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에 소재한, 우리나라 3보 사찰 중 한 곳인 통도사 관음전 앞에는 석등 한 기가 서 있다. 이 석등은 등불을 밝히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아래는 팔각의 받침돌을 삼단으로 쌓았다.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 장식을 얹고 있는 이 석등은, 현재 경상남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70호이다.

석등의 용도는 절 안의 어두움을 밝히는 것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자비광명을 온 누리에 비추어 중생을 깨우쳐 선한 길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등불은 수미산과 같고, 등을 밝히는 기름은 넓은 바다를 상징한다고 한다. 이는 등에서 나간 불빛이 고루 퍼져나가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공양구 중에서도 으뜸인 등불

석등은 언제나 석탑과 함께 전각의 앞에 자리한다. 이는 부처님께 드리는 공양물 중에서도 등불 공양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갖가지 형태의 많은 석등이 현재까지도 자리하고 있으며, 폐사지 등에도 석등이 남아있는 숫자가 많은 것을 보면, 석등을 그만큼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보인다.

통도사 관음전 앞에 자리하고 있는 석등은, 그 조형 양식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석등은 둥근 형태의 연꽃받침인 연화대 두 개를 아래 위로 놓고, 그 가운데를 팔각의 간주석을 세웠다. 그 윗부분에는 불을 밝히는 화사석과 지붕돌을 올려놓은 형태이다. 석등의 구성형태는 거의가 이런 형태로 꾸며진다.



연화대가 상징하고 있는 뜻은?

이 통도사 석등은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따르고는 있으나, 귀꽃 양식 등이 세밀하지 않다는 점을 보아 고려 초기 작품으로 추정한다. 아래받침돌인 연화대의 옆면에는 안상을 얕게 새겼고, 윗면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조각하였다. 이 아래에 있는 연꽃받침은 물속에 있는 탁한 진흙과 같은 세상을 뜻한다. 아래 위 연화대 가운데에 있는 간주석인 기둥은 중앙에 세 줄의 테를 둘렀다.

이 세 줄은 천, 지, 인을 상징한다고도 하고, 불가에서 부처님의 목에 난 삼도와 같은 의미라고도 한다. 하지만 이 세 줄에 대한 정확한 풀이는 알 수가 없다. 이 팔각의 기둥은 이상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불교의 올바른 길인 팔정도를 상징한다. 깨달음과 열반으로 이끄는 올바른 여덟 가지 길인 팔정도는,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을 말한다.



간주석 위에 있는 윗받침돌에는 위로 솟은 연꽃무늬를 장식하였다. 위로 향한 연꽃을 조각한 연화대는, 광명, 청정, 부처, 보살의 세계를 상징한다. 이렇듯 석등 하나가 갖는 뜻은 상당히 깊은 것이다.

흔치 않은 부등변 팔각석등

4개의 커다란 불창이 있는 화사석은, 파손이 된 것을 후에 새로 교체한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인 석등의 조화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석등은 언뜻 보면 4각처럼 보이지만, 부등변 팔각석등으로 우리나라 석등의 변천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꼽히고 있다.



화사석의 위에 얹은 지붕돌은 귀퉁이마다 꽃장식인 귀꽃을 달았다. 지붕돌 위에는 머리장식의 받침인 노반과, 꼭대기에는 꽃봉오리 모양의 장식인 보주를 놓았다.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석등. 크고 작은 모형의 이 석등을 볼 때마다 더욱 그 가치를 높이 사는 것은, 바로 이런 깊은 뜻이 있기 때문이다.

경북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1789번지, 비구니의 요람이라는 운문사 금당 앞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등 한 기가 서 있다. 운문사에는 많은 전각이 있으며, 율원과 강원 등이 있다. 운문사의 율원은 ‘보현율원’이라 칭하고 있으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지고지순한 계행을 전문적으로 익히고 연구하는 곳이다.

이 운문사에는 율원과 강원 등이 있어, 일반인들의 출입이 제한되는 곳이 있다. 그 중에는 금당도 끼어있는데, 금당은 삼국시대부터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이 금당은 가람의 중심으로 본존불을 안치하는 전각을 말한다. 일설에는 전각 안을 금색으로 칠하므로, 본당의 명칭을 금색의 당이라는 의미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또 다른 일설은 금색의 불상을 내부에 안치하기 때문에 금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된 금당

운문사는 비구니의 요람답게 일반적인 사찰과는 많이 다르다. 그만큼 지켜야 할 것이 많으며, 출입이 제한되는 곳 역시 많다. 금당 또한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되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 금당 앞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세운 석등 한 기가 서 있는 것이다.

석등은 등불을 안치하는 곳으로 대개 전각 앞에 세운다. 불교에는 육법공양이 있는데, 그 중 등불을 밝히는 것을 공양 중에서도 으뜸으로 친다. 또한 이 석등은 부처님의 불법을 온 세상에 퍼트려 세상을 밝힌다는 뜻도 갖고 있다. 하기에 석등은 공양구의 하나로 제작이 되었던 것이다.




