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비(下馬碑)’라는 것이 있다. 하마비는 궁궐이나 향교, 혹은 사찰이나 옛 고택 등의 앞에도 서 있다. 이 하마비가 서 있으면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타고 가던 말에서 내리라는 뜻이다. 하마비의 한편이나 뒤쪽을 보면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고 적혀있다.

 

여기서 ‘대소인’이란 당하관인 종 3품 이하의 관원을 뜻한다. 또한 원(員)이란 당상관을 말한다. 우리가 옛 각판 등에서 볼 수 있는 정3품 통정대부 이상을 말하는 것이다. ‘개(皆)’는 ‘모두 다’ 라는 뜻이니, 결국은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 말에서 내리라는 뜻이다. 이 하마비가 서 있는 곳에서는 누구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려 걸어가란 뜻이다.

 

자연석을 이용한 하마비도 있어

 

물론 전국에 있는 하마비는 거의 위와 같은 ‘대소인원개하마’라고 각자를 했다. 하지만 가끔은 예외도 있다. 고을의 방백 등이 자신의 위치를 과시하기 위함인지는 몰라도, 자신의 직급을 적고 그 밑으로는 다 말에서 내리라고 적은 글귀도 보인다. 이런 예외인 하마비는 고을의 수령이 근무를 하는 입구에 놓여있기도 하다.

 

이러한 하마비는 어디를 가나 흔히 볼 수가 있다. 하마비는 대개 일석으로 조성을 한다. 길게 세운 위를 둥그렇게 조형을 해 세우는 것이 일반적인 하마비의 모습이다. 하지만 특별하게 만든 하마비도 있다.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해 하마비를 만든 곳도 있고, 돌에다가 하마비라고 각자를 해 놓은 것들도 보인다.

 

 

하마비는 조선조 태종 3년인 1413에 종묘의 궐문 입구에 표목을 세운 것이 처음이다. 이곳에는 ‘대소관리과차개하마(大小官吏過此皆下馬)’라고 적어, ‘이곳을 지나는 사람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말에서 내려야 한다.’ 라는 뜻이다. 조선시대에는 궁이나 종묘, 문묘, 왕장이나 성현, 고관의 출생지나 분묘 앞에 세워졌다.

 

전주 경기전 앞의 하마비는 특이해

 

전북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 3가 102번지에 소재한 경기전은 ‘어용전(御容殿)’이다. 어용전은 조선 태종 10년인 1410년에 완산과 계림, 평양에 건물을 짓고 태조의 어진을 모신 곳으로 세종 24년인 1442년부터 지역마다 이름을 달리 불렀다고 한다. 경기전은 전주에 있던 어용전을 가리키는데 선조 31년인 1598년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광해군 6년인 1614년에 고쳐지었다.

 

경기전 입구에 보면 특이하게 생긴 하마비가 서 있다. 일반적으로 하마비는 일석으로 조성을 하는 것에 비해, 경기전 앞의 하마비는 밑에 두 마리의 행태가 비를 받치고 있는 형태이다. 두 마리의 해태가 사각형의 넓은 판석을 이고 있으며. 그 위에 하마비를 세웠다. 판석에는 사방에 안상을 새겨 넣었다.

 

 

하마비의 표석에는 ‘지차개하마 잡인무득입(至此皆下馬 雜人毋得入)’이라고 적혀있다. 즉 이곳에 이르거든 누구나 다 말에서 내려야 하며, 잡인을 일체 들이지 말라는 뜻이다. 이 하마비는 1614년에 세웠으며, 그 후 1856년에 증각을 하였다.

 

하마비라고 해서 다 같지는 않다. 대개는 비의 중앙에 ‘하마비’라고 음각을 한 후, 한 편에 대소인원개하마란 글귀를 적어 놓는 방법을 택한다. 하지만 경기전 앞에 서 있는 하마비는 하마비라는 글자를 음각하지 않고, 양편으로 나누어 글귀를 내리 음각했다. 아마도 이 경기전이 태조의 어진을 모셔놓은 곳이기 때문에, 이렇게 특별한 하마비를 세운 듯하다.

 

전국을 다니면서 보면 많은 곳에서 만날 수 있는 하마비. 때에 따라서는 하마비에 얽힌 재미있는 사연도 들을 수가 있다. 이제는 이와 같은 하마비도 훌륭한 하나의 문화유산으로 인정해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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