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시 창수면 오가리 546에 소재한 포천 향토유적 제17호인 금수정(金水亭), 1989년 복원한 정자로 영평 8중 제 2경으로 창수면 오가리 영평천 가에 자리하고 있다. 앞으로 영평천 맑은 물이 흐르며, 주변은 숲으로 쌓여 가히 절경에 자리하고 있는 정자이다. 원래 이 금수정은 4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정자였다.

 

1608년경에 이곳에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우두정이라는 정자를 지었는데, 이 정자를 사위인 봉래 양사언(1517(중종 12)~1584(선조 17)에게 주었다고 한다. 봉래 양사언 선생은 정자이름을 금수정이라 하고, 편액도 갈아 붙였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정성이 대문호를 만들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만은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양사언은 돈녕주부 희수(希洙)의 아들이다. 어머니가 소실로 양민에게 시집을 사는 바람에 서자(庶子)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부친인 양민에게서 어릴 적 부채인 채단을 선물로 받고 끝까지 딴 곳으로는 시집을 가지 않겠다고 우겨, 나중에 정실부인이 있는 양민에게 후처로 들어가게 된다. 양민이 죽던 날 양사언의 모친은 정실부인의 소생인 양사준에게 부탁을 한다. 자신이 남편과 같은 날 자결을 해 죽으려고 하니, 자신이 낳은 아들들에게 서자라 부르지 말 것을 부탁하고, 스스로 비수로 찔러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다.

 

 

이런 어머니의 정성이 있어 양사언은 명종 1년인 1546년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양사언은 금강산을 자주 들리고는 했는데, 그의 호를 봉래(蓬萊)’라 한 것을 보아도, 양사언이 금강산에 남다른 마음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양사언은 1556년을 전후로 대동현감을 지냈으며, 그 이후 삼등·함흥·평창·회양 등지를 다니며 직임을 맡았다. 회양에 나간 것은 금강산을 따라 스스로 택한 것으로, 이때 금강산에 관한 시를 많이 남겼다. 1564년에 고성군의 구선봉 밑 감호가에 정자 비래정(飛來亭)’을 짓고 풍류를 벗 삼으며 은거했다.

 

 

선조 15년인 1582년 다시 안변군수로 나갔으나, 다음해 번호 변란을 당해 수사의 책임을 지고 해서에 귀양 가서 1584년인 68세에 세상을 하직했다. 양사언은 점복에도 능하여 임진왜란을 예고했다고 하며, 조선 전기 4대가로 일컬어질 만큼 서예를 잘해 초서와 해서에 능했다.

 

양사언의 숨결을 낚다

 

금수정은 울창한 숲속에 자리 잡고 있어, 앞으로 흐르는 영평천의 맑은 물과 숲이 아름답게 어울리는 곳이다. 안동김씨의 소유로 전해오면서 몇 차례 중수되었으며, 6.25때 완전 소실된 것은 1989년에 현재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정자의 현판은 봉래 양사언 선생의 글씨이며, 정자 옆에는 선생의 시조비인 태산이 높다하되가 서 있다.

 

 

정자는 팔작지붕으로 지어졌으며 정면 2, 측면 2칸이다. 정방형의 주추를 놓고 그 위에 둥근 기둥을 올렸다. 기둥의 밑동 위에 마루를 놓고 난간을 둘러, 멋진 정자로 지었다. 크지 않은 정자가 숲과 영평천과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 든다. 과거 봉래선생도 이곳에서 이런 아름다운 절경에 취해 시 한 수 짓지 않았을까? 떠가는 구름조차 아름답다는 생각이다.

 

지석묘는 흔히 고인돌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고인돌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돌방을 세우고, 그 위에 커다란 돌을 괴어 놓기 때문이다. 지석묘는 우리나라의 전역에 걸쳐서 나타나는데, 그 중에는 거대한 지석묘들도 있다.

2월 26일 의정부, 남양주를 거쳐 포천으로 들어갔다. 마을 제의식을 지내는 곳을 찾아다니다가 돌아 나오는 길에 이정표가 보인다. ‘자작리 지석묘’라는 안내판을 보고 마을 안으로 들어가니, 상당히 큰 지석묘 한기가 보호철책 안에 자리하고 있다. 이 지석묘는 포천시 자작동 251-2에 소재하며, 현재 포천시 향토유적 제2호이다.


보존 잘되고, 거대한 지석묘가 향토유적?

