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시 설악동 켄싱턴 호텔 길 건너편에 보면 장엄한 탑이 1기가 서 있다. 속초시내에서 신흥사를 올라가는 길 좌측에 서 있는 이 삼층석탑은, 보물 제443호인 향성사지 삼층석탑이다.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탑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이 탑은, 상륜부는 없어졌으나 그 모습이 웅장하고 잘 보존이 되어 있다.

 

8매의 돌로 구성된 지대석은 하단까지 지표에 노출되어 있고, 그 위에는 높직한 괴임대와 같이 4매의 장대석으로 결구된 기대를 마련하여 하층기단 면석을 받치고 있다. 하층기단면석은 대소 8매의 장방형석재로 이루어졌는데, 각 면마다 양우주와 중앙의 탱주가 돋을새김 되어 있다. 그 위의 갑석은 5매의 판석으로 덮였는데, 그 상면은 현저하게 경사를 이루었다.

 

자장이 창건한 향성사

 

신흥사사적에 의하면 향성사는 신라 고승 자장이, 진덕여왕 6년인 652년에 건립했다고 전해지는 신흥사의 전신이다. 지금은 신흥사가 뒤로 물러나 있지만, 이 삼층삭탑이 있는 자리로 보아 이곳까지 향성성의 가람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 같다. 처음으로 해체보수를 할 때, 3층 탑신석 중앙에서 사리구멍이 발견되었으나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전체 높이가 4, 33m에 이르는 장엄한 탑이지만, 전체적으로는 간결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설악을 뒤로하고 수 백 년은 족히 넘었을 노송을 곁에 둔 삼층석탑, 그동안 이곳을 몇 번이나 지나쳤는데도 보지 못했을까? 아마 그동안은 나와 인연이 없었나보다.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빛이 탑에 아른거리는데, 천년 그 자리에 서 있는 탑은 말없이 지나는 차들의 소음을 듣고 서 있다.

 

뒤편으로 흐르는 계곡의 물과, 그 너머에 있는 설악. 예전 같으면 그 탑의 자리에 서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불심이 일었을 것만 같다. 지난 시간 천년, 앞으로 또 수많은 시간을 자리를 지키고 있을 이 탑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간구를 한다. 다시는 이 많은 문화재들이 수난을 당하지 않았으면 하고.

 

 

이 향성사지 석탑을 처음으로 해체 보수할 때 3층 탑신석 중앙에서 사리공이 발견이 되었지만 내용물은 없었다고 한다. 전국에 산재한 수많은 석탑과 석불 안에 있던 내용물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문화재는 민족이 정신을 계승하는데 있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런 소중한 문화재를 우리는 그동안 너무 홀대해 왔다는 생각이다.

 

문화재보존 제대로 이루어져야

 

문화재를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는 것은 지금도 다를 바가 없다. 나라에서 국보나 보물 등으로 지정을 해서 보존을 하고 있거나, 사찰 경내에 있어 보존을 하는 문화재들은 그나마 나은편이다. 들이나 산 등에 산재한 문화재들은 아무래도 사람들의 손을 탈 수밖에 없다. 며칠전 뉴스에서 모 지방의 문화재지킴이들이 문화재를 도굴해 팔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결국 문화재를 도둑놈들에게 맡겨놓은 꼴이 되었으니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그 정도로 우리는 문화재 보존에 대해서 불감증을 앓고 있는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자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소중한 문화재. 향성사지 3층 석탑 앞에서 머리를 숙이는 것은, 나 자신도 그런 문화재 보존에 대해서 제 할 일을 다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개 절을 다니면서 보면 제일 먼저 일주문을 두고, 이어서 금강문 또는 사천왕문, 마지막이 불이문 등으로 나열을 한다. 불이문을 들어서면 금당(대웅전, 극락전, 미륵전 등)을 짓고, 금당 앞에 탑, 금당 뒤에 요사채, 강당 등이 있다. 이렇게 절의 배치를 하는 것을 가람배치라고 하는데, 가람이란 범어의 승가람마(Sangharama)를 말하는 것으로 이를 약하여 가람이라 한다.

