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에 소재하고 있는, 보물 제94호 사자빈신사지 석탑. 이 석탑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충주와 제천의 문화재를 답사하기 위해 지나던 길에 두 번째로 들린 빈신사지. 문화재란 볼 때마다 조금씩 느끼는 바가 다른 것은, 아마 그만큼 우리 문화재에 대해 나름대로 눈을 뜨고 있기 때문인가 보다.

 

제천시 한수면의 빈신사지 석탑은, 국보 제35호인 구례 화엄사에 있는 사사자 석탑과 같은 유형이다. 우리나라에는 이러한 사사자 석탑이 몇 기가 전하고 있는데, 제천 빈신사지 석탑은 시기적으로 보아 신라 때 석탑인 화엄사 석탑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조성 연대와 이유가 확실한 빈신사지 석탑

 

문화재는 대개 그 형태 등으로 보아 연대를 추정한다. 그만큼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기가 힘이들기 때문이다. 문화재의 복장물 등이 모두 도난을 당하거나 도난을 당하기 때문이다. 그런 덤에서 빈신사지 석탑은 조성 연대와 목적이 확실하다는데 특징이 있다. 그것은 기단에 명문을 음각해 놓았기 때문이다.

 

 

명문에 적힌 것을 보면 빈신사지 석탑은 고려 현종 13년인 1022년에 조성을 했으며, 왕의 장수와 국가의 안녕, 불법의 융성으로 인해 적국인 거란족을 영원히 물리칠 수 있기를 염원해 세웠다고 적고 있다. 이 석탑은 명문을 보아 처음 조성했을 때는 9층 석탑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받침돌 위에는 사각의 하대가 놓여있고, 상부에는 두터운 테를 둘렀다. 그 밑에는 각 면을 파서 3개의 안상을 새겨 넣었다. 꽃문양이 그려진 안상은 고려시대 석탑 등의 기단에서 보이는 수법이다. '몹쓸 적들이 영영 물러갈 것을 기원하며 고려 현종 13년인 1022년에 월악산 사자빈신사에 구층 석탑을 세웠다'1079자의 글이 명문으로 음각되어 있다.

 

 

아름다운 상층 기단은 뛰어난 작품

 

상층 기단의 중석은 이 빈신사지 석탑의 백미라고 보여진다. 네 마리의 사자가 머리에 갑석을 이고 있는데, 네 마리의 사자는 모두 다르게 조형이 되었다. 갈기를 세운 네 마리의 사자 중 앞쪽에 있는 좌우 두 마리의 사자는, 고개를 약간 비스듬히 돌려 사선으로 밖을 보고 있다 뒤편의 두 마리는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네 마리의 사자가 지키고 있는 안에는 비로자나불의 좌상이 자리하고 있다. 비로자나불은 중생을 제도하는 부처로 알려져 있다. 왜 거란을 물리치기 위한 서원을 담은 탑에 비로자나불을 조각한 것일까? 아마도 비로자나불의 원력이 온 세상에 미치듯, 북방정벌을 위한 고려의 염원이 그렇게 온 세상에 미치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을까?

 

 

네 마리의 사자가 받치고 있는 옥개석의 밑면 중앙에는 연꽃이 양각되어 있다. 이 연꽃은 가운데 연밥을 두고 주변에 꽃잎을 새겨 넣은 것으로, 그 조각 솜씨가 뛰어나다. 현재는 위로 5층의 몸돌과 4층의 옥개석만이 남아있다. 그러나 현재의 탑만으로도 고려 시대 석탑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간직하고 있다.

 

네 마리의 돌사자는 그 모습이 다르게 조성이 되었다. 정면 좌우에 있는 두 마리의 사자는 입을 벌리고 금방이라도 무엇을 향해 달려들 것만 같은 모습으로 조각하였다. 뒤편에 있는 두 마리는 입을 다문 형태이다. 이 네 마리의 사자는 모두 갈기가 있어, 수사자임을 알 수 있다. 모든 사자는 힘차게 조성이 되었는데, 아마도 고려의 기상을 담은 듯하다.

