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은 대개 산 위에 자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기쉽다. 그러나 성의 종류를 보면, 산의 정상부를 에워싸고 자리를 잡은 산성과, 수원 화성과 같이 평지와 산을 이용해 쌓은 성곽이 있다. 또 한 가지는 홍주성과 같이 평지에 성을 마련한 경우도 있다. 명칭을 보아 ‘○○산성’이란 명칭이면 산을 이용해 성을 쌓은 것이고, ‘○○성’이면 평지에 쌓은 성으로 볼 수가 있다.

사적 제231호 홍주성은,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에 소재한다. 지금은 성벽의 일부가 사라지고, 성곽과 조금 떨어진 곳에 동문이었던 조양문이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 이곳까지 성이 연결이 되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8월 29일이 국치 100년이 되는 날이다. 왜 하필 많은 성 가운데 홍주성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일까? 그것은 홍주성이 국치를 막기 위해 피를 흘린 항일의 성이기 때문이다.


사적 제231호 홍주성과 홍주성 전투그림. 칼과 죽창을 든 의병들이
신식무기인 총을 가진 일본군들과 혈투를 벌이고 있다.

을사보호 조약을 반대한 의병들의 항거

국치의 시작이기도 한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이를 반대한 의병들이 전국에서 벌떼처럼 일어나 일본군과 싸움을 벌였다. 홍주성에는 의병장인 민종식과 이세영, 안병찬 등이 의병을 일으켜, 홍주성에 있던 일본군들을 섬멸하고 3일간 항쟁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순절한 곳이다.

의병장 민종식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정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906년 5월 홍산에 의병을 집결시킨 뒤, 충청남도 서부지역인 서천과 보령, 청양 등 충남의 요지를 점령한 후, 서부의 중심지인 홍주까지 점령했다. 홍주성을 점령한 의병들이 서울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를 차지하게 되자, 일본군은 이해 5월 31일 홍주성을 공격했다. 이 싸움에서 의병 83명이 죽고, 145명이 포로가 되었다.



역사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홍주성. 네모난 돌을 짜맞추어 견고하게 쌓았다.
성벽에 달라붙는 적을 공격하기 위한 돌출이 된 치가 보인다(가운데와 아래)

의병장 이세영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906년 홍산에서 민종식을 도와 참모장으로 홍주성을 점령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반격을 받고 크게 패한 뒤 붙잡혀, 종신유형을 받고 황주로 유배되었다. 의병장 안병찬은 민종식을 창의대장으로 추대하고 의병을 일으켰으나. 홍주성 전투에서 크게 패했다. 그 뒤 변호사가 된 안병찬은 1909년 안중근의사 공판의 변호를 맡기도 했다. 경술국치 이후 1919년 3.1만세운동 발발 후 만주로 망명했다.

비록 의병들이 성공을 하지 못했다고 해도, 홍주성에 머물면서 신식화기를 가진 일본군과 3일간이나 치열한 접전을 벌였던 곳이다. 홍주성이 언제 축성이 되었는가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 다만 조선 초기 문종 원년인 1451년에 성을 고쳐 쌓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이미 홍주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서문터인 듯하다. 성벽이 트여있는 안으로 들어가니 와편이 보인다. 전각이 이곳에 있었음을 뜻한다. 

조선 초기 성 쌓기 방법을 충실히 따른 성곽

홍주성은 문종 때 성 주위가 4,856척에 높이가 11척이라고 적고 있다. 일부가 사라진 홍주성은 홍성군에서 예전의 모습 그대로 복원하기 위해 많은 노력중이라고 한다. 성을 따라 천천히 걸어본다. 네모난 돌들을 가지런히 맞춘 성벽에는 담장이가 타고 오른다. 성의 연륜을 짐작케 하는 광경이다. 성은 지형을 이용해 쌓았으며, 지리적으로 비워져 허전한 곳에는 치를 내어 보강을 하였다. 잠시 걸어가니 성벽이 트인 곳이 나온다. 아마 성문이 있던 자리인 듯하다.

터진 곳으로 들어가니 한편에 와편이 쌓여있다. 이곳에 누각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홍주성에는 모두 세 곳의 문이 있었다. 동문인 조양문과 북문과 서문이 있었는데, 위치로 보아 이곳이 서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 안에는 몇 기의 비들이 보이는데, 그 중 하나의 비는 충남 지정 문화재자료 제166호인 ‘홍주성 수성비’이다.


홍주성을 보수한 것에 대한 기록을 한 수성비

그냥 지나치기 쉬운 작고 볼품없는 비 하나. 이 비는 순조 24년인 1824년 황폐된 홍주성을 보수하면서 세운비로, 내용을 보면 순조 23년 이곳에 부임한 진장 김계묵과 목사 이헌규가 상을 수리하기로 하고, 그 해 8월에 시작하여 11월에 마쳤다고 기록을 했다. 완성된 성의 길이는 7리이고, 공사시간은 100일이라는 것이다.

한양을 지키는 길목에서 중요한 위치에 놓여있는 홍주성. 오늘 이 성을 다시 기억하는 것은 잃어버려서는 안 될 우리의 아픈 역사를 지우고 싶어하는 사람들 때문이다. 아픈 기억이라고 해도 그것을 잃어버릴 수는 없다. 지운다고 해서 지워지는 것도 아니다. 그 아픔을 거울삼아, 다시는 가슴 찢기는 또 다른 형태의‘국치’를 만들지 말라는 뜻이다.


성벽 위에 난 길과 담장이로 인해 아름다운 성벽. 이 아름다움은 수많은 선조들의 피로 지켜진 것이다.
다시는 이렇게 피로 지켜지는 역사는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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