석등은 받침돌인 하대석과 간주석인 중대석, 그리고 상대석과 불을 밝히는 화사석, 맨 위에는 지붕돌인 옥개석 등 5부분으로 구성이 된다. 옥개석 위에는 보주를 얹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이다.

우아한 모습의 석등

청도 운문사 금당 앞에 놓여 있는 석등은 8각으로 꾸며졌다. 불을 밝히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바닥돌과 하나로 이루어진 아래받침돌에는, 여덟 장의 아래로 향한 꽃잎을 새긴 앙화가 조각되어 있다.

그 위에 놓인 가운데기둥인 간주석에는 아무런 꾸밈이 없으며, 윗받침돌에는 각 면마다 연꽃이 새겨져 있다. 팔각의 화사석에는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4개의 창을 마련해 두었으며, 불창마다 불창을 바람을 막기 위한 장식을 했는지 작은 구멍들이 보인다. 지붕돌은 경쾌한 모습이며, 꼭대기에는 연꽃봉우리 모양의 보주가 남아 있다.




이 석등은 각 부분이 균형을 이룬 우아한 모습이다. 7월 15일 찾아간 운문사. 도착하기 전부터 내리는 비가 점점 더 빗방울이 굵어진다. 우산도 받치지 못하고 금당 앞 석등으로 다가선다. 그리고 연신 사진을 찍어댄다. 한시라도 빨리 촬영을 마치고 딴 곳으로 옮겨가기 위해서다. 비가 오는 날 답사는 만만치가 않다. 하지만 늘 같은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는 문화재가 있어, 내리는 비도 마다하지 않는다.


소중한 문화재 중에서 가장 그 가치가 뛰어나서 지정을 하는 국보, 이 국보와 국보가 만나면 그 아름다움이 과연 배가가 될까? 아마 이렇게 국보와 국보가 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만큼 국보의 숫자도 적으려니와, 야외에서 한 자리에 두 점의 국보를 만나기가 쉽지가 않기 때문이다.

구례 화엄사. 지리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화엄사는 백제 성왕 22년인 544년에 인도 스님이신 연기조사가, 대웅상적광전과 해회당을 짓고 화엄사를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백제 법왕 때인 599년에는 3천여 명의 승려들이 있었다고 하니, 그 크기가 어느 정도일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화엄사 경내에 세워진 국보 각황전과 국보 석등

자장율사로 인해 신라 때 절로 알려져

신라 선덕여왕 14년인 645에 자장율사가 부처님 진신사리 73과를 모신, 사사자 삼층 사리석탑과 공양탑을 각황전 뒤편에 세웠다. 원효대사는 해회당에서 화랑도들에게 화엄사상을 가르쳐, 삼국통일을 이루게 하는 기초를 마련하였다. 또 문무왕 17년인 677년에 의상조사는 2층 4면 7칸의 사상벽에 화엄경을 돌에 새기고, 황금장육불상을 모신 장육전(지금의 각황전)과 석등을 조성하였다. 이렇게 자장율사를 거쳐 원효, 의상 등의 스님들이 화엄사에 중창을 하였으므로, 화엄사가 신라시대 절이라고 하는가보다.

화엄사는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타버린 것을 인조 때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국보 제67호 각황전 터에는 3층의 장륙전이 있었고, 사방의 벽에 화엄경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조선 숙종 28년인 1702년에, 이층으로 건물을 다시 지었으며 ‘각황전’이란 전각의 명칭을 숙종이 지어 현판을 내린 것이라고 한다.



국보 각황전, 밖에서 보면 2층의 전각이지만, 안으로는 퉁층으로 꾸며져 있다.

각황전 앞에 감히 서질 못하다.

각황전 앞에 서면 사람이 압도당한다. 신라시대에 쌓은 것으로 보이는 장대석의 기단석 위에 정면 7칸, 측면 5칸 규모로 지은 2층 전각이다. 팔작지붕으로 지어진 각황전은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계 양식이로 매우 화려한 느낌을 준다. 건물 안쪽은 위 아래층이 트인 통층으로 되어있으며, 세분의 여래불과 네 분의 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무슨 깊은 사연이 있는 것일까? 쉬지 않고 예를 올리는 여인에게.

밖에서 보면 이층인 전각으로 꾸며졌으나, 안을 보면 단층이다. 워낙 전각의 규모가 크다보니 중간에 기둥을 세워 받쳐놓았다. 그 안의 공포의 장식 등이 화려하다. 각황전 안을 들여다보면서 그 거대함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각황전 동편 출입구 앞에 신발 한 켤레가 놓여있다. 누군가 간절한 소망을 이루기 위해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예불을 올린다. 걷기도 더운 날에 저리 온 마음을 다한다면, 여래불과 보살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듯하다.

최대의 석등은 그 자체만으로도 최고였다.

