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볼라벤'은 국보와 보물급 문화재에도 상처를 남겼다. 바람이 강하게 부는 속초 등에서 실제로 목격한 바로는, 기왓장 등이 수시로 바람에 날리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럴 당시 바람은 초속 10~15m 정도였던 것을 감안하면, 이번 태풍 블라벤의 바람은 기왓장 정도는 당연히 날아갈 것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

 

태풍 '볼라벤'의 영향으로 오늘 오전 국보 67호인 전남 구례 화엄사 각황전 기와 일부가 파손되었으며. 또 보물 396호인 여수 흥국사 대웅전 용마루 일부도 파손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아무래도 사찰 등은 지붕을 기와로 올리기 때문에, 그만큼 태풍이 강한 바람을 동반하면 전각의 지붕들이 가장 심한 피해를 당하기도 한다.

 

 

전라남도가 문화재청에 보고한 것으로 밝혀진 문화재의 훼손은, 국보 각황전과 보물 흥국사 대웅전 정도겠지만, 태풍이 끝난 뒤 전국의 사찰 등에서는 기왓장이 훼손 등이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볼라벤은 내륙으로 진입을 했다고 하지만, 문제는 14호 태풍인 덴빈이 바로 올라온다고 한다. 문화재 보존 등에 각별한 주의를 요하는 대목이다.

 


 

참 그동안 세상을 헛살았다는 반성을 해본다. 바람이 찬 방에서 괜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보니, 그동안 세상을 살아 온 것에 대한 뼈저린 후회를 하게 만든다. 갑자기 왜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일까? 그저 쉽게 얻을 수 있는 답은 ‘나이가 먹긴 먹었구나.’하는 대답이 맞을 것이리라.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달려가 무릎이라도 꿇고 펑펑 울부짖고 싶은 심정이다. 왜 그토록 긴 시간을, 한 번도 내가 정말로 불효자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을까? 매번 효가 어쩌고저쩌고 입만 벌리면 떠들어 대던 내가 아니던가. 그러면서도 정작 나는 얼마나 불효를 하고 있는지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니. 고개를 들 수가 없다.


효를 깨우쳐주는 구례 화엄사 효대에 있는 사사자삼층석탑. 몇 번이고 찾아갔으면서도 반성을 하지못했다.

부모님의 마음을 이제야 이해를 하다니


날이 춥다. 이 추운 날에 괜히 날이 춥다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이런 추운 날씨에 좀 더 환경이 좋은 곳에서 살아갈 수 없는 것에 대한 불평만 늘어놓고 살았다. 그런데 곰곰 생각을 해보니, 예전에는 지금보다 훨씬 추웠다는 생각이다. 그 추운 날 부모님들은 어떻게 사셨을까? 행여 감기라도 걸릴까보아서 늘 감싸주셨다. 그런 마음조차 헤아리지 못하고 살았다.


“죽을 때가 되면 사람이 변한다.”고 한다. 주변에 지인들이 요즈음 왜 그런 말을 자주 하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죽을 때가 되었거나, 나이가 먹었거나 그런 것만은 아니다. 내가 고통스럽다가 보니, 그 고통보다 몇 배나 더 힘든 고통을 참아가며 살아오셨던 분들이 생각이 나기 때문이다.


사람은 닥쳐보아야 안다고 했던가? 이제 와서 때늦은 후회를 해보지만 그것이 무슨 소용일까? 참 무던히도 속을 썩여드렸다. 하라는 것은 마다하고 내가 좋아라 하는 일만을 고집스레 해왔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 아무리 철이 없는 나이였다고 하지만, 좋은 직장을 말 한마디 없이 그만두고 나와 방황을 한 것이 30년 세월이 지나버렸다.



뒤늦은 후회, 그러나 눈물을 닦아줄 부모님은...


이제 나이 60이 넘어서 그토록 모자란 세월을 살았다는 것을 후회해본다. 그러나 아무리 마음속으로 통곡을 한들 어찌 할 방법이 없다. 그 통곡을 들어줄 분도, 흐르는 눈물을 닦아줄 분들도 안계시니. 참 바보스럽게 세상을 살아왔다는 것을 후회해보지만, 이렇게 때는 늦어버렸다는 것에 머리를 쥐어뜯고만 싶다.


음력으로 내일이면 한 해가 저문다. 늘 음력의 생활에 젖어있는 나로서는, 2월 3일 설날이 오기 전인 내일이라도 아버님 묘역을 찾아보아야겠다. 그곳에서 지난 시간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잘못이라도 빌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가지 내가 살아 온 세월이 정말로 무의미해진다는 생각이다.



