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부터 시작한 ‘화성 겉돌기’가 끄트머리에 왔다. 팔달산을 오르다가 만나게 되는 남포루에서 서남암문을 지나 용도의 중간에서 만나게 되는 용도동치와, 팔달사의 능선 끝에 자리한 서남각루인 화양루의 구간이다. 약 600m정도의 이 구간은 팔달산으로 오르는 길이다. 10월 26일 오후, 팔달산에는 가을이 짙게 물들어 있었다.

 

남치를 벗어나 천천히 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한 기온이지만, 한낮의 기온은 땀을 나게 만든다. 그저 성벽을 하나하나 손끝으로 느끼면서 오르다가 보니, 성에 아치형의 문이 나있다. 이 길을 따라서면 팔달산 중턱에 있는 화성을 지켜준다는 신을 모신 성신사가 나온다.

 

 

가을을 느끼며 걷다

 

조금 안으로 걸어본다. 팔달산이 나무들이 붉은 색으로 옷을 입었다. 사람들은 화성을 돌아보는 화성열차에 몸을 싣고 그 가을을 느껴보는가 보다. 다시 걸음을 옮겨 성벽 밖으로 돌아 길을 오른다. 남포루가 성벽 밖으로 돌출이 되어 서 있다. 남포루는 팔달산의 오르막에 자리를 하면서, 팔달문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물인 듯하다.

 

남포루의 또 하나의 기능은 팔달산으로 오르는 적들에게 공격을 하여 서남각루인 화양루를 보호하기 위한 곳이기도 하다. 3층으로 된 포루에서 쏘아대는 포와 총 등을 피하기가 어려웠을 듯하다. 눈을 감고 상상을 해본다. 저렇게 비탈을 올라야 하는 것도 쉽지가 않았을 텐데, 거기다가 포까지 쏘아대는 포루로 인해 용도를 공격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화성의 5곳의 포루 중 하나인 남포루는 1796년 7월 9일에 완성되었으며, 만드는데 3,203냥의 비용이 들었다. 포루를 지나 팔달산의 능선을 향해 오른다. 갑자기 길이 가파르게 변한다. 그리고 그 위에 서남암문이 자리하고 있다. 서남암문은 용도로 군량을 옮기는 병력을 이동시키기 위한 곳으로, 암문 중에서는 유일하게 밖으로 나갈 수가 없는 곳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다

 

용도의 시작점인 서남암문을 올려다보면서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이곳에는 성 밖으로 노송들이 즐비하게 서 있어, 갈을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용도에는 중간에 동서로 치가 한 곳씩 있다. 그 동편의 치를 끼고 돌아 서남각루로 향한다. 지난 9월, 비가 몹시 심하게 뿌리던 날, 이곳에서 화성 밖으로 걷기를 시작했다.

 

 

 

그 마지막 구간인 11번째의 구간. 그저 계속 걸으면 두 시간, 사진 촬영을 꼼꼼히 하면서 걸어도 4시간이면 충분할 거리를 2달 만에 끝을 내다니. 물론 게으르기 때문은 아니다. 그저 가는 계절에 따라 조금씩 변화된 모습으로 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성은 역시 밖으로 돌아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언젠가는 완전한 성을 돌아보고 싶다.

 

옛날 제도에 따르면 ‘용도(甬道)’란 것은 군량을 운반하기 위하여 보이지 않게 서남암문서부터 화양루까지 능선을 따라 낸 길이다. 팔달산의 남쪽 기슭 한 가닥은 성 밖으로 나와서 별안간 높이 솟아 사방의 들을 내려다보게 되어 있다. 만약에 이곳을 막아 지키지 않아서, 적군이 먼저 올라가게 한다면 성의 허실을 모두 엿볼 수가 있다. 하기에 이곳은 화성에서도 가장 중요한 곳 중 한 곳이다.

 

 

그렇게 화상을 밖으로 돌아보기가 끝났다. 화성 겉돌기를 하면서 성안에서는 느낄 수 없는, 또 다른 화성의 진면목을 보았다. 화성은 자연을 벗어나지 않는 아름다운 성이라는 것을, 밖으로 돌아보지 않으면 절대로 느낄 수가 없다. 그래서 화성의 겉돌기는 화성에 대해 더 많은 것들을 알아보는 시간이 되었다. 언젠가는 완전히 이어진 화성 겉돌기를 다시 한 번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올 6월 복원이 된 남수문. 그 옆에는 끊어진 채, 화성의 연결이 멎은 곳이 있다. 바로 화성 중에서 훼손이 되었던 구간이다. 지금은 예전 남수문에서 팔달문까지 연결이 된 부분에는 상가들이 즐비하게 서 있다. 이 상가들이 앉은 자리가 남공심돈과 남암문, 그리고 팔달문의 양편에 적대가 자리하고 있던 곳이다.