국보 제12호인 각황전 앞에 세워진 석등은, 전체 높이 6.4m로 한국에서 가장 커다란 규모이다. 석등은 부처의 광명을 상징한다 하여 광명등이라고도 부른다. 불을 밝히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올린 후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를 하였다. 통일신라 때인 헌안왕 4년인 860년에서, 경문왕 13년인 873년 사이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석등. 팔각의 지대석 위 아래받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큼직하게 조각해 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는 배가 불룩한 장고 모양의 기둥을 세웠다. 이런 배가 부른 기둥은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한 형태이다.



국보 석등은 아름답다. 기단석과 중간의 장고형 기둥

배가 부른 기둥 위로는 돋을새김을 한 연꽃무늬를 조각한, 위 받침돌을 두어 화사석을 받치도록 하였으며, 팔각으로 이루어진 화사석은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4개의 큼직한 창을 뚫어 놓았다. 팔각의 지붕돌은 귀꽃이 화려하게 장식이 되어 있으며, 위로는 머리 장식이 온전하게 남아있어 전체적인 완성미를 더해준다.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손꼽히는 석등과 국보 각황전. 이 두 점의 국보가 만들어내는 정경은 말로 형용하기가 힘들다. 어디서 이런 모습을 볼 수가 있으려나. 해가 짧아진 오후에 걸음을 재촉하면서도 쉽게 떠날 수 없는 것은, 그 모습에 취했음이다. 저녁나절 국보와 국보가 만나며 보여주는 아름다움은, 앞으로도 쉽게 만나지 못할 멋진 모습이다.


화사석에는 네 곳의 창을 내고, 머리 위에는 귀꽃이 아름다운 머릿돌을 올렸다.

절을 찾아가면 대웅전이나 석불, 혹은 부도 탑 앞 등에서 있는 석등을 볼 수가 있다. 이 등은 어둠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고통을 받고 있는 중생들을, 부처님의 자비광명으로 깨달음을 주어 어둠에서 벗어나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 석등은 실제로 불을 켜는 경우가 있어 실용적인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후대에 이르러서는 불전이나 탑 등의 앞에 세우는 장식적인 축조물로 변하고 말았다. 석등은 대개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하대석과 중간인 석주, 그리고 불을 밝히는 화사석, 맨 위에는 지붕돌을 얻는 형태가 석등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논산시 관촉동 254번지 관촉사 경내에 자리한 석등은 보물 제232호로, 고려시대에 조성이 된 석등이다.


거대한 석등 은진미륵과 어우러져

관촉사 미륵보살입상 앞에 서 있는 석등은 그 높이가 5,45m나 되는 거대한 석등이다. 이 석등은 남한에서는 화엄사 각황전 앞에 있는 석등 다음으로 거대 석등으로 본다. 이 석등은 석조미륵입상이 세워진 해인, 고려 광종 19년인 968년에 조성한 것으로 기록에 보인다. 이 석등은 4각의 석등으로 화사석이 중심이 되어, 아래에는 3단의 받침돌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이 관촉사 석등은 여러모로 특이하다. 우선 화사석이 2층으로 되어있다는 것도 특이하지만, 창이 넓고 기둥이 가늘어 조금은 불안한 감을 주기도 한다. 전체적으로 석등의 평면이 정사각형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고려시대 양식으로, 아래 받침돌과 위 받침돌에 새겨진 굵직한 연꽃무늬가 두터움을 드러내고 있다.





중앙에 둥근 기둥으로 조형을 한 기둥은 굵고 조금은 투박하게 제작이 되었으며, 위아래 양끝에는 두 줄기의 띠를 두르고 중간에는 세 줄기의 띠를 둘렀다. 특히 중간의 세 줄기 중에서 가장 굵게 두른 가운데 띠에는 여덟 송이의 꽃을 조각하여 뛰어난 조각미를 자랑하고 있다. 아마 이러한 꽃이 조각되어 있지 않았다면, 그저 평범한 석등으로 제작이 되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귀꽃이 아름다운 지붕돌

화사석이 2층으로 이루어진 관촉사 석등은 화사석 1층에 4개의 기둥을 세웠다. 이 기둥은 지붕돌을 받치도록 하였는데, 지붕돌의 이랫부분은 다듬지를 않은 듯하다. 각 층의 지붕돌은 처마 끝을 가볍게 올린 듯 곡선을 그리고 있으며, 네 귀퉁이에는 큼직하게 귀꽃을 조각하여 생명이 없는 찬 돌에 부드러움을 주었다. 화사석 위에 올린 머릿돌 꼭대기는 불꽃무늬가 새겨진 큼직한 꽃봉오리 모양의 장식을 두었다.




이렇게 거대한 석등을 조각하면서도 그 하나하나에 많은 공을 들인 관촉사 석등. 고려 시대 최고의 걸작품으로 꼽히는 이 석등은 벌써 천년이라는 시간을 훌쩍 넘겨 오랜 시간을 풍상을 겪었으면서도, 저리도 장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아마 또 앞으로 얼마의 시간을 저리 서 있을지, 오늘 그 석등 앞에서 고개를 숙인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