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이 넘게 계속된 찜통더위. 그 찜통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8월 4일에 찾아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에 소재한 사적 고달사지. 그곳에서 난 땀을 비오 듯 흘리면서도 그늘을 찾아갈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바로 보물 제6호인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 때문이었다. 바람 한 점 없는 날 찾아간 고달사지에서,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원종대사는 신라 경문왕 9년인 869년에 태어나, 고려 광종 9년인 958년에 90세로 입적을 하였다. 광종은 신하를 보내어 그의 시호를 ‘원종’이라 하고, 탑 이름을 ‘혜진’이라 추시하고 대사의 진영일정을 그리게 하였다. 이 탑비는 대사가 입적 후, 17년 뒤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벌써 몇 번째 찾아간 탑비, 그런데 이럴 수가

 

이 비는 몸돌은 무너져 내려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져 있으며, 이곳 고달사지에는 받침돌인 귀부와 머릿돌인 이수만 남아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비문에는 원종대사의 가문과 출생, 행적, 그리고 고승으로서의 학덕 및 교화, 입적 등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고 한다.

 

몸돌인 비문을 볼 수가 없어 매번 갈 때마다 아쉬움이 컸던 원종대사탑비였다. 언제가 답사를 함께하던 동료 한 사람이, 도대체 왜 그렇게 갈 때마다 사진을 많이 찍어대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세세하게 사진을 찍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시간이 흐른 다음에 혹 무엇이 변하지는 않았는가를 비교해 보기 위해서이다.

 

 

 

 

이번에도 다를 바가 없다. 탑비의 구석구석을 살펴보며 한 장씩 찍어댄다. 40도를 육박하는 땡볕에서 사진을 찍다가보니, 이미 몸은 땀으로 다 젖어버렸다. 얼굴과 등에서는 연신 땀이 흘러내린다. 닦을 엄두도 나질 않는다. 그런데 그렇게 사진을 찍다가 그만 몸이 굳어버렸다. 이걸 왜 보지 못했을까? 지난번에는 제대로 잘 찍었었는데.

 

배워도 배워도 끝이 없는 문화재 이야기

 

받침돌의 거북머리는 눈을 부릅떠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눈 꼬리가 길게 치켜 올라가 매우 험상궂은 모습이다. 이 비에 조성된 거북의 머리는 험상궂은 용의 머리에 가깝고, 목이 짧고 앞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점. 머릿돌인 이수의 표현이 격동적이며 소용돌이치는 구름무늬의 번잡한 장식 등이,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로 진전되는 탑비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귀두의 이는 큼지막하니 두텁게 표현을 하였고, 콧구멍을 크게 뚫렸다. 영화에서처럼 이 콧구멍에서 불이라도 뿜어대는 것일까? 눈썹은 짙고 굵게 표현을 하였으며, 왕방을 눈은 금방이라도 사람에게 위압을 줄 것만 같다. 귀두를 살펴본 후 그 위에 비문을 올려놓았던 장방형의 비좌를 살펴본다.

 

비좌는 받침돌과 일석으로 조성을 하였으며, 이중의 육각형 벌집 모양이 정연하게 조각된 귀갑문을 중앙부로 가면서 한 단 높게 소용돌이치는 구름을 첨가하여, 비를 끼워두는 비좌를 돌출시켰다. 그런데 지난번에도 그랬고, 그 이전에는 이 비좌를 놓치고 말았다. 비좌에 새겨놓은 문양을 돌아보다가 그만 굳어버리고 만 것이다.

 

 

 

이렇게 더위먹고 내가 제대로 살 수는 있을까?

 

꽃과 구름문양을 새겨 넣은 비좌의 밑면에도 세세하게 조각을 해놓았다. 그저 지나치기 쉬운 부분인데도 불구하고, 그 섬세함에 눈을 떼지 못한다. 그리고 이수를 보다가 ‘아’하고 탄성을 지른다. 몸을 꼬아 용트림을 하는 조각의 놀라움이다. 어찌 그리도 섬세하게 표현을 해 놓았을까?

 

 

그 뿐만이 아니다. 지금까지 그저 겉으로 보이는 것만을 보아왔던 것이다. 비좌의 밑에도 이수의 밑에도 아름답게 조각을 한 문양들. 그런 것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저 그렇게 멍하니 넋을 잃고 있는 사이, 더위는 더욱 기승을 부린다. 그렇게 꽤 시간이 흘렀다. 정신을 차려 걸음을 옮기면서 되뇐다.

 

“이 문화재 때문에 아무래도 내가 제 명대로 살지 못할 수도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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