 

화성 겉돌기 그 10번째 구간은 참으로 마음 아픈 구간이다. 팔달문 양편으로 아직도 끊어진 채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이 구간이 이어지겠지만, 이 끊어진 구간은 참으로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10월 11일 오후에 돌아본 화성 겉돌기, 남수문에서 팔달산으로 오르는 길에 만나는 남치까지 돌아본다.

 

 

 

일제는 왜 팔달문 일대를 파괴했을까?

 

국립민속박물관에 보관 중인 헤르만 산더가 1907년에 찍은 사진에는, 남수문에서 팔달문으로 가는 성곽의 돌출된 치성 위에 축조한 남공심돈이 보인다. 그리고 팔달문 양편에는 적대가 있었다. 적대란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로 성 양편에 있었던 치성위에 축조한 포를 쏘는 구조물이다.

 

그리고 지금은 사라져 버린 남암문도 팔달문 동쪽 약 95미터 되는 곳에 있었다. 암문은 후미진 곳에 설치해 비상시에 적의 후미를 공격하는 병사들이 출입을 하거나 식량 등을 나르는 비상문이었다. 암문은 성벽에다 돌로 무지개 문을 설치하였는데, 제도는 정문과 같으나 약간 작게 하였다고 한다.

 

 

 

 

남암문이 완성된 것이 을묘년인 1795년 2월 23일인데, 화성의 다섯 개의 암문 가운데 가장 먼저 이루어진 것이다. 문의 너비도 다섯 암문 중에서 가장 넓었는데, 옛 어른들의 증언에 의하면 남암문은 시신을 내보내는 ‘시구문(屍柩門)’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상여가 통과할 만큼의 너비와 크기를 축조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남암문과 남공심돈, 그리고 팔달문 양편의 적대가 사라진 것이다.

 

언제인가 화성 답사를 할 때, 팔달문 인근에 오래 사셨다는 어르신에게서 들은 말이 있다. 팔달문 양편의 성곽 일부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일제에 의해서였다고 한다. 동문으로 백두대간과 연결된 광교산의 지기가 흘러들어, 성곽을 타고 팔달문을 거쳐 팔달산으로 지기가 오르면 수원에서 큰 인물이 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국 명산에 쇠말뚝을 박은 것처럼 팔달문 양편의 성곽을 허물어, 수원에 큰 인물이 나지 못하도록 했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 한 소리이긴 하지만, 유독 이 곳만 성벽을 허물었으니 그런 말이 나올 만도 하다,

 

끊어진 성곽, 마음이 아파

 

화성은 이 구간만 빼고는 거의 복원을 마쳤다. 올해 남수문을 복원하면서 서남각루 아래서 끊어졌던 성곽이 남수문을 지나 연결이 된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팔달문은 양편 성곽을 잃어버려, 마치 양팔을 잃은 체 외롭게 서 있는 것처럼 쓸쓸해 보인다. 서편으로도 잘려진 성벽이 미쳐 잇지 못한 체, 팔달산으로 오르는 성벽을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10월 11일 오후에 돌아본 끊어진 팔달문과, 사라진 남공심돈, 남암문, 팔달문 양편의 적대. 그 모든 것이 언제나 제대로 연결이 되어, 완전한 화성을 이룰 수가 있는 것인지. 돌아보면서도 내내 마음이 아프다. 세계문화유산 화성의 가시지 않은 아픔이다.

 

팔달문은 지금 한창 보수 공사 중이다. 팔달문을 바라보고 길을 건넌다. 그리고 팔달산 쪽으로 다가선다. 그곳에서 미쳐 연결을 하지 못한 성곽이 잔뜩 움츠리고 있다. 언제나 저 팔달문과 맞닿을 수 있으려는지. 성벽을 따라 천천히 팔달산을 오른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남치.

 

 

 

 

그런데 이곳은 여장의 간격이 없다. 모두 연결을 시켜 만든 여장. 왜 유독 이 구간만 이렇게 여장의 사이를 떼지 않고 연결을 한 것일까? 그 여장과 성벽이 연결되는 부분에 꽃이 피어있다. 이곳은 원형 그대로 보존이 되어있는 곳이다. 남치를 둘러보고 팔달산으로 치솟아 오르는 성벽을 바라본다.

 

이곳을 지나 남암문으로 나가는 용도를 따라가면, 화성 겉돌기는 끝이 난다. 성 밖으로 돌면서 살펴 본 화성 겉돌기. 난 이 화성 겉돌기를 하면서 또 다른 화성을 만난다.

