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렁이가 사람에게 좋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일이다. 천년을 산다는 학의 먹이가 되는 우렁이는, 뱀장어보다 칼슘이 10, 철분은 5배가 많다. 우렁이는 우리 몸에 필요한 칼슘과 찰이 다량 함유하고 있어, 건강 영양식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동의보감>에는 우렁이의 효능에 대해서 뱃속을 맺힌 열을 없애려면 즙을 취해 먹으라고 했으며, 술을 깨게 하고 반위를 치료한다. 소갈에 소변이 잦은 증세를 치료한다고 하였다. 우렁이는 피부의 노화를 막아주고, 강장 강정의 효과도 있다.

 

 

다양한 우렁이의 효능

 

우렁이는 많은 효능을 갖고 있다. 그 효능을 보면

1. 성장발달 - 우렁이에는 칼슘과 철분이 풍부하게 함유되어 있어, 골격형성을 도와주어 성장기 어린이의 성장발달에 좋다.

2. 빈혈예방 - 우렁이에는 철분이 풍부하게 함유되어 있어, 임신부나 여성들의 빈혈예방에 좋3. 신경통 - 우렁이는 위장에 좋으며, 신경통에도 좋다.

3. 부종 - 우렁이는 찬 성질을 갖고 있어 몸에 열이 많은 사람의 갈증을 없애주고, 이뇨작용을 도와주어 부종에 좋다.

4. 피부미용 - 우렁이에 함유되어 있는 콘드로이틴 황산은, 체내에 흡수되어 주름을 개선하는 효능이 있다. 뿐만 아니라 피부노화 방지에 아주 중요한 콜라겐 형성을 촉진시키는 효능이 있어, 피부미용에도 좋다.

5 골다공증예방 - 우렁이에 함유되어있는 콘드로이틴 황산은 연골조직을 구성하는 주성분일뿐 아니라, 연골 속.의 칼슘이 뼈 조직 밖으로 나오는 것을 막아주는 효능이 있어 골다공증예방에 좋다.

 

 

추천하고 싶은 우렁이 쌈밥집

 

가끔 좋은 사람들과 식사를 할 때 찾아가는 집이 있다. 수원시 팔달구 팔달로3131-5에 소재한 시골집 우렁이 쌈밥집이다. 이 집은 교동에서 팔달산으로 올라가는 길에 있는데, 하루에 단 100인 분만 판매를 하고 있다. 100인 분의 재료가 떨어지면, 시간이 일러도 장사를 마친다.

 

이 집을 찾아가는 이유는 우선 다양한 우렁이 쌈밥을 즐길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저 점심을 먹으려면 기본적인 우렁이 쌈밥을 시키면 된다. 1인분에 7,000원이며, 2인분 이상만 주문 가능하다. 제육과 함께 나오는 쌈밥은 10,000원이며 특 우렁이 쌈밥은 12,000원이다. 조금 대접을 해야 할 사람이라면 쌈밥 특을 시키면 된다.

 

 

정성 가득한 밥상

 

이 집은 여느 쌈밥 집과는 다르다. 우선 쌈으로 나오는 야채가 싱싱하다. 몇 가지의 쌈을 소쿠리에 담아 내오는데, 쌈만 보아도 군침이 돈다. 거기다가 집에서 직접 만든 두부와 생선조림을 준다. 이것만 해도 반찬이 충분하다. 우렁이도 삶아낸 것을 초고추장과 한 접시 별도로 내어준다.

 

우렁이쌈장은 된장과 콩가루를 함께 섞어 끓여내 온다. 이 집에 가면 늘 생일이다. 미역국을 끓여내 오기 때문이다. 채소에 밥과 쌈장을 함께 싸먹거나, 초고추장에 삶은 우렁이를 곁들여 먹어도 별미이다. 밥 한 그릇을 후딱 비우고도 쌈장과 삶은 우렁이 충분할 정도로 내어준다.

 

 

그렇게 푸짐한 상을 차려주고도 딴 집보다 가격이 착하다. 7,000원 밖에 받지 않는다. 이 집 입구에는 장독이 널려있다. 장을 직접 담군 것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식사를 마치고나면 팔달산 둘레 길을 한 바퀴 돌아보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단풍이 든 둘레 길을 한 바퀴 돌아보면, 가을을 충분히 느낄 수가 있기 때문이다. 혹 수원을 들리게 되면, 이 시골집 우렁이 쌈밥 집을 꼭 한 번 들려보라고 권하고 싶다.