 

 

고려 현종 때에 조성된 사자빈신사지 석탑. 이 석탑을 조성하면서 새겨 놓은 명문대로 거란을 영원히 물리치기를 빌었다. 그리고 왕이 장수할 것을 바랐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탑의 기능은 호국탑으로 세웠을 것이란 생각이다. 천년이나 되는 세월을 그렇게 서 있는 빈신사지 석탑. 오늘 이 빈신사지 석탑이 더욱 마음 안에 다가오는 것은, 혼란한 이 시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재 서울 경기지역에 첫 눈이 내렸다. 첫 눈이라고 하지만 눈이 온 표시도 나지 않게 조금 내리는가 싶더니 그쳐버렸다. 한 겨울에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리는 날은 가급적이면 고택답사는 피하고 있다. 그것은 눈에 덮힌 고택의 정취는 아름답지만, 곳곳을 제대로 살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오리 고가를 찾아 간 날은 눈이 발목까지 빠지게 쌓여있는 날이었다.

 

제천시 한수면 소재지에서 597번 도로를 따라 한수면에 있는 덕주사를 찾아가기 전, 좌측으로 보면 도로에서 조금 들어가 한송초등학교가 있다. 그 학교 교문 옆에는 초가 한 채와 기와 한 채가 나란히 보인다. 이 초가가 충북 민속문화재 제5호인 한수 명오리 고가이다. 이 명오리 고가는 초가로 꾸며졌으며, 원래는 한수면 명오리 303번지 풍무골에 있었던 것을, 충주댐의 건설로 1983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한 것이다.

 

 

눈밭에 집 주위를 몇 바퀴나 돌아

 

명오리 고가를 찾아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벌써 세 번째 찾아가는 집이지만, 갈 때마다 문이 잠겨 있었다. 대문 안으로 보면 슬리퍼 등도 보이고, 패널을 여기저기 쌓아 놓은 것이 사람이 사는 집 같은데 항상 문이 자물통으로 채워져 있다. 이곳도 눈이 꽤나 내렸는지 집 뒤편으로 돌아가니, 밭에는 발목까지 빠지는 눈이 쌓여있고 담장의 초가위에도 눈이 쌓여있다. 할 수 없이 눈밭을 몇 바퀴를 돌면서, 집의 구석구석을 촬영하는 수밖에. 고가를 찾아다니다가 보면 이렇게 문이 잠겨 있는 집들이 대부분이다.        

 

명오리 고가는 튼 ㅁ 자형의 집이다. 대문을 사랑채로 삼아 대문을 들어서면서 좌측에는 두 칸 방을 드렸고, 대문을 지나 남쪽으로는 방과 외양간, 방앗간, 광으로 배열하였다. ㄴ 자형의 이 대문채는 사랑과 대문채를 겸한 집이다. 이 지역의 일반적인 민가의 형태를 갖고 있는 명오리 고가는 특별한 점은 없으나, 나름대로 중부지방 민가의 형태를 잘 나타내고 있는 고가이다.

 

 

건넌방에 낸 까치구멍의 용도는?

 

명오리 고가의 안채는 ㄱ 자 형으로 대문채와 마주하고 있다. 삼단의 돌로 쌓은 기단위에 지은 안채는, 안방을 기준으로 하여 정남향을 하고 있다. 안방의 좌측으로는 부엌이 있고, 우측으로는 윗방이 있다. 꺾인 부분에는 한 칸 대청과 건넌방이 자리하고 있다. 안채의 부엌 앞에는 누군가 패널을 가득 쌓아 놓아, 밖에서는 부엌문을 확인할 수가 없다.

