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거창군 북상면 갈계리에는 양편으로 내가 싸고 흐르는 숲이 있다. 이 숲을 ‘갈계숲’이라고 하는데, 원래의 이름은 은사의 정원을 이르는 ‘임정(林亭)’이라고 한다. 거창의 절경 중 제3경에 해당하는 갈계숲은 수고 22m 정도의 2~3백년이 된 소나무와 물오리나무, 느티나무 등이 숲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거창군의 천연보호림 제2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숲은, 덕유산에서 발원한 갈천이 동서로 나뉘어져 흐르고 있어 마치 섬과도 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조선조 명종 때 유현 석천 임득번과 그의 아들 효간공 갈천 임헌 등 삼형제와 문인들이 이 숲에 들어와 시를 짓고 노닐던 곳이라고 한다.



‘가선숲’안에 ‘가선정’이라니

이 숲 안에는 갈천 임헌의 호를 따서 지은 가선정이 있어 ‘가선림’이라고도 부르며, 청학교를 놓은 뒤에는 ‘청학림’이라고도 부른다. 또한 마을 이름을 따서 ‘치내숲’이라고도 부르는데, 현재는 갈계숲으로 통칭하고 있다.

다리를 건너 숲 안으로 들어가면 몇 채의 전각이 보인다. 그 중 가장 고풍스런 전각이 바로 가선정이다. 가선정은 정면 두 칸, 측면 두 칸의 팔작지붕 중층 누각으로 지어졌다. 갈천 임훈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효자로 이름이 높았다. 이 갈계숲은 갈천 임훈 선생이 태어나 자라고 묻힌 곳이기도 하다.




고풍스런 가선정이 언제 지어졌는가는 확실치가 않다. 주변에는 조선 명종 때 육현신의 한 사람으로, 광주목사를 지낸 갈천 임훈이 후학 양성을 위하여 그의 아우 임운과 함께 1573년에 건립한 갈천서당이 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가선정도 그 당시나 1878년 후손들이 각천서당을 중건할 때 짓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누각에 오르니 절경이로다

가선정 위로 올라본다. 여기저기 글을 적은 게판들이 걸려있다. 그리고 천정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바둑을 두는 신선들과 한 편에는 다구 등이 보이다. 학도 몇 마리 한쪽 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아마도 이 갈계숲의 가선정이 이들에게는 바로 신선의 세계였으리라는 생각이다.




중층으로 된 가선정은 자연석 주초에 치목을 하지 않은 목재를 사용해 기둥을 삼았다. 자연의 형태를 무너트리지 않겠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런 마음들이 있어, 이렇게 무성한 갈계숲이 남아있을 것이다. 나무계단을 밟고 누각위로 오르면, 난간을 사방에 두른 누마루 끝편으로 활주가 걸려있다.

누가 이런 곳에서 살고 싶지 않겠는가? 갈천 선생 당시나 지금이나 자연을 좋아하고 그것을 누릴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이 가선정이나 갈계숲보다 적합한 곳은 없을 것이다. 심호흡을 해본다. 숲의 맑은 공기가 폐부 깊숙이 빨려드는 듯하다. 도심에서 답답한 가슴이 시원해진다. 아마도 이런 즐거움이 있어 이곳을 찾지 않았을까?


오늘 가선정 누마루에 털썩 주저앉아 옛 문인들의 정취를 느껴보고 싶다. 그리고 이 갈계숲에서 시간을 버려두고 싶다. 5월 20일의 늦은 오후, 길을 재촉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난 이곳에서 자리를 털 수가 없다.


전라북도에는 두 개의 ‘제일’이 있다. 그 중 하나는 ‘호남제일루’란 명성을 자랑하는 남원의 ‘광한루’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제일이 있다. 바로 정읍시 태인에 자리한 ‘피향정’이다. 피향정은 ‘호남제일정’이란 별칭으로 불린다. 주변의 경관을 느끼면서 피서를 하고자 지은 피향정은, 호남지방에서는 으뜸가는 정자로 꼽힌다.