봄을 즐길 수 있는 아름다운 길 둘

 

경기도청의 벚꽃이 만개를 했습니다. 그런 길을 따라서 걷다가 보면, 사람들은 괜히 기분이 좋아집니다. 자연친화적인 길이나 흐드러지게 핀 꽃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한다는 것은 그래서인가 봅니다. 벚꽃 길을 벗어나 팔달산 위로 오르다가 보면, 진달래가 여기저기 소나무와 다른 색조를 띠며 피어 있습니다.

 

팔달산을 싸안고 있는 성곽. 화성은 그렇게 자연을 보듬어 안고 길게 누워 있습니다. 연분홍 진달래가 성벽에 기대다시피 피어 있습니다. 소나무 숲길을 따라 심호흡을 한 번 해봅니다. 짙은 솔향이 가슴으로 밀려들어 옵니다. 바로 이런 숲이 내음으로 인해 이 길이 좋아지는가 봅니다.

 

 

흙을 만나는 즐거움

 

사실 길이란 것은 어디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도심의 한 복판에서 먼지가 이는 흙길을 밟을 수 있다는 것은 큰 행복입니다. 그 길을 밟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된다고 하니까요. 천천히 화성의 바깥 길을 남쪽으로 따라 걸어봅니다. 걷다가 눈을 돌려보니 진달래가 지천에 깔려 있습니다.

 

419(), 역시 4월의 꽃답게 푸른 소나무 숲 아래 그렇게 수줍게 피어있습니다. 4월에 만난 진달래는 언젠가 헤어짐에 눈물을 흘리던, 아련한 여인을 생각나게 합니다. 이 계절만 되면 한 번씩 몸살을 앓는 것도, 진달래를 닮은 여인 생각이 나기 때문인가 봅니다. 저만큼 화양루의 지붕이 삐죽 얼굴을 내밀고 있습니다.

 

 

 

앞서가던 여인이 눈앞에서 사라졌습니다. 화양루 바깥 길을 돌아 다시 북쪽으로 성곽이 이어집니다. 그곳을 천천히 걸어봅니다. 화성을 바라보고 핀 작은 꽃들이 성벽을 기어오르기라도 할 것처럼 성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습니다.

 

자연을 만날 수 있는 화성 외곽 길

 

성벽 밑으로 까치 한 마리가 부리로 연신 땅을 쪼아댑니다. 아마 그곳에 무엇인가 먹을 것이라도 있는 모양입니다. 사람이 가까이 가도 도망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소나무 숲에는 진달래가 가득합니다. 그 색의 조화가 정말 오묘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누가 이렇게 아름다운 색채를 표현 할 수 있을까요? 자연의 신비가 경이롭게 느껴집니다.

 

 

화양루 밖에서 용도를 따라 걷다가 보면, 그 끝에 암문과 포사가 보입니다. 그리고 길에는 진달래들이 피어 있어, 코를 벌름거리면서 걸어도 봅니다. 팔달산의 봄을 마음껏 맡아보는 것이죠. 누군가 힐링을 하는 듯 붉은 진달래 틈으로 걸어갑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길이 팔달산에 있습니다. 그것도 도심 한 복판에 말입니다.

 

어찌 수원이란 곳이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이런 맨흙을 밟으면 걸을 수 있는 길이 지천에 널려있기 때문입니다. 물과 바람, 산과 숲, 그리고 자연과 이야기를 하는 성곽. 이것이 바로 화성 외곽 길입니다. 정말 걷고 싶은 그런 길입니다. 이 길만 걸으면 자연과 하나가 되어, 살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사람과 자연이 만나는 곳

 

화성을 흔히 자연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만큼 화성은 자연적 지리를 최대한 활용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 곳, 자연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이 자연인 양, 그렇게 조용히 자리를 틀었기 때문입니다. 가파른 언덕을 내려오다가 보면 약수터가 보입니다. ‘팔달약수터’, 걷느라 마른 목을 축일 수가 있습니다. 이 또한 팔달산이 갖는 아름다움입이다. 그저 누구에게나 많은 것을 주기 때문입니다.

 

시원한 물 한잔을 마시고나면 성곽을 도로가 지나기 때문에, 아치형으로 성을 조형해 길에게 자리를 내준 곳이 있습니다. 이 아치형의 입구는 예전에 내 것이 아닙니다. 이곳은 19일에 벚꽃이 만개를 했다가, 이미 바람에 꽃잎이 날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에 바쁘고요. 벚꽃과 화성은 그렇게 하나인 양, 딱 달라붙어 있습니다.

