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산(麗岐山)은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 농촌 진흥청 내에 위치하고 있는 해발 104.8m의 산이다. '화성성역의궤'에는 '여기산(如岐山)'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산세가 크지 않고 산의 모습이 기생의 자태와 같이 아름다워서 '여기산(麗岐山)'으로 불렀다고 한다. 산의 정상부에는 토축산성이 조성되어 있는데, 해발 104.8m로부터 10m 아래에 쌓여 있는 것이 특색이다. 전형적인 머리띠 모양의 테뫼식으로 성 길이는 약 453m이다.

 

전철 화서역에서 구운동 방향에 있는 여기산 공원은 축구장, 게이트볼장, 익스트림 스포츠 연습장 등 체육시설과 산책로가 조성돼 있는데, 경기도는 팔달구 화서동 436 일대 서호저수지 332997, 여기산 선사유적지 225828를 경기도 기념물 제200호와 201호로 지정하였다. 여기산 서호방면에는 우장춘 박사의 묘와 그의 석상이 위치해 있다.

 

 

땀을 흘리며 돌아 본 여기산

 

8일 오후 2. e수원뉴스의 김우영 주간과 함께 여기산에 올랐다. 여기산에는 화성을 축성할 때 돌을 뜨던 부석소와 토축산성이 있어, 직접 눈으로 확인을 해보고 싶어서였다. 여기산 입구에서 확인을 받은 후 천천히 산으로 난 소로로 접어들었다. 주변에 서 있는 나무들에게서 숲이 주는 향이 짙다. 비가 내린 뒤라 그런지 잎들이 유난히 푸르다.

 

천천히 걸어 오른 길 우편에는 우장춘 박사의 석상이 자리하고, 좌측에는 묘가 있다. 그곳을 지나 높지 않은 산 정상으로 오르다가 숲길로 접어들었다. 산성을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이곳 여기산은 수원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목이다. 산성이 이곳에 있다는 것은 예부터 이곳이 중요한 거점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자연녹지인 여기산은 1979~1984년에 숭실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한 곳이다. 이곳에서는 철기시대와 삼국시대 전기에 사용했던 토기종류들이 상당수가 발굴이 되었으며, 생활용구인 철기류 등도 꽤 조사되었다. 또한 주거지 내부에서 검게 탄 볍씨들이 발견이 되어, 서호일대에서 벼농사를 지었음도 확인되었다.

 

 

화성 축성 때 돌을 뜬 곳 발견

 

숲을 지그재그로 돌면서 옛 토축산성의 흔적을 찾아보고 있는 중에 거대한 암벽을 만났다. 여기산은 화성 축성 당시에 돌을 뜬 곳으로 알려지고 있었으나, 그동안 소개된 돌은 길가에 보이는 작은 바위였다. 이렇게 큰 암벽은 아직 소개되지가 않았는데, 주변에는 큰 바위덩어리들이 놓여있는 것으로 보아 돌을 뜬 곳임을 알 수 있다.

 

절개된 바위를 자세히 살펴보니 나란히 난 쐐기구멍이 보인다. 이렇게 바위에 쐐기구멍을 내고 그 안에 나무를 집어넣은 후 물을 부어놓으면 나무가 부풀어지면서 바위를 쪼개는 것이다. 커다란 암벽이 마치 칼로 자른 듯하다. 어떻게 이 큰 바위덩어리를 이렇게 반듯하게 쪼갤 수가 있을까? 선인들의 지혜가 놀랍기만 하다.

 

 

천년 세월을 지키고 있는 토축산성

 

산을 한 바퀴 돌아 정상부근으로 오르다 보니, 한 눈에도 토축산성임을 일 수 있는 흙더미가 나란히 뻗어있다. 이 토축산성은 아마도 삼한시대나 삼국시대 때 쌓은 것으로 보인다. 높지 않은 산이지만 이곳은 주변에 광활한 농경지가 조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 군사적으로도 상당히 중요한 곳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토축산성을 따라 걷다보니 산 정상이 나타난다. 그 위가 평평하게 조성되어 있는 곳이 군사지휘소가 있었을 듯하다. 두 시간 남짓 돌아본 여기산. 여기산을 돌아 내려오는 길에 시원한 바람이 땀을 식혀준다. 농촌진흥청이 이곳에 자리한 것도 우연히 아니란 생각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농사를 지었던 곳이었기 때문에.

