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 사나사를 찾아가다

 

천년의 숨결이 배어있는 사나사(舍那寺)’는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 304에 위치한 사찰이며 대한민국 전통사찰 제48호이다. 사나사는 많은 수난을 당했다. 신라 경명왕 7년인 923년에 고승 대경대사가 제자 용문과 함께 창건한 후, 5층 석탑과 노사나불상을 조성하여 봉안하고 절이름을 사나사로 하였다고 전한다.

 

사나사는 조선조 선조 25년인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 깨 소실되었던 것을, 선조 41년인 1608년에 단월 한방손이 재건하였다. 영조 51년인 1773년에는 양평군내 유지들이 뜻을 모아 당산계를 조직하고 향답을 사찰에 시주하여, 불량답을 마련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경내에 비를 세웠다.순종 원년인 1907년에는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는 의병들의 근거지라 하여, 사찰을 모두 불태웠다. 그 뒤 1909년에 계헌이 큰방 15칸을 복구하였으며, 1937년에 주지 맹현우 화상이 큰방과 조사전 등을 지었다.

 

 

절에 함씨각이라는 전각이 특이해

 

그러나 1950년에 일어난 6.25사변으로 인해 또 한 번 사나사는 전소가 되었다. 1956년에 주지 김두준과 함문성이 협력하여 대웅전, 산신각, 큰 방을 재건하고 함씨각을 지었다. 이렇게 많은 수난을 당한 사나사에 함씨각을 건립했다는 것은, 사나사와 함규의 관계가 밀접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사나사 경내에는 경기도도유형문화재 제72호인 원증국사석종탑과 도유형문화재 제73호인 원증국사석종비가 있고, 대적광전, 극락전, 삼성각, 조사전, 함씨각, 요사채등의 전각이 자리 잡고 있다. 절 한편으로 용문산으로 오르는 등산로 밑으로는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 있어, 여름이면 많은 사람들이 피서를 하로 찾아오는 곳이기도 하다.

 

 

함공혈에 얽힌 전설

 

옥천면 용천 2리 사나사 입구 계곡에 작은 구멍이 있는데, 여기서 함씨 시조인 성주 함왕이 탄생했다고 전한다. 이 함공혈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아주 오랜 옛날 함공혈 부근에 함씨족이 무리를 지어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함씨들은 나름 하나의 부족을 형성하여 살아가길 열망 하였으나, 그 무리를 이끌어 나갈 지도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무리지어 사는 씨족사회에서 절대적인 힘을 가진 우두머리가 없으면, 그들은 오합지졸에 불과하다. 함씨들은 의견을 모아 하늘에 제사를 드렸는데, 어느 날 함공혈에서 한 남자 어린이가 나왔다. 함씨들은 기뻐하며 이는 하늘이 점지한 아이라고 여겨, 그 아이를 자신들의 지도자로 삼아 함왕으로 추대를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 후 함씨들은 번창을 하였으나, 결국 얼마 가지 않아 다른 부족들의 침입을 받아 함씨들의 왕은 죽고 점차 쇠퇴해 버렸다.

 

 

그런데 어느 날 함씨마을을 지나던 나그네가 말하기를 '어머니는 버려두고 자기들만 번창하길 바라면 될 것인가? 그러니 나라가 이 꼴이 되었지'라면서 혀를 차고 갔다는 것이다. 그때서야 자신들의 잘못을 깨달은 함씨들은 왕이 태어난 바위를 성 밖에 두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 뒤에 함씨 중에서 왕의 덕목을 갖춘 지도자가 나타나지를 않아, 결국 새로운 성을 축조하지 못하였고, 여기저기 흩어져 살게 되었다고 한다.

 

전설은 단지 전설로 끝이 나지만, 함규를 어찌하여 함왕이라고 칭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사나사에 전하는 함왕에 대한 또 다른 설이 있어, 그 설을 정리해 본다.