이렇게 큰 지석묘는 이 인근에서는 보기가 힘들다. 이렇게 화강암으로 조성한 지석묘 1기가, 한편의 굄돌 벽이 반쯤 파손이 된 것을 빼고는 거의 완벽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그런데 이런 지석묘가 지방기념물도 아니고 향토유적이라니, 이해가 가질 않는다. 향토유적은 자치단체에서 지정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작리 지석묘는 커다란 덮개돌 밑을 사방으로 굄돌을 놓아 받쳤다. 탁자식인 이 지석묘는 하부 돌방이 약간 땅속에 묻혀있기는 하지만, 거의 완벽한 모습이다. 이 지석묘의 덮개돌은 420cm × 347cm 정도의 크기이다. 덮개돌의 두께는 45~50cm 정도가 된다. 덮개돌은 위가 평평하게 조성이 된 것이, 상당히 넓어 보인다.



덮개돌을 받치고 있는 지석(굄돌)은 사방이 모두 남아있다. 다만 남쪽을 받치고 있는 돌이 반쯤 잘려나갔을 뿐이다. 굄돌의 규모는 서쪽이 265cm × 144cm ×33cm이며, 반대편인 동쪽의 굄돌은 220cm × 144cm × 31cm로 이 돌 역시 화강암의 판석으로 조성하였다.

짧은 단벽의 길이는 북쪽벽이 105cm × 144cm × 28cm이며 장벽 사이에 끼어져 있다. 남쪽의 단벽은 110cm × 85cm × 20cm 의 규모이다. 이 남쪽의 단벽은 15cm 정도만 땅위에 올라와 있다.


문화재 안내판에 신경을 써야

이 고인돌은 사방에 벽을 대고, 그 위에 덮개석을 올리는 형태이다. 사방의 벽면 안에는 묘실이 되는데, 현재 묘실 바닥에서 덮개석의 하단부까지는 144cm 이고, 지표까지의 높이는 70cm 정도이다. 묘실의 넓이는 180cm × 122cm이며, 묘실 바닥에는 부식토가 깔려있다. 이런 형태의 지석묘라면 그 부장품은 모두 도굴을 당했다고 해도, 그 지석묘만 갖고도 문화재자료 정도의 가치를 갖고 있다고 하겠다.

지석묘는 마을로 들어가 가정집의 담장 옆에 자리하고 있으며, 문화재의 주변은 정리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다. 이 지석묘가 있음을 알리는 안내판 역시, 지나가는 사람이 발견하기란 쉽지가 않다. 지석묘 앞에는 ‘자작리 유적지’가 있다고 안내판이 있으나, 주변을 아무리 돌아보아도 유적지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아마 몇 바퀴를 주변을 돌았을 것이다.




문화재는 소중한 것이다. 그것이 형태에 따라 국보가 되었거나 보물이 되었거나, 아니면 향토자료라고 해도 소중하기는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요즘 문화재 답사를 다니다가 보면, 안내판 하나 제대로 설치를 하지 않은 이런 문화재들이 즐비하다. 언제나 우리 문화재를 관계자들이, 제대로 그 기치를 알고 평가를 할 것인지.


2월 5일, 포천시 소흘읍 산 64번지 노고산에 있는 포천시 향토유적 제43호인 ‘고모리산성지’를 다녀와, 다시 동영상으로 제작하여 올립니다. 아마도 좀 더 실감이 날 것 같다는 생각에. 겨울철 산행이 만만치는 않지만 산 정상까지 올라갔는데, 정작 산성의 흔적이 보이질 않아 급 실망을 하기도.

그래도 이곳에서 만난 지역의 답사가들로 인해, 고모리산성에 대해 조금 더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있을 듯도 합니다. 문화재는 역시 사진보다 동영상이 있어야 더 좋은 듯합니다.


   

경기도 포천시 군내면 청군로 3290번길 19, 옛 구읍리에는 사적 제403호인 반월성이 있다. 반월산성은 총 길이 1,080m 이다. 현재 성의 옛 자취를 엿볼 수 있는 시설물로는 남쪽과 북쪽의 문터, 성벽 바깥쪽에 사각형 모양으로 덧붙여 만든 치성 4개소, 건물터 6곳, 배수시설이었던 수구터, 장수의 지휘대였던 장대터, 적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세웠던 망대터 등이 있다.

이 반월산성은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가 쌓았다고 전해지나, 조사결과 고구려 때 쌓은 성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여러 책에 고성(古城), 산성, 반월산성 등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대동지지』를 통하여 광해군 10년(1618)에 고쳐 쌓고, 인조 1년(1623)부터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밖에 <연려실기술>, <포천군읍지>, <견성지> 에도 돌로 쌓았다는 기록과 함께, 여러 가지 당시 성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눈길을 밟으며 반월성에 오르다

2월 5일 아직 산에는 눈이 그대로 남아있다. 고모리산성을 돌아보고 난 뒤, 이어서 찾아간 반원성. 하루에 두 곳의 산성을 돌아본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더구나 눈길에 오른 산행이라 다리도 아프지만, 그레도 인근에 있으니 돌아보리라 마음을 먹었다.

