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헌은 고을의 수령이 집무를 보는 곳이다. ‘전주부’라고 하면, 지금의 전주시청을 말하는 것이고, 동헌인 풍락헌은 현재 전주시장의 집무실과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 전주부 안에는 ‘내아’라고 하는 살림집인 안채가 자리하고 있다. 내아는 동헌에서 서쪽에 자리를 한다고 하여 ‘서헌’이라고도 부른다.

조선시대 전주부영에는 형방청(현재의 법원이나 검찰청과 같은 곳), 장방청(현재의 감옥), 군기고, 장청, 작청(6방의 청사로 지금의 각 실과에 해당), 사령청, 통인청, 관노청, 관청(지금의 식당) 등의 수많은 관아 건물이 있었다. 그러나 현재의 전북도청에 해당하는 전라감영과 전주부영의 관아 건물 가운데 남아있는 것은 유일하게 이 동헌뿐이다.


수많은 환란을 겪은 전주동헌

전주 동헌의 명칭은 풍락헌, 또는 음순당이라고 불렀다. 이는 전라도 관찰사가 집무를 맡아보던 전라감영의 선화청과 상응하는 관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유는 전주부의 임무를 관찰사가 겸임을 했기 때문이다. 전주부의 실무는 중앙에서 파견한 판관이 맡아했다. 이럴 정도로 전주부의 임무가 중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래 전주부는 조선조 초에 청사를 마련한 것으로 『완산지』에 기록하고 있다. 건물이 오래되어 낡고 퇴락해 무너진 것을, 판관 서노수가 개건을 했다. 그 후 고종 27년인 1890년에는 화재로 소실이 되기도 했다. 다음 해 판관 민치준이 중창을 한 것을, 1934년에 일제가 강제로 철거하여 매각을 결정했다.

이로 인해 자칫 사라지게 될 전주 동헌을 전주 유림인 유창근 선생이 구입하여, 완주군 구이면 덕천리로 옮겨 전주 유씨의 제각으로 사용을 했다. 영원히 그 흔적조차 없어질 뻔한 전주동헌은 이렇게 그 명맥을 보존하게 되었으며, 2007년 전주시의 노력으로 유인수 선생이 제각의 건물을 전주시에 쾌척을 하게 되었다.

파란만장한 환란을 겪은 전주동헌은 전주시의 개청 60년인 2009년에 전주로 다시 돌아왔으며, 이는 전주를 떠난 지 75년 만이다. 당초 정면 7칸이던 전주 동헌은 한 칸이 줄어든 6칸의 제각을 지었으나, 철저한 고증작업을 거쳐 원형 그대로 복원하였다. 현재 새롭게 조성이 된 전주동헌은, 전주시 완산구 교동 28번지 전주향교 옆에 자리하고 있다. 부속 건물로는 동헌인 풍락헌을 비롯하여, 내삼문, 안채, 중간채, 사랑채로 꾸며져 있다.




당당한 전주 동헌 풍락헌

아직 일반인에게 공개를 하지 않은 풍락헌이다. 마침 KBS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의 촬영 때문에 잠시 열려있는 풍락헌을 돌아보았다. 풍락헌은 여느 동헌보다도 그 규모가 당당하다.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지어진 건물은 장대석으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지었다. 주추는 원형의 밑이 넓고 위가 좁은 돌을 사용했으며, 그리 높지 않게 두었다.

기둥은 보수를 한 자욱이 여기저기 보인다. 풍락헌을 바라보면서 좌측 3칸은 방을 드렸는데, 맨 끝의 방은 누정과 같이 툇마루에서 돌출을 시켜 꾸몄다. 누마루를 깐 대청은 모두 4칸으로 창호는 들어 올릴 수 있도록 하였다. 뒤편의 문도 창호로 내어 멋을 더했다. 방의 뒤편에는 깊게 아궁이를 내었으며, 굴뚝은 건물에서 조금 떨어져 있다.



당당하게 복원이 된 풍락헌. 아마 이렇게 당당한 건물이 전주 유씨들의 제각으로나마 남아있었다는 것에 대해 다행이라 여겨진다. 일제에 의해 강제철거가 되어 매각이 될 뻔한 전주 동헌. 다시는 이런 아픔을 당하지 않기를 바란다. 하마터면 소중한 우리의 역사의 현장이 영영 우리 곁을 떠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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