 

밖을 몇 바퀴를 돌았지만, 안방이 있는 곳은 가려서 보이지를 않는다. 이럴 때는 할 수 없이 안방의 뒤편을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고가를 답사하면서 생긴 나름대로의 답사방법이다. 이제는 웬만한 집은 밖에서 한 바퀴만 돌아보아도 집안 구조를 알 수 있으니, 그도 다행이랄 수밖에.

 

 

안채는 평범한 민가의 꾸밈이다. 그런데 안채의 건넌방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건넌방의 앞쪽에는 툇간으로 달아낸 한데 아궁이를 두었는데, 그 아궁이 우측에 까치구멍이 있다. 바람을 막으려고 종이로 발라 놓았지만, 이렇게 건넌방에 까치구멍을 낸 이유는 무엇일까? 이 까치구멍의 용도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질 않는다. 그냥 작은 쪽문이라면 이 문을 통해 음식물 등을 들여보낼 수 있다고 하지만, 까치구멍이라니.

 

건넌방의 옆문 밖으로는 툇마루를 놓았다. 뒤로 돌아가니 대청의 뒤편에는 판자문이 있다. 옆과 뒷면을 보고나서야 이 까치구멍의 용도가 이해가 간다. 일반적으로 건넌방에도 뒷벽에 문을 하나정도 내는 것이 통례이다. 그런데 건넌방은 툇마루를 놓은 곳과, 대청에서 드나드는 곳 밖에 문이 없다. 그러다보니 이렇게 작은 까치구멍을 한데 아궁이쪽에 하나 내어놓음으로써 환기를 원활하게 한 것이다. 작은 것 하나에서도 느낄 수 있는 지혜다.

 

 

판자굴뚝이 아름다운 집

 

명오리 고가는 굴뚝이 모두 판자굴뚝이다. 이 판자굴뚝이 이 초가집을 멋지게 장식하고 있다. 판자굴뚝은 네모난 판자로 길게 사각의 연기통을 만들고, 그 중간에는 역시 나무로 움직이지 않게 고정을 시켰다. 그리고 맨 위에는 사방을 트이게 해, 위를 꺾은 판자로 마감을 하였다. 흡사 고깔을 쓴 것처럼 만들었는데, 모든 방의 뒤편에는 이 판자굴뚝이 서 있다. 이 판자굴뚝이 서 있어, 초가집이 더욱 여유 있게 보인다.

 

명오리 고가의 또 하나의 특징은 집은 전체적으로 크지 않지만, 이용을 잘 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체적으로 조금 흐트러진 사각형으로 쌓은 담 안에 집을 놓았는데, 대문채에서 북쪽 담 끄트머리에 측간을 두었다. 그리고 안채 부엌 밖에는 또 다른 한데 아궁이를 놓았다. 이렇게 전체적인 조형을 생각한 것이 명오리 고가의 특징이다. 비록 화려하지도 않고 남다를 것도 없는 초가이지만, 그 안에 한껏 여유를 부린 집이다.

판서 김세균(1812~1879)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자는 공익(公翼)이고 호는 만재(晩齋)이다. 본관은 안동으로 헌종 7년인 1841년에 정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대사헌을 거쳐 고동 8년인 1871년에 이조판서를 지냈다. 후에는 강원도와 함경도의 관찰사를 거쳐, 수원유수가 되었다. 왕명으로 <기년아람>의 속편을 편찬하였으며, 저서에 <완염통고(琬炎通考)>가 있다. 시호는 문정이다.

