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하남시 춘궁동 이성산에 자리한 사적 제422호인 이성산성. 일부에서는 백제 혹은 고구려에서 축성한 것으로 전해지기도 하지만, 성곽의 발굴에서 조사된 바로는 신라시대의 성으로 보기도 한다. 그 이유는 고고학적인 유물과 축성방법으로 보아, 신라의 성이라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는 것이다.

 

이성산성은 본래 백제 한성시대(서기전 18~서기 475)의 도읍지로 주장되어 오기도 했다. 그러나 한양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1986년부터 2003년까지 10차례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결과로 볼 때, 신라가 삼국통일의 과정에서 한강유역을 확보한 후 신주를 설치할 때, 이 신주의 주성으로 쌓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눈길에 찾아간 이성산성

 

이성산성을 오른 것은 산성 안에 남아있는 저수지를 돌아보기 이해서이다. 눈 내린 다음에 찾아간 이성산성을 오르는 길은 눈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등산객들이 밟은 발자국인지 눈길에 발자국들이 흐트러져 있다. 조심스럽게 눈길을 걸어 산으로 오른다. 해발 210m의 높지 않은 이성산에 쌓은 포곡식 산성인 이성산성.

 

20여분을 오르다가 보니, 저만큼 성돌이 보인다. 이성산성은 산의 경사면을 이용하여 석축을 하였다. 성벽을 돌아가면서 10여개소의 치를 두었다고 하는 이성산성. 그러나 이번 답사는 성 안에 남아있는 저수지를 답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성 안에는 두 곳의 저수지가 있다고 하는데, 그 중 한곳을 돌아보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온전한 배수로가 남아 있는 저수지

 

이성산성 안에 있는 저수지는 2차에 걸쳐 조성이 되었다. 1월 3일 찾아간 저수지 주변에는 흰 눈이 쌓여있고, 저수지 안에는 마른 풀들이 보인다. 이 저수지는 산성 내의 자연계곡 아래쪽을 막아 물을 가두어 사용하였다. 네모난 직사각형의 저수지는 1차 저수지를 준설한 후, 4면에 석축을 하여 2차 저수지를 조형하는 방법을 택했다.

 

석축은 단을 만들어 쌓았으며, 50×20×40cm 의 돌로 5cm 정도로 들여쌓기를 하였다. 이렇게 들여쌓기를 하는 것은 저수지의 벽이 붕괴되는 것을 방비하기 위함이다. 저수지는 보기에도 매우 단단하게 축조를 하였다. 한편에는 배수로가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저수지 물이 넘치면 경사진 배수로를 따라 성벽 밑에 물을 모으는 형태로 조성이 되었다. 모인 물은 다시 더 밑으로 난 2차 배수로를 따라 흐르게 하였다.

 

 

수차례 석축을 한 이성산성

 

이성산성은 외벽의 성벽을 쌓은 돌들이 네모나다. 그러나 각이 진 것이 아니라 옥수수알처럼 밖을 둥그렇게 다듬은 형태이다. 그래서 일반 성곽과는 달리 성벽이 모나지가 않았다. 저수지가 있는 곳 주변의 성곽은 일부가 남아있는데, 안으로 보면 이보다 더 이른 시기에 축조된 성곽이 보인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백제가 처음으로 축조를 하고 그 후에 신라가 보축을 하여 사용한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눈길을 밟으며 찾아간 이성산성의 저수지. 당시에 이 산 꼭대기에 이렇게 저수지를 마련했다는 것이 놀랍다. 이렇게 산성에서 적과 교전을 하기 이해서는 무엇보다도 식수가 중요했을 것이다. 그런 용도로 볼 때 이 저수지의 중요성을 가늠할 수 있다. 저수지 위편에 ‘이성산성 약수’라고 목판을 단 나무로 만든 작은 전각이 보인다.

 

그러나 돌로 쌓은 약수는 입구가 봉해져 있어 아쉽다. 모처럼 찾은 이성산성의 물맛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잃다니. 봄이 되면 이성산에 꽃들이 만개할 때 산성을 한 바퀴 돌아보아야겠다.