사람들은 화성을 구경하러 와서 안으로 돌아본다. 물론 시설물 등을 보기 위해서는 안으로 돌아보아야 맞다. 하지만 성이라는 것이, 안보다 밖에 더 중요하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터. 성은 밖으로 겉돌아보아야 진가를 알 수가 있다. 밤에 만나게 되는 화성, 그것은 또 다른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10월 6일, 제49회 수원화성문화제 둘째 날 밤 8시부터 연무대 일원에서 열린다는 연무대와 창룡문(화성의 동문) 성곽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야간군사훈련이 주제인 ‘야조(夜操)’를 취재하기 위해 화성 동문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일몰 후에 조명이 들어오는 화성. 조명으로 인해 더욱 장엄하게 보이는 화성의 모습은 장관이었다.

 

 

 

동일포루에서 봉돈까지

 

동문인 창룡문을 나서서 서쪽으로 조금 가다가 보면 동일포루를 만날 수가 있다. 아경으로 보는 동일포루는 낮과 다른 볼거리를 준다. 아마도 관광객인 듯한 가족들이 그 위에서 소리를 질러댄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 것일까? 돌을 이용해 치성을 쌓고 그 위에 판문이 없는 전각을 지은 동일포루. 군사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다.

 

동일 포루는 화성의 5개 포루 중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조 20년인 1796년 7월 10일 완공되었다. 동일포루를 지나 남수문 방향으로 가다가보면 동일치를 만나게 된다. 꿩은 제 몸은 숨기고 밖을 엿보기를 잘 하는 까닭에, 이 모양에서 취한 것이라고 하여 치라고 했다. 치는 성곽을 돌출시켜 성벽으로 달라붙는 적을 공격하는데 유리하게 조성을 하였다.

 

 

 

동일포루에서 동일치로 가다가 보면 성이 심하게 휘어진 곳이 있다. 왜 유난히 이곳만 이렇게 안으로 들어가게 축성을 했을까? 아마도 지금은 평평하게 만들어져 있지만, 예전 이 앞에는 또 다른 무엇이 있지나 않았을까? 아니면 특별한 사연이 있는 것일까? 그런 궁금증을 만들어 주는 것도 화성 겉돌기가 주는 재미이다.

 

화성에서 치는 16곳이나 된다. 하지만 그 위에 돈이나 포루 등을 설치한 곳이 있어서 순전한 치는 8곳이다. 치는 원래 여장만 두르고 전각을 짓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저 간단한 구조물 같지만, 치의 역할을 나름 중요한 구조물이다.

 

 

치성의 발전된 모습인 포루

 

동일치를 지나면 동이치를 가기 전 동포루가 자리한다. 동포루는 화성의 5개 포루 중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조 20년인 1796년 7월 16일에 완공되었다. 포루는 적이 성벽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화포를 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로 치성의 발전된 형태이다. 화성의 포루는 모두 벽돌을 사용하여 만들었으며 공심돈과 같이 안을 비워 적을 위와 아래에서 동시에 공격할 수 있게 하였다.

 

야경으로 보는 동포루의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적에게 위엄을 보일 수 있는 구조물이다. 옛 선인들은 도대체 전쟁을 하기 위한 성을, 이렇게 아름답게 조성을 할 수가 있었을까? 새삼 선인들의 지혜에 머리를 숙인다. 동포루를 지나면 동이치를 만난다. 그리고 그 저만큼 앞에 커다란 구조물을 만나게 된다.

 

 

 

봉돈에 봉화라도 보였으면

 

봉돈은 돌로 쌓아올린 성의 몸체 위에다가, 다시 벽돌로 높게 쌓은 구조물이다. 성 밖으로 18척이나 튀어 나온 봉돈은, 마치 치처럼 생겼으면서도 그 보다 크다. 외면의 돌로 쌓은 것이 5층, 벽돌로 쌓은 것이 62층으로 전체 높이 25척, 너비 54척이나 된다. 봉돈은 그 봉화의 숫자로 신호를 하게 된다.

 

봉돈은 안에서는 또 하나의 작은 성처럼 견고하다. 하지만 밖에서 보는 봉돈은 그 자체만으로도 걸작이다. 봉돈을 촬영하고 있는데, 봉돈의 안에서 사람들의 소리가 난다. 위를 올려다보니 사람들의 발이 보인다. 저 다리가 보이는 곳에서도 장용영의 군사들이 성벽으로 달라붙으려는 적들을 향해 화살과 총을 쏘아대었을 것이다.

