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작가 이미경, 그녀가 전시기획자가 된 까닭은?

 

독립운동가이자 사학자, 언론인이었던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라고 했다. 선생은 우리나라에 부처가 들어오면, 한국의 부처가 되지 못하고 부처의 한국이 된다. 우리나라에 공자가 들어오면, 한국을 위한 공자가 되지 못하고 공자를 위한 한국이 된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오면, 한국을 위한 예수가 아니고 예수를 위한 한국이 되니 이것이 어쩐 일이냐. 이것도 정신이라면 정신인데 이것은 노예정신이다.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려거든 역사를 읽을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나라를 사랑하게 하려거든 역사를 읽게 할 것이다.”라고 했다.

 

선생은 <독사신론>에서 내가 지금의 각 학교에서 교과서를 쓰는 역사를 보건대, 가치 있는 역사가 거의 없도다.”라고 해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한 신채호 선생의 명언처럼 아픔의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한 의미있는 전시가 열린다. 광복회 경기도지부(지부장 황의형)이 마련한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조선의열단 백년을 말하다 - 그날의 기억 1919’1126일부터 121일까지 경기도문화의 전당 빛나는 갤러리에서 열린다.

 

그런 그날의 기억 1919’의 공동기획자인 이미경씨를 13일 오후, 영동시장 2층 청년몰 한편 카페에서 만났다. 지난해(2018) 115일 행궁동에 소재한 대안공간 눈에서 이미경 개인전 상처가 아물지 읺았다전을 열고 난후 1년 만의 만남이다. 당시 이미경씨의 전시는 지인의 갑작스런 죽음이 몰고 온 공포를 그대로 사진으로 옮겨 놓았던 상징적 전시였다.

 

 

1년 만에 기획자가 되어 나타난 이미경씨

 

그 전에도 이미경 작가의 전시를 찾아보고 기사화 한 적이 있어 낯이 익은 사람이다. 그런데 뜬금없이 기획자가 되어 나타났다. 그것도 3·1운동, 임시정부수립 100년이라는 의미있는 해(1919)그날의 기억 1919’라는 전시제목을 갖고 전시를 한다는 것이다. 올해는 3·1운동과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수많은 관련행사가 열렸다.

 

그런 행사가 한 해의 막바지에 들기 시작한 11월 말에 또 다시 ‘3·1온동 및 임시정부수립 조선의열단 백년을 말하다라는 제목으로 전시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것도 사진작가가 아닌 전시기획자로 나타났다. 도대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왜 1919년을 기억하고 싶은 것일까?

 

안양에서 사진전을 여는데 독립운동가의 후손들과, 지금은 생존해 계시지 않는 독립운동가를 모티브로 사진전을 열었어요. 그들의 마음을 담아내는 사진작업을 하다가 우리가 그날(191931)의 역사나 독립운동가 들에게 너무 홀대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갖고 있는데, 광복회 경기도지부에서 조선의열단 백년을 말하다라는 제목으로 전시계획을 갖고 있는데 기획을 맡아달라고 했어요

 

그런 전시라면 힘들어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전시기획을 맡았다고 한다. 그동안 3·1운동 관련자료를 찾기 위해 화성 제암리, 천안 유관순 열사 생가지 등을 찾아다니면서 많은 것을 보고 들었다고 한다. 기획을 한 것이 얼마 되지 않아 힘들지만, 나름 최선을 다해 1919년의 역사를 조명하고 싶다는 것이 이미경씨의 말이다.

 

 

앞으로 우리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하고 싶어

 

이미경씨가 기획을 하게 된 것은 8,15 광복절을 맞이해 아이들이 그린 태극기를 한 곳 지하도에 전시회를 열고, 그곳에 커다란 태극기를 걸어놓은 후 지나는 사람들이 자신이 느낀 바를 글로 적는 전시를 연 것이 기획의 시작이라고 한다. 전시는 생각 밖으로 많은 사람들이 동참했고, 그 전시를 통해 기획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다는 것이다.

 

저는 중앙대학교 평생교육원 사진학과를 졸업한 후, 국립한경대학교 일반대학원 시각디자인학과에 재학하고 있어요. 이번에 석사논문이 나왔는데 논문제목이 <내면심리의 사진적형상화를 통한 불안극복 -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를 중심으로> 였죠. 개인적인 불안의 문제를 예술활동으로 극복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정신분석학의 이론과 선행작가를 기반으로 살펴본 작품 논문예요

 

이미경씨가 건네주는 석사학위 논문집을 받아들고 사진작가가 기획을 할 수 있다면 우리가 모르고 있던 내면의 세계까지 사진으로 담아낼 수 있기 때문에 기대가 된다고 그동안의 용기를 격려해주었다. 이미경씨는 기획을 하다보니 그동안 사진작가로서 모르고 있었던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더 많은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다면서 이번 그날의 기억 1919’9명의 작가가 동참했으며(깅동우, 김희곤, 류엘리, 염동균, 이혜정, 조정호, 최순옥, 한영숙, 한희준) 작가들은 모두 경기도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이번 전시의 기획은 이미경씨와 장기택씨가 공동 전시기획을 맡았다.

