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여행을 떠난다고 하면 얼마 전부터 부산스럽게 여행준비를 시작한다. 그렇게 떠난 여행도 물론 재미가 있다. 여행은 늘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상에서 벗어나 정신적이나 육체적으로 쉬고 싶을 때 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런데 예정도 없이 불쑥 여행을 떠난다면 어떨까?

 

올봄부터 23일 정도 여행을 떠나리라 마음을 먹었다. 누구 말마따나 오리는 곳은 없어도 갈 곳이 널려있다. 그런 곳을 그저 훌쩍 등에 걸망 하나를 메고 다녀오고 싶었다. 매일 짜인 틀 속에서 쳇바퀴 돌아가 듯 하는 일상과, 새로운 것이 없는 밋밋한 시간보내기가 가슴을 억누르고 있다는 답답함 때문이다.

 

 

여행에서 내가 만날 수 있는 존재감

 

몇 년 전만해도 여행을 떠날 때는 사전에 준비를 하지 않았다. 그저 배낭 안에 갈아입을 옷가지와 세면도구, 그리고 카메라 한 대와 필기도구 정도만 갖추면 훌쩍 여행을 떠나고는 했다. 물론 내가 가는 여행은 남들처럼 경치 좋은 곳을 찾아가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가 있는 곳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찾아간 곳에는 천년지난 석불과 석탑, 그리고 고택과 천연기념물 등 반기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좋다. 그리고 그것들과 서로 교통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정말 행복함이다. 나는 그런 문화재들을 만날 때, 그 속에 숨어있던 장인의 존재를 함께 만난다. 몇 백 년 혹은 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문화재 안에 숨죽이고 있던 장인의 존재.

 

그러한 장인의 존재를 만나는 순간 가슴은 뛰고 얼굴은 늘 상기가 된다. 그리고 꼼꼼히 그 문화재 안에 숨어있던 장인과의 대화를 시작한다. 바로 천년 세월 숨어있던 존재감을 만나는 것이다. 그런 새로운 만남이 없다면 문화재 답사란 것이 큰 의미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예정에 없는 답사를 즐겨하고는 했다.

 

 

아무생각 없이 떠난 강원도 여행

 

사실 이번에는 강화도나 백제문화권인 공주, 부여, 서천을 다녀오리라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일기예보에서는 3일간이나 비가 내린다고 한다. 그것도 일부지역엔 강풍과 함께 폭우까지 내린다는 것이다. 그저 걸망 하나를 준비하고 길을 나섰다. 그동안 늘 보지 못하고 생각만 하던 사람 하나가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벌써 10년 가까이 세월이 흘렀다. 우연히 속초를 들렸다가 그곳에서 수양딸을 한명 삼았다. 그런데 이 딸이 수양딸이 아닌 친딸보다 더 살가운 정을 느끼게 만든다. 일일이 나열할 수는 없지만 난 그 뒤로 그 아이를 그냥 딸이라고만 부른다. 부슬부슬 내리는 빗길을 달려 찾아간 속초. 아직은 휴가철이 끝나지 않아, 딸이 장사를 하고 있는 속초 영랑동 해안 길의 집집마다 사람들로 그득하다.

 

바쁜 아이를 붙들고 있을 수 없어 그저 간단히 음식을 주문하고 바다를 보고 앉았다. 파도소리와 적당히 부는 바람, 그리고 한 방울씩 얼굴을 적시는 빗방울. 그리고 바다 향이 물씬한 해산물, 이런 것들이 그리웠는가 보다. 그저 술 한 잔에도 취흥이 일어날 수 있는 그런 분위기 아니겠는가?

 

 

여행 생각 없이 그저 즐겨라

 

오늘은 어디를 여정으로 삼을까? 그것조차 진정한 여행이 아니란 생각이다. 그저 길을 나섰으면 발길 닿는 곳으로 가면 될 것을. 미리 여정을 정해놓고 그쪽으로 따라간다면 여행의 묘미를 모른다. 아무리 험한 길을 간다고 해도 길을 나섰을 때 생각나는 곳으로 가는 것이 진정한 여행이 아니겠는가?

 

비가오고 있지만 구룡령 길을 택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구룡령을 넘어보지 않았거든 백두대간을 논하지 말라. 해발 1,013m의 구룡령은 날만 흐르면 비가 내리는 곳이다. 해발 900m를 넘어서면 안개로 인해 항상 긴장하게 만드는 곳이기도 하다. 하기에 웬만한 운전자들은 이 길을 피하고는 한다.

 

그 구룡령 위에 올라서 주변을 바라보면 모든 산등성이가 눈 아래 펼쳐진다. 바로 구룡령이 주는 기쁨이다. 예정 없이 떠난 여행에서 만나게 되는 많은 것들. 그런 것들이 바로 삶의 활력소 노릇을 한다. 그런 힘이 바로 걸망 하나만 메면 길을 나설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빗길에서 만나게 되는 것들의 소중함

 

강원도. 하늘이 내린 곳이라고 한다. 그만큼 아직은 청정하다는 뜻이다. 매연 등으로 찌들어버린 도심에 살다가 만나게 되는 강원도의 청정함은 남다르다. 그 남다른 길을 빗속에서 걷는다고 하면 그것은 도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터벅거리고 길을 걷다가 만나게 되는 많은 것들의 즐거움. 이제는 그런 즐거움조차 사람들은 잊어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구룡령을 넘어 홍천군 명개를 거쳐 청천, 그리고 서석면을 지나면 국도 19번 길이다. 이 길을 걷다가 보면 횡성군 청일면을 지나 갑천면으로 나가는 길에 춘당2리를 지난다. 예전에는 장승들이 서 있어 장승골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신작로(19번 국도)가 뚫리면서 그 장승골이 사라지게 되어 다시 이곳에 탑을 쌓고 장승을 세웠다.

 

비가 내리는 날 떠난 여행이지만, 오히려 가는 곳마다 더 신선한 듯한 깅원도 길. 강원도 동쪽 속초에서 길을 나서, 구룡령을 넘어 강원도 서편인 횡성에 도착할 때까지의 길은 길고 지루하다. 하지만 그 안에서 만나는 이런 쏠쏠한 재미들을 아는 나로서는 이 길을 벗어나고 싶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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