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거 피터님이 딸 에스더를 태우고 즐기고 있다 

 

전날(17일) 늦게까지 꽉 짜인 일정과 살인적인 무더위. 거기다가 늦은 시간까지 함께 자리한 시간으로 인해, 아침에 늦을 것이란 생각과는 달리 모두가 제 시간에 일어났다. 숙소인 사랑채 1층에 자리한 한식집에서, 콩나물 해장국으로 속을 달래고. 잠시 휴식들을 취한 파워소셜러 일행은 행궁광장으로 나갔다.

 

제주도에서 승용차를 배에 싣고 온 아이엠피터님은 가족들과 함께였다. 아들 요셉과 페이스북에서 인기스타인 딸 에스더를 데리고 함께 참석을 했다. 에스더는 생태교통에 참석한 파워쇼설러들이 거의 다 알고 있어서 이곳에서도 인기 만점. 아빠만 따라다니는 에스더로 인해 피터님은 제대로 구경을 못한 듯하다.

 

위는 시승하는 블로거 주리니님. 아래는 시범을 보이고 있는 주민에게 질문을 하고 있는 보라미랑님 

 

무동력 자동차를 시승도 해보고.

 

오전 9시 반이 되자 행궁광장에는 생태교통에서 사용할 많은 탈것이 나타났다. 수원시청 박흥수 교통안전국장이 직접 인솔해 나온 시승차들을 타보며, 파워소셜러들도 덩달아 즐거워 하기도. 이미 전날 행궁동 시범지역을 돌아보는 시간에 먼저 바이크 택시를 경험한 터라, 그것보다는 혼자서 탈 수 있는 것을 타는 시간을 가졌다.

 

몇 가지를 타본 한 소셜러는 “정말 이렇게 무공해 자전거와 자동차를 타면서 살아갈 수만 있다면, 이다음에 우리 아이들이 얼마나 좋은 환경에서 살아갈까요. 생각만 해도 행복합니다.” 라고 했다.

 

또 한 소셜러는 “정말 수원은 대단한 지자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을 타고 다니면서, 차 없는 거리를 활보할 수 있는 생태교통 수원2013이 기대가 됩니다. 자동차를 집 앞까지 타고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불편은 하겠지만, 이렇게 다양한 차들을 이용할 수 있다니 그도 색다른 한 달간의 체험이 될 듯합니다. 수원으로 이사를 오고 싶네요.”라며 크게 웃기도.

 

부산에서 올라 온 블로거 거다란님(위)와 자전거를 타보는 참교욱님

 

수원천을 따라 아트포라까지

 

탈 것들을 시승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파워소셜러 일행은 성 밖에 마련한 주차장을 보기 위해, 장안문서부터 화성의 북수문인 화홍문까지 성을 따라 걷기도. 주차장의 규모나 장소 등에 대한 설명도 듣고, 거기다가 외지에서 온 소셜러들에게 화성에 대한 다양한 설명까지 곁들이기도.

 

화홍문에서 주변 촬영을 한 일행은 수원천으로 내려가 생태하천을 따라 걸으며, 수원에 대한 또 다른 생태를 보면서 감탄을 했다. 딴 곳에서는 생태하천을 인위적으로 조성을 하고 있는데, 수원천은 복개를 한 구간도 걷어버리고, 자연천 그대로를 살려 많은 생명이 살고 있다는 것을 보면서 ‘역시 수원이네’라는 말로 칭찬을 하기도.

 

위는 탈거리 체험을 한 블로거들과 주민들. 아래는 생태교통 주차장 

 

수원천을 따라 내려간 파워소셜러 일행은 팔달문 앞 영동시장 이층에 있는 작가들의 공방인 아트포라로 올라갔다. 이곳에서 각자가 작가들을 만나 인터뷰도 하고 사진을 찍느라 분주한 시간을 보내기도. 소셜러들은 입주 작가인 윤경숙 작가가 직접 부채에 쓴 글씨를 받아들고 좋아하기도. 이곳에 책임을 맡고 있는 김춘홍 작가는 파워소셜러들에게 직접 내린 더치커피 한 통씩을 선물로 주기도 했다.