이제 얼마나 남았을까? 그런 생각이 아니다. 그저 몇 날이 남았거나 이제는 달리 살고 싶다. 부모님만이 아니라 그동안 나로 인해 작은 상처라도 받은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 모두에게 잘못을 빌고 싶다. 올 한해는 그렇게 살고 싶다. 입을 다물고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살고 싶다. 설을 맞이하는 마음에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싶은 마음이다. 부모님께조차 불효를 한 주제에, 무슨 말을 할 자격이나 있을까? 허허로운 마음 하나 짊어지고 가면 될 것을.

전남 구례 화엄사, 하왐사상의 중심지로,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어 화엄종을 널리 알리던 절이다. 신라 후기에는 도선스님에 의해 크게 확장되었다. 회엄사가 더욱 그 사세를 떨친 것은 고려 문종 때이다.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화엄사에 매년 곡물을 바치도록 허락해 주었다고 하니, 당시 화엄사의 사세를 알 수가 있다. 이는 고려가 국교를 불교로 했고, 화엄사는 화엄사상의 중심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당시 화엄사 일주문 밖에는 큰 창고를 짓고, 경상도와 잔라도에서 실어오는 곡물을 저장했다고 한다. 화엄사는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7년 만에 여러 건물들을 다시 세웠다. 그 뒤로도 여러 번의 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많은 전각들이 중창되었다.



각황전 한편에 자리한 사자탑

화엄사 각황전 앞에 난 계단을 오르면 우측에 탑이 서 있다. 보물 제300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이 탑은 <화엄사 사자탑>이다.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조성한 독특한 석탑으로, 네 마리의 사자가 길쭉하고 네모난 돌을 이고 있는 모습이다. 이런 형태를 사찰에서는 '노주'라고 부르는데, 무엇으로 사용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일설에는 불사리를 모셔놓은 것이라 하기도 하고, 불가의 공양대로 쓰였을 것이라는 추측만 있을 뿐이다.

기단은 이층으로 꾸며졌으며, 위층 기단을 네 마리의 사자가 머리에 받침돌을 이고 그 위에 비를 받치고 있다. 그 모습은 각황전 뒤 효대에 있는 국보 제35호인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을 모방했으니, 조각수법 등은 이에 미치지 못한다. 조성시기도 사사자삼층석탑보다 뒤인 9세기경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비의 형태로 만들어진 탑이 독특해

탑을 받치는 역할을 하는 기단은 2단이다. 아래층 기단은 문양이 없는 단순한 석재를 이용해 꾸며 놓았다. 소박하면서도 꾸밈이 없는 모습은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로 넘어갈 당시의 석조물인 듯 하다. 이 탑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인 위층 기단의 각 모서리에 사자상을 놓은 모습이다. 사자들은 비스듬히 밖을 바라다보고 있으며, 그 표정이 각각 다르다.

네 마리의 사자들은 연꽃받침 위에 앉아, 연꽃이 조각된 돌을 머리에 이고 있다. 아마 불교적인 형태를 강조하기 위한 조각품으로 보인다. 이런 조각을 보아 이 사자탑ㅁ이 사리탑이었을 것이란 조심스런 추정을 해본다. 네 마리의 사자가 몸돌의 받침돌을 이고 있는데, 탑신에는 직육면체 모양의 몸돌이 있다. 몸돌의 각 면에는 직사각형의 테두리를 둘렀으며, 그 안에 신장상을 조각하였다. 몸돌 위에는 1장의 판돌이 있는데, 밑면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고 윗면에는 반구형의 돌이 솟아 있다.



몸돌에는 네모나게 판 후 그 안에 신장상을 조각하였다.

무엇에 쓰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는 화엄사 사자탑. 아마 당시에는 소중한 절의 기물로 여겼을 것이란 생각이다. 수많은 불교 유물이 전하지만, 아직은 지식이 모두에 미치지 못함이 안타깝다. 사자탑을 돌아보면서도 여러가지 생각을 해보지만, 짧기만한 지식을 어찌하랴. 해가 떨어지는 시간에 더 지체를 못하고, 아쉬움으로 뒤만 연신 돌아본다.

