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이 많죠. 저희는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입니다. 도자기를 하다가보니 이렇게 한 곳에서 서로 힘을 합해 작업을 하게 되었네요. 이곳 영동시장 아트포라에 함께 들어와 공동작업을 하는데, 여러 가지로 힘든 일이 많아요.”

 

수원시 화성 팔달문 앞에 자리한 영동시장 2층 아트포라에 입주한 작가 중 아마 나이가 제일 어린 듯하다. 작가 허영남(남, 31세)와 작가 안소원(남, 30세)는 순천전자고등학교 선, 후배 사이라고 한다. 나이로 보아 당연히 허영남 작가가 선배가 된다. 현재 아트포라 우측 맨 앞쪽에서 ‘흙마음 도예공방’이라는 공방을 운영하는 도예작가들이다.

 

 

선후배가 한 자리에서 작업을

 

순천전자고등학교 기능반에서 도예를 익히면서 만난 두 사람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 대학은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허영남 작가는 도립남도대학 도자기과를 졸업한 후, 군산대학교 예술대학 세라믹디자인 전공을 편입 후 졸업을 했다. 그리고 경기대학교 미술디자인 대힉원에서 도예전공을 하였다.

 

“저는 고등학교 때 도예작업을 하다가 도자기에 푹 빠졌어요. 일 년이면 설날과 추석 등 명절을 뺀 나머지 날은, 도자기를 만드는데 모든 시간을 다 썼다고 보아야죠.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도자기에 모든 것을 걸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 같아요.”

 

2011년에 제1회 개인전을 열기도 한 허영남 작가는, 2000~2008년 동안 지방기능경기대회에서 금상 2회, 은상 1회를 수상했다. 또한 2010년까지 무등미술대회에서 5회 수상을 하는 등, 2000~2011년도까지 전국단위 공모전 밀 실기대회에서 20여 차례나 수상을 하기도. 그 외에도 순천미술대전 특별상, 제43회 전국 기능경기대회 도자기직종 금메달, 경향미술대전, 월드아트페스타 등에서 수상을 했다. 2012년에는 동양도자전을 4회나 열기도 했다.

 

 

1년 후배인 안소원 작가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경희대학교 미술대학 도예과를 졸업한 후 동 대학원을 수료했다. 아직 개인전은 갖지 못했다는 안소원 작가는

 

“한 2년 정도 더 실력을 쌓은 후 개인전을 열 생각입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흙을 갖고 하는 것은 다 좋아했기 때문에, 이 도자기를 만드는 것이 제 천직으로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 정말 누구나 다 인정하는 그런 작가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한다.

 

안소원 작가도 그동안 수많은 상을 수상했다. 전국 기능경기대회 도자가 직종에서 수상을 한 것을 비롯하여, 관광기념품 공모전, 온고을 전통공예대전 특선, 강진청자공모전, 순천미술대전 등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백제문화제 전국 백제토기 물레경연대회에서는 대상 2회 금상 1회를 수상하기도.

 

아직은 젊다, 하지만 그래도 힘들어

 

이 두 사람의 선후배는 아트포라 공방에 입주를 한 후, 수많은 노력을 해왔다. 7월 20일(토) 오후에 찾아간 작업실 겸 공방은, 여기저기 작품들을 만들고 있음을 알 수 있는 흔적들이 보인다. 작업을 해 놓은 작품들이 말라 갈라질까봐 온통 비닐을 씌어 놓았기 때문이다. 물레에 앉아 작업에 열중하던 허영남 작가는

 

“저희들이 이곳에 들어왔을 때, 들어와서 작업만 하면 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들어와 보니 이것저것 모든 것을 저희들 스스로 해결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죠. 심지어는 전기 가마를 구입하는 것도 그렇지만, 한 달에 전기세가 25~30만원씩 나가게 되니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죠.”