 

수원시 팔달구 영동 43-2 번지에 소재한 영동 거북산당. 이 도당은 18세기 말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그 역사가 200여 년이 지난 것으로 추정한다. 영동 거북산당은 화성을 축성을 하기 이전부터 이미 그곳에 서 있었다고 보는 것이 지배적이다. 이 거북산당이 자리한 앞쪽으로는 낮으막한 ‘거북산’이라는 산이 있어, 그 명칭을 거북산당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거북산당은 처음에는 현 구천동의 마을 제당으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던 곳이었을 것으로 보이나, 후에는 영동시장의 번영과 안녕을 기원하는 도당으로 기능이 바뀌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 거북산당은 주변 상권과 무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화성 축성을 위해 팔도에서 모여 든 수많은 노역자들로 인해 장시가 개설이 되고 난 후. 그때부터 팔달문 앞에 형성된 장시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재인청의 마지막 화랭이 이용우 일가가 지켜 온 거북산당

 

영동 거북산당은 옛날에는 세습무인 화랭이에 의해 굿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재인청 도대방을 역임했던 이종하의 삼남인 이용우 선생이, 생존 시 거북산당 도당굿을 주관하였다. 이용우 선생 일가는 현 오산시 부산동(당시 수원 오산리)에 거주하였으며, 경기도 지역의 많은 도당굿을 주관해 오기도 했다.

 

현재 정면 두 칸, 측면 한 칸의 기와로 조성된 겨북산당은 수원시 향토유적 제2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거북산당은 과거에는 짚으로 이엉을 엮어 만든 ‘터주가리당’이었다고 한다. 1935년(乙亥年)에는 터주가리 당 앞에 작은 연못이 있었으며, 당 옆에는 3층으로 된 탑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 거북산당 주변에는 기와집과 판잣집들이 있었다고 전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이곳이 팔달문 앞 장시의 외곽에 있던 당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터주가리 당을 당시 인계동에 거주하던 이씨 만신이 관청의 도움을 받고, 개인이 사비를 들여서 거북산당을 축조하고 그 안에 도당할아버지와 도당할머니 그리고 대왕님의 탱화를 모셨다고 한다.

 

그 탱화는 현재 거북산당 안에 모셔진 그림과 동일한 형태이다. 그 뒤 1994년 10월 24일(음력 9월 10일) 수원시청의 지원을 받아 당을 수리하고 단청을 새로 입혀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당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당 앞에 있었다는 연못이 메어지고, 그 자리에는 앞 건물에서 가건물을 내 짓는 바람에 옛 형태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렇게 당의 형태가 변한 거북산당은 세습무인 화랭이들이 주관하던 것을, 이용우 선생의 제자인 강신무로 전 경기도당굿 기, 예능보유자였던 고 오수복으로 전해졌다. 보유자 오수복의 별세 이후 지금은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98호인 경기도당굿의 회원들이 도당굿을 맡아서 하고 있다.

 

 

영동시장 내에 거북산당이 건립된 이유는?

 

영동 시장 내에 거북산당이 축조된 이유를 보면 화성의 축성과 무관하지 않다. 화성 축성을 위해 전국에서 많은 노역자들이 몰려들었고 자연히 팔달문밖에 장시가 서게 되면서, 상인들 을 주축으로 상가의 번영과 안녕을 위한 도당을 필요로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지금까지도 시장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당고사를 지내지 않으면 시장에 불이 잘 나기 때문에, 예전부터 이 시장에서 터를 잡고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세상없어도 당제는 올려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의 명칭이 거북산당으로 불리는 것은 원래 이곳에 거북이 모양의 돌이 있었다고도 하고, 또 인근의 구천동과 가까우며 주위에 물이 많은 곳이라서 풍수적으로 불을 제압 할 수 있는 힘을 상징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근처에 ‘거북산’이라고 부르는 작은 언덕이 있었기 때문에 그 산 이름을 따 거북산당이라고 부른 것으로 보인다.

 

 

도당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신 당

 

경기도의 도당은 당집을 마련하고 그 안에 도당신을 섬기는데, 신위는 위패를 모시거나 무신도를 모셔놓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영동 거북산당 안에는 도당할아버지, 도당할머니, 대왕님(염라대왕)을 모시고, 매년 음력 10월 7일에 영동시장의 번영과 안녕을 위해서 지내오던 것이다.

 

이 도당굿은 시장의 번영과 상인의 대동단결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공동체적인 삶의 필요로 창출된 굿이다. 그러나 1990년 초에 이르러서는 영동시장 번영회에서 별도로 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고, 현재는 중요무형문화재 제98호인 경기도당굿 보존회원들에 의해서 굿이 진행되지만 옛 형태는 찾아보기 힘들다.

화성은 거대한 축조물이다. 하지만 화성은 자연과 닮았다. 사람들이 화성을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화성이 자연과 동화되었다는 점이다.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어느 한 곳도 자연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 거대하면서도 자연과 닮아있는 화성은, 4월이 되면 제대로 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그것은 화성 주변으로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나기 때문이다. 꽃과 함께 어우러진 화성을 돌다가 보면, 어찌 이리도 자연과 어울리게 축성을 했는지 감탄이 절로 나온다. 411() 화성 창룡문(동문)을 들어서 남수문까지, 안과 밖으로 화성을 돌아보았다. 아직은 만개가 되지 않은 꽃들이지만, 그래도 화성의 아름다움을 한층 더 돋보이게 만든다. 꽃과 함께 어우러진 화성의 일부분을 돌아본다. 이 봄에 남은 구간을 4번으로 나누어 돌아 볼 생각이다.

