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그동안 세상을 헛살았다는 반성을 해본다. 바람이 찬 방에서 괜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보니, 그동안 세상을 살아 온 것에 대한 뼈저린 후회를 하게 만든다. 갑자기 왜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일까? 그저 쉽게 얻을 수 있는 답은 ‘나이가 먹긴 먹었구나.’하는 대답이 맞을 것이리라.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달려가 무릎이라도 꿇고 펑펑 울부짖고 싶은 심정이다. 왜 그토록 긴 시간을, 한 번도 내가 정말로 불효자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을까? 매번 효가 어쩌고저쩌고 입만 벌리면 떠들어 대던 내가 아니던가. 그러면서도 정작 나는 얼마나 불효를 하고 있는지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니. 고개를 들 수가 없다.


효를 깨우쳐주는 구례 화엄사 효대에 있는 사사자삼층석탑. 몇 번이고 찾아갔으면서도 반성을 하지못했다.

부모님의 마음을 이제야 이해를 하다니


날이 춥다. 이 추운 날에 괜히 날이 춥다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이런 추운 날씨에 좀 더 환경이 좋은 곳에서 살아갈 수 없는 것에 대한 불평만 늘어놓고 살았다. 그런데 곰곰 생각을 해보니, 예전에는 지금보다 훨씬 추웠다는 생각이다. 그 추운 날 부모님들은 어떻게 사셨을까? 행여 감기라도 걸릴까보아서 늘 감싸주셨다. 그런 마음조차 헤아리지 못하고 살았다.


“죽을 때가 되면 사람이 변한다.”고 한다. 주변에 지인들이 요즈음 왜 그런 말을 자주 하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죽을 때가 되었거나, 나이가 먹었거나 그런 것만은 아니다. 내가 고통스럽다가 보니, 그 고통보다 몇 배나 더 힘든 고통을 참아가며 살아오셨던 분들이 생각이 나기 때문이다.


사람은 닥쳐보아야 안다고 했던가? 이제 와서 때늦은 후회를 해보지만 그것이 무슨 소용일까? 참 무던히도 속을 썩여드렸다. 하라는 것은 마다하고 내가 좋아라 하는 일만을 고집스레 해왔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 아무리 철이 없는 나이였다고 하지만, 좋은 직장을 말 한마디 없이 그만두고 나와 방황을 한 것이 30년 세월이 지나버렸다.



뒤늦은 후회, 그러나 눈물을 닦아줄 부모님은...


이제 나이 60이 넘어서 그토록 모자란 세월을 살았다는 것을 후회해본다. 그러나 아무리 마음속으로 통곡을 한들 어찌 할 방법이 없다. 그 통곡을 들어줄 분도, 흐르는 눈물을 닦아줄 분들도 안계시니. 참 바보스럽게 세상을 살아왔다는 것을 후회해보지만, 이렇게 때는 늦어버렸다는 것에 머리를 쥐어뜯고만 싶다.


음력으로 내일이면 한 해가 저문다. 늘 음력의 생활에 젖어있는 나로서는, 2월 3일 설날이 오기 전인 내일이라도 아버님 묘역을 찾아보아야겠다. 그곳에서 지난 시간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잘못이라도 빌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가지 내가 살아 온 세월이 정말로 무의미해진다는 생각이다.



이제 얼마나 남았을까? 그런 생각이 아니다. 그저 몇 날이 남았거나 이제는 달리 살고 싶다. 부모님만이 아니라 그동안 나로 인해 작은 상처라도 받은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 모두에게 잘못을 빌고 싶다. 올 한해는 그렇게 살고 싶다. 입을 다물고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살고 싶다. 설을 맞이하는 마음에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싶은 마음이다. 부모님께조차 불효를 한 주제에, 무슨 말을 할 자격이나 있을까? 허허로운 마음 하나 짊어지고 가면 될 것을.

향나무가 마을의 길흉을 점친다. 향나무의 생육이 좋으면 마을에 경사가 겹치고, 생육이 안좋으면 마을에 불길한 일이 생긴다고 한다. 수령 400년이 훨씬 지난 이 향나무는 연기군 조치원읍 봉산리 128의 1에 자리한다. 천연기념물 제321호인 이 향나무는 입구에 철책으로 문을 달아 보호를 하고 있다.

향나무는 측백나무과에 속한다. 원산지는 한국과 중국 등이며 정원수로 많이 심는다. 이 나무는 강화 최씨인 중용이 심었다고 전하는데, 후손들이 잘 가꾸어 놓았다. 향나무를 많이 보았지만 봉산동 향나무를 보는 순간, 입을 벌리고 말았다. 이런 나무가 도대체 어떻게 자라난 것일까?