 

 

봄을 즐길 수 있는 아름다운 길 둘은 화성의 외곽 길 중 남쪽길입니다. 팔달산 남쪽 끄트머리에 자리한 화양루에서 팔달문까지. 그렇게 자연과 숲, 꽃과 바람이 하나가 되어 걸었습니다. ‘힐링제대로 한 셈이죠.

팔달산 중턱에는 성신사(城神祠)’라는 사당이 있다. 바로 화성을 지키는 신을 모시는 사당이다. 이 사당은 일제 강점기에 훼파가 되었던 것인데, 사단법인 화성연구회 회원들의 노력으로 복원이 되었다. 이곳에서 오래 전부터 고유제를 지내 온 화성연구회 회원들은, 화성 행궁 뒤편 좌측 서장대로 오르는 길에서 명문이 적힌 기와편 등을 발견하였다.

 

그런 후에 매년 정월에 날을 정해 이곳 성신사 터에서, 성신을 위한 고유제를 지내왔다. 처음에는 성신사의 복원을 위한 고유제를 지냈으나, 200910월에 성신사가 조금 자리를 옮겨 복원을 마치자 그곳에서 정월에 날을 잡아 고유제를 지내오고 있다.

 

 

정조의 지시에 의해 지은 사당

 

정조대왕은 화성 성역이 완료되는 시기에 맞추어 특별지시를 내렸다. 바로 성신사를 지으라는 것이었다. 성신사는 화성을 지키는 신이기는 하지만, 당시로 보면 수원전역을 보호하는 신이기도 하다. 팔달산 중턱 서장대 아래 성신사를 축조했다는 것은, 그만큼 이 성신사를 중요하게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정조대왕은 우리고장을 바다처럼 평안하고, 강물처럼 맑게 하소서라며 화성과 화성 백성들을 사랑하는 축문을 직접 지어 하사를 하기도 했다. 성신사는 정조 20년인 1796711일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약 한달 만에 완공이 되었다. 사당이 완성된 후에는 화성 성신의 위패를 만들고 길일을 기려, 1796919일에 사당 안 정면에 봉안하였다.

 

 

화성연구회 노력으로 복원 된 성신사

 

화성의 신을 모시는 성신사는 팔달산 기슭의 병풍바위 아래에 자리하고 있었다. 정당은 53가인데 벽돌을 쌓아 벽을 만들었다. 앞 기둥 안쪽에는 네모난 벽돌을 깔았고, 당 아래에는 층이지게 기단을 놓았다. 정당 앞으로는 3문을 세웠으며, 좌우로는 5간 행각을 붙였다. 남쪽으로 2간은 안쪽으로 행하게 하여 전사청을 삼았고, 북으로 3간은 밖으로 향하게 하여 재실 1, 마루 1, 나머지 1간은 공랑을 삼았다.

 

정조대왕 당시의 성신사는 일제에 의해 훼파가 되었으며, 화성연구회의 무단한 노력으로 200910월에 다시 복원을 하였다. 이 때의 복원에 들어가는 비용은 중소기업은행에서 수원시에 12억 원을 기탁하여 이루어지게 되었다.

 

 

216일 오후 2시에 사단법인 화성연구회 주관으로 이루어진 수원화성 성신사 고유제는 이낙천 이사장, 김이환 명예이사장(이영미술관장) 30여명의 회원들이 참석을 하였다. 제순은 성신의 위폐를 여는 것으로 시작을 해, 행강신례 행참신례, 행전신례에 이여 초헌관이 첫 잔을 성신에게 올리는 행초헌례의 순으로 이어졌다.

 

화성의 신을 모시는 성신사, 이게 아쉽다

 

30분 정도에 걸쳐 끝이 난 성신사 고유제. 고유제의 끝은 행망예레라고 하여서 축문을 태우는 일이다. 그리고는 예를 모두 마치게 된다. 그러나 이 고유제를 보면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이 든다. 사당은 어디나 예제를 마친 후 축문을 태우는 예감을 마련한다. 그러나 성신사에는 어디에도 축문을 사를 수 있는 예감이 보이지 않았다. 정당 좌측 뒤편에라도 예감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또 한 가지는 정당 안 위패 앞에 향로 하나가 없다는 것이다. 어디를 가나 사당 안에는 기본적으로 향로가 있기 마련이다. 성신사는 화성의 신이기도 하지만, 넓은 의미로 따지면 수원을 지키는 신격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앞에 방명록이나 향을 사를 수 있는 변변한 향로 하나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이곳을 들리는 관광객들이 향을 피우고 예를 하게 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옆에는 방명록 등을 비치해 들려간 흔적을 남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촛불은 화재의 위험 때문에 켤 수 없다고 해도, 향 정도는 마련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화성에 대소 공사를 시작하거니 끝이 날 때는 이곳 성신사에 가서 참례라도 하는 것이 예의가 아닐까? 담당부서에서는 조금 더 깊이 생각을 하기 바란다.

