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여행 오겠다는 지인들, 어디가 좋은지 물어와

 

노송지대의 소나무들은 지지대비가 있는 지지대고개 정상에서부터 옛 경수간 국도를 따라 펼쳐진 5km의 도로변에 식재된 소나무들을 말한다. 정조대왕이 내탕금 1,000량을 현릉원 식목관에게 내주어 소나무 500주와 능수버들 40주를 심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동안 많은 나무들이 사라지고 현재는 일부만 남아있다. 이 노송지대는 정조대왕이 아버지 장헌세자의 원침인 현릉원(현재의 융릉)을 다니는 길목에 식재한 것으로 정조대왕의 아버지에 대한 효심을 보여주는 길이다.

 

수원시는 그동안 노송지대 곳곳에 들어서 있던 건물을 매입해 주변을 정비했다. 20165월엔 노송 지대를 통과하는 도로를 폐쇄했으며, 우회도로를 개설하고 노송공원 일대(2734)에 소나무 33주를 심었다. 2017년부터 최근까지 노송 지대 주변 토지를 사들여 도로포장을 걷어내고 녹지를 조성했으며, 이곳에 노송공원을 조성했다.

 

하지만 정조대왕 당시에 효심으로 심은 소나무들은 대개 고사하고 지지대고개에서 약 5km에 걸쳐 식재되어 있던 소나무 중에서 현재는 38주 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다. 효행기념관 부근에 9, 삼풍가든(노송지대 소나무 군락) 부근에 21, 그리고 송정초등학교 부근에 8주 정도의 소나무만이 남아 있다.

 

 

가을에 걸어보는 노송지대에서 새 기운을 느끼다

 

24일 오후 전화를 한통 받았다. 충청도 일원에 거주하는 지인들이 주말경에 수원을 찾아오는데, 수원에 갈만한 곳을 소개해 달라는 전화였다. 그동안 몇 차례인가 수원을 올 때마다 화성을 한 바퀴 돌고는 했는데, 화성 외에 가을을 만끽할 수 있고,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곳을 알려달라는 것이다. 문화가행을 하는 일행이라 정조대왕의 효심이 서린 노송지대와 만석공원 일대를 돌아보면 적당하겠다고 생각든다.

 

25일 오전 7시에 길을 나서 송정초등학교 앞서부터 걷기 시작했다. 송정초등학교 주변 도로변에 식재되어 있는 소나무를 돌아보고 난 뒤 걸어서 2.5Km 정도. 경기도문화재자료인 노송지대로 들어섰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아침운동을 하는 사람도 많지 않다. 천천히 걸어 소나무 길을 걸어본다. 소나무 아래로는 맥문동이 가득하다.

 

 

정조대왕이 내탕금을 들여 조성했다는 소나무길. 220년이 흐른 지금은 그 일부가 남아있지만 이 길은 정조대왕의 효심이 깃든 길이다. 능행차를 마치고 돌아가던 정조대왕은 지지대고개에서 몇 번이고 뒤돌아보며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고 한다. 의왕시와 경계 마루턱에 놓인 지지대비는 그런 정조대왕의 효심을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가을날 걸어보는 노송지대는 여름과는 또 다르다. 그저 더위를 피해 걷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걸으면서 정조대왕의 효심과, 내탕금을 내주어 소나무길을 조성한 대왕의 마음을 함께 느껴본다. 누군가 소나무 숲길에 재활용품을 가득 쌓아놓았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길에 꼭 이렇게 해야만 했을까?