하남시 춘궁동 이성산 남쪽 고골저수지 옆으로, 나지막한 야산에 자리한 고려 초기의 대규모 절터가 있다. 이곳을 동사지라고 하는데, 발굴 당시 명문에서 ‘동사(桐寺)’라 적힌 기와가 발견이 되었기 때문이다. 발굴 당시 금당지의 초석이 발굴이 되었는데, 이 초석의 넓이로 보아, 신라시대 경주 황룡사의 금당에 버금가는 크기였다는 것이다.

 

이 고려 때의 절인 동사는 10세기경에 새롭게 지어진 절로, 현재 동사지 안에는 보물 제13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춘궁동 삼층석탑과, 보물 제12호인 춘궁동 오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2011년 첫 번째 답사일인 1월 3일에 눈길을 미끄러지면서 찾아간 춘궁리 동사지. 그 한편에 삼층석탑과 오층석탑이 나란히 서 있다.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는 삼층석탑

 

춘궁리 삼층석탑은 보물 제13호로 지정이 되어있으며, 동사지 안에 남동향으로 서 있다. 이 석탑은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이층 기단 위에 삼층의 탑신을 세웠다. 아래층 기단부의 밑 부분은 눈이 쌓여 있어 자세히는 볼 수가 없다. 상륜부는 사라져 본 모습은 알 수 없지만, 남아있는 부분만으로도 당당하다.

 

하층 기단은 조각이 나 있기는 하지만, 아래층 기단부에 눈 모양을 한 안상이 한 면에 3구씩 새겨져 있다. 상층 기단은 판석으로 조성을 하였는데 양편에 모서리 기둥인 우주와, 가운데 버팀기둥인 탱주가 새겨져 있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일석으로 조성을 하였다. 탑 몸돌의 각 면에는 모서리 기둥인 우주만을 새겨 넣었다.

 

신라 석탑의 양식을 계승하다

 

 

 

이 탑을 보면 신라 석탑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음을 일 수 있다. 몸돌을 덮고 있는 지붕돌의 지붕인 낙수면의 경사가 완만하고,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가 끝에서 약간 위로 치켜져 있다. 이층 이상의 몸돌이 일층에 비해 급격히 낮아지고 있는 형태나, 지붕돌의 형태 등에서 신라 탑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탑은 여기저기 상당한 부분이 훼손이 되었다. 그러나 그 당당함은 고려 초기의 석탑에서 보이는 국권의 상징처럼 보인다. 이렇게 석재로 조성을 한 석탑 하나에서도 국권을 회복하고, 북벌을 하여 옛 고구려의 고토를 회복하겠다는 고려의 열망이 보인다.

 

 

경기도에서 보기 힘든 춘궁동 오층석탑

 

삼층석탑 옆에는 보물 제12호로 지정된 춘궁동 오층석탑이 서 있다. 남동향으로 서 있는 이 오층석탑은 높이가 7.5m에 이르는 탑으로, 경기도에서는 이렇게 큰 탑을 보기가 힘들다. 이 탑은 이층의 기단 위에 오층의 탑신을 쌓아 올렸는데, 여러 장의 석재를 이용하여 석탑을 조성하였다.

 

사각형의 석재를 여러 장을 이용해 조성한 춘궁동 오층석탑.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를 새겨 넣고, 일층 탑신은 상하 2단으로 탑신을 구성하였다. 이러한 탑의 형태는 딴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이다. 이 오층석탑 역시 고려 초기에 조성을 하였으나, 신라 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층마다 석재를 사용한 것이 달라

 

이 오층석탑은 층마다 사용한 지붕돌의 석재의 숫자가 다르다는 것이다. 오층은 1장, 사층은 2장, 3층 이하는 4장의 석재를 이용하여 지붕돌을 조성하였다. 또한 일층 탑신의 하단은 4장의 방형 석재를 시용하였으며, 상단은 1장의 석재로 만들었는데, 이곳에도 모서리 기둥인 우주가 마련되어 있다.