여름에는 차가 성지까지 올라간다고 하는데, 눈길에 위험할까봐 그런지 입구를 막아 놓았다. 할 수없이 걸어 오르는 수밖에. 길에는 아직도 눈이 쌓여 미끄럽다. 언덕길을 올라 반원성의 남쪽 성곽 쪽으로 다가갔다. 수령 400년이 지난 보호수인 느티나무가 서 있는 곳서부터 천천히 성을 한 바퀴 돌아본다.



일부는 아직 복원이 되지 않아 그대로 방치가 되어있다. 반월성은 성벽을 높게 쌓고, 일부구간은 안과 밖을 함께 성벽을 쌓아두기도 했다. 서쪽에는 문지인 듯한 곳 옆에 치성을 쌓았다. 이곳의 치성은 그 크기가 상당하다. 성 위에서 바라보니 건너편에 왕방산이 보이고, 그 밑으로는 포천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북에서 내려오는 길목, 고구려의 전진기지

성 위에서 보면 성 밑으로 난 길이 훤히 보인다. 철원으로 가는 길에는 차들이 줄을 잇는다. 이런 지리적 위치로 보아, 반월성은 고구려가 남쪽으로 내려가기 위한 전진기지 역할을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서쪽에서 성벽 위를 따라 동쪽으로 가다가 보니, 좁은 문루가 있었던 곳이 보인다. 암문이 있었던 곳일까?



조금 더 가니 건물터가 보이고 동편으로 난 문지가 있다. 반월성은 문을 그냥 바닥에 놓은 것이 아니라, 돌을 쌓고 그 위에 문을 내었다. 1m 가 넘는 축대 위에 문을 낸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문지 안으로는 건물터가 있고, 조금 더 가니 삐죽 내민 치성이 보인다. 반월성은 상당히 견고한 성곽이었을 것이다.



해발 283.5m의 청성산 정상을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축성한 테뫼식 석축산성인 반월산성. 고구려는 이곳을 남진을 하기 위한 기지로, 신라는 북진을 하기 위한 기지로 삼았다고 한다. 이 성은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포천지역의 주성(主城0으로 역할을 했다. 이곳을 발굴 당시 <마흘수해공구단>이란 명문이 적힌 기와가 발견이 되어, 삼국사기에 기록된 고구려의 ‘마흘군’이 바로 포천지역임을 입증하고 있다.

반월성이란 마치 성이 반월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옛 성 중에서는 상당히 큰 규모의 성이었다는 반월성. 고구려가 쌓은 이성은 통일신라 시기까지 사용을 하다가, 고려 때는 폐성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조 광해군 10년인 1618년에 후금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다시 쌓았다고 한다.



아직은 일부분이 복원이 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는 반월성. 한 바퀴 돌아본 반월성은 상당히 요충지에 자리를 하고 있으면서, 매우 견고하게 쌓은 성임을 알 수 있다. 눈길에 돌아본 반월성. 아마도 완전히 복원을 마친다면, 이 지역의 또 다른 명소가 될 것이란 생각이다.

창단 된지 70년이 지난 동춘 서커스단에는 할 이야기들이 많다. 그러나 그 많은 이야기들을 젖혀두고라도, 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한 공연들이 있다. 바로 안전망도 없이, 고공에서 천으로 된 줄을 잡고 기예를 선보이는 사람이다.

2월 5일,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고모리에 있는 고모리 저수지 공터. 한 옆에는 고공크레인 한 대가 서 있다. 무엇에 사용하려 크레인까지 동원을 했을까 궁금했는데, 한 소녀가 나오더니 붉은 천을 고리에 걸고 타고 오른다. 그리고 그 천을 잡고 곡예를 펼치는 것이다. 단지 천 하나만을 잡고 곡예를 하는 소녀.





맨발의 소녀, 안전망도 없어

크레인에 매달려 온각 재주를 보이는 소녀는, 겨울인데 양말도 신지 않았다. 그리고 두 가닥으로 된 붉은 천을 잡고, 발과 몸을 감아 그 위에서 온갖 재주를 보인다. 갑자기 툭 떨어지는 듯도 하고, 양팔을 벌려 몸을 일자로 만들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환성을 지르면서 박수를 친다.





10여분 정도를 고공에서 재주를 보이던 소녀가 땅으로 내려왔다. 그저 열일곱 여덟이나 되었을까? 앳된 얼굴이다. 그런 소녀가 그 높은 곳에 올라가 안전망도 없이 곡예를 하다니. 동춘 서커스라는 명성이 하루아침에 얻어진 것이 아니란 생각이다. 저렇게 하기 위해서 얼마나 오랜 시간을 연습을 한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들자, 절로 박수가 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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