 

 

수원미술전시관과 만석공원도 돌아봐

 

이곳 정조대왕의 효심이 서린 노송지대 길에 남아있는 소나무들은 모두 번호표를 붙이고 있기 때문에 초행길이라고 해도 누구나 220여 년 전에 정조대왕이 내탕금을 주어 심은 소나무라는 것을 쉽게 구별할 수 있다. 사전에 미리 이 길을 걸어보는 것은 수원을 찾아오는 일행들에게 정조대왕의 효심과 소나무, 그리고 가을이 물들어가는 만석공원 일대를 제대로 알려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노송지대를 한 바퀴 돌아보고 난 뒤 만석공원으로 향했다. 이곳은 송정초등학교 인근에 자라고 있는 정조대왕 당시 식재한 소나무들과 수원시 향토유적인 만석거, 만석거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만석공원, 영화정, 수원미술전시관 등이 자리하고 있다. 아침 시간 건강을 위해 걷기를 하는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걷는다.

 

만석거 주변으로 난 산책길을 걸으며 공원에 가을이 물든 나무들을 바라본다. 이 가을에 어딜 가나 아름답지 않은 곳이 있겠는가? 하지만 수원 화성을 돌아보지 않고 역사와 문화, 볼거리와 즐길거리, 그리고 먹거리까지 함께 해결할 수 있는 곳을 찾아본다면 난 이 길을 추천하고 싶다.

 

이 가을. 노송지대를 걸으면서 정조대왕의 효심을 다시 한 번 생각하고, 만석공원에 들려 수원미술전시관에 전시된 작품들도 만나보기를 권한다. 그리고 주말이면 운 좋게 만석공원 야외무대에서 펼쳐지는 각종 공연까지 접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라는 생각이다.

정자는 그 안에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 하나하나에는 우리들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숨어있다. 그것은 상반을 초월한다. 내가 정자를 찾아 먼 길을 떠나는 것도 그런 이야기 때문이다. 요즈음처럼 있는 자들이 하나라도 더 가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스스로 본이 되게 하려고 많은 애를 쓴 흔적이 남아있다.

 

이런 이야기를 자랑하고 있는 정자가 있다. 마음은 흐르는 맑은 물과 같다는 말이 있다. 경주 양동마을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고 있는 심수정(心水亭). 마음을 깨끗이 비우고 세상 탐욕에서 멀리하다 보니, 이런 아름다운 정자가 생길 만도 하다.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정자

 

중요민속문화재 제81호로 지정이 된 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에 있는 심수정. 마을 전체가 중요민속문화재 제189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곳이다. 마을에 들어서면서 초입 우측으로 오래된 나무들이 굵은 줄기에 이끼를 가득 안고 있는 집이 있다. 멀리서 보기에도 예사롭지가 않은 집, 바로 심수정이다.

 

심수정은 농재 이언괄을 추모하여 지은 정자다. 조선 명종 15년인 1560년경에 지어졌으니 벌써 450년이 지났다. 이언괄은 형인 회재 이언적을 대신하여 벼슬길을 마다하고, 나이 드신 어머니를 극진히 모셨다. 양반의 가문에서 태어나 벼슬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모를 모신 이언괄. 아마 그 마음이 예전이나 지금이나 더럽고 추하게 세속에서 탐하는 벼슬을 마다하고, 흐르는 물에 씻듯 모든 것을 다 씻어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마음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정자가 바로 심수정이다.

 

 

 

벼슬을 버리고 효를 택한 마음 심수정

 

세상 사람들은 물질과 벼슬에 탐닉을 한다. 그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온갖 추하고 역겨운 인간들이 자리를 탐하면서도, 스스로 반성을 할 줄 모르는 모양새를 보면 이 심수정이 더욱 빛이 난다. 모든 여건이 다 만들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모를 위해 스스로 벼슬길을 마다할 수 있는 이언괄의 마음이야 말로, 바로 맑은 물이라는 생각이다. 심수정은 그와 같은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고 본다.