 

승가란 중을, 람마란 원의 뜻하는 것으로, 가람은 본래 많은 승려들이 한 장소에서 불도를 수행하는 장소를 지칭하는 것이다. 하기에 이를 합해 중원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사찰의 대표적인 구성요소로는 문과 루, 종각, 법당, 회랑, 탑 등 다양한 축조물들이 있다.

 

가람의 배치는 어떻게 하나?

 

가람의 배치란 절의 건물 배치를 말한다. 이는 탑, 금당, 강당 등 사찰의 중심부를 형성하는 건물의 배치를 뜻하는 말로, 그 배치는 시대와 종파에 따라 다르다. 통일신라 때는 수많은 절이 있었다. 이 절들의 배치는 주로 일탑일금당식이나, 혹은 쌍탑일금당식의 가람 배치법을 하였다.

 

쌍탑일금당식은 일탑일금당식과 마찬가지로, 금당 앞에 동서로 불탑을 2기 세우는 배치법이다. 통일신라 8세기까지의 가람은 쌍탑일금당식으로 절이 산에 건립되었다. 통일신라 후기에는 절이 산 속으로 자리를 옮겨가면서 산지가람이 발달하여, 가람 배치가 자연의 지세에 따라 건물이 건립되었다. 그런 연유로 금당 앞에 쌍탑이 두거나, 일탑일금당식, 혹은 경우에 따라 탑이 없는 무탑 절도 생겨났다.

 

많은 탑을 조성한 성주사지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2에 소재한 사적 제307호인 성주사지. 보령 성주산 남쪽 기슭에 있는 9산선문의 하나인 성주사가 있던 자리이다. 성주사는 백제 법왕 때 처음 지어졌는데 당시에는 오합사(烏合寺)라고 부르다가, 신라 문성왕 때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화상이 절을 크게 중창하면서 성주사라고 하였다. 당시의 절들은 산골에 자리 잡았지만, 통일신라시대의 다른 절과는 달리 평지에 자리하는 가람의 형식을 택하였다.

 

절터에는 남에서부터 차례로 중문처, 충남 유형문화재 제33호인 석등, 보물 제19호인 5층석탑, 금당건물과 그 뒤에 동서로 나란히 서있는 충남 유형문화재 제26호인 동삼층석탑, 보물 제20호인 중앙 3층석탑, 보물 제47호인 서삼층석탑가 있고 그 뒤에 강당이 자리하고 있다. 최치원의 사산비문 중 하나인 국보 제8호인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도 절의 북서쪽에 있다.

 

 

성주사지는 발굴조사결과 건물의 초석, 통일신라시대의 흙으로 빚은 불상의 머리, 백제, 통일신라, 고려시대의 기와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성주사는 당대 최대의 사찰이었으며, 최치원이 쓴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는 신라 석비 중 가장 큰 작품으로 매우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

 

4탑 형식의 독특한 가람배치

 

현재 남아있는 문화재와 주춧돌 등으로 본 성주사지는 웅장하였다. 중문지를 지나면 석등과 그 뒤에 웅장한 오층석탑이 서 있다. 그리고 금당지가 있고, 좌우로 동남회랑지와 서남회랑지가 있다. 동남회랑지의 뒤편으로는 삼천불전지가 자리하고 있어, 성주사가 얼마나 큰 절이었는가를 가늠할 수가 있다.

 

 

금당의 뒤편으로는 삼층석탑 3기가 나란히 서 있다. 3기의 석탑 뒤에는 강당지가 있고, 그 한편에는 석불입상이 서 있으며, 한편에서 조금 비켜선 북서쪽에 국보 8호인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가 서 있다. 이러한 가람의 배치는 금당 앞에 오층석탑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일탑일금당식과 같은 가람의 배치이다. 금당 뒤편에 3기의 탑은 후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성주사 사적기에 따르면 이 금당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3기의 탑은, 통일신라 말기의 탑으로, 정광, 가섭, 약사여래사리탑 중 하나이며, 발굴조사 결과 딴 곳에서 가져온 것으로 밝혀졌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성주사는 신라시대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선종 중심의 하나인 성주산문의 중심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9산 선문 중 하나인 성주산문은 선문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컸으며, 많은 승려를 배출한 최대의 산문이었다. 수많은 문화재만을 남겨놓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성주사. 잔뜩 흐리고 바람이 부는 날씨였지만,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음은 옛 성주사를 다시 한 번 가늠해보고자 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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