 

 

기획자는 단순히 나에게 주어진 모티브만을 갖고 전시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티브가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도 고민해야 참다운 기획자가 될 수 있다라는 말로 전시를 하는 이미경씨에게 도움을 주었다. “앞으로는 우리 문화재에 대해 더 많은 것을 공부하고 그 문화재에 얽힌 이야기와 국가, 그리고 민초들의 이야기까지 찾아보겠다고 하는 이미경씨. 이번 그녀가 기획한 그날의 기억 1919’전이 기대되는 것은 사진작가로 활동하던 기획자가 얼마나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지가 궁금하기 때문이다. 또한 참여작가들이 생각하는 조선의열단 백년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지가 궁금하기 때문이다.

부도탑이라고 하는데, 그런 것 같지가 않다. 부도탑 보다는 오히려 석등이라고 해야 옳을 듯하다. 논산시 부적면 탑정리 산 5에 소재하고 있는, 충남 유형문화재 제50호인 논산 탑정리 석탑을 보고 느낀 소감이다. 탑정리 석탑은 탑정저수지 북쪽 제방 끝에 서 있는 탑으로, 원래의 자리는 이곳에서 50m 정도 떨어진 남쪽에 있었다고 한다.

 

탑정리 석탑을 옮긴 이유는 일제 시대에 저수지 공사를 하면서, 탑이 있던 자리에 물이 차자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이 탑은 고려시대의 탑으로 보고 있으며, 탑의 전체 높이는 283cm에 기단부의 높이가 184cm이다. 탑신의 높이는 54cm에 지나지 않는다. 이 탑을 부도탑으로 보아야 하느냐, 아니면 석등으로 보아야 하느냐를 놓고 한참이나 망설였다.

 

 

태조 왕건이 지었다는 어린사(魚鱗寺)’

 

사료에 의하면 연산현 서쪽 17리에 탑정리가 있고, 탑정리에 어린사(魚鱗寺)가 있었다고 한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고려 태조 왕건이 남으로 견훤을 정벌할 때에, 이곳에 주둔하여 어린사라는 절을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주변에 성을 쌓았다고 하나, 지금은 성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이 탑은 왕건이 개국사찰로 세운 개태사에 속해 있던 많은 암자 중, 적사암의 대명스님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것이었다고도 하지만 문헌상 기록은 없다.

 

이 탑을 보면서 다소 엉뚱한 생각을 한다. ‘어린사라는 절 이름을 들으면서 우리 조상들의 지혜에 그저 감탄을 할 뿐이다. 고려 초에 왕건이 이곳에 성을 쌓았다는 것은, 이곳의 지형이 평지이거나 높지 않은 구릉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에 이곳에 절을 지으면서 어떻게 이곳에 호수가 들어찰 것을 미리 알았던 것일까?

 

 

천년 후에 이곳에 저수지가 생길 것을 미리 알았다.

 

탑정호는 충남 논산시 부적면과 가야곡면에 걸쳐 있는 저수지를 말한다. 1941년에 착공을 하여 1944년에 완공을 한 인공호수로, 그 규모가 상당하다. 면적은 1522천 평에 달하며, 제방길이는 573m이고, 둘레가 20km이나 되는 거대한 저수지이다. 이 저수지가 들어선 곳에 어린사라는 절이 있었다는 것이다.

 

어린(魚鱗)’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물고기와 물속에 사는 온갖 것들을 말한다. 결국 어린사는 물고기가 많은 절이라는 표현인데, 당시에는 이곳에 물고기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성을 쌓을 수 있는 곳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점으로 볼 때 고쳐 초기에 왕건은 이곳이 천년 후에 저수지가 들어설 것을 미리 알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지명을 찾아보면 상당히 많이 있다. 용인시 이동면에 있는 이동저수지 인근에도 이와 같은 지명이 있다. ‘어비리라는 곳이다. 논밭이 즐비한 이곳이 고기가 살이 찐다는 표현을 한 것이다. 용인 어비리는 이동저수지가 들어서 그야말로 물고기가 살이 찐다는 지명이 맞아 떨어졌다. 어린사 역시 그렇게 절 이름에, 이미 이곳이 저수지가 들어설 것을 예측한 것이다.

 

석등과 같은 형태의 탑정리 석탑

 

탑정리 석탑은 지대석 위에 8각의 간주석을 세우고, 그 위로 받침돌을 두어 탑신을 받치도록 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탑의 구성을 보면 하대석, 간석, 중대석, 탑신부와 옥개석으로 되어있다. 이런 형태는 어디서도 볼 수가 없는 모습이다. 흡사 석등과 탑을 합쳐 놓은 듯한 형태로 보인다.

 

더구나 이 탑의 탑신 아래의 받침 부분은, 전형적인 고려시대의 석등 양식이다. 8개의 연꽃잎을 양각하여 장식하였다. 혹 이 탑이 별개의 탑신을 올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즉 화사석이 들어설 자리에 있는 지금의 탑신이, 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혹 화사석 대신 놓아 둔 것은 아니었을까?

