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황 막고굴의 문화재는 일체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막고굴은 모두 철문으로 굳게 닫혀있으며. 안내자의 인도에 따라서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막고굴에는 비천상의 그림들이 있는데, 우리나라의 범종에 새겨진 그림들과 흡사한 모습이다.

 

오대산 동종과 흡사한 비천상

 

오대산 상원사에 있는 국보 제36호 동종은 신라 성덕왕 24년(725)에 만들어졌다. 경주 성덕대왕신종(국보 제29호)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완형의 통일신라시대 범종 3구 중 하나이며, 크기는 높이 167cm, 입지름 91cm이다.

 

 

종 몸체의 아래 위에 있는 넓은 띠와 사각형의 유곽은 구슬 장식으로 테두리를 하고 그 안쪽에 덩굴을 새긴 다음 드문드문 1∼4구의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상(奏樂像)을 두었다. 네 곳의 유곽 안에는 연꽃 모양의 유두를 9개씩 두었다. 그 밑으로 마주보는 2곳에 구름 위에서 무릎을 꿇고 하늘을 날며 악기를 연주하는 비천상(飛天像)을 새겼다.

 

입구에서 막고굴의 비천인상을 팔아

 

돈황 막고굴에서 입장권을 끊어 안으로 들어가다가 보면, 돈황의 문을 들어가기 전에 상점이 한 동이 있다. 그곳에서는 돈황 막고굴에 그려진 비천인상의 모습을 그려서 팔기도 한다. 그런데 그 비천인상의 그림이 우리에게도 전혀 낯설지가 않다. 아마 우리나라 절 어느 곳을 가도 볼 수 있는, 비천상을 보아왔기 때문인가 보다.

 

 

돈황은 불교의 성지로, 중국 역대 불교의 집산지다. 그리고 불교의 신앙 속에 나타나는 여러 세계를 조각과 조소, 회화 등을 종합적으로 시각화한 박물관이기도 하다. 2,500년이라는 오랜 시간을 눈으로 불교를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막고굴의 불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불교도나 승려뿐이 아니었다.

 

막고굴의 불사에는 조각가, 화사, 역경사, 석공, 도공, 칠공, 목공까지 수많은 그 분야의 거장이라는 사람들이 오랜 시간을 두고 이루어낸 작품이다. 오랜 역사를 통해서 조성된 돈황 막고굴은 한나라 서하, 원, 명, 청대에 이르기까지 이것을 보존해 왔다는데도 그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오아시스 안에 숨겨진 막고굴

 

돈황 막고굴은 돈황 시가지에서 25km 떨어진 사막 속의 작은 오아시스에 숨겨져 있다. 492개소의 석굴로 되어있으며, 4세기경부터 14세기경까지 1,000년 동안에 하나 둘 씩 뚫은 것이다. 기록에는 1,000여개의 굴이 있다고 하나, 현재는 492개소의 굴이 정리되어 보존되고 있다. 현재 굴속에 소상되어 있는 소상수는 3천여 점이며, 전면을 세로로 연결하면 그 길이가 45km에 달한다고 한다.

 

막고굴은 각 시대별로 특색이 있다. 막고굴은 사방 벽면에 벽화로 메워져 있으며, 대체로 서역취향적이다. 인도의 여러 형식을 갖고 있으며, 벽화속의 불상이나 비천상들이 많은 것도 특색이다. 이렇게 세계 최대의 불교의 보고라는 막고굴은 엄격하게 보호가 되고 있어, 그 외형만 담을 수밖에 없음이 안타깝다.

 윤한흠 옛 수원화성 그림전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여우가 죽을 때는 자신이 살던 굴이 있는 언덕 쪽으로 머리를 둔다는 말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말이다. 수원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아오면서 변해가는 모습이 안타까워, 고향의 옛 모습을 기억해내는 그림전이 열렸다.

수원화성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2월 23일 오후 2시 30분에 개막식을 가진, ‘윤한흠 옛 수원화성 그림전 - 용(龍)을 품은 도시 수원화성’전이 바로 그것이다. 4월 1일까지 열리는 그림전을 돌아보았다.

윤한흠 선생이 그린 화성 종로

90세의 노 화백 윤한흠 옹의 고향

그림전을 연 화가는 윤한흠 선생이시다. 1923년 수원시 남창동에서 태어나셨으니 올해 90이시다. 선생은 수원과 화성의 아름다움을 후대에 전해주기 위해, 선생 스스로의 기억과 토박이 어르신들의 증언을 토대로 수원화성의 옛 모습을 재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선생은 1938년 현 수원중고등학교의 전신인 화성학원을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조국의 광복이 되던 1945년에 귀국하셨다.


귀국 후에는 수원역 앞에서 양화점을 경영하였으며, 1957년 화성의 남문인 팔달문 앞 영동시장에서 식품점인 천덕상회를 경영하였다. 1981년부터는 종로사거리에서 화홍예식장을 운영하셨다.

선생이 수원화성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50대 중반인 1977년부터라고 한다. 그림들은 1980년까지 그렸으며, 이 그림들을 수원시에 기증하였다.



개막식 광경

옛 감성을 그대로 살려낸 그림


기획전시실에 걸려있는 그림들을 보면 ‘푸르다’라는 생각이 든다. 전시작품마다 숲이 표현되어 있다. 그냥 숲이 아니라 용트림을 하고 올라가는 울창한 소나무들을 표현했다. 정조 이산을 화성 곳곳에 솔씨를 뿌렸다. 자그마치 이만 섬이나 되는 솔씨를 뿌렸다고 한다. 부친 사도세자의 능침을 방문하는 길에도 소나무를 심었다.

그것은 정조의 푸른 꿈이었다. 선생의 그림 속에는 그런 정조의 뜻이 담겨져 있다. 전문적인 회화 교육을 받지도 않으신 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 속에는 정조의 마음을 그대로 그려내고 있다. 푸른 화성, 그리고 감성에 배어있는 그림들. 그 안에는 옛 풍취가 그대로 남아있다. 그만큼 고심을 한 흔적들이 보인다.



위로부터 영화정과 만석거, 매향교, 세류동 서낭

변해버린 세상이 결코 아름다울 수 없어

윤한흠 선생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급격하게 변해버린 도시가 결코 아름다울 수 없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옛 수원화성의 모습들 속에서는 까맣게 잊어버린 옛 기억을 되살려 낼 수가 있다. 일일이 어릴 적 기억과, 어르신들의 기억 속에 있는 모습을 그려낸 것이다.

2월 23일 오후 2시 30분 개막식에는, 윤한흠 선생을 비롯하여 강장봉 수원시의회 의장, 이달호 화성박물관장 등이 참석을 했다.



위는 거북산, 아래는 창룡문 주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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