 

 

함규(왕규)를 함왕으로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또한 바위굴에서 나왔다는 분도 함규가 아니다. 함왕이라 함은 구봉 함혁 즉, 함왕주악을 일컫는 말이다. 함혁(함왕주악)은 함씨 시조로 알평과 동시대 인물이다. 함씨 세보에 의하면 당나라 때 대사마대장군(지금으로 말하면 국방부 장관)으로 병사 2천명을 거느리고 입동국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한 세력으로 한강을 유역으로 한 양근지역에 마한의 부족국가를 세운 후 세대를 이어오다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신라에 복속된다. 그가 마한의 부족국가를 세웠을 때 함왕주악은 왕()이었다. 하기에 함왕성, 함왕골, 함왕혈, 함왕계곡등의 이름이 아직도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는 신라에 복속된 후 문성왕으로부터 문간공의 시호를 받은 인물이다. 함씨들은 한강유역의 강력한 지지기반을 바탕으로 신라에서부터 고려까지 승승장구한 호족가문이다. 한강을 유역으로 한 양근지역에 함왕성을 쌓고 강력한 지역기반을 바탕으로 세대를 이어오다가, 그의 21대 후손인 함규가 고려 왕건을 도와 개국 공신이 되었다.

 

왕건은 한강유역의 강력한 호족세력 함규를 얻음으로써 후삼국 통일의 발판을 마련한다. 왕건은 함규의 두 딸과 혼인을 함으로써 함규의 강력한 지지를 얻게 되었으며, 그런 연유로 왕건이 함규에게 성을 하사한다. 그는 왕규로 고려사에 기록되어지는데, 함왕은 함규(왕규)의 시조인 함왕주악을 일컫는 말이다.

 

알평이 구봉 함혁과 경주 표암봉 밑에서 같이 지냈다는 기록이, 경주 이씨 세보에 전해진다. 알평이 신라를 개국하기 전에 촌장이었듯, 함혁 즉, 함왕주악도 마한의 부족국가 왕이었다. 사나사 함씨각은 구봉 함혁 즉, 함왕주악의 영정을 모신 각이며 함혁을 함씨 시조로 보아야 한다. 함왕은 함규(왕규)와는 다름 선대의 함혁을 칭한다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에 소재한 사나사에 가면, 딴 절에서는 볼 수 없는 전각이 자리하고 있다. 절에서 인물의 영정을 모신 전각은 조사당이라고 하여, 절과 관계가 있는 고승들의 영정을 모신 전각이 있다. 그런데 사나사에는 함씨각이라는 전각이 있다. 고려의 개국공신인 함왕성주 함규를 모셔 놓은 전각이라는 함씨각. 왜 사나사에는 이런 함씨각이 있는 것일까?

양근을 근원지로 한 양근 함씨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 사나사 인근에 소재한 함왕성은 별칭 함공성(咸公城), 양근성(楊根城), 함씨대왕성 이라고도 불렀다. 포곡식 석축 산성인 함왕성은 해발 1031m의 봉우리를 기점으로 사나사가 있는 계곡을 포위하고 있는 형국이다. 자연석으로 쌓은 함왕성은 현재 700m 정도의 무너진 석축이 남아있는데, 그 내성의 규모가 2km에 달한다고 하니 작은 성은 아니다. 석축의 성벽은 거의 무너졌다고 하는데, 눈이 쌓인 함왕성을 오르지를 못해 그 모습을 볼 수 없어 아쉽다.


양근에는 이 함왕성에 대한 전설이 전한다. 성 밖 계곡 아래 있다는 함공혈이라 부르는 바위굴에서 삼한시대에 주악이라는 함씨대왕이 태어났다는 것이다. 양근 함씨의 시조 함혁이 삼한시대에 석성을 쌓고 스스로 함왕(咸王)이라 칭했으며, 이곳을 세거지로 정한 함씨들이 이 바위굴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을 쌓고 웅거하였다가 멸망하였고, 그 자손들이 본관을 양근으로 삼았다 한다.

통일신라시대 말기에는 지방에 산거한 호족들이 각지에서 스스로 한 세력을 일으켜 왕이라는 칭호를 붙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 양근을 중심으로 한 호족 세력 중 함규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스스로를 함왕이라 칭한 듯하다. 그러나 왕건이 고려를 세우자, 왕건에게 귀속하여 후삼국의 통일에 공을 세웠다. 그런 연유로 함규는 개국공신이 되고, 그가 죽은 후 사나사를 원찰로 삼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高麗太祖統合三韓翊贊壁上功臣名錄'을 살펴보면 1등 공신에는 최응,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이 있고, 2등 공신에는 유금필, 김선평, 장길, 류차달, 이도, 함규, 김선궁, 홍규, 왕희순, 김훤술, 윤신달, 박윤웅 등의 이름이 보인다. 또한 3등 공신에는 왕식, 염태, 평견, 권행, 박희술, 능식, 권신, 염상, 전락, 연주, 마난 등이, 4등 공신으로는 김홍술과 박수경이 공신록에 책봉이 되었다. 함규는 개국공신 중 2등 공신으로 책봉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함공혈에 얽힌 전설