 

더구나 일제시대에 저수지를 조성하고, 그들에 의해서 옮겨졌다고 하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문헌상으로 확실하다면 무슨 걱정을 할까? 문헌도 없고, 받침이나 간주석의 형태 등으로 보면 부도이기 보다는 석등이라야 맞는다는 생각이다. 탑정리 석탑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석탑을 보라갔다가 어린사라는 절이 더 궁금해지는 날이다.

참 벌써 2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다음 뷰로 다시 돌아온 지가. 어제보니 그 동안 1,000개의 글을 다음 뷰에 송고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에게 이 1,000개의 글은 딴 분들의 글과는 좀 다르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여행블로거들이나 문화에 대한 글을 쓰시는 분들은 나와 같은 생각을 조금은 할 테지만 말이다.

 

다음 뉴스였을 때 블로그에서 티스토리로 옮겨 앉았다가, 2007년도에 2,000개가 넘는 글을 하루아침에 삭제를 해버리고 다음을 떠났다. 그리고는 한 3년 정도를 블로그를 떠나있었다. 그동안에 내가 느낀 것은 솔직히 ‘편안하다’는 생각보다는, ‘무엇인가 조금 허전하다’라는 생각이었다.

 

 

다시 돌아온 다음 뷰, 아쉽게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2

007년도에 다음을 떠날 때도 그랬다. 뉴스가 뷰로 바뀌더니 문화, 연예가 한데 묶이고 나서부터, 문화는 아예 찬밥신세가 되었다. 그래도 다음뉴스 시절에는 문화기사도 가끔은 메인 창에 버젓이 자릴 잡았고, 그런 기사에 30만 명 이상이라는 사람들이 들어와 글을 읽고는 했다.

 

그런데 뷰로 옮겨가더니 이것은 온통 문화는 사라지고, 연예기사가 도배를 하기 시작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보는 연예기사를 올려야 하는 다음의 곤란함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참 허전하게도 문화는 그야말로 찬밥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그런 점은 문화재 글을 주로 송고를 하는 문화전문 블로거로써 참담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고작 글 1,000개, 하지만 나에겐 장난이 아니야

 

말이 그렇지 2009년 11월에 티스토리 초대장 한 장을 이웃블로거에게서 받아 개설을 해놓고도, 사실은 블로그에 글을 올린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글을 올리기에는 지난 울화가 채 가시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글을 송고하기 시작한 것이 2010년 8월 경 부터이다.

 

이런 계산이라면 22개월 동안 1,000개의 글을 뷰에 송고를 했으니, 날마다 1~3개의 글을 썼다는 것이다. 물론 그 글이 모두 문화재에 대한 것은 아니다. 때로는 횡성수설 지껄이기도 했고, 어쭙잖은 연애이야기도 쓰기도 했다. 그 중 750개 정도의 글이 문화, 문화재에 대한 글이다. 결국은 문화나 문화재에 대한 글을 매일 한 개 이상의 글을 송고를 했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 문화재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서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과 경비를 들여야만 했을까? 한 번에 답사를 나가면 보통 1박 2일로 돌아온다. 요즈음은 숙박비와 차량을 움직이는 비용이 만만찮다. 1박 2일에 기본적으로 30만원 정도의 경비를 써야한다. 지금은 뜸한 편이지만 일주에 1~2회 답사를 나간다.

 

어떤 날은 7월 복중에 50리를 걷기도 했다. 다리는 붓고, 몸은 만신창이가 되고. 그렇게 돌아다닌 세월이 벌써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뀐 세월이다. 


 

일주에 경비를 50만원 정도 썼다고 하면, 한 달이면 200만원 정도를 답사 경비로 썼다는 계산이 나온다. 하지만 실제는 그것보다 훨씬 더 들어갈 때가 많다. 왜인지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결국 일 년에 2,400만원, 그동안 5,000만원 정도를 답사비로 날렸다. 그 금액으로 답사를 한 글을 다음 뷰에만 보낸 것은 물론 아니다. 그렇다면 다음에서 2년 동안 들어온 돈은 얼마일까?

 

다음 뉴스 시절, 그 시절이 참 그립기도 하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상금과 애드박스 등에서 들어온 돈은 고작 2년을 다 합해야 300만원이 되질 않는다. ‘그런데 왜 이 짓을?’ 하고 묻는 분이 계시다면 할말이 없다. 요즈음 같은 세상에 미치지 않고서야 누가 이런 짓을 할 것인가? 결국 그 미친 짓이 지난해 년 말에 문화연예 부분의 뷰 블로거 대상을 받기도 했다. 결국 나에게 그 대상은 5,000만원 짜리라는 셈이다.

 

 

나에게는 이 사진 한 장마다 다 사연이 깊다. 그래서 사진이야 어떻든 소중한 자료가 된다. 위는 보물인 함안 방어산 마애불, 아래는 천연기념물인 전남 담양 봉안리 은행나무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난 나의 길을 간다고 마음을 다진다. 앞으로 얼마동안이나 더 활동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는 이 1,000개의 글이 주는 의미가 남다르다. 알고 보면 참 마음 아픈 글의 숫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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