 

춘궁동 오층석탑의 지붕돌의 낙수면은 경사가 완만하다. 추녀는 수평을 이루다가 전각에 이르면 반전을 보이고 있다. 상륜부에는 노반석만이 남아있다. 동사지에 남아있는 춘궁동 삼층석탑과 오층석탑을 돌아보면, 이 동사지의 규모가 짐작이 간다. 아마도 이렇게 공을 들여 석탑을 조성한 이유도, 고려의 국권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눈길에 미끄러지면서 찾아간 동사지에서, 옛 고려의 강성하고자 했던 기운을 느낀다.

어제 밤 집에 귀가를 한 시간이 밤 10시가 다 되어서이다. 그래도 어제는 나름대로 일찍 귀가를 하였다고 생각한다. 매일 밤 12시를 넘겨서 집으로 들어가는 날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피곤이 겹쳐 대충 씻는 둥 마는 둥 자리를 펴고 누워서 잠시 TV 마감뉴스를 보고 있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휴대폰 벨이 울린다.

 

이름도 뜨지 않는 낯선 전화번호이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는 좀처럼 전화를 받지 않지만, 요즘 들어 갑자기 밤에도 기사 제보를 하는 분들이 간혹 있어 전화를 집어 들었다. 이 시간에는 그 지겨운 광고 전화는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루에도 몇 통화씩 걸려오는 광고 전화는, 은근히 사람을 스트레스를 받게 만들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참 다정하게 가정을 꾸려 가는 분들이 더 많다

 

나더러 이제 깼냐고?

 

“예, ○○○입니다”

“자기야, 이제 자다가 일어 난거야?”

“누구신데요?”

“아직 잠이 안 깼나보다. 나 오늘 집에 늦게 들어간다. 알았지”

“전화 잘 못 거셨습니다.“

“내가 집에 없어서 화났어? 오늘 모임 있다고 했잖아.”

“전화 잘 못 거셨다니까요”

 

갑자기 전화가 끊긴다. 상대방 확인도 안하고 무작정 ‘자기야’를 찾아가면서 술 취한 목소리로 전화를 거신 이 분. 참 황당하다. 전화를 잘못 건 것도 화가 나지만, 잠이 깨고 나면 다시 잠을 청하기가 어려운데. 오늘 밤도 꽤나 뒤척이게 생겼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댁 같으면 이런 아내 좋아할까?

 

전화를 끊고 나니 슬슬 화가 난다. 도대체 이 시간에 왜 밖에서 전화를 한 것일까? 물론 나하고는 전혀 생면부지의 관계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전화 내용을 들어보니, 남편이 귀가를 하기 전에 집을 나왔다는 소리다. 그런데 밤 12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에 늦는다고 하는 것을 보니, 이 분 아예 날밤을 밖에서 새우겠다는 소리로 들린다. 다시 전화가 울린다.

 

“여보세요. 전화 잘못 거셨데니까요.”

“그게 아니고요. 아저씨 목소리 짱이네요”

“전화 끊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육두문자라도 날리고 싶었지만, 그래도 이 직업을 갖고 있으니 말도 조심할 수밖에. 그런 것이 오히려 더 성질이 난다. 속에서 부글거리는 것을 참느라고 거실로 나가 냉수를 한 컵 들이킨다.

 

이런 분들은 그저 이렇게 볼기라도(사진은 특정한 내용과는 무관함)

 

가만히 생각해보니 알 지도 못하 는 사람이지만, 그 남편이 참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여자를 아내로 두고 산다는 것이. 밖에서 부인이 이러고 다니는 것을 알고는 있는 것일까? 하기야 나와는 전혀 무관한 일이니, 내가 생각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내 달아난 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참 이런 여자를 아내라고 데리고 살아야 할까? 이런 몇 몇 사람들 때문에, 정말 집안에서 남편과 아이들을 정성껏 보살피며 가정을 잘 꾸려가는 분들까지 욕을 보이는 것은 아닐까? 세상 참 달라져도 많이 달라졌다. 감히 늦은 시간에 외간남자에게 전화를 걸어 농지꺼리를 할 수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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