얼마나 어머니의 정성에 감복을 하였으면, 직접 탑을 조성하고 스스로 어머니에게 공양을 올리는 자신의 모습을 조성하였을까? 화엄사 각황전 뒤편에 있는 ‘효대’는 어머니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한 연기조사의 사사자 삼층석탑으로 인해 효를 상징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국보 제35호인 이 사사자 삼층석탑은 신라 진흥왕 5년인 544년에 연기조사가 화엄사에 조성한 것으로 탑 안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 72과를 봉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사자 삼충석탑은 주변이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화엄사 서북쪽의 제일 높은 대지에 조성을 했으며 이 석탑이 있는 효대에는 연기조사가 어머니에게 공양을 올리는 형상이라는 석등과 마주보고 서 있다. 석탑은 2단의 기단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이다.


신라 최고의 걸작품 3층 석탑

2단으로 꾸며진 기단의 아래층에는 각 면에는 천인상을 돋을 새김하였다. 한 면에 3구씩 모두 12구의 천인상이 새겨져 있으며, 춤을 추고 악기를 연주하며, 공양물을 들고 있다. 이 기단석만으로도 뛰어난 걸작품이다. 그 위에는 사방에 암수 사자가 입을 벌리고 밖을 향해 앉아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사자들에 둘러싸인 스님의 입상이 서 있다. 이 스님상이 연기조사의 어머니를 형용한 것이라고 한다.

그 앞에 석등을 머리에 이고 한 무릎을 세워 앉아있는 공양상은, 손이 공양물을 받쳐 들고 있다. 연기조사 스스로가 어머니를 위한 공양을 올리는 것을 상징하였다고 하며, 공양물은 차로 어머니에게 향한 연기조사의 효심을 알아볼 수 있는 조각상이다. 이 두 가지의 조각품을 합해 사사자 삼층석탐이라 하며, 국보 제20호인 불국사 다보탑과 더불어 우리나라 이형석탑의 쌍벽을 이룬다고 한다.





조각예술의 극치라는 사사자 삼층석탑의 기단부

3층의 몸돌에도 뛰어난 조각이

3층으로 구성된 몸돌은 1층 몸돌에 문짝 모양을 본떠 새기고, 양 옆으로 인왕상, 사천왕상, 보살상을 조각했다. 사면에 각각 조각을 한 상들도 뛰어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지붕돌은 5단씩의 받침으로 평평하게 했으며, 처마는 네 귀퉁이만 살짝 치켜올려 여유로움을 보인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과 엎어놓은 그릇과 같은 복발만이 남아있다.

이 사사자 삼층석탑은 각 부분의 조각이 뛰어나며, 몸돌의 위에 올린 지붕돌에서 경쾌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어, 통일신라 전성기인 8세기 중엽에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화엄사를 찾아갈 때마다 오르는 효대. 이곳을 찾을 때마다 지난 날 어머니께 효도를 하지 못한 것이 마음이 아프다. 그래서 이 효대를 찾아 무릎을 꿇을 때마다 눈물이 흐른다. 차라리 이 잎 석등 안에 쪼그리고 앉은 연기조사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삼층석탑의 석탑부와(위) 석탑 앞 석등의 공양상(가운데) 공양상은 연기조사 본인이라고 전한다(아래)
 
전국을 다니면서 수 없이 많은 석조물들을 보아왔지만, 이 효대에서 만나는 사사자 삼층석탑은 늘 고개를 조아리게 만든다. 공양상인 석등 뒤편에 마련한 자리에서 고개를 떨어트리고 일어날 수 없는 것은, 부끄럽기 때문만은 아니다. 어떻게 이런 대단한 조각품을 조성할 수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그 옛날 손으로 일일이 돌을 다듬어 만든 사사자 삼충석탑. 기단부에 돋을 새김한 비천상은 금방이라도 하늘로 날아오를 것만 같고, 1층 몸돌에 새겨진 사천왕상들은 바로 문을 열고 박으로 뛰쳐나올 것만 같다. 넋을 뺐기고 보고 있는데 저녁예불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보니 벌써 시간이 꽤 지났다. 동행한 일행의 재촉하는 소리에 석탑을 뒤로하고 떠나면서도, 마음은 그곳에 두었나보다. 조금이라도 그 모습을 더 보려는 안타까움에.

석탑 앞에 있는 배례석. 배례석 하나만으로도 가치를 지니고 있다. 


소중한 문화재 중에서 가장 그 가치가 뛰어나서 지정을 하는 국보, 이 국보와 국보가 만나면 그 아름다움이 과연 배가가 될까? 아마 이렇게 국보와 국보가 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만큼 국보의 숫자도 적으려니와, 야외에서 한 자리에 두 점의 국보를 만나기가 쉽지가 않기 때문이다.