 

자리를 옮기면서 안채와 떨어진 사랑채

 

현재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뒤로 덕주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김세균 판서고가는, 원래 한수면 북노리에 있었던 고가다. 충주댐이 건설되면서 1983년 이곳으로 옮겼으며, 현재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88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 집은 본래 사랑채와 안채로 구분되어 있었다. ㄱ자형의 현재 집은 사랑채고, 안채는 이전 시 딴 곳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충주댐의 건설로 인해 수몰지역에 있던 많은 문화재들이, 이전을 하면서 조금씩 달라지기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피해를 본 것은 고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택들은 워낙 옮기는 것도 쉽지 않은 데다가, 일반적인 문화재들처럼 한 부분씩 떼어 옮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집을 전체로 옮기는 기술이 발달이 되었지만, 아마 1983년경에는 그럴 수가 없었을 테니, 집의 기둥 하나, 기와 하나도 다 해체해 옮긴 후 다시 조립을 했을 것이다.     

 

돌담이 아름다운 집. 충북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에 소재한 김세균 판서고가는 아름다운 돌담이 눈길을 끈다.

충주댐의 건설로 수몰지역에서 이곳으로 1983년에 옮겼다. 안채는 딴 곳으로 가고 사랑채만이 이건되었다.

 

사랑채만 남은 김세균 판서고가

 

김세균 판서고가는 몇 번을 찾아갔다. 갈 때마다 문이 잠겨있고 안에 사람이 없어, 매번 주변을 돌면서 촬영을 해야만 했다. 어떤 것이든지 속 시원히 안을 들여다 볼 수가 없으면 답답하다. 김세균 판서고가 역시 안으로 들어가 마음껏 휘젓고 다니면서 보아야 하지만, 그럴 수가 없으니 답답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월장을 할 수도 없으니 어쩌겠는가. 밖에서만 보는 수밖에. 이럴 때는 정말 난감하다. 많은 고택을 돌면서 이렇게 안으로 들어갈 수 없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현재 김세균 판서고가는 사랑채와 광채만이 있다. 높은 축대 위에 자리한 이집은 돌계단을 올라 일각문으로 마련한 대문이 있고, 대문의 우측에 광채가 자리하고 있다. 밖에서 본 광채는 세 칸 정도로 지어졌으며, 두 개의 판자문을 두고 있다. 생활공간인 사랑채는 ㄱ자 형으로, 앞으로 ㅡ자 형 네 칸으로 되어있고, 뒤로 날개를 붙여 세 칸을 달아내었다. 이 날개채의 끝은 사랑방으로 제사의례를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대문 옆에 자리한 광채. 세칸으로 지어졌으며, 두개의 판자문을 달고 있다.

일각문으로 된 대문. 이 대문은 집을 옮길 당시 집안의 일각문을 가져와 대문으로 삼은 듯하다.

 

한 끝에 놓은 개방된 대청이 특별해

 

김세균 판서고가의 특징은 개방된 대청을 한 끝에 놓았다는 것이다. 안을 자세히 볼 수가 없어서, 겨우 발 하나 디딜 틈도 없는 축대 위에 발끝을 붙이고 안을 들여다 볼 수밖에. 안의 사랑채는 그래도 특별함이 있다. 대문간에서 바라다보는 사랑채는 좌측 끝에 툇마루를 더하여 뒤로 길게 대청을 드렸다. 이 대청은 위로 들어 올리는 문을 내어 개방이 되어 있고, 밖의 벽으로도 전체를 문을 내어 누정과 같은 구실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 옆으로는 두 칸의 방을 드렸는데, 그 앞에는 툇마루를 넓게 깔았다. 그리고 맨 끝의 한 칸은 툇마루에 연결해 판자벽을 달아 마감을 하였다. 앞에서 보면 방과 같은 이곳은, 오래도록 손을 보지 않았는지 벽의 일부가 떨어져 내렸다. 뒤편으로 돌아가니 이곳의 뒤편엔 까치구멍과 판자문이 있다. 아마 부엌의 용도로 지어진 구조물인 듯하다. 앞으로 보면 방인데, 뒤로 돌아가면 부엌인 이 방은 이 집의 구조가 특이함을 알게 해준다.