몇 년 전인가 이곳을 지나다가 피향정을 들렸다. 그 때는 봄이었는데, 겨울의 경치는 어떠할까? 그것이 궁금하여 정읍시 태안에 있는 피향정을 찾아갔다. 피향정은 보물 제289호이다. 예전에는 피향정의 앞뒤로 상하연지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 아름답던 경관은 찾아볼 수가 없다.

정읍시 태인면에 소재하는 보물 제289호인 피향정

통일신라시대에 기인하는 피향정

피향정이 언제 지어졌는가는 정확하지가 않다. 다만 통일신라 헌안왕(재위 857∼861) 때, 최치원이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지만 지은 시기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태산군수로 있던 최치원이 이곳의 연지가를 소일하며 풍월을 읊었다는 것이다. 기록에 전하는 것을 버면, 피향정은 조선 광해군 때 현감 이지굉이 다시 지었다고 한다.

그 뒤 현종 때 현감 박숭고가 건물을 넓혔으며, 현재의 피향정의 모습은 조선조 숙종 42년인 1716년에 현감 유근이 넓혔다고 한다. 그 뒤에도 몇 차례 부분적으로 보수를 하였으며, 정면 5칸에 측면 4칸의 팔작지붕이다. 이 피향정은 주심포계 건물로 지어졌으며,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장식구조는 새 부리가 삐져나온 것과 같이 꾸몄다.



피향정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집이다.(위) 현판에는 '호남제일정'이라 적혀있다(가운데) 난간은 화려하지 않게 꾸며졌다. 

피향정은 사면이 모두 뚫려 있어 사방을 바라볼 수 있고, 난간은 짧은 기둥을 조각하여 주변을 촘촘히 두르고 있다. 건물 안쪽의 천장은 지붕 재료가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이지만, 천장 일부를 가리기 위해 건물 좌우 사이를 우물천장으로 꾸민 점이 눈길을 끈다. 피향정의 동편으로는 ‘피향정(披香亭)’이라 쓴 편액이 걸려있고, 많은 시인묵객들의 글이 남아있다.

누마루 밑의 돌기둥, 정말로 말문이 막혀

아직 마당에는 눈이 쌓여있다. 몇 년 사이에 피향정은 말끔히 정리가 되어있다. 안으로도 흙 담을 두르고, 일각문을 내었다. 일각문을 지나 정자 가까이 다가가면, 제일 먼저 눈에 띠는 것이 있다. 바로 누마루 밑에 세운 돌기둥들이다. 이 기둥 돌들은 아래가 약간 넓고 위가 좁은 방추형으로 조성을 하였는데, 일정하지가 않다.



피향정의 멋은 누마루를 받치고 있는 돌기둥들이다. 여러 개의 돌을 쌓아 만든 기둥도 있다(위) 정자를 오르는 계단은 장대석을 여려 겹 포개놓아 만들었다(가운데) 정자 안에는 많은 시인묵객들의 글이 걸려있다(아래) 

몇 개의 기둥은 여러 개의 돌을 포개 기둥을 삼았다. 밑으로 줄지어 선 돌기둥들은 위에 잇는 기둥과 일직선이 되게 조성을 하였다. 이렇게 돌기둥을 사용해 누마루를 받치고 있는 형태는, 피향정이 아니면 보기가 힘들다. 정자 위로 오르는 계단은 장대석을 한 층부터 여러 층을 포개 놓으면서 자연적인 층계가 되게 하였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건축물

피향정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정자 중 하나이다. 조선 중기의 목조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이 정자는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남원 광한루와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보이고 있는 피향정. 누군가 ‘호남제일정’이란 명칭을 붙였을까? 그런 안목이 부럽다는 생각을 한다.



겨울철이라 조금은 황량하게 보이겠지만, 정자를 한 바퀴 돌아보면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을 느낀다. 명성이 헛되이 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호남제일정이라는 것에 절로 수긍이 간다. 이 겨울이 지나면 또 어떤 모습으로 사람들을 반길 것인지. 정자를 뒤로하면서 몇 번이고 그 모습을 담아내기 위해 애를 태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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