천연기념물 제321호 연기 봉산동 향나무 전경(위)과 가지를 받쳐놓은 버팀목(아래)

봉산동 향나무, 용이 따로 없네.

수령이 400년이 지난 이 향나무는 위로 자라지를 못했다. 나무는 3.2m 정도에서 옆으로 가지를 뻗었는데, 그 가지를 수많은 통나무로 버팀목을 만들어 괴어놓았다. 버팀목은 사방으로 늘어놓고, 그 위를 다시 옆으로 늘어놓아 흡사 가지가 버팀목을 싸안고 자라난 것처럼 보인다.

밑동은 외과수술을 한 흔적이 있으며, 위로 오르면서 가지가 뒤틀어져, 마치 용이 엉켜있는 듯한 모습이다. 잔가지 역시 그렇게 엉켜서 자라났다. 수 십 마리의 용들이 사로 엉켜있는 듯한 봉산동 향나무. 그 앞에서 말이 나오지를 않는다. 그 오랜 세월 이렇게 자랄 수 있었던 특별한 사연이 있는 것은 아닐까?

밑동에서 올라가는 가지들은 용이 뒤틀고 있는 형상이다. 많은 모습들이 그 안에 있다.

밑동의 둘레가 2.5m 정도나 되는 이 나무는 극진한 효자인 최중용이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효성을 자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심었다고 전한다. 그래서서인가 자손들은 이 나무를 끔찍이 위하고 있다. 향나무의 주변에는 탑 등으로 정리를 하고, 향나무 둘레는 축대를 쌓아 보존을 하고 있다.



위로 오른 가지에서 자연의 위대함을 배우다

요즈음 분재라고 하여서 나무를 철사 등으로 고정을 시켜 멋진 모습으로 키워낸다. 가끔 이런 나무들을 보면서 '참 아름답다'라는 생각을 하고는 했는데, 이 향나무 앞에 서는 순간 그런 생각이 부질없음을 깨닫는다. 어떻게 이렇게 자연적으로 자라난 나무가 예술적으로 자랄 수가 있었을까?

한 마리 용이 몸을 뒤틀고 있는 모습도, 아름다운 무희가 살포시 버선코를 내딛고 한발자국 뛰어 오르는 모습도, 나무에 달린 커다란 눈이 사람들을 향해 안녕을 바라는 듯한 모습도 있다. 자연이 만들어낸 최고의 걸작품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무 한 그루에도 이렇게 자연의 조화는 무궁무진하다. 이런 자연의 앞에 한없이 작아지는 나를 발견한다.


자연의 조화를 느끼게 하는 이 향나무는 수령이 400년이 지났다.

석송령이나 반룡송처럼 소나무가 옆으로 가지를 뻗은 것은 보았지만, 이렇게 향나무가 옆으로 자라난 것은 보기가 힘든 것 같다. 그런데 이 봉산동의 향나무는 그대로 자연을 느끼게 한다. 자연이 인간에게 준 가장 아름다운 선물 하나를 본 것이다. 이것보다 아름다운 선물이 또 어디 있을까? 석양에 향나무 곁을 떠나지 못하는 발길을 억지로 재촉해본다.

충남 연기군 남면 나성리 산 59에는 전서공 임난수 장군의 부안임씨 가묘가 있다. 연기군 향토유적 제42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가묘는 고려 말 최영 장군과 더불어 탐라를 정벌하는데 큰 공을 세운 임난수 장군을 기리는 가묘이다. 임난수 장군은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세우자,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하여 벼슬을 버리고 현 남면 양화리에 은거하였다.

연기군 나성리에 있는 문화재를 답사하는 중에, 마을주민들이 가묘 뒤에 석불입상이 있다고 이야기를 한다. 연기군 홈페이지에서는 석불입상에 대한 문화재 정보가 전무하다. 그래도 혹 모른다는 생각에 길을 물어 찾아보기로 했다. 답사 증에 새로운 것을 찾는다는 것은, 답사를 하는 사람에게는 늘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전설을 갖고 있는 석불입상. 30분이 넘게 덩굴을 헤치고 찾아다녔다.
 