 

 

 

여덟 번째 구간인 동일포루에서 봉돈까지. 길지 않은 구간이지만, 그 안에서 많은 것을 느끼게 만든다. 다만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야간총체 훈련이라는 ‘화성, 정조의 꿈’이란 군사훈련모습을 보여주는 날인데, 초대되어 온 대사들이나 외지에서 찾아온 많은 관광객들에게, 봉돈이 야간에는 불을 피워 신호를 했음을 보여주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행사장으로 발길을 돌리면서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동장대를 지나 천천히 걷는다. 저만큼 높이 솟은 동북공심돈의 지붕이 보인다. 언젠가 저 위에 올라가 아래를 보니, 앞쪽의 전망이 상당하다. 연무동. 지동, 우만동 등의 지붕들이 눈 앞에 점점이 펼쳐진다. 옛날에는 그 위에서 내려다보는 화성 밖의 풍경이 어떠했을까? 아마도 성으로 밀려드는 적이 있었다고 한다면, 개미 한 마리 달라붙지 못했을 것이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화성은 싸움을 위한 성이 아니라, 거대한 조형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구조물 하나하나가 다 아름답다. 공심돈 위에 전각을 올릴 생각을 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우리 선조들의 미적 감성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만하다. 그래서 고 3짜리 학생조차 ‘화성이 말을 걸어온다.’라는 표현을 했는가 보다.

 

 

 

성 아래로 난 길조차 끌어안을 수 있는 화성

 

동북공심돈에서 동북노대를 걷는 길 밑으로는 도로가 뚫려있다. 그래도 고마운 것은 이런 구조물로 만들어 성을 연결했다는 것이다. 현재 수원 화성은 남수문에서 팔달산까지의 성벽과 팔달문에서 팔달산으로 오르는 구간 두 곳이 끊긴 상태이다. 이 끊어진 부분이 연결이 될 때 화성은 비로소 제 모습을 갖추게 된다.

 

길이 난 위 성벽 앞으로는 작은 길이 있지만, 위험으로 인해 사람들의 통행을 막고 있다. 밑으로 돌아 동북노대 쪽으로 오른다. 노대는 다연발 화살인 쇠뇌를 쏘아대던 노대. 동문인 창룡문에서 불과 96보의 거리에 있는 이 동북노대의 위엄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다. 동복노대는 아래는 돌로 쌓고 그 위에 벽돌을 쌓아오려 축조를 했다.

 

 

 

성벽은 세월을 말하 듯 여러 가지 색깔을 내고 있다. 아마도 이곳은 그렇게 급한 경사가 아닌 곳이기에, 나름대로 단단하게 축조를 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천천히 성벽을 따라 걸어본다. 성 밖 나무그늘아래, 어르신 두 분이 무엇을 그리 이야기를 하시는 것인지. 저런 모습 하나도 더 아름답게 만드는 성이 바로 화성이다.

 

창룡문, 그 위엄을 어찌 말로 다하랴

 

창룡문 앞에 다다랐다. 사람들이 문을 통해 드나든다. 아마 예전에는 이 문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을 것이다. 동문인 창룡문의 의미는 남다르다. 장안문이나 팔달문도 물론 중요한 길목이다. 하지만 동문의 의미는 성의 가장 근간이 되는 곳이고, 사실은 동문인 창룡문이 정문인 셈이다.

 

 

 

창룡문은 행궁에서 1,040보 떨어져 있다고 <화성성역의궤>에 기록하고 있다. 창룡문은 성문 밖으로 옹성을 쌓았는데, 북쪽 한편만 얼어놓았다. 이렇게 한편으로 치우쳐 옹성의 입구를 낸 것은 고제(古制)에 따른 것이다. 또한 옹성 중앙에 입구를 내는 것보다, 더 공격을 하기가 쉽지가 않다.

 

옹성의 북쪽을 틔워놓고, 남쪽 끝을 계단으로 해서 원성과 연결을 하였다. 연결되는 곳은 문을 달아내었다. 옹의 높이는 9척 6촌이고 내 면은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57척이고 동문과의 거리는 28척이다. 아마도 전투가 벌어졌을 때 동문을 공격하려고 했다면, 비탈진 위에 축조한 동문도 버거운데, 한편으로 입구를 몰아 놓은 곳으로 공성무기를 들여보내 성을 공격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옹성만으로도 버거운데 성문 양편의 성벽을 밖으로 돌출시켜 놓아, 삼면에서 성문으로 몰려드는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축성을 했으니 가히 난공불락의 성문이 아니겠는가? 화성 겉돌기 그 일곱 번째 이야기에서 만난 창룡문. 이제는 이 동문에 대한 의미도 재해석이 필요할 때란 생각이다. 성문 중에는 동문이 으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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