구례 화엄사. 지리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화엄사는 백제 성왕 22년인 544년에 인도 스님이신 연기조사가, 대웅상적광전과 해회당을 짓고 화엄사를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백제 법왕 때인 599년에는 3천여 명의 승려들이 있었다고 하니, 그 크기가 어느 정도일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화엄사 경내에 세워진 국보 각황전과 국보 석등

자장율사로 인해 신라 때 절로 알려져

신라 선덕여왕 14년인 645에 자장율사가 부처님 진신사리 73과를 모신, 사사자 삼층 사리석탑과 공양탑을 각황전 뒤편에 세웠다. 원효대사는 해회당에서 화랑도들에게 화엄사상을 가르쳐, 삼국통일을 이루게 하는 기초를 마련하였다. 또 문무왕 17년인 677년에 의상조사는 2층 4면 7칸의 사상벽에 화엄경을 돌에 새기고, 황금장육불상을 모신 장육전(지금의 각황전)과 석등을 조성하였다. 이렇게 자장율사를 거쳐 원효, 의상 등의 스님들이 화엄사에 중창을 하였으므로, 화엄사가 신라시대 절이라고 하는가보다.

화엄사는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타버린 것을 인조 때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국보 제67호 각황전 터에는 3층의 장륙전이 있었고, 사방의 벽에 화엄경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조선 숙종 28년인 1702년에, 이층으로 건물을 다시 지었으며 ‘각황전’이란 전각의 명칭을 숙종이 지어 현판을 내린 것이라고 한다.



국보 각황전, 밖에서 보면 2층의 전각이지만, 안으로는 퉁층으로 꾸며져 있다.

각황전 앞에 감히 서질 못하다.

각황전 앞에 서면 사람이 압도당한다. 신라시대에 쌓은 것으로 보이는 장대석의 기단석 위에 정면 7칸, 측면 5칸 규모로 지은 2층 전각이다. 팔작지붕으로 지어진 각황전은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계 양식이로 매우 화려한 느낌을 준다. 건물 안쪽은 위 아래층이 트인 통층으로 되어있으며, 세분의 여래불과 네 분의 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무슨 깊은 사연이 있는 것일까? 쉬지 않고 예를 올리는 여인에게.

밖에서 보면 이층인 전각으로 꾸며졌으나, 안을 보면 단층이다. 워낙 전각의 규모가 크다보니 중간에 기둥을 세워 받쳐놓았다. 그 안의 공포의 장식 등이 화려하다. 각황전 안을 들여다보면서 그 거대함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각황전 동편 출입구 앞에 신발 한 켤레가 놓여있다. 누군가 간절한 소망을 이루기 위해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예불을 올린다. 걷기도 더운 날에 저리 온 마음을 다한다면, 여래불과 보살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듯하다.

최대의 석등은 그 자체만으로도 최고였다.

국보 제12호인 각황전 앞에 세워진 석등은, 전체 높이 6.4m로 한국에서 가장 커다란 규모이다. 석등은 부처의 광명을 상징한다 하여 광명등이라고도 부른다. 불을 밝히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올린 후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를 하였다. 통일신라 때인 헌안왕 4년인 860년에서, 경문왕 13년인 873년 사이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석등. 팔각의 지대석 위 아래받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큼직하게 조각해 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는 배가 불룩한 장고 모양의 기둥을 세웠다. 이런 배가 부른 기둥은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한 형태이다.



국보 석등은 아름답다. 기단석과 중간의 장고형 기둥

배가 부른 기둥 위로는 돋을새김을 한 연꽃무늬를 조각한, 위 받침돌을 두어 화사석을 받치도록 하였으며, 팔각으로 이루어진 화사석은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4개의 큼직한 창을 뚫어 놓았다. 팔각의 지붕돌은 귀꽃이 화려하게 장식이 되어 있으며, 위로는 머리 장식이 온전하게 남아있어 전체적인 완성미를 더해준다.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손꼽히는 석등과 국보 각황전. 이 두 점의 국보가 만들어내는 정경은 말로 형용하기가 힘들다. 어디서 이런 모습을 볼 수가 있으려나. 해가 짧아진 오후에 걸음을 재촉하면서도 쉽게 떠날 수 없는 것은, 그 모습에 취했음이다. 저녁나절 국보와 국보가 만나며 보여주는 아름다움은, 앞으로도 쉽게 만나지 못할 멋진 모습이다.


화사석에는 네 곳의 창을 내고, 머리 위에는 귀꽃이 아름다운 머릿돌을 올렸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