 

 사랑채 한 끝에 자리한 대청. 문을 위로 올리게 조성이 되었다. 바깥벽을 모두 문으로 낸 것으로 보아 누정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앞으로 두 칸의 방을 드렸다. 그리고 맨 끝에는 부엌인데도 앞에서 보면 방과 같이 꾸며졌다

 

사랑채가 안채의 구실에 제몫을 다하는 집

 

김세균 판서고가의 특징은 사랑채이면서도 안채의 구실까지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앞부분의 ㅡ자 형의 공간 네 칸에 두 칸의 방이 있고, 뒤편에 꺾인 부분에도 두 칸의 방을 두어 충분한 공간을 마련하였다. 아마 이 집이 원래의 안채와 사랑채를 그대로 다 옮겨왔으면, 지금보다도 더 품위가 있는 집이 되었을 것이다.     

 

많은 고택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집들은, 어쩔 수 없이 살아가기에 조금이라도 불편함이 있으면 손을 보는 듯하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할 수는 없다. 누구나 다 자신의 집에서 행복하게 살아가야 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형을 잃고 조금씩 변해가는 고택을 보면서 마음이 허전한 것은, 난 역시 있는 그대로가 더 좋다는 사고를 버릴 수가 없기 때문인가 보다.

 

사랑채 뒤편이 맨 끝방을 사랑방으로 두고, 제사의례를 하는 공간으로 마련하였다.

 눈이 쌓인 담장과 장독이 조화를 이룬다.

 

김세균 판서고가를 돌아보면서, 툇마루에 놓인 메주뭉치가 보기 좋아 혼자 웃는다. 남들이 보면 무엇이라고 할까? 아마 고택답사를 하면서 이렇게 혼자 웃으면서 다닌 적이 꽤나 많은 듯하다. 그만큼 고택에 빠져 있기 때문이지만.

충북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에 소재하고 있는, 보물 제94호 사자빈신사지 석탑. 이 석탑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충주와 제천의 문화재를 답사하기 위해 지나던 길에 두 번째로 들린 빈신사지. 문화재란 볼 때마다 조금씩 느끼는 바가 다른 것은, 아마 그만큼 우리 문화재에 대해 나름대로 눈을 뜨고 있기 때문인가 보다.

제천시 한수면의 빈신사지 석탑은, 국보 제35호인 구례 화엄사에 있는 사사자 석탑과 같은 유형이다. 우리나라에는 이러한 사사자 석탑이 몇 기가 전하고 있는데, 제천 빈신사지 석탑은 시기적으로 보아 신라 때 석탑인 화엄사 석탑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조성 연대와 이유가 확실한 빈신사지 석탑

문화재는 대개 그 형태 등으로 보아 연대를 추정한다. 그만큼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기가 힘이들기 때문이다. 문화재의 복장물 등이 모두 도난을 당하거나 도난을 당하기 때문이다. 그런 덤에서 빈신사지 석탑은 조성 연대와 목적이 확실하다는데 특징이 있다. 그것은 기단에 명문을 음각해 놓았기 때문이다.

명문에 적힌 것을 보면 빈신사지 석탑은 고려 현종 13년인 1022년에 조성을 했으며, 왕의 장수와 국가의 안녕, 불법의 융성으로 인해 적국인 거란족을 영원히 물리칠 수 있기를 염원해 세웠다고 적고 있다. 이 석탑은 명문을 보아 처음 조성했을 때는 9층 석탑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받침돌 위에는 사각의 하대가 놓여있고, 상부에는 두터운 테를 둘렀다. 그 밑에는 각 면을 파서 3개의 안상을 새겨 넣었다. 꽃문양이 그려진 안상은 고려시대 석탑 등의 기단에서 보이는 수법이다. '몹쓸 적들이 영영 물러갈 것을 기원하며 고려 현종 13년인 1022년에 월악산 사자빈신사에 구층 석탑을 세웠다'는 10행 79자의 글이 명문으로 음각되어 있다.