 

 

아트포라는 일부 전기세와 수도세 등은 작가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있고 있다. 그러나 도자기라는 작업의 특성상 가마에 굽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래서 들어가는 전기세 등이 만만치 않으니, 마음 놓고 작업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전기세만 좀 감해주어도 매일 가마를 땔 수가 있어요. 더 좋은 작품을 만들이 이곳을 찾는 분들에게 드릴 수도 있고요. 하지만 지금은 전기세 하나만 갖고도 힘이 들어요. 아직 소문도 나지 않은데다가 타지라 우리들을 알리기 위해서는 더 많은 작업을 해야 하는데도, 그렇게 마음대로 작업을 할 수 없으니 그런 것이 힘들죠.”

 

두 사람 다 도자기에 모든 것을 걸었다고 한다. 그러나 타지에 와서 작업을 하고, 그런 것이 소문이 나 적절한 수입이 생기기까지는 길이 너무 먼 듯하다. 이들이 마음 놓고 작업을 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할 수는 없는 것일까? 도자기는 꼭 가마에서 구워내야 한다. 그것도 초벌에서 세벌구이까지. 가마에 온도가 떨어지는 것을 바라다보는 안소원 작가는

 

“그저 마음 놓고 작업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좋아했는데, 선배의 강사료 등으로 근근이 버티고 있어요. 어서 빨리 작업에만 몰두 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란다.

 

젊고 유능한 두 사람의 작가가 마음 놓고 작업에만 열중 할 수 있는 그런 환경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이런 열정에 찬 젊은 작가들이, 더 이상 작품을 포기하는 불행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사람이 죽으면 저승을 간다고 한다. 저승을 가면 염라대왕이 제일 먼저 묻는 것이 바로 ‘공덕을 했느냐?’라는 것이다. 공덕이란 덕(德)을 쌓았는가를 묻는 것이라고 한다.

 

“배고픈 이 밥을 주어 급식공덕 하였느냐?

목마른 이 물을 주어 급수공덕 하였느냐?

헐벗은 이 옷을 주어 의복공덕 하였느냐?

깊은 강에 다릴 놓아 월천공덕 하였느냐?“

 

고 묻는단다. 그 중 하나라도 쌓은 공덕이 없으면 죄를 묻는 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속설에 나타난 공덕 중에는 배고픈 사람들에게 베푸는 급식공덕이 최고라고 했다. 흔히 우리가 이야기하는 ‘배가 고픈 설음은 설음 중에도 가장 큰 설음’이라고 하니 말이다.

 

 

적십자 봉사활동 급식공덕 펼쳐

 

14일(금) 오전 11시 50분부터 팔달문 앞 영동시장 입구 건너편에는 긴 줄이 하나 생겼다. 연세가 드신 분들이 줄을 서서 계시고, 앞에는 차량이 한 대 서 있다. 현수막에는 ‘적십자가 여러분께 함께 합니다. 적십자 이동급식 봉사활동’이라고 적혀있다. 차량 앞에는 적십자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열심히 분담을 해 급식을 하고 있고, 어르신들은 식판에 음식을 담아 테이블 등에서 식사를 하신다.

 

“한 달에 이곳에서 몇 번이나 봉사를 하시나요?”

“한 달에 두 번 합니다. 둘째 주와 넷째 주 금요일에 이곳에서 무료급식을 하죠.”

“한 번에 몇 분이나 식사를 하세요?”

“올 때마다 250명에서 300명쯤이 식사를 하시죠. 오늘은 날이 더워서인가 많이들 오시지 않은 듯하네요.”

 

 

KB 금융그룹 국민은행에서 마련한 밥차를 이용한 무료급식은 이렇게 한 달에 두 번 이곳에서 주기적으로 열린다. 날이 뜨거운데 야외에서 식사를 하시는 것이 힘이 들었는지, 몇몇 분은 그늘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 12시가 넘었는데도 꼬리는 줄지가 않는다. 그만큼 이곳을 찾는 분들이 많다는 소리이다.

 

"맛있죠. 그리고 고맙죠."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지 않고, 지동교 위에서 혼자 식사를 하고 있는 사람이 보인다.

 

“왜 이곳에서 혼자 드세요? 그늘도 없어 뜨거운데”

“제게서 냄새가 난다고 해서요”

“여기 오시는 분들이 모두 노숙자 분들은 아니시죠?”

