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무척 좋아서

밝은 빛의 이 밤이 기이하네

강에 비추어 물결이 움직이고

메뿌리에 닿으니 그림자가 들쑥날쑥하네

터럭이 희니 더럽힘이 없음을 알겠고

마음이 참되려면 속이지 않는 것이 필요하네

나그네의 넋은 늙을수록 느끼기 쉬우니

시 읊고 휘파람 부는 것이 스스로 많을 때이네

 

용인시 기흥읍 지곡동에 있는 음애 이자 고택의 담 밖에 세운 문학비에 적힌 시다. <추월(秋月)>이라는 이 시는 민족문화추진위원 이필구 역으로 적혀있다. 음애 이자(李자)는 성종 11년인 1480년에 출생하여, 중종 28년인 1533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자는 정치가며 도학자였다. 그리고 뛰어난 시인으로도 명성을 떨쳤다. 고려 말의 대학자인 목은 이색의 5대손으로, 자는 차야(次野), 호는 음애(陰崖)이며, 본관은 한산이다.

 

 

이자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뛰어났으며, 연산군 7년인 1501년에 식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사헌부 감찰(監察)을 거쳐 이조좌랑에 올랐다. 그러나 연산군의 폭정이 시작되자, 홀연히 관직을 사직하고 초야에 묻혔다. 그 후 중종반정으로 다시 조정에 나아가 우승지, 한성판윤, 형조판서를 거쳐 우참판이 되었다. 조광조와 함께 정치개혁에 선봉에 섰으나, 기묘사화 때 조광조 등과 함께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낙향한 이자는 음성, 충주, 용인 등에서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용인 지곡리에는 고택과 유택이 있고, 조광조 등과 함께 노후를 생각해 지은 사은정이 있다.

 

음애 이자의 시문은 3656편이라는 대단한 글을 남겼다고 한다. 그러나 그 대부분이 유실되었으며, 현재는 120여 편의 시문이 실린 음애집이 남아있다. 1533년 54세로 운명하니, 중종은 이자를 관직에 복위시키고, 1577년 선조 시에 문의공(文懿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팔각형의 기둥이 있는 사랑채

 

이자 고택은 부와산을 마주하는 낮은 야산을 뒤로하고 동향으로 앉아 있다. 처음의 가옥은 사랑채와 안채가 부엌으로 연결이 되어 ㄷ자 모양을 하고 있고, 그 앞에 -자형의 행랑채가 있었다고 한다. 튼 ㅁ자 형의 집이었던 것이 지금은 행랑채는 없어지고, ㄷ자형의 사랑채와 안채가 남아 있다.  

 

사랑채는 좌측 남서쪽 모서리에 마루로 놓은 신주를 모시는 청방을 두었다. 이 방이 정자 역할을 하는 마루방이 아닌 것은 창호에서 나타난다. 정자 역할을 하는 마루방의 경우 정면과 측면을 모두 창호로 내는데 비해, 이자 고택의 마루방 측면의 문은 판자문으로 만들었다. 이런 점으로 보아 이 방이 사당 역할을 하는 청방임을 알 수 있다. 과거 집의 규모가 크지 않은 중류 주택에서는 사당을 별도로 짓지 않고, 사랑채나 안채에 일부를 사당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돌출이 된 청방의 옆으로는 두 칸 사랑방이 있다. 이 사랑방은 두 칸으로 넓게 트여 있으며, 청방과 사랑방의 사이는 전체를 문으로 해달았다. 사랑채의 우측 맨 끝에는 부엌을 들였는데, 위는 다락방이다. 그리고 사랑방의 우측 끝에는 문을 달아 높은 다락을 만들었다. 이 다락은 사랑방 앞에 놓은 툇마루를 통해서만 출입이 기능하다. 이자 고택의 사랑방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사랑방 전면에 있는 기둥이다. 네모기둥의 모서리를 긁어 팔각기둥으로 만들었다. 이런 팔각기둥은 딴 곳에서는 찾아보기가 힘든 이자 고택만이 갖고 있는 멋이다.

 

간결한 안채의 꾸밈이 돋보여

 

이자 고택은 사랑채와 안채가 붙어있다. 사랑채와 안채는 공간을 별도로 했으며, 이어지는 부분에 부엌을 두었다. 사랑채에서 꺾이는 부분에 부엌을 두고 한 칸 건넌방이 있다. 이어서 두 칸의 대청이 있고, 꺾인 부분에 두 칸의 안방이 있다. 그리고 다시 두 칸의 부엌을 두었다. 한 칸의 건넌방 앞에는 툇마루를 두어 대청과 연결을 했다.

 

 

안방은 길게 두 칸으로 만들었으며, 부엌 위 한 칸은 다락을 꾸몄다. 그런데 그 다락을 올려다보면 굽은 목재를 이용하여 집을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굽은 목재를 이용했다는 것은, 집을 지은 목수의 기능이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체적으로 이자 고택은 치목 수법이 뛰어나며, 평면과 입면의 짜임새가 도드라진다. 조선조 후기 경기도 지역 중류주택의 특성을 잘 간직하고 있는 집이다. 

 

안채 대청의 뒤에는 툇마루를 놓았는데, 이 툇마루가 또한 일품이다. 길게 마루를 놓은 것이 아니고, 두터운 통나무를 그대로 툇마루로 이용을 하였다. 그 옆에 연도를 놓아 올린 굴뚝도 낮게 만들어 편안한 마음이 들게 한다. 이자 고택을 돌면 주춧돌에 눈길이 간다. 다듬지 않은 네모난 돌을 이용해 집안의 주추를 놓았는데, 그러한 흐트러짐이 이 집의 여유로움이다. 그 하나하나가 다 다르면서도 어우러짐의 미학이라니. 우리 고택을 돌아보면서 느끼는 즐거움이 이런 데 있다.