아름다운 상층 기단은 뛰어난 작품

상층 기단의 중석은 이 빈신사지 석탑의 백미라고 보여진다. 네 마리의 사자가 머리에 갑석을 이고 있는데, 네 마리의 사자는 모두 다르게 조형이 되었다. 갈기를 세운 네 마리의 사자 중 앞쪽에 있는 좌우 두 마리의 사자는, 고개를 약간 비스듬히 돌려 사선으로 밖을 보고 있다 뒤편의 두 마리는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네 마리의 사자가 지키고 있는 안에는 비로자나불의 좌상이 자리하고 있다. 비로자나불은 중생을 제도하는 부처로 알려져 있다. 왜 거란을 물리치기 위한 서원을 담은 탑에 비로자나불을 조각한 것일까? 아마도 비로자나불의 원력이 온 세상에 미치듯, 북방정벌을 위한 고려의 염원이 그렇게 온 세상에 미치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을까?

네 마리의 사자가 받치고 있는 옥개석의 밑면 중앙에는 연꽃이 양각되어 있다. 이 연꽃은 가운데 연밥을 두고 주변에 꽃잎을 새겨 넣은 것으로, 그 조각 솜씨가 뛰어나다. 현재는 위로 5층의 몸돌과 4층의 옥개석만이 남아있다. 그러나 현재의 탑만으로도 고려 시대 석탑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간직하고 있다.



오늘 나라의 평안을 빈신사지에서 빌고싶다

네 마리의 돌사자는 그 모습이 다르게 조성이 되었다. 정면 좌우에 있는 두 마리의 사자는 입을 벌리고 금방이라도 무엇을 향해 달려들 것만 같은 모습으로 조각하였다. 뒤편에 있는 두 마리는 입을 다문 형태이다. 이 네 마리의 사자는 모두 갈기가 있어, 수사자임을 알 수 있다. 모든 사자는 힘차게 조성이 되었는데, 아마도 고려의 기상을 담은 듯하다.




고려 현종 때에 조성된 사자빈신사지 석탑. 이 석탑을 조성하면서 새겨 놓은 명문대로 거란을 영원히 물리치기를 빌었다. 그리고 왕이 장수할 것을 바랐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탑의 기능은 ‘호국탑’으로 세웠을 것이란 생각이다. 천년이나 되는 세월을 그렇게 서 있는 빈신사지 석탑. 오늘 이 빈신사지 석탑이 더욱 마음 안에 다가오는 것은, 혼란한 이 시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사람들이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문화재를 답사하다가 보면 참 희한안 일을 자주 보고는 한다. 어떤 때는 정말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올 때도 있다. 도대체 우리나라 교육에서는 어릴 적부터 문화재의 소중함에 대해서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 것인지. 적어도 사회생활에서 문화재는 무엇이며, 우리가 문화재를 왜 보존해야 하는지 정도는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문화재에 낙서를 하는 것은 비일비재고, 심지어는 사람들이 있는 앞에서 문화재를 나무로 두드리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발로 차기가 일쑤이다. 목이 달아난 석불이며, 국보나 보물의 벽에 가득한 낙서도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왜 우리들은 이렇게 소중한 문화재를 폄하하고 훼손하는 것일까?

보물 제94호 사자빈신사지 석탑

본질적인 교육도 되어있지 않은 나라

문화재가 무엇인지, 그것을 우리가 왜 보존해야 하는 것인지. 그런 것을 가르친다는 것은 기본적인 것이다. 말로는 우리 문화재를 보존해야 한다고 잘도 떠들어 댄다. 그러나 정작 현장을 돌아다니면서 보면, 그런 말이 얼마나 허구에 찬 것인지를 알 수가 있다. 우리의 문화재 보호 점수는 빵점이다.

