방형으로 구성된 대지는 북에서 남으로 비탈져 있어서, 군데군데에 축대를 동남향으로 쌓고 그 기단 위에 집을 앉혔다.


대문과 효자정려. 이 사진은 모두 '아이패드2'로 촬영을 하였다.

대문 위에 걸린 효자 정문

밖에서 보기에도 집은 넓지 않은 터에 오밀조밀하게 건물들이 지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솟을삼문으로 구성된 대문은 이 집의 품위를 나타내는 듯하다. 조선시대 지방 사대부가의 일면을 알아 볼 수 있는 이웅재 고가는, 대문 위에 효자현판이 걸려있다. 고종 7년인 1870년에 이문주에게 내려진 이 현판에는, 「有明朝 孝子贈 通政大夫 吏曹參議 李文胄之閭」라고 적혀있다.

문간채도 이 무렵에 중수된 것으로 보인다. 대문채는 5칸 규모이며 가운데에 솟을대문을 두었다. 대문 안을 들어서니 개 한 마리가 요란하게 짖어댄다. 집안은 공사 중인지 여기저기 자재들이 널려있고, 시끄러운 기계음이 들린다. 대문을 들어서면 5단의 장대석 축대 위에 올린 사랑채가 보인다.




 

안 행랑채 동편에 일자형으로 지어진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의 규모이며, 상량문에 의하면 1864년에 세워졌다. 기록에는 고종 1년인 1864년에 기둥에 보를 얹고, 그 위에 마룻대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사사랑채는 동편으로 두 칸 마루를 놓고, 서쪽으로는 두 칸 방을 드렸다.

방의 앞으로는 툇마루를 빼 난간을 둘렀으며, 기둥에는 주련이 걸려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쓰임새가 있게 지어진 사랑채이다. 사랑채는 안채와 안담으로 연결이 되어있으며, 뒤편으로는 안채를 드나들 수 있는 일각문을 내어 놓았다. 그 뒤편으로는 높게 축대를 쌓고 지은 사당이 있다. 사랑채의 서쪽으로는 높임마루를 놓아 책방을 꾸민 안 행랑채가 자리한다.



양편에 날개를 단 안채 공루가 특이 해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으로 동서 양측에 날개를 달아 ㄷ자형을 이루고 있다. 안채는 기단을 높이고 그 위에 앉혔으며, 날개채는 단을 낮게 놓았다. 하기에 날개채의 지붕은 안채의 지붕보다 낮게 조성이 되었다. 안채는 큰방의 동측에 머리방 대신 도장을 설치하고, 도장 남측에 마루를 두고 이어서 방을 드렸다.

안채 대청을 바라보면서 우측날개에도 방을 따로 두고 있다. 상부는 외부를 판벽으로 두른 공루이고, 하부는 아궁이를 둔 공간을 배치하였다. 큰방의 서쪽에는 찬방을 두어 부엌과 연결되도록 하였다. 현재는 실내의 공간은 조금 바뀐 듯하다. 이러한 가옥의 배치나 구성은 딴 집에서는 찾아보기가 힘든 경우이다.




안채 전면에는 ㄷ자형의 안 행랑채가 날개를 벌려 안채를 감싸고 있다. 이는 방아실, 안변소, 안광, 책방 등으로 구성되었다. 다만 방아실과 안광이나 책방 등은 사이가 떨어져 있다. 이러한 건물의 배치는 풍향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안채로 불어드는 바람을 막지 않기 위함인가 보다. 방아실의 벽을 타고 바람이 안으로 불어들게 조성하였다.

넓지 않은 대지를 이용해 건물배치를 한 이웅재 고가. 나름대로 건물배치의 미학을 보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공사를 하느라 조금은 산란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독창적인 가옥의 배치를 보이고 있다. 공사가 마무리 되는 시기에, 제대로 된 답사를 다시 한 번 해야겠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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