“아닙니다. 대개는 이곳 가까운 곳에 사시는 어르신들인데, 한 달에 두 번 적십자 밥차가 오면 이곳에 와서 식사를 드세요”

 

 

살펴보니 입성들이 깨끗한 분들이 많이 계시다. 꼭 이곳에서 밥을 먹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이렇게 봉사를 하시는 분들이 있어서 즐겁다고 하시는 어르신 한 분은

 

“우리 수원에는 이렇게 무료급식을 하는 곳이 모두 합해 20여 곳 정도가 됩니다. 집안에서 무료하게 보내느니, 가끔 이렇게 나와 친구들과 함께 밥을 먹는 즐거움도 있고요. 이곳은 주변에 우리같은 나이 먹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인데, 때가 되면 이렇게 밥을 주니 얼마나 고마운 줄 모르겠네요.”라고 하신다.

 

여기저기 모여 식사를 마치신 분들은 돌아가면서 ‘고맙다’라는 인사를 잊지 않으신다. 밥 한 그릇의 정성. 아마도 그래서 공덕 중에 가장 큰 공덕을 급식공덕이라고 한 것은 아닌지. 밥 한 그릇의 나눔이 행복한 시간이다.

보물 제402호인 수원 화성의 팔달문이 3년 가까운 중건 공사를 마치고, 201353() 오후 2시에 중건 준공식을 가졌다. 팔달문은 화성 축성 당시인 1794228일 공사를 시작하여, 13개월 만에 옹성이 완공되면서 공사를 마쳤다. 팔달문은 장안문보다 약 3개월 정도 공사기간이 더 길었으며, 공사에 들어간 비용 역시 더 많았다.

 

이러한 팔달문은 그동안 여러 차례 보수공사를 한 기록이 보인다. 처음으로 팔달문을 보수를 한 것은 도광 26년인 1846년이었다. 이 해 69일부터 내린 비로 수원천의 물이 크게 불어나, 북수문 아래 전돌이 떠내려갔고 문루도 무너졌으며, 남수문과 매향교까지 파괴가 되었다고 수원부 판관 겸 중군인 채학영이 보고를 한 것이다. 이때 폭우로 무너진 팔달문을 중수하고 옹성을 수보하였다.(수원부계록) 이 이후에도 팔달문은 28차례나 보수를 한 것으로 기록에 보인다.

 

 

팔달문의 해체보수

 

팔달문의 국보 1호인 숭례문과 같은 형태로 축조가 되었다. 하지만 그 크기 면에서는 숭례문보다 크다고 하였다. 20082월 숭례문이 화재로 인하여 소진되었을 때, 수많은 국민들이 불타고 있는 숭례문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화성의 팔달문은 일제의 치하와 6, 25 한국동란 때에도 화서문과 함께 그 모습을 지켜내었다.

 

이러한 팔달문을 해체 보수를 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2007년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안전진단 결과, 팔달문 상층 문루 일부의 서까래가 빠지고 보가 처지는 등 목부재의 변형이 발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더 이상 방치를 하면 원형의 훼손이 온다고 판단하여, 2010625일 팔달문을 해체, 보수를 시작했다.

 

 

팔달문을 해체 공사 이전에도 주요부재의 균열 및 대량의 기울어짐, 평고대 파손과 공포의 이완, 평바의 이완, 상층 종도리 및 서까래 탈락, 상층 외기도리 뻘목 파손들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주요 부재의 균열 및 부식, 부재 결구부 이완 및 이격현상에 대한 보수가 2010625일 시작을 하여, 2013331일까지 29개월 정도 이루어진 것이다.

 

팔달문 다시 돌아오다.

 

팔달문은 옹성의 문이 성문과 일직선으로 놓여있다. 그것은 이 팔달문의 홍예를 지나 옹성을 거쳐 곧게 사통팔달하라는 뜻이다. 삼남에서 한양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모두가 팔달문을 들어서야 한다. 팔달문의 상량문에는 돈과 곡식과 군사가 모이고, 선비와 농사꾼과 장사치가 반드시 여기 있네.’라고 적혀있다고 한다. 한 마디로 팔달문은 풍요와 번영을 상징하는 문이다.