 

작가들이 정성들인 선물을 받고 즐거워하기도

 

“정말 수원 팸투어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주어서 고맙다. 어딜 가도 이렇게 팸투어에 참가를 한 블로거들에게 잘해주는 곳은 없는 듯하다. 물론 좋은 대우를 받은 만큼 더 많은 글, 좋은 글을 성의껏 쓰겠지만, 미안할 정도로 후한 대접을 받고 가는 듯하다.”

 

아트포라에 들려 입주 작가들과  기념촬영도

 

아트포라 입주 작가들과 기념촬영을 한 파워소셜러 일행은, 둘째 날의 점심을 행궁동에 있는 화성옥에서 추어정식으로 먹었다. 푸짐하게 차려진 상을 보고, 수원에는 먹거리도 다양하다고 칭찬들을 하기도. 점심을 마친 일행은 멀리서 온 사람들이 서둘러 길을 나서고, 끝으로 떠나는 사람들을 위해 수원역까지 배웅을 했다.

 

“여러분이 이렇게 우리 수원을 찾아주신 것에 대해 깊은 감사를 드린다. 불편한 점이 있었을 텐데도 잘 참아주신 것 또한 고맙다. 부디 우리 수원의 생태교통 수원2013이 성공을 할 수 있도록 파워소셜러 분들이 좋은 글을 써주시기를 부탁한다. 그리고 가을에 화성문화재 때 다시 뵐 수 있기를 가대한다.”

 

둘째날 점심을 먹은 화성옥과 잘 차려진 밥상

 

수원시 정채홍보담당관실 SNS 박사승 팀장의 인사로, 1박 2일간의 생태환경 팸투어를 모두 마쳤다. 수원역에서 헤어지면서 아쉽다고 인사를 한 소셜러들은 총총히 역사를 향해 걸음을 옮기고. 달라진 생태교통 시범지역과 인근을 돌아 본 파워소셜러들의 글이 기대된다.

 

“가장 힘든 것은 혼자 매표소를 지키다가 보니, 생리현상을 제대로 해결할 수가 없다는 점일 거예요 그래서 가급적이면 하루에 두 번 정도 밖에는 가지 않아요. 자리를 비운 사이에 관람객들이 관람권을 구하러 오거나, 화성에 대해 묻기라도 하려고 찾아왔는데 사람이 없으면 불편하니까요”

 

화성의 북수문인 화홍문 건너편 성곽 밑에 작은 임시건물이 하나 있다. ‘화성관람매표소’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이 작은 기와구조물이, 바로 김숙희씨가 근무를 하는 화성관람매표소이다. 사실 이 매표소는 화성의 6곳의 매표소 중에서는 가장 한적한 곳이다. 사람들이 많이 표를 구할 때라야 60여장 정도라고 한다.

 

 

관람객이 적다고 쉬운 일은 아니다

 

김숙희씨가 수원문화재단에서 일을 한지는 이제 5년째라고 한다. 원래 고향은 경남 거창이지만, 결혼을 하고나서 수원에 정착했다는 것.

 

“이제 저는 이곳에 근무하는 직원치고는 아직 햇병아리예요. 오래 되신 분들은 10년이 넘은 분들도 계세요. 저희는 매표소와 행궁, 안내소 등을 돌아가면서 3개월씩 근무를 하기 때문에, 꼭 어디가 편하고 어디는 힘들고 하는 것은 없어요. 저도 8월까지 이곳에 있다가 또 딴 곳으로 가서 근무를 하게 되니까요”

 

화홍문 매표소는 하루에 이용객이 가장 적다고 한다. 이곳은 화성열차를 승차하는 곳도 아니고, 딴 곳처럼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란다. 그래도 하루를 보내는 것은 어디나 똑 같다고 한다.