환삼덩굴을 30분이나 헤집고 다니다

가묘 뒤라고 해서 찾아보았다. 그러나 가묘 뒤로 길이 보이지를 않는다. 주변은 여름내 자란 풀들이 허리까지 차오른다. 거기다가 환삼덩굴은 가시가 있어 맨살에 스치면 금방 살이 부르트기 일쑤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찾아보았으나, 석불입상은 보이지가 않는다. 땀은 비오듯 쏟아지는데, 옷은 살에 감겨든다.

30여분을 길도 없는 덩굴을 헤치면서 다니다가 보니, 저만큼 무엇인가가 보인다. 거미줄과 덩굴더미를 헤치고 가보니 정말로 석불입상이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이곳에 서 있었다는 주민들의 말처럼, 석불입상은 보기에도 범상치가 않다. 뒷면은 그냥 돌을 쪼아낸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높이는 2m 정도가 되는 이 석불입상은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지 않아, 풀숲에 그대로 방치가 되어있다.


낮은 곳은 무릎까지 깊은 곳은 가슴까지 덩굴이 우거져 있다. 아래사진 가운데 흰 것이 석불입상이다.

지방의 장인에 의해 제작된 듯

석불입상은 눈썹이 굵게 표현하였다. 눈은 가늘고 길게 옆으로 -자로 팠는데, 쪼아낸 흔적이 보인다. 코는 뭉툭하게 표현을 하였다. 입은 작고 양끝이 약간 위로 치켜 올려졌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한 것으로 보아, 석불입상이 틀림이 없다. 경기 남부와 충청지역에서 많이 나타나는 고려 때의 거대석불과 같은 형태로 제작이 되었다.

귀는 어깨까지 내려왔으며, 가슴에는 손의 형상을 조각하다가 만듯하다. 전체적인 모습으로 볼 때 미완성인 석불입상과 같은 모습이다. 머리는 이마위로 잘려나갔다. 아마 그 위에 보개석이라도 얹을 생각이었나 보다. 그런데 어떻게 이 석불입상이 이런 곳에 서 있게 되었을까? 혹 전서공 임난수 장군과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다. 이런 형태로 보아 고려 시대에 재작하다가 미완성으로 남아있는 듯하다.

마을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마을 주민들이 이야기로 들려주는 이 석불입상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옛날에 이곳에 한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아들을 두지 못하여 대가 끊길 것을 생각하고 큰 걱정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백발 노승이 찾아와 시주를 달래서 후히 대접하고 가정 이야기를 하였더니, 노승이 그 석불입상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며 정성껏 예불을 드리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했단다. 그 부부는 음식을 차려놓고 한 달 동안 정성을 다해 예불을 드리자, 어느 날 저녁 그 부처님이 꿈에 나타나 “그대들의 지성이 지극해서 아들을 점지하니 잘 길러서 장차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하라. 그리고 어려운 일이 있거든 날 찾아라.”라고 말을 했다. 꿈을 꾸고 난 뒤 태기가 있어 열 달 만에 아들을 낳았다. 이 아기가 자라서 나라에 큰 공을 세웠다.

그런데 단란하게 살던 노부부가 모두 병으로 죽게 될 처지가 되었다. 지난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찾아라.”라는 꿈에서 본 부처님을 회상하고 아들에게 그 말을 하였더니, 아들은 곧 석불입상을 찾아가 부모님의 병이 낫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랬더니 이번에도 부처님이 꿈에 나타나 “내일 아침 일찍 산에 올라가 보면 둥근 바위가 있는데, 그 밑에 큰 더덕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캐서 부모님께 달여 드리면 병이 곧 나을 것이다. 만일 내일이 지나면 그 더덕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니 날짜를 어기지 말라.”라고 하였다. 다음날 아들이 산에 올라가 바위 밑을 보니 정말로 거기에 커다란 더덕이 있었다. 아들이 그것을 캐어 부모님께 달여 드리자 곧 완쾌되었다.(자료 / 연기실록)



맨 아래 사진이 부안 임씨의 가묘이다.

전설은 여기서 그치지를 않는다. 마을에 사는 불효자가 그 말을 듣고 석불입상에 빌러 큰 돌을 얻었는데, 어려운 사람을 돕지 않고 부모에게 효도를 하지 않았다. 그러자 돈이 모두 뱀이 되어 불효자의 온몸을 감아 질식해 죽였다고 한다. 나성리 마을 뒤편에 서 있는 미완성인 석불입상. 지정은 되지가 않았지만 그보다 더 큰 아름다운 지니고 있었다. 땀을 흘리며 덩굴을 헤치면서 찾아낸 석불입상. 그런 아름다운 전설을 간직한 채, 말없이 오랜 시간을 주민들과 무언의 대화를 하며 그 곳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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