화성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견고하고, 아름답게 축성한 성이다. 이렇게 자연과 조형을 이루면서 축성이 된 화성은, 물자를 조달하는데도 강제적으로 한 것이 하나도 없다. 철저하게 그에 맞는 비용을 지불하고, 물자를 구입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화성성역의궤>에 일일이 기록을 하고 있어, 당시 기록문화가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알 수가 있다.

 

성을 쌓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석재이다. 화성 축성 시 사용한 석재는 모두 20만1천403덩어리로, 이를 가격으로 환산하면 13만6천960냥9전이었다고 한다. 이는 수년 전 진단학회와 경기문화재단이 공동으로 개최한 ‘화성성역의궤의 종합적 검토’라는 제목의 심포지엄에서 경기대 조병로 교수가 밝힌바 있다.  

 

 팔달산의 성돌 채취흔적

 

가까운 곳에서 돌을 채취해 와

 

화성을 축성 할 때 사용된 돌은 그 무게로 인해 멀리서 운반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화성 축성의 장소에서 가까운 팔달산과 숙지산, 여기산, 권동 둥에서 석재를 채취했다. 지금도 팔달산과 숙지산, 여기산 일대에는 당시 돌을 뜬 자국들이 남아있다.

 

화성을 축성하면서 가장 많은 돌을 뜬 곳은 숙지산이다. 숙지산이 있는 곳의 옛 지명은 공‘석면(空石面)’이었다. 그야말로 돌이 비었다는 뜻이다. 이곳에 돌이 많다는 채제공의 보고를 받은 정조는 1796년 1월24일 수원에서 환궁하는 길에 이렇게 말했다.

 

“오늘 갑자기 단단한 돌이 셀 수 없이 발견되어 성 쌓는 용도로 사용됨으로써, 돌이 비워지게(空石) 될지 누가 알았겠는가? 암묵 중에 미리 정함이 있으니 기이하지 아니한가?”

 

라고 감탄을 하였다는 것이다. 우리 선조들의 옛 지명을 보면, 다 그렇게 변하게 된다. 앞을 내다본 선조들의 예지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부분이다.  

 

  숙지산의 성돌 채취흔적(위)와 여기산의 흔적

 

부석소를 설치하고 성돌을 떠내

 

공석면 숙지산은 현 화서동 숙지산을 일컫는 것이다. 이 산에서 돌을 뜨는 자리를 ‘부석소(浮石所)’라고 했으며, 각 부석소에서 캐낸 돌의 양을 보면 실로 어마어마하다. 그 양이 숙지산 8만1천100덩어리, 여기산 6만2천400덩어리, 권동 3만2천덩어리, 팔달산 1만3천900덩어리 등 18만9천400덩어리였다. 화성 축성에 사용된 돌들을 거의 모두 이 네 군데에서 떠냈다고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그렇다고 부석소에서 떠 낸 돌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 아니다. 커다랗게 떼어내 옮겨온 돌은 치석소로 보내, 일정한 규격으로 다듬은 후에 사용을 했다. 특히 성곽에 사용된 돌의 경우 일정한 규격에 의해 척수에 따라 대. 중. 소로 규격화한 다음, 축성현장으로 옮겨져 성을 쌓는데 사용된 것이다.

 

 공석면 숙지산의 부석소 표지

 

각종 운반용 수레 사용

 

부석소에서 캐어낸 돌을 어떻게 화성의 축성현장까지 옮겼을까? 돌덩이 하나가 상당히 컸던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그 돌을 나르는 것도 힘이 들었을 것이다. 정조는 돌을 옮기기 위해서 지시를 내린다. 즉 도로를 `화살 같이 쭉 곧고 숫돌처럼 평평하게' 도로를 개설하라고 지시했다.  

 

돌은 소 40마리가 끄는 수레인 대거, 소 4~8마리가 끄는 수레인 평거, 소 한 마리가 끄는 수레인 발거와, 장정 4 사람이 끄는 수레인 동거 등이 있었다. 이렇게 수레를 이용해 축성현장까지 돌을 날랐으며, 때로는 썰매를 사용하기도 했다. 소 40마리가 끌었다는 대거에 올린 돌의 크기는 상당했을 것이란 생각이다.