 

 

“아침에 9시에 근무지로 나오면 오후 6시까지 자리를 지켜야 하죠. 전에는 둘이 근무를 했는데, 지금은 혼자라서 밥을 먹거나 생리현상을 해결하거나 혼자서 알아서 해야 하죠. 또 관람객들이 이곳으로 돌아오면 검표도 해야 하기 때문에, 항상 출입문을 열어놓고 있어야 해요”

 

시비를 거는 관람객의 의사도 존중해야 해

 

아무래도 매표소에서 혼자 감당을 하다가 보면, 이러저런 일로 피곤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하루에도 몇 명씩 시비조로 이야기를 하는 관람객들이라고 함부로 대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루에 보통 두 명 꼴은 시비를 거는 분들이 계세요. 이곳은 화성열차를 하차는 할 수 있어도 승차는 하지 못하는 곳인데도 불구하고, 마구잡이로 승차를 하겠다는 분도 있고요. 표를 구입하지 않고 관람을 하겠다는 분들도 계세요. 그분들도 나름대로 의사를 표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엇이라 할 수는 없는 일이죠. 그 중에는 존중해야 할 의사도 있으니까요”

 

 

그래도 이곳은 많은 사람들이 이용을 하지 않는 곳이라 낫다는 것이다. 연무대매표소나 장안문매표소, 행궁 등은 워낙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기 때문에 힘들다는 것.

 

“그곳에 근무하는 동료들은 정말 많이 힘들어요. 올 해 1박 2일이 끝나고 나서 행궁 매표소 같은 곳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정도였어요. 엄청나게 밀려드는 관람객들로 인해 몇 사람이 달라붙어도 힘이 들었으니까요. 장안문이나 연무대는 1박 2일 촬영지라고 간판을 놓았는데 여기는 그런 표시가 없으니, 사람들이 이곳에서도 촬영을 했느냐고 물어보시죠. 화홍문에서도 퀴즈도 내고 그랬는데, 안내판이 없어 잘 모르시는 것 같아요”

 

어디에 근무하던 지 최선을 다할 터.

 

1박 2일이 끝나고 난 뒤 그렇게 밀려들던 관람객들도 지금은 소강상태라고 한다. 그러나 관람객들이 꾸준히 찾아오고 있다는 것. 매표소 앞에 있는 상점에서도 1박 2일 이후 정말 많은 관람객들이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 이후 조금 줄기는 했지만, 아직도 꾸준히 찾아오고 있다고 한다.

 

 

“날이 더워서 에어컨을 틀어도 시원한지를 모르겠어요. 그러나 제가 어느 곳에 근무를 하느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봐요. 그것보다는 제 일을 얼마나 최선을 다하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죠. 요즈음은 ‘생태교통 수원2013’ 때문에 가이드 분들이 많은 질문을 해요. 행궁 주차장이 사용을 할 수 없다는데, 어디에 차를 대느냐고요. 아직 저희들은 지침을 받은 것이 없어서 설명을 잘 해드릴 수가 없어 죄송하죠.”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하는 김숙희씨. 수원 화성을 찾는 관람객들에게 늘 미소로 대한다는 그녀로 인해, 화성을 찾은 모든 관람객들이 행복해 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장맛비가 연일 오락가락이다. 생태교통 수원2013이 열리는 행궁동 일원에 취재를 나갔다가 화홍문(화성 북수문) 앞에서 수원천으로 내려왔다. 내가 수원천을 가장 걷기 좋아하는 계절이 바로 지금이기 때문이다. 장맛비가 내리고 나면 수원천 바닥에 겨우내 싸였던 앙금이 조금은 물에 씻겨 사라지기 때문이다.

 

화홍문 앞에서 수원천 가로 조성된 천변 길. 걷기만 해도 활력이 돋는다. 푸른 수초들과 한가롭게 수원천을 유영하고 있는 오리 떼. 양편 축대를 타고 오르며 서로 높이 오르겠다고 아우성인 담쟁이들. 그리고 그 틈새에 나 몰라라 피어있는 작은 꽃들. 거기다가 팔뚝만한 물고기들이 서로 입을 물 위로 내밀며 한 마디씩 하는 듯하다.

 

 

 

여름이 좋은 수원천

 

내가 수원천을 여름이 가장 좋다고 하는 이유는 푸른 수초들 때문이다. 가을에 잎이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를 보는 맛도 일품이지만, 그것보다는 푸름을 간직하고 있는 여름이 한결 운치가 있어 보인다. 어디 그것뿐이랴, 흐르는 수원천 물에 발을 담구고 세족이라도 할 량이면 그야말로 거뜬히 여름을 이겨낼 수가 있다.