 

 

명종 때에 처음으로 지은 심수정은 철종 때에 이르러 소실이 되었다. 그 후 1917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심수정은 아름답다. 그 안에 배인 마음이 있어 더욱 아름답다. 7칸 대청에 양편으로 방을 둔 팔작집이다. 서쪽 방 옆으로는 난간이 있는 누마루를 두었다. 심수정의 아름다움은 바로 이 누마루에 있다. 3면이 훤히 트인 누마루에 오르면 양동마을이 다 보인다. 아마 이 누마루에 올라 이언괄의 효심을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심수정, 이언괄이 그러했다. 벼슬길이 보장이 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형을 대신해 노모를 극진히 모시기 위해 벼슬을 마다한 이언괄. 그 마음이 배어있는 정자이기 때문에, 더 아름다웠는지도 모른다. 정자 하나가 이토록 먼 길을 찾아 온 나그네를 기분 좋게 하다니. 그래서 정자기행이 계속되는가보다.

 

세상을 살아가기 힘들 때 이곳 정자에 올라 마음 한 자락을 내려놓을 수 있어서 좋다. 아마도 그런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한다면 어찌 이 불편한 세상을 살아갈 수가 있을까? 심수정 누마루에 더럽혀진 마음 한 자락을 꺼내어 훌훌 털어본다.

수원시 파장동에서 길게 지지대비로 넘어가는 길. 약 5km 정도의 이 길은 예전 정조대왕이 능침에 잠들어 있는 아버지인 장헌세자(사도세자)를 만나러 다니는 길목이었다. 이 길은 정조의 지극한 효성을 느낄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수령 200여년을 넘는 소나무들이 줄을 지어 있는 노송 길. 예수가 이 땅의 고통을 짊어지러 왔다는 12월 25일, 노송지대를 걸었다.

지난 23일에 내린 많은 눈으로 인해, 소나무가 있는 곳에는 아직 눈이 녹지 않아 미끄럽다. 기온이 떨어진데다가 바람까지 분다. 손이 시려 사진을 찍기가 조금은 불편하다. 2차선 도로를 따라 양편으로 자란 소나무들은 정조 당시에 심었다고 하니, 아마 수령이 200여년은 족히 지났을 것이다.


500주의 소나무를 심은 정조

경수간 국도를 따라 5km 정도에 조성되어 있는 노송지대. 기록으로는 이곳에 500주 이상의 소나무들이 살고 있어야 한다. 이산 정조(1776~1800)가 부친인 장헌세자의 원침인 현륭원의 식목관에게, 내탕금 1,000량을 하사하여 이곳에 소나무 500주와 능수버들 40주를 심게 하였다고 했기 때문이다.

소나무들은 자라면서 솔씨를 퍼트려 새로운 종자를 키워내기 때문에, 200년이 지난 세월이라면 울창한 소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현재는 대부분 고사하고 38주 정도의 노송만이 보존되어 있다. 이 노송지대는 경기도 기념물 제19호로 지정이 되어있으며 1973년 7월 10일에 지정이 되었다.



정조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노송 길 끝에 있다는 지지대비.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산 47-2에 소재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4호인 지지대비는 정조의 지극한 효심을 추모하기 위해, 순조 7년인 1807년에 화성 어사 신현의 건의로 세워진 비이다. 정조는 아버지인 장헌세자의 능을 참배를 마치고 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늘 이곳에서 거동을 멈추고 능침이 있는 방향을 돌아보았다고 전한다.

그래서 이 비의 이름이 ‘지지대비’이다. 지지대란 정조대왕이 이곳에 오르면 행차가 느릿느릿해진다고 하여, 느릴 ‘지(遲)’자 두 개를 붙여 썼다고 한다. 정조 이산의 그런 효심이 만들어 낸 것이 바로 노송지대일 것이란 생각이다.



노송이 길을 따라 울창한 이 길. 이 길에 얽힌 사연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무슨 이유로 정조 이산은 자신이 부친의 능침을 돌아보는 길목에 소나무를 500주나 심었던 것일까? 아마도 소나무의 생명이 길다는 것을 감안한 것은 아니었을까? 즉 소나무처럼 생명이 강한 조선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다.