 

화성의 축성에 사용된 돌, 지금은 팔달산과 여기산, 숙지산 등에 그 흔적이 일부 남아있는 정도지만, 그 역사의 현장을 가늠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 모든 것이 <화성성역의궤>에 고스란히 기록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집을 짓거나 건조물을 지으면, 그곳에는 신령이 있다고 믿었다. 집안에 있는 가신만 해도 상당하다. 우선 대문을 들어서면 만나는 수문장신이 있다. 그리고 집안으로 들어서면 우물에는 용왕신이 있고, 마구간에는 우마대신이 자리한다. 부엌으로 들어가면 조왕신이 있고, 물독에는 용궁각시가 있다고 한다.

 

대청에는 성주신이 있으며, 안방으로 들어가면 삼신할미가 자리한다. 시렁위에는 조상신이 좌정하고, 안방의 벽에는 삼불제석이, 집 뒤편으로 돌아가면 굴뚝에는 굴대장군이 있으며, 장독대에는 터주신이 자리한다. 이렇게 집안에만도 수많은 가신(家神)이 존재한다. 이러한 것은 다 집안을 평안하게 만들어주고 있으며, 이 신들은 사로 상응하면서 집안사람들을 도와준다는 것이다.

 

 

 

화성에도 신이 있다.

 

가정에도 그 많은 신이 있는데, 화성이라는 거대한 조형물을 축성했는데 어찌 신이 없을 것인가? 화성에도 당연히 성을 지키는 신이 있다. 바로 서장대를 오르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는 ‘성신사(城神祠)’에 모셔놓은 ‘화성의 신’이다. 성신사라는 명칭은 ‘성의 신에게 제사를 모시는 사당’이란 뜻이다.

 

화성을 지키는 신을 모신 사당인 성신사는, 화성의 축성이 완료될 때쯤에 정조의 특별지시에 의해서 축조가 되었다. 성신사는 정조 20년인 1796년에 정조는 7월 11일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약 한 달 만에 완공이 되었다. 정조는 성신사의 설치 후, ‘우리고장을 바다처럼 평안하고 강물처럼 맑게 하소서.’라는 축문을 내리기까지 헸다.

 

사당의 조성이 완공된 후 화성 성신의 위패를 만들고, 1796년 9월 19일에 길일을 잡아 위폐를 사당 안 정면에 봉안하였다. 성신사의 제사는 매년 봄, 가을이 시작되는 초하룻날인 행삭에 지내도록 하였다.

 

 

 

가을 빛 아름다운 성신사에 오르다

 

성신사는 일제 강점기에 훼파되었던 것을, 화성역사문화도시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2008년 4월에 복원공사를 시작하였다. 이 성신사를 복원하기 위한 비용은 중소기업은행에서 수원시에 12억 원을 기탁하여, 2009년 10월에 중건을 마쳤다. 복원된 성신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지어졌으며, 사당 앞에는 솟을삼문을 짓고 문 좌우로는 5칸의 행각을 연결하였다.

 

10월 26일, 신풍루 앞에 서서 팔달산을 바라다본다. 단풍이 들기 시작하는 양편의 보호수가 일몰시간이 가까워서인가, 오히려 더 분위기를 자아낸다. 화성 행궁 옆 주차장을 벗어나 천천히 팔달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물이 들어 떨어지기 시작한 단풍들이 발밑에서 부서지는 소리가 정겹다.

 

일부러 차도를 버리고 비탈길을 오르는 것도, 깊어가는 가을을 발밑으로 느끼고 싶어서이다. 길을 벗어나면 좌측으로 성신사가 보인다. 아마도 일제는 화성의 아름다움을 어지간히 시기를 했는가보다. 많은 화성의 구조물들을 훼파한 것을 보면. 성신사의 솟을삼문을 들어서 정당 앞으로 가 고개를 숙인다.

 

 

 

성신사 주변을 돌아본다. 뒤편의 담벼락은 전돌을 사용한 심벽으로 조성을 하였다. 그 한편에는 제향에서 사용한 우물인 듯 육각형으로 조성한 우물이 있다. 그 우물 속에 단풍이 물들어가는 팔달산이 담겨있다.

 

오랫동안 이곳에서는 제향이 중단되어 있었는데, 내년에는 날이라도 잡아 화성의 성신을 위하는 ‘성신굿’이라도 한 번 해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화성의 사라졌던 구조물이 하나하나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는 것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언젠가는 화성이 완전한 제 모습을 갖추게 될 텐데. 그때까지 화성을 바라볼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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