 

“시원하세요?”

“그럼요 함께 들어와 발을 담가보세요. 피서 멀리 가지 않아도 됩니다. 저는 매년 이렇게 수원천에서 여름을 보냅니다.”

 

흐르는 물에 발을 담구고 정담을 나누고 있는 사람들의 답변이다. 여름에는 아이들도 수원천에서 물장구를 치며 놀기도 한다. 그런 수원천을 비가 멎은 후 걷는다는 것이, 바로 요즈음 대세인 ‘힐링’이란 생각이다.

 

 

항상 하는 생각이지만 힐링이란 돈을 들여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저 편하게 내가 즐길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가장 좋은 힐링이 아니겠는가? 아주 천천히 풀냄새를 맡으면 걸어보는 수원천. 그 안에 오만 잡동사니 같은 생각들을 다 잊을 수가 있다. 풀 냄새 하나 만으로도 머리가 맑아지는 수원천이다.

 

“비가 온 다음 수원천을 걸으면 정말 행복합니다.”

 

아이와 함께 손을 잡고 수원천 갓길을 걷던 한 어르신의 말씀이다. 그만큼 수원천은 수원사람들 만이 아닌, 수원을 찾아 온 사람들이 즐겨 걷는 곳이 되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수원천을 따라 걷다가 소리를 친다.

 

“오리들 좀 봐. 비에 젖은 몸을 말리고 있나봐”

 

잠시 비가 갠 틈에 오리들이 물이 흐르고 있는 바위 위에 올라 쉬고 있다. 그런 모습들이 잠시나마 행복을 느끼게 해주는 곳이 비로 수원천이다. 물과 풀, 그리고 물고기와 날짐승. 그런 것들이 그저 눈을 편하게 해준다.

 

 

이게 무슨 ‘옥에 티’람.

 

그저 행복함에 젖어 걷는 수원천이다. 걷고만 있어도 행복이 밀려온다. 사람들은 그런 작은 행복을 느끼면서, 절로 얼굴에 미소를 띤다. 그런데 몇 사람이 벽을 보며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 눈에 띤다. 바로 매향교 밑이다. 무슨 일인가 궁금하여 함께 들여다본다.

 

“이거 작년에 사람들이 열심히 그려대더니 벌써 이렇게 흉물이 되었네.”

“그러게나 말야. 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코팅을 하지 않았나보지”

“설마, 물가에 그림을 그리면 일반 벽보다 먼저 부식이 된다는 것을 모르고 조성한 것은 아니겠지”

 

 

얼굴이 화끈거린다. 수원천을 즐겨 걷는 나도, 지난해에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을 보고 코팅을 하지 않으면 쉽게 벗겨진다고 이야기를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9월이 되면 생태교통 수원2013이 행궁동 일원에서 열린다. 그때는 많은 사람들이 수원천을 걸어 이동을 할 것이다. 그 많은 사람들이 이런 흉물을 본다면 무엇이라고 할까? 그 전에 이 타일에 그린 그림들이 제 모습으로 돌아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화성 중에서 가장 큰 조형물은 장안문이다. 밖에서 바라다보는 장안문의 위용은 역시 ‘장안문 답다’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장안(長安)’이란 수도를 상징하는 말이다. 이 장안문은 화성의 정문이라고 할 수 있다. 동문인 창룡문이 화성의 백성들의 출입을 관장하는 문이라면, 북문인 장안문은 남북을 가로지르는 길목에 서 있는 문으로 정조 이산의 꿈이 그곳에 서려있는 문이기도 하다.

 

밖에서 볼 수 있는 옹성의 벽은 양 옆면에 총안과 현안을 둔 ‘철형여장(凸形女墻)’을 쌓았다. 옹성의 중앙에는 성문과 맞추어 홍예문을 설치하고, 그 위에 5개의 원형구멍을 낸 오성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양 대문 모두 안쪽으로 정면과 측면이 각각 한 칸인 누각을 세웠다.

 

 

 

장안문에 담긴 정조의 큰 뜻은?