옥천면 용천 2리 사나사 입구 계곡에 작은 구멍이 있는데, 여기서 함씨 시조인 성주 함왕이 탄생했다고 전한다. 이 함공혈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아주 오랜 옛날 함공혈 부근에 함씨족이 무리를 지어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함씨들은 나름 하나의 부족을 형성하여 살아가길 열망 하였으나, 그 무리를 이끌어 나갈 지도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무리지어 사는 씨족사회에서 절대적인 힘을 가진 우두머리가 없으면, 그들은 오합지졸에 불과하다. 함씨들은 의견을 모아 하늘에 제사를 드렸는데, 어느 날 함공혈에서 한 남자 어린이가 나왔다. 함씨들은 기뻐하며 이는 하늘이 점지한 아이라고 여겨, 그 아이를 자신들의 지도자로 삼아 함왕으로 추대를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 후 함씨들은 번창을 하였으나, 결국 얼마 가지 않아 다른 부족들의 침입을 받아 함씨들의 왕은 죽고 점차 쇠퇴해 버렸다.

그런데 어느 날 함씨마을을 지나던 나그네가 말하기를 '어머니는 버려두고 자기들만 번창하길 바라면 될 것인가? 그러니 나라가 이 꼴이 되었지'라면서 혀를 차고 갔다는 것이다. 그때서야 자신들의 잘못을 깨달은 함씨들은 왕이 태어난 바위를 성 밖에 두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 뒤에 함씨 중에서 왕의 덕목을 갖춘 지도자가 나타나지를 않아, 결국 새로운 성을 축조하지 못하였고, 여기저기 흩어져 살게 되었다고 한다.

전설은 단지 전설로 끝이 나지만, 함규를 어찌하여 함왕이라고 칭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함공혈을 찾아보고 싶었으나 눈이 많이 쌓여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역사의 흔적은 늘 색다른 이야기로 다가와,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만든다.

수많은 난 속에 함씨각의 존재가 있어

사나사는 많은 수난을 당했다. 신라 경명왕 7년인 923년에 고승 대경대사가 제자 용문과 함께 창건한 후, 5층 석탑과 노사나불상을 조성하여 봉안하고 절이름을 사나사로 하였다고 전한다. 조선조 선조 25년인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 깨 소실되었던 것을, 선조 41년인 1608년에 단월 한방손이 재건하였다.

순종 원년인 1907년에는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는 의병들의 근거지라 하여, 사찰을 모두 불태웠다. 그 뒤 1909년에 계헌이 큰방 15칸을 복구하였으며, 1937년에 주지 맹현우 화상이 큰방과 조사전 등을 지었다. 그러나 1950년에 일어난 6.25사변으로 인해 또 한 번 사나사는 전소가 되었다. 1956년에 주지 김두준과 함문성이 협력하여 대웅전, 산신각, 큰 방을 재건하고 함씨각을 지었다. 이렇게 많은 수난을 당한 사나사에 함씨각을 건립했다는 것은, 사나사와 함규의 관계가 밀접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함씨각은 미타전 옆에 마련되어 있다. 1칸으로 된 함씨각 안에는 함규의 영정인 듯한 탱화가 걸려있다. 언제부터 함씨각이 있었는지는 정확지가 않다. 하지만 함규가 사후에 사나사를 원찰로 삼고 함씨각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 양근지방을 근거로 세력을 확장했던 함씨들이, 사나사에 많은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함규라는 고려의 개국공신을 이곳에 모셔, 함씨들의 정신적인 지주로 삼았는지도 모른다. 사나사에 있는 함씨각은 그렇게 색다른 이야기로 찾는 이를 즐겁게 만든다. 눈이 쌓여 발목까지 빠져들지만, 겨울 답사는 또 다른 재미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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