 

 

이자 고택의 안채 부엌에는 아궁이 옆에 광을 두고 있다. 이렇게 아궁이 곁에 광을 둔 것도 이자 고택에서 보이는 또 다른 특징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집안의 여인들이 생활을 하기에 편리하게 꾸며졌다. 안채의 부엌과 사랑채의 부엌 사이에 놓인 우물을 보아도, 이 가옥이 여인네들의 동선에 많은 신경을 썼다는 것이 나타난다. 

 

흰 눈이 녹지 않아 설원으로 변한 이자고택. 현재 경기도 민속자료 제10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자 고택은 운치가 있다. 눈을 밟고 집안 구서구석을 돌아보면, 절로 탄성이 나온다. 크지 않으면서도 멋이 있고, 화려하지는 않으나 짜임새가 돋보인다. 대문으로 사용하는 일각문을 나서면 담장 모서리 위에 올린 기와가 눈길을 끈다. 눈이 덮인 담장의 기와는 모두 감추어졌는데, 한 장의 기와가 밖으로 돌출이 되어 있다. 그 또한 아름다움이라. 이자 고택이 주는 즐거움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어머니를 지극한 효심으로 모신 효자였다. <난중일기>에는 이러한 이충무공의 내력을 적고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3년 6월에서 12월 사이에 팔순에 가까운 어머니를, 여수 웅천동 송현마을 정대수 장군의 집에 모셔다 놓고 수시로 문안을 드렸다고 한다.

하루는 노모를 뵙기 위해 일찍 배를 타고 송현마을로 문안을 드리러 왔는데, 기운이 많이 떨어진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사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장군은 어머니를 뵈러 갈 때는 흰 머리카락을 모두 뽑고는 했는데, 이는 늙어가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어머니께서 마음 아파할 것을 생각해서였다고.


장군의 모친이 살던 집터를 찾아가다.

10일 아침 일찍 여수 수산시장에 볼일이 있어 내려갔다. 여수에 사는 지인을 만나 함께 장을 보고 오는 길에, 장군의 어머니께서 사셨다는 집터를 찾아갔다. 길가에는 ‘이충무공 어머님 사시던 곳’이란 푯말이 붙어있다. 안으로 들어가니 요즘 주변 정리를 하느라, 한창 공사 중이다. 전남 여수시 웅천동 송현마을 1420-1번지. 옛 집터 인 듯한 곳에는 거북선에 비를 세운 형상물이 있는데, 이 근처 어디인가 이충무공의 모친이 5년간 살았던 곳이라고 한다.

거북비가 서 있는 안으로 들어서면 정면 7칸 정도에, 측면 두 칸 반 정도의 팔작 겹처마 지붕으로 된 집이 있다. 현재 이 집은 사람들이 거주를 하고 있는데, 현재 거주를 하시는 분은 정평호(남, 79세)로 임지뢔란 시 활동을 하던 정대수 장군의 후손이라고 한다. 이분은 임진왜란 때부터 선조들이 대대로 이 터에서 살아왔다는 것이다.



 

고택다운 옛집, 1930년대 지은 것으로 전해져

현재의 집주인도 이 집에서 태어나고 자랐다고 한다. 임진왜란 이후 조상 대대로 이 집터에서 살았다는 분들. 집터는 옛집 터지만, 집은 그동안 여러 번 개축을 한 것인지 옛 모습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현재 이 집은 예전 충무공의 어머니께서 사시던 집은 아니다. 당시 발굴을 할 때 대들보 등이 발굴된 곳은, 현재 정대수 장군의 후손인 정평호옹이 살고 계시는 집의 부엌과 장독대에 걸쳐 있다고 전한다.

현재 주인이 거주하고 있는 집이 옛 선조들이 살던 집터에 나중에 보수, 개축을 했다고 보면, 이순신 장군의 어머니는 아마 사랑채나 별채에 기거를 하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당시 이 집에는 정대수 장군의 가족들이 살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문 앞에 선 안내문에 보면 「1972년 옛 집이 있던 자리로 추정되는 곳에서 대들보, 마룻대, 세살창문과 같은 집 구조물과 맷돌, 디딜방아용 절구, 솥 같은 세간들을 찾아냈다」고 적고 있다. 현재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 집 주변으로는 수령 300년이 넘는 팽나무가 서 있다. 보호수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팽나무는 수고가 25m에, 나무의 둘레는 5.2m나 되는 거목이다.



문화재 발굴조사 후 문화재지정도 고려 해

집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사집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주춧돌은 원형으로 다듬었으며, 그 위에 팔각기둥을 세웠다. 사방에는 처마 끝에 활주를 받쳐 놓았으며, 전체적으로 보아도 고택의 멋스러움이 그대로 배어있다.

여수시 문화재 관련 담당자는 내년에 발굴에 필요한 예산 신청을 했다고 한다. 발굴 후에 이 터가 정확하게 이순신 장군의 어머니가 살던 집이라고 밝혀진다면, 이곳에 복원계획도 고려해 보겠다는 것이다. 그럴 경우 현재의 집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할 것이라고.



만일 이 터가 발굴조사 후에도 정확한 고증이 들어나지 않는다면, 관광자원으로 활용을 할 것이라고 한다. 어차피 난중일기에 밝혔듯이, 송현마을에 어머니를 모셨다고 기록이 있고, 현재의 집이 당시 정대수 장군의 집터이기 때문이다. 충신이요 효자인 이충무공의 어머니가 살았다는 집터. 그곳에는 충무공에 관한 역사를 안내판을 통해 배울 수 있지만, 아직 발굴이 끝나지 않아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는 것에 아쉬움이 크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