정조대왕의 효심 길을 따라 걷다

소나무는 다른 나무들이 자라기 힘든 메마른 곳에서도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자란다. 또한 사철 푸르른 잎을 지니기 때문에, 강인한 인상을 준다. 늘 변함없는 푸름 때문에 대나무와 함께 송죽지절(松竹之節 : 변하지 않는 절개)이라고 한다. 이렇게 소나무를 심어 놓은 이산 정조의 마음속에서는 변하지 않는 효심과 강인한 조선, 그리고 강한 왕조를 의식한 것은 아니었을까?


바람이 차다. 500그루나 되는 소나무들이 10분의 1도 남지 않았다는 것이 마음이 아프다. 아마 제대로 관리가 되었다면, 이 일대는 정조의 효심을 가득담은 솔밭이 되었어야 할 것이다. 지금도 양편으로 늘어선 소나무 사이를 매연을 내뿜으며 달리는 차량들을 보며, 저 나무들도 언젠가는 매연으로 인해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그것은 이산 정조의 효심이 사라지는 것일 텐데 말이다.

(주) 요즈음 블로그 돌아가는 모습이 하도 한심해, 우측에 달았던 마크를 접었습니다. 같은 블로거들에게 상처주기를 일삼는 '자칭 파워블로거'라고 하는 사람들의 작태가 우스꽝스러워, 그런 것을 달고 있다는 것이 쪽을 까기 때문입니다. 왜 그랬는가는 글을 통해 알려드리겠습니다. 수일 내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어머니를 지극한 효심으로 모신 효자였다. <난중일기>에는 이러한 이충무공의 내력을 적고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3년 6월에서 12월 사이에 팔순에 가까운 어머니를, 여수 웅천동 송현마을 정대수 장군의 집에 모셔다 놓고 수시로 문안을 드렸다고 한다.

하루는 노모를 뵙기 위해 일찍 배를 타고 송현마을로 문안을 드리러 왔는데, 기운이 많이 떨어진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사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장군은 어머니를 뵈러 갈 때는 흰 머리카락을 모두 뽑고는 했는데, 이는 늙어가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어머니께서 마음 아파할 것을 생각해서였다고.


장군의 모친이 살던 집터를 찾아가다.

10일 아침 일찍 여수 수산시장에 볼일이 있어 내려갔다. 여수에 사는 지인을 만나 함께 장을 보고 오는 길에, 장군의 어머니께서 사셨다는 집터를 찾아갔다. 길가에는 ‘이충무공 어머님 사시던 곳’이란 푯말이 붙어있다. 안으로 들어가니 요즘 주변 정리를 하느라, 한창 공사 중이다. 전남 여수시 웅천동 송현마을 1420-1번지. 옛 집터 인 듯한 곳에는 거북선에 비를 세운 형상물이 있는데, 이 근처 어디인가 이충무공의 모친이 5년간 살았던 곳이라고 한다.

거북비가 서 있는 안으로 들어서면 정면 7칸 정도에, 측면 두 칸 반 정도의 팔작 겹처마 지붕으로 된 집이 있다. 현재 이 집은 사람들이 거주를 하고 있는데, 현재 거주를 하시는 분은 정평호(남, 79세)로 임지뢔란 시 활동을 하던 정대수 장군의 후손이라고 한다. 이분은 임진왜란 때부터 선조들이 대대로 이 터에서 살아왔다는 것이다.



 

고택다운 옛집, 1930년대 지은 것으로 전해져

현재의 집주인도 이 집에서 태어나고 자랐다고 한다. 임진왜란 이후 조상 대대로 이 집터에서 살았다는 분들. 집터는 옛집 터지만, 집은 그동안 여러 번 개축을 한 것인지 옛 모습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현재 이 집은 예전 충무공의 어머니께서 사시던 집은 아니다. 당시 발굴을 할 때 대들보 등이 발굴된 곳은, 현재 정대수 장군의 후손인 정평호옹이 살고 계시는 집의 부엌과 장독대에 걸쳐 있다고 전한다.