답답한 정도가 아니다. 고작 문화재를 보호한다는 생각에서 나타난 행위는 바로 꽁꽁 잠가버리는 것이다. 그런다고 올바로 보존이 되는 것은 아니다. 숱한 문화재들이 도난을 당한다. 요즈음 TV 광고에 보면 문화재 도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 광고를 볼 때마다 가슴이 아리다. 그런 광고를 해야 할 정도로 문화재에 대해 무지한 것이 우리네들이란 이야기다.

왜 기를 쓰고 좋은 학교를 가야만할까? 그러기 위해서 어릴 적부터 학원을 몇 군데씩 돌아야 한단다. 그 아이들이 배우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공동체, 우리, 이런 말을 알기나 할까? 우리문화, 우리민족, 우리말, 우리글, 이런 것은 알기나 할까? 나만 잘 살겠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는 작금에 우리는 잊어도 너무 소중한 것을 잊고 산다. 내 종교와 관계가 없다고, 내가 돈을 버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차라리 무관심이 나을 것만 같다. 그렇다면 폄하나 훼손이라도 하지 않을 테니까.

명문. 기단석에 쓰여진 명문. 몹쓸 적들이 영영 물러갈 것을 기원하며 고려 현종 13년(1022년) 월악산 사자빈신사에 구층 석탑을 세웠다‘고 적었다

여기서 모하는 짓이야!

답사를 하면 여기저기 많이 다닌다. 답사를 하는 사람들은 똑 같은 거리를 걷는다고 해도, 그냥 관람을 하는 사람의 세 배를 더 걸어야 한다. 그만큼 여기저기를 자세히 보기 위해서는 쉴 새 없이 걸음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조금 바쁘게 돌아다니는 날은 아침부터 해가 지기 전까지 14시간 이상을 쉬지 않고 걷기도 한다. 그만큼 열심을 내지 않으면 문화재 답사는 의미가 없다.

문화재가 꼭 사람들이 많이 보는 곳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 문화재는 사람들의 발길도 끊기고, 산 속이나 사람들이 찾지 않는 곳에 있기도 하다. 제천 한수면 송계리에 소재한 보물 제94호인 사자빈신사지석탑을 답사하러 가는 길에 덕주산성의 문이 보인다. 문을 촬영하려고 위로 올라가 보니, 누각의 문이 닫혀있다. 산성의 문은 사람들의 통행이 많은 곳이 아니면 일반적으로 개방을 하고 있다.

상층기단에 조성된 사사자 상은 내 마리가 모두 다르게 조형이 되었다

안으로 들어가려고 보니 안에서 기척이 난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세상에 이런 황당한 일이. 남녀가 둘이 부둥켜안고 뒹굴고 있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순간 화가 치민다. “이 사람들 문화재 안에서 지금 모하는 짓거리야?” 순간 두 사람도 놀랐는가 보다.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곳이다 보니, 그 안에서 둘이 사랑이라도 나누려고 했는지. 여자가 황급히 옷을 추스르고 얼굴을 가리고 도망을 가버린다.

마침 밑에는 동행을 한 일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도 얼굴이 벌겋게 변해 어쩔 줄 모른다. 생각 같아서는 그냥 한 대 쥐어박고 싶다. 문화재 안에서 이런 짓을 하면 안 된다고 타일러 보내고 나니 기가 막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들이 알고 있는 문화재에 대한 상식인지도 모른다.

빈신사지 석탑의 상층 기단 중앙에 있는 비로자나불

사진을 찍고 내려오니 일행이 무슨 일인가 묻는다. 여자가 황급히 내려와 차를 몰고 가버렸다는 것이다. 어찌된 일인지를 이야기를 했더니, 어이가 없어 그냥 웃고 만다. 이런 황당한 짓을 한 사람들이 왜 생겨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우리 문화재의 소중함에 대해서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란 생각이다. TV광고로 아무리 문화유산이 소중하다고 이야기를 해보았자, 누가 그것을 눈여겨 볼 것인가? 어릴 적부터 우리문화재에 대한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것보다 좋은 방법은 없을 것이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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