 

 

 

정조의 명에 의해 화성이 축성될 당시 축조 된 팔달문은 220년 만에 첫 해체 보수공사를 마친 것이다. 그리고 53일 마침내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팔달문은 조선 초기 건물의 수려함과 건물의 멋스러움을 갖추고 있으며, 군사적 기능의 방어기능까지 겸비하고 있다. 하기에 팔달문은 성문건축의 백미로 손꼽힌다.

 

행사는 2시가 지나서 시작이 되었으며, 고유제로 먼저 팔달문의 복원을 마쳤음을 고하였다. 식전공연 시조시인 정수자의 축시와 화성사업소장의 경과보고 등으로 이어졌고, 염태영 수원시장의 기념사와, 노영관 수원시의회 회장과 국회의원 남경필 의원의 축사가 이어졌다.

 

 

염태영 수원시장은 이렇게 팔달문이 우리에게 돌아온 것을 축하한다. 팔달문의 해체보수 중건을 하는데 모두 47억이라는 예산이 들었으며, 국비가 70%, 도비가 15%, 시예산 15%로 공사를 마무리했다. 국보 1호인 숭례문과 같은 모습으로 지어진 팔달문이 지금까지 우리들의 곁에 남아있어 우리는 행복하다고 기념사에서 말을 했다.

 

축사가 끝난 후 성문 안에 놓여있던 대북을 여덟 번을 울려 개문을 하고, 팔달문의 누각에 올라 돌아보는 것으로 준공식을 마쳤다. 팔달문을 해체보수하면서 교체된 부재들은 팔달문, 가까이 늘 우리 곁에라는 제목으로 수원화성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전시가 된다. 53일부터 721일까지 열리는 이 전시회에 가면, 220년 전의 팔달문의 목재와 부토, 잡상 등 부재를 만날 수가 있다.

 

2년 여 간에 걸친 보수공사를 마친 팔달문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조선후기인 1794년에 세운 화성의 남쪽 문인 팔달문은, 사방팔방으로 길이 열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이름이다. 그 이름은 팔달산에서 따왔다. 화성의 네 곳의 성문 중 동쪽문과 서쪽 문에 비해 북쪽문과 남쪽 문은 더 크고 화려하게 꾸몄다.

 

팔달문은 돌로 쌓은 무지개 모양의 문은 왕의 행차 시에도 가마가 드나들 수 있을 만큼 널찍하게 내고 위에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 문루를 세웠다. 문루 주위 사방에는 낮은 담을 돌리고 바깥쪽으로는 반달형 옹성, 좌우에는 적대 등 성문 방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시설을 두었다.

 

 

우진각 지붕으로 꾸민 팔달문

 

팔달문은 도성의 문루처럼 우진각 형태의 지붕과 잡상 장식을 갖춘 문루로서 규모와 형식에서 조선 후기 문루 건축을 대표한다. 옹성은 우리나라 성곽에서 일찍부터 채용되었던 방어 시설로서 서울성곽의 동대문, 전주성의 풍남문 등에서도 볼 수 있는데, 팔달문의 옹성은 규모와 형태면에서 한층 돋보인다.

 

414일 오후에 팔달문을 찾았다. 그동안 몇 번인가 촬영을 하려고 했지만, 공사가 마무리가 되지 않아 미루고는 했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일요일 오후였지만, 그 바람으로 인해 기가 나부끼는 모습이 오히려 보기가 좋다. 차들이 지나다니는 곳에서 촬영을 하느라 조금은 힘이 들었지만, 이렇게 웅장한 팔달문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공사 실명제 석판이 가장 뚜렷해

 