 

장안문에 걸린 편액은 참판을 지낸 조윤형이 썼다고 한다. 서울의 숭례문과 같은 형태로 조성을 하였다는 이 장안문은, 우리나라 성곽의 문루 중에서 장점만 따서 축조를 했다고 한다. 하기에 가장 견고하고 웅장한 것이 바로 화성의 장안문이다.

 

정조는 왜 화성의 북문을 ‘장안문’이라고 이름을 붙였을까? 1794년 2월 28일, 화성유수부의 북쪽, 장안문을 축조하기 위한 자리에서, 이유경은 북문 성곽 터에 제단을 쌓고 고유제를 올렸다. 원래 장안문을 세울 자리는, 현재 장안문의 자리가 아니었다. 처음에 정약용이 계획한 화성의 길이는, 3,600보인 4.2km였기 때문이다.

 

1794년 1월 14일 화성의 공사현장으로 내려 온 정조는, 백성들이 살고 있는 민가에 깃발이 꽂힌 것을 보았다. 당시 장안문 앞에는 영화역이 있었고, 그 앞에는 장시가 이미 서 있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이주를 해 살고 있었다. 그런 곳에 무수히 꽂힌 깃발을 보고 그 이유를 물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채제공이 물음에 대답하기를, 화성을 축조하기 위해 백성들이 이주를 할 곳이라는 대답이다. 정조는 즉시 이곳으로 이주를 해온 백성들이 또 이주를 하는 불행을 겪지 않게 성벽을 구부렸다 폈다 반복해, 백성들의 민가를 다치지 않게 민가 밖으로 성을 쌓으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곳서부터 방화수류정까지는 화성이 구불구불하고, 덕분에 성의 길이가 길어졌다.

 

 

장안문에만 있는 적대

 

장안문의 양편에는 적대라는 구조물이 서 있다. 화성의 적대는 두 곳으로, 각각 장안문의 좌우 53보 되는 곳에 있다. 적대 안에는 활과 불화살, 화창 등을 대 위에 갖추어 둔다고 하였다. 적대란 성곽의 중간에 약 82.6m의 간격을 두고 성곽보다 다소 높은 대를 마련하여 무기를 비치해 두기도 하고, 적군의 동태와 접근을 감시하는 곳으로 옛날 축성법에 따른 성곽 시설물이다.

 

적대는 장안문을 보호하는 시설이다. 그리고 장안문에만 유별나게 적대라는 구조물이 양 옆에 포진하고 있는 것이다. 그 위에는 당시의 가장 강력한 화기인 홍이포가 북을 향해 시커먼 구멍을 열고 있다. 아마도 정조가 이 북문을 장안이라고 하고, 그 양편에 적대를 마련한 것은 상징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바로 북벌의 상징 말이다.

 

 

 

성돌 들이 말을 걸어온다.

 

장안문을 지나 방화수류정 쪽으로 걷다가 보면, 성돌이 말을 하자고 덤벼든다. 휘어진 성벽 저 끝에 북동포루가 보인다. 북동포루는 화홍문 서쪽 124보 3척쯤 되는 거리에 있다. 포를 쏘는 구조물인 포루는 성의 몸체에 凸 자 모양을 붙여 치성과 비슷하게 하고, 그 위에 포사를 지었는데 3층으로 하여 그 가운데를 비운 점이 마치 공심돈의 구조와 비슷하다.

 

이 포루는 모두 벽돌을 사용하여 만들었는데, 그 안에 화포를 많이 감추어 두어 위아래에서 한꺼번에 포를 쏘게 하였다. 생각을 해보라, 장안문을 공격하려고 덤벼드는 적들은 멀리서부터 곤욕을 치루어야 한다. 성문의 옹성에서 까맣게 하늘을 가리고 쏟아져 나오는 화살도 그렇지만, 양편의 적대와 포루에서 한꺼번에 쏘아대는 포는 그 위력이 대단했을 것이다.

 

 

포루를 항해서 걷다가 보면 성돌에 흔적들이 보인다. 성돌을 쪼아내기 위해 파 놓은 흠집이다. 그 안에 마른나무를 끼어 넣고 물을 부으면, 나무들이 불어나 돌을 쪼개는 것이다. 저 구멍들은 불평을 한다. 석공이 자릴 잘못 잡아 제 구실을 못하고, 이렇게 성벽에 얼굴을 내밀어 부끄럽다는 것이다.