현재 주인이 거주하고 있는 집이 옛 선조들이 살던 집터에 나중에 보수, 개축을 했다고 보면, 이순신 장군의 어머니는 아마 사랑채나 별채에 기거를 하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당시 이 집에는 정대수 장군의 가족들이 살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문 앞에 선 안내문에 보면 「1972년 옛 집이 있던 자리로 추정되는 곳에서 대들보, 마룻대, 세살창문과 같은 집 구조물과 맷돌, 디딜방아용 절구, 솥 같은 세간들을 찾아냈다」고 적고 있다. 현재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 집 주변으로는 수령 300년이 넘는 팽나무가 서 있다. 보호수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팽나무는 수고가 25m에, 나무의 둘레는 5.2m나 되는 거목이다.



문화재 발굴조사 후 문화재지정도 고려 해

집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사집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주춧돌은 원형으로 다듬었으며, 그 위에 팔각기둥을 세웠다. 사방에는 처마 끝에 활주를 받쳐 놓았으며, 전체적으로 보아도 고택의 멋스러움이 그대로 배어있다.

여수시 문화재 관련 담당자는 내년에 발굴에 필요한 예산 신청을 했다고 한다. 발굴 후에 이 터가 정확하게 이순신 장군의 어머니가 살던 집이라고 밝혀진다면, 이곳에 복원계획도 고려해 보겠다는 것이다. 그럴 경우 현재의 집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할 것이라고.



만일 이 터가 발굴조사 후에도 정확한 고증이 들어나지 않는다면, 관광자원으로 활용을 할 것이라고 한다. 어차피 난중일기에 밝혔듯이, 송현마을에 어머니를 모셨다고 기록이 있고, 현재의 집이 당시 정대수 장군의 집터이기 때문이다. 충신이요 효자인 이충무공의 어머니가 살았다는 집터. 그곳에는 충무공에 관한 역사를 안내판을 통해 배울 수 있지만, 아직 발굴이 끝나지 않아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는 것에 아쉬움이 크다.

세계문화유산인 수원 화성.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다. 또한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정조의 정치적 포부가 담긴 곳으로,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삼기 위해 한양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곳이었다.

둘레의 길이 5,744m인 화성은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축성이 되었다. 성내의 시설물로는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砲)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의 시설물이 있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고 현재는 41개 시설물이 남아 있다.



창룡문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파손이 되었던 것을 복구하였다. 동쪽으로 난 문인 창룡문은 푸를 '창'자를 써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아래 사진을 보면 옹성 밖의 성벽이 돌출이 된 것을 볼 수 있다. 성문을 지키는 옹성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이다. '철옹성'이란 말이 생각난다.


동문인 창룡문을 들어서다

수원화성은 규장각의 문신인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1793년에 저술한 <성화주략>을 지침서로 하여 축성을 하였다.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하여 1796년 9월에 완공을 하였다. 화성 축성 시에는 거중기와 녹로 등 신기재를 특수하게 고안하여 사용하였다.

화성의 동문인 ‘창룡문(蒼龍門)’. 이 이름은 음양오행설에서 푸를 '창'자가 동쪽을 의미한다는 데에서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동방을 ‘청(淸)’이라고 하는데, 그 청을 상징하는 것인가 보다. 창룡문은 한국전쟁 당시 크게 소실된 것을 1978년에 복원하였다. 창룡문은 홍예의 크기만을 놓고 볼 때는 장안문보다 더 크다. 안팎으로 홍예를 설치하였는데, 안쪽은 높이가 16척 너비가 14척, 바깥쪽은 높이가 15척 너비가 12척, 전체 두께는 30척이다.