196493일에 보물 제402호로 지정이 된 팔달문은, 화성의 시설물 중에서 서문인 화서문(보물 제403), 방화수류정, 서북공심돈 등과 함께 보물로 지정이 된 시설물이다. 그동안 갑갑하게 공사 때문에 가려져 있던 팔달문이, 모든 공사를 다 마치고 말끔하게 새로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문을 지나 옹성 쪽으로 나가다가 문의 겉 벽면에 있을 공사실명제 판을 찾아보았다. 이 실명제 판은 4개문에 다 있지만, 장안문은 6.25 때 폭격을 맞는 바람에 깨어졌다고 한다. 대신 그 내용을 적어 옹성 안에 비로 제작을 해두었다. 팔달문을 바라보고 오른쪽 문 벽에 있는 실명제 판에는 감동 전 목사 김낙순, 전 부사 이방운 등 85의 기술자가 팔달문의 조성에 참여를 했다고 적고 있다.

 

 

꿀이 흘렀다는 팔달문

 

문 안에는 커다란 나무 하나가 바닥에 놓여있다. 바로 문을 닫고 빗장을 지를 때 사용하는 비녀이다. 그 크기만 해도 팔달문의 장엄함을 알 수가 있다. 안으로 들어가 옹성의 벽을 바라다본다. 참 단단하게 지어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지금은 양편의 성곽이 끊어져 아픔을 더하고 있지만, 그 문 하나만으로도 대단하다.

 

바람이 갑자기 세차게 불어 옹성의 문이 삐그닥거린다. 만일 그 소리를 과거에 적들이 들었다고 하면, 그 소리만으로도 두려움에 떨었을 것만 같다. 함께 팔달문의 구경에 나섰던 김우영 e수원뉴스 주간이 이야기를 한다.

 

 

여기 어디쯤인가 성문 벽에서 무엇이 흘러 내렸데요. 그것을 손가락으로 찍어 먹어보니 달았다는 거예요. 성돌을 들어내고 안을 들여다보니, 그곳에 벌들이 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고 해요

 

팔달문은 생명을 살리는 문이라는 것이다. 정조대왕이 강한 국권을 만들기 위해 전국의 선비들을 모아 장사를 시작했던 곳. 팔달문 앞의 장시는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그런 장시에 몰려드는 사람들의 흥청거림이 있어, 꿀벌조차도 그 안에 집을 지은 것은 아니었을까?

 

 

모든 공사를 마치고 장엄한 모습을 드러낸 팔달문. 주변을 돌아보다가 보니, 성문 벽 밑에 풀 한포기가 자라고 있다. 그렇게 공사를 하고 있는 동안도 생명이 그것에서 움튼 것이다. 비록 위로 올라갈 수는 없었지만, 주변을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감흥을 불러온다.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팔달문, 팔달문을 자랑하기에 주저함이 없는 것은, 새롭게 치장을 한 팔달문을 만났다는 감흥 때문이다.

수원 영동시장 아트포라는 무한 변신 중

 

지난 해 1025, 영동시장 상가 안 비어있던 2층이 새롭게 단장을 했다. 전통시장인 영동시장이 공간 안으로 예술가들을 끌어들여 변신을 시도하였다. ‘아트포라는 예술을 뜻하는 ‘art'와 라틴어로 시장을 뜻하는 복수형인 ’fora'가 결합된 합성어이다. 아트포라는 영동시장 내의 상인들과 예술가들이 연계하여, 예술적 상품을 개발하고 지역주민이나 이곳을 찾는 관광객을 위한 프로그램을 기획, 실행하는 창작공간이다.

 

수원 화성의 팔달문 앞에는 9개의 시장이 모여 있다. 이곳은 정조대왕이 화성을 축조하면서 장시를 연 곳으로, 그 역사가 200년이 넘는 유서 깊은 곳이다. 영동시장은 여러 장들과 함께 모여 있는 장으로, 200여 년 전부터 장터였던 곳이기도 하다.

 

 

문밖시장, 성외시장 등으로도 불려

 

정조대왕 시대에 만들어진 팔달문 앞의 왕이 만든 시장은 그 영역으로 보아, 지금 팔달문시장 인근의 장들이 모두 한 장터였을 것으로 보인다. 영동시장은 1919년 이후 문밖시장(팔달문 밖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성외시장(성 밖에 개장이 되어있어 붙여진 이름) 등으로 불리며 4일과 9일에 장이 서던 곳이다.

