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른들이 계신 방에 들어가면, 벽에 온각 색으로 꽃이며 나비, 해와 달 등 각종 채색으로 이름이며 가훈 등을 쓴 액자나 족자를 볼 수 있었다. ‘혁필화’라고 하는 이 그림과 글씨는, 납작한 가죽을 이용해, 여러 빛깔의 색을 내는 것이다.

 

오늘 아침 갑자기 혁필화 생각이 났다. 가끔 이렇게 오래전에 본 것들이 갑자기 생각이 나고는 한다. 아마 천상 이런 버릇에서 못 벗어날 것만 같다. 처음 혁필화 사진을 찍은 것이 2003년도였으니, 벌써 10년이 훌쩍 지나버렸다. 한국민속촌 장터 안에서 본 기억이 나 민속촌에 전화를 걸어보았다. 혁필화를 그리는 분이 민속촌을 떠난지 꽤 오래 되었다는 대답이다.

 

 2003년 한국민속촌에 가서 혁필화를 그리시는 어르신을 만나뵈었다. 벌써 10년이란 세월이 훌쩍 지나버렸다

 

집집마다 한 점씩은 벽에 걸렸던 그림

 

예전에는 집집마다 방문을 하거나, 혹은 장거리 등에서 가끔 물감을 꺼내놓고 혁필화를 그리는 화가를 볼 수가 있었다. 혁필화는 조선조 초기인 1,600년경에 유덕공 선생으로부터 시작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 후 많은 혁필화가들이 활동을 하였다.

 

일설에는 18세기 유득공이 버드나무 가지로 쓴 비백서에서 기인하였다고 전해지기도 하지만, 혁필화가 언제부터 누구에게서 시작되었는가에 대한 확실한 자료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혁필화가들은 1930년대 한창 왕성한 활동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에는 혁필로 쓴 이름이나, 가훈, 상호, 고사성어 등을 집집마다 한두 장 지니고 있었다. 혁필화가들이 적은 수로 그 명맥을 유지했던 것은 대우문제에도 있다. 같은 그림을 그리지만 정상적인 화가들에 대해서 대우를 받지 못했다.

 

화가들에게서도 냉대를 받아

 

또한 화가들 중에서는 혁필화가들은 화가의 대우를 해주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아마 그들을 장거리로 내본 이유가 되지 않았을까 한다. 혁필화는 빠른 시간에 그려내야 한다. 가죽이라는 특성상 물감을 흡수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아픔이 있다. 한 장이라도 더 그려야 먹고 살수가 있었기 때문이란다.

 

화가들처럼 대우를 받지 못하고, 싼값에 그려야하는 혁필화가들로서는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 빠른 작업만이 살길이었을 것이다. 1960년대부터 사양길에 들어선 혁필화는 이제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아직도 혁필화에 대한 올바른 가치가 정립이 안되었기 때문에, 혁필화를 그림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은 인사동에나 가 보아야 가끔 만나볼 수가 있는 혁필화. 재빠른 손놀림으로 화려하게 그려내는 혁필화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다. 혁필의 끝에서 뿜어져 그려대는 나비며, 꽃이며 각종 나무들이 온갖 색을 만들며 화선지 위에 춤을 춘다.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려낸 혁필화. 그 아름다움 속에 숨겨진 화가의 애환을 아는지 모르는지, 보는 이들은 그저 탄성만 흘려낼 뿐이다.

 

그 당시 어르신이 쓴 혁필화가 지동 고성주 전안의 벽에 걸려있다

 

참 이제 와서 생각을 하면, 그동안 내가 문화예술인들을 만나면서도 참 소홀했다는 생각이 든다. 어째 당시에 혁필화를 그리시는 분의 존함조차도 물어보지 못했는지. 오늘 10년 전 같이 민속촌에 가서 쓴 혁필화 글씨를 전안에 곱게 모셔놓고 있는 아우의 집에 가서, 새삼 옛 기억을 더듬어본다. 하나씩 사라져가고만 있는 우리의 소중한 풍물이 오늘따라 마음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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