동문의 옹성은 밖은 벽돌로 쌓고, 안은 화강암으로 이용하여 축성을 했다. 옹성 안으로 들어가는 길은 터진 곳 밖에 없다. 성문을 깨트리는 공성무기를 안으로 옮기기도 힘들지만, 성문 앞으로 다가서면 전멸을 하게 된다. 성문은 모두 여러조각의 철퍈으로 덮어 놓았다


창룡문을 들어서면 우선 홍예의 크기에도 놀랍지만, 창룡문서부터 팔달문까지 이어지는 제1저지선이 있다는 것에 더욱 경이롭다. 용머리길이라고 하는 이 외곽의 저지선은 그 자체가 토성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루로 올라본다. 한편을 터놓고 둥글게 문을 감싸고 있는 옹성. 옹성위로도 병사들이 이동을 할 수 있어, 적이 성문으로 접근하는 것을 방비하였다. 성벽 여기저기에는 뜨거운 기름등을 부어 성벽을 타고 흐르게 만들었다. 성문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적을 막아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문루에 올라가면 옹성위로 난 길을 따라 이동을 할 수가 있다. 옹성 위 여장에는 총혈과 화살을 쏠 수 있는 구멍이 마련되어 있다. 아래로는 기름 등을 부을 수 있는 구멍도 있다. 상상만 해도 옹성 안으로 들어온 적이 어떻게 될지가 그려진다.


보물로 지정된 화서문

‘화서문(華西門)’은 화성의 서문으로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보물 제403호로 지정이 되었다. 서문인 화서문의 홍예와 문루의 제도는 모두 동문인 창룡문과 같다. 다만 좌우의 돌계단을 꺾어지게 해서 층을 만든 것이 다르다. 화서문을 둘러쌓고 있는 서옹성의 제도는 동옹성과 동일하며, 높이는 11척이다.

화서문은 안과 바깥 면 모두에 평평한 여장을 설치하고, 외면에는 방안 총혈 19개의 구멍과 활 쏘는 구멍 6개를 뚫었다. 나머지는 모두 동옹성과 같다. 화서문은 정조 19년인 1795년 7월 21일 공사를 시작하여, 정조 20년인 1796년 1월 8일에 완성을 하였다, 화서문은 서해안과 남양만 방면으로 연결되는 곳이다.



서장대에서 성벽을 떠라 내려오다가 만나게 되는 화서문. 화서문은 옛 모습을 보존하고 있어 보물 403호로 지정이 되었다


화서문의 편액은 초대 화성유수였단 채제공이 썼다고 한다. 동문인 창룡문의 옹성이 벽돌로 쌓은데 비해, 화서문의 옹성은 단단한 화강암으로 쌓아 올렸다. 문루는 양편으로 출입문을 내었으며, 안에는 마루를 깔았다.

성문, 그 위에 올라서

수원화성은 축조이후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 손실되었다. 파손된 부분을 1975~1979년까지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 복원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동문인 창룡문과 서문인 화서문, 그 위 문루에 올라서 난 무엇을 보았을까?



서문인 화서문은 문루로 오르는 계단을 꺾어 놓아 또 다른 형태로 조성을 하였다. 화성의 모든 문은 각기 특색있게 꾸며졌다. 성문의 두께도 대단하지만, 겉을 보누 철판으로 마감을 하였다.


화성의 성문들은 자연이다. 사방으로 난 길을 따라 난 성문들은, 그 형태들이 나름대로 특징을 갖고 있다. 네 곳의 문이 다 다른 모습으로 서 있다. 그 자체가 하나의 자연인양 하다. 주변의 지형에 맞게 꾸며진 사대문. 그것 하나만으로도 화성에 쏟아 부은 정성이 어느 정도였는지, 또 얼마나 심혈을 기울인 성곽인지 알만하다.



옹성 위로 올라가면 성문에 접근하는 적이 한눈에 들어온다. 공성무기조차 사용할 수 없는 화성의 문. 당시 어떻게 이런 구조물을 생각해 낸 것일까?  


사람들은 화성을 돌아보면서 참 잘 쌓은 성이라고 한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될 만하다는 칭찬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그 엄청난 성을 쌓기 위해 수많은 눈물을 이곳에 얼마나 흘린 것일까? 땀과 눈물, 창룡문의 문루 위에서 저 멀리 높게 보이는 서장대를 바라보니, 군사들의 함성과 함께 수많은 민초들의 땀으로 얼룩진 모습이 있다. 끝내 이루진 못한 이산 정조의 눈물까지.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