 

수원팔경 중에 이경(二景)을 만나다

 

광교(光敎)에서 발원한 대천(=수원천)이 가로로 화성을 자르며 흐르고 있다. 이 대천이 여름 장마 때마다 범람하는 환난이 있었다. 그래서 성을 쌓기 시작할 때에 물길을 내는 일을 먼저 하였다. 넓혀서 소통을 시키고 7간의 홍예로 된 돌다리를 하천 위에 걸쳐서 설치하였다. 7개의 안팎 홍예 사이에는 각각 좌우에 돌기둥 4개를 세웠다.

 

 

화홍문이란 말 그대로 수문의 모양이 무지개처럼 생겨 붙여진 이름이다. 물이 넘쳐흐를 때 생겨나는 물보라의 장관을 화홍관창(華虹觀漲)이라 하여, 수원 팔경 중에 하나로 손꼽힐 정도다.

 

동북각루는 북성(화성의 북쪽)의 서북 19보 용연의 위에 있다. 광교산의 한 쪽 기슭이 남으로 벋어내려 선암산이 되었고, 다시 서쪽으로 감돌아 몇 리를 내려가 용두에서 그쳐 북쪽을 향하여 활짝 열려있다. 용두란 것은 용연의 위에 불쑥 솟은 바위이다. 성이 이곳에 이르면 산과 들이 만나게 되고, 물이 돌아서 아래로 흘러 대천에 이르게 된다.

 

 

이 풍광에 술 한 잔 없다면, 어찌 사내라 할 것인가?

 

수원팔경 중에는 ‘용지대월’이 있다. 바로 이 용연 위에 달이 떠 비치는 아름다움을 그린 것이다. 동북각루에 걸린 편액에는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이라 하였으며, 참판이었던 조윤형이 썼다고 한다. 화홍문에서 용연으로 가는 징검다리를 건너다보면, 못의 서쪽에 석각 이두를 설치하였다. 이는 용여에 물이 많이 차면 이 이두로 물을 화홍문 밖으로 뿜어낼 수가 있는 시설이다.

 

용연은 모양이 반달처럼 생겼다고 했다. 둘레가 210보, 깊이 6척이고, 못의 가운데에는 작은 섬이 있다. 못 위 성의 모퉁이에는 방화수류정이 있고, 정자 아래에 있는 바위는 옛날부터 용머리라 하여 낚시터로 삼을 만하다고 하였다. 이곳에서 해가 지기를 기다린다. 일몰 후 14분이 지나면 화성은 온통 불빛으로 아름답게 채색을 한다.

 

 

의자에 앉아 조금 기다리고 있으려니 방화수류정이 갑자기 변해버렸다. 조명으로 인해 이런 모습으로 바뀔 줄이야. 이 풍광을 보고 술 한 잔 하지 않는다면, 어찌 사내라 할 것인가? 이번에는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난다. 바로 저 아름다움이 눈에서 가시기 전에, 풍광을 잊지 않고 곡차에 몸을 적시기 위해서이다.

화성에는 두 개의 수문이 있다. 바로 북수문인 화홍문과 남수문이다. 남수문가지 복원되어 수원천의 물길이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 북수문은 칠간수문으로, 남수문은 구간수문으로 생김새는 전혀 딴판이다. 북수문 위에 건립된 누각에 화홍문(華虹門)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화홍문이란 말 그대로 수문의 모양이 무지개처럼 생겨 붙여진 이름이다. 물이 넘쳐흐를 때 생겨나는 물보라의 장관을 화홍관창(華虹觀漲)이라 하여, 수원 팔경 중에 하나로 손꼽힐 정도다.  

 

화강암으로 쌓은 북수문

 

화홍문은 화강암으로 쌓았다. 잘 다듬어진 화강암으로 조성한 화홍문은 보기에도 여간 단단해 보이지를 않는다. 아마 이러한 수문이기에 그 오랜 시간 많은 물을 맞으면서도, 아직도 옛 모습 그대로인지도 모르겠다.