 

영동시장은 2~30리 밖에서도 이용하는 장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영정시장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5일장으로 열리던 시장은 1949년 수원이 시로 승격이 되면서 영동시장이라고 이름이 바뀌었다. 현재 영동시장은 수원천을 끼고 상가와 상점이 발달되어 있으며, 200개가 넘는 점포가 입점이 되어있다.

 

 

영동시장이 들어서 있는 팔달문 앞의 장은 모두 9개이다. 하지만 수원의 전통재래시장 22곳 중, 거개가 팔달구인 팔달문 인근에 밀집이 되어 있는 상태이다. 21곳의 장 중 팔달구에만 14개소의 장이 있으며, 권선구 3개소, 장안구 4개소, 영통구 1개소가 자리하고 있다.

 

한복의 맵시에 취할 수 있는 영동시장

 

영동시장은 1층에 자리하고 있는 170여 개의 점포 중에서, 40여 개 정도가 한복을 취급하는 점포들이다. 그래서인가 영동시장은 예전부터 한복을 필요로 하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던 것이 점차 한복이 급격한 수요의 감소가 오고, 점차 사람들이 편리한 옷을 선호하게 되자 한복의 입지를 재조명하고자 무단한 노력을 했다.

 

 아트포라 공간과 전시공간인 아라

 

또한 대중에게 한복의 아름다움과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2001년부터 ()영동시장의 주관으로 한복맵시대회를 열고 있기도 하다. 힌복맵시대회는 영동시장 내에 입점을 한 한복집들이 정성들여 제작을 한 한복을, 모델로 지원을 한 시민들과 함께 선보이는 축제이다. 이 한복맵시대회는 매년 화성문화제 기간 중에, 팔달문 지역 시장 거리축제로 선보인다.

 

아트포라점차 자리를 잡아가고 있어

 

처음 아트포라가 영동시장 2층에 자리를 잡을 때는, 서편 일부 밖에는 자리하지 못했다. 개관 당시에는 전통시장 예술을 만나다라는 제목으로, 모두 9명의 예술가들이 힘겹게 참여를 하였다. 개관 당시에 이곳에 입주를 한 작가들은 사진 조성근, 한복 이정화, 금속공예 어진선, 도자공예 안소원· 허영남, 서예 윤경숙, 회화 김춘홍, 한지공예 이혜순, 전통문양디자인 최윤경, 염색·직물공예 이정하 작가들이다.

 

아트포라의 모든 공방은 안이 들여다보이게 조성을 했다. 그 자체만으로도 전시 공간처럼 보인다

 

개관을 하고 난 뒤 이제 6개월 남짓. 아트포라가 점차 활기를 띠고 있다. 2013년에는 330일부터 시작해 1019일까지 토요문화체험부스를 운영하고 있다. 이 체험은 토요일 15시부터 17시까지 운영을 하며, 금속책갈피 만들기, 종이죽으로 포장용기 만들기, 투명 장바구니 만들기, 흙으로 엽전 만들기, 단오부채 만들기, 꽃바람개비 만들기, 나도 화가다 등 다양한 체험이 마련되어 있다.

 

날이 따듯해지면서 점차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는 영동시장의 창작공간인 아트포라’. 첫날 체험에 아이들과 함께 참가를 했던 박아무개(, 35. 서울)

 

이렇게 전통시장 안에 아름다운 작가들의 공방이 있다는 것이 놀랍다. 앞으로 재래시장들이 이렇게 예술을 끌어안을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많아져야 한다. 그것이 예술과 재래시장이 동반 발전을 할 수 있는 탁월한 선택인 듯하다고 한다.

 

 

재래시장인 영동시장 안의 작가들의 산실인 아트포라. 지역민들과 관광객들에게 더 좋은 작품들을 보여주기 위해 무단히 노력을 하는 작가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더 한층 발전을 할 수 있는 작가들의 산실인 아트포라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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