 

 

바닥 역시 화강암을 다듬은 장대석으로 기단을 놓았다. 7개의 수구가 있는 화홍문은 지금은 없어졌으나, 원래는 쇠창살로 막아 외부의 출입을 차단하였다. 수문 옆 양편에 쌓은 축대도 당시에는 없었을 것이다. 넓은 내를 이루며 흐르는 물이 수구로 빨려 들어가는 모습 또한 장관이었을 것으로 생각이 든다.

 

이 화홍문 위에 누각을 만들어 놓았다. 지금도 봄철부터 가을까지 많은 사람들이 이 누각에 올라 쉬어간다. 여름철이면 특히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피서를 즐기는 곳이기도 하다. 누각은 이층으로 되어있으며, 아래는 군사들이 들어가 적을 맞아 싸울 수 있도록 하였다. 위는 장대석으로 계단을 만들어 양편에서 오를 수 있도록 하였으며, 지금은 문이 없지만 예전에는 문을 달았던 흔적이 보인다.


 

 

 

아름다운 누각, 수문과 조화를 이뤄

 

화홍문은 전체적으로 보면 수구와 누각으로 구분이 되어있다. 누각은 2층으로 아래층은 전술에 필요한 공간이고, 이층은 쉴 수 있는 공간이다. 문이 있었을 당시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를 생각하면, 오히려 지금보다도 더 아름다웠을 것이란 생각이다. 한 겨울에도 병사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이었으니 말이다.

 

누각의 아래는 살창으로 문을 내었다. 그것은 앞면이 벽돌로 막혀있어, 성 안쪽으로는 바람이 통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한 것으로 보인다. 누각의 밑에 성 안쪽으로 난 살창문을 들어서면 장정이 고개를 숙여서 움직일 만한 높이의 공간이 있고, 밖으로는 안혈(眼穴)을 냈다. 북수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막기 위한 총이나 활을 쏠 수 있는 구멍이다. 그저 수문 위에 서 있는 아름다운 누각인 듯 하지만, 철저하게 전쟁을 대비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이 바로 화홍문의 멋이 아닌가 생각한다.

 

 

 

 

 

살창문의 양 옆으로는 검은 벽돌을 이용해 문양을 넣었다. 양편에 있는 문양으로 인해 누각이 더 아름다워 보인다. 누각의 앙 옆의 성곽은 돌이 아닌 흑벽돌로 쌓은 점도 돋보인다. 투박하지가 않아 누각의 형태에 중압감을 주지 않았다. 이렇게 하나하나 세세한 부분까지도 미적인 감각을 볼 수 있기 때문에 화성이 더 소중하게 여겨진다.

 

 누 위에 오르면 절로 시 한 수 나와

 

화홍문의 누각 위에 오르면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이다. 성 밖으로 보면 우측에 연지가 있고, 성벽을 따라 바라보면 그 유명한 방화수류정이 보인다. 그리고 좌측으로는 조금 떨어져 북문이 우뚝 서 있다. 수문을 지나는 물소리가 귓전을 간질인다. 수문 안쪽은 돌로 바닥을 깔고 격차를 두어 물이 낙수치는 소리를 듣게 만들었다. 그런 자연 하나도 거스르지 않고 조성을 한 것이 바로 화성의 멋이다.

 

 

 

 

누각 위 마루로 깐 바닥이 편안하게 만든다. 흡사 사랑방 앞의 대청마루 같은 느낌이 든다. 그 주변에 두른 난간도, 어느 경치 좋은 계곡 물가에 지은 정자 같기만 하다. 전쟁을 위한 성곽이면서도 결코 자연을 벗어나지 않고, 자연 안에서 꾸며진 화홍문. 성곽으로서의 기능도 뛰어나지만, 그 모습 또한 장관이 아닐 수 없다.   


화성을 돌아보면 언제나 느끼는 것이, 어떻게 이렇게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조성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화홍문 역시 그 아름다움의 한 부분이다. 싸움터이면서도 커다란 자연의 조형물 같은 화성. 그리고 수문이면서도 누정과 같은 화홍문. 언제나 찾아가도, 늘 그 아름다움에 빠져들고는 한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