 

화성은 정조대왕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곳이다. 정조대왕은 화성을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축성을 하였을 뿐 아니라,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화성은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9월에 완공되었다. 28개월 만에 이렇게 거대한 성을 축성할 수 있었던 것은, 동원된 모든 인부들에게 적정한 노임을 지불했기 때문이다.

 

화성을 돌아보는 많은 사람들

 

<화성성역의궤>에 의해 복원된 화성

 

화성의 축성시에는 많은 기물이 동우너되었다. 거중기와 녹로 등 신 기재를 특수하게 고안해 사용하였고, 이런 장비를 이용해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다. 화성은 축성이후 일제의 강점기를 지나고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 손실되었다. 그 뒤1975~1979년까지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화성의 성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축성하였다. 성의 시설물로는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5,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다. 이 중 아직까지 복원이 되지 못한 시설물은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 등이다.

 

공사실명제로 축성을 한 화성은 공사를 맡은 사람들의 이름까지 세세하게 적어놓았다

 

화성을 그냥 돌아보았다니

 

요즈음 들어 날씨가 풀리면서 화성에는 주말과 휴일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성을 따라 걷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외지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가족들과 함께 화성을 찾아와 성 길을 따라 걷는다. 그런 관광객에게 물어보았다, ‘화성에서 무엇을 보았느냐고?’. 그들의 대답은 한결같다. 그냥 돌아보았노라고.

 

그래서 화성을 좀 더 재미있게 돌아볼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화성에서 이것들은 꼭 찾아보라고. 1. 공사실명제판 2. 성벽 위에 거대한 연못 3. 장안문의 성혈 4. 성벽에 남긴 야질흔적 5. 성을 지탱하는 적심돌 등이다.

 

화성은 철저하게 실명제에 의해서 축성이 되었다. 공사구간마다 책임자들이 그들의 주도아래 성을 쌓은 것이다. 그리고 성벽에 그곳을 축성한 자들의 이름을 모두 적어 놓았다. 이 축성실명제의 표시는 화서문과 창룡문 등의 성문의 바깥쪽 벽에 새겨져 있다.

 

장안문의 옹성 위에 마련한 소방시설인 다섯개의 구멍인 오성지 

 

'화성성역의궤'‘<실정기實政記>에 이르기를, 오성지는 모양이 구유 같고 5개의 구멍을 뚫었는데 크기는 되()만하다. 적이 문을 불태우려 할 때 물을 내려 보낸다. 오성지를 설치하였는데, 전체 길이는 14, 너비는 5, 깊이는 2척이고 각 구멍의 지름은 1척이다.’라고 적고 있다. 장안문의 북옹성에 설치한 오성지를 설명한 글인데, 팔달문의 남옹성에도 오성지를 설치하였고 그 크기도 비슷했을 것으로 보인다. 오성지는 중국의 제도를 모방하여 다산 정약용이 설계하였는데, 옹성문이 없는 창룡문과 화서문에는 오성지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작은 규모지만 중요한 암문 중에서 동암문과 북암문에는 오성지를 설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성지 뒤편 위에 커다란 저수통을 만들고, 그곳에 구멍을 다섯 개 뚫어 옹성문 위에 설치한 것이 오성지이다. 적의 화공으로부터 성문을 지키는 한 방법이다.

 

장안문의 기단석에는 많은 성혈이 파여져 있다. 장안문은 신앙의 대상이었다

 

장안문은 화성의 정문이다. 이 장안문은 사실 신앙의 대상물이었다. 장안문이라는 상징성이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또한 정조대왕이 한양에서 화성행궁으로 오갈 때 이 장안문을 지났기 때문일 수도 있다. 장안문의 안쪽 왼편 기단석에 보면 성혈(性穴) 이 보인다. 대개 성혈이란 아주 오래 전 선사시대부터 전해진 신앙이라고 하지만, 화성은 200년 전에 축성되고 난 후 이 성혈이 생겼다는 것이다. 아마도 한양에 과거라도 보러 가는 남편과 자식을 위해서 이렇게 정성을 다 해 성혈을 조성한 것은 아니었을까?

 

성돌을 쪼개내기 위해 파 놓은 야질의 흔적들

 

화성을 밖으로 돌다가 보면 성을 쌓은 돌에 야질의 흔적이 보인다. 야질이란 성을 쌓을 돌을 쪼개낼 때, 커다란 바위의 계획선 위에 띄엄띄엄 원뿔형의 구멍을 정으로 파낸다. 그 다음 바짝 마른 밤나무나 소나무 따위를 그 구멍에 맞게 깎아서 박아 넣은 후에 물을 뿌린다. 물에 불어난 나무가 바위를 쪼개는 것이다. 이런 방법을 우리말로 야질이라고 하는데 고대로부터 써 오던 기술이다. 이 야질의 흔적이 성벽 곳곳에 남아있다.

 

가운데 큰 돌이 성을 단단하게 붙들고 있는 돌인 적심돌이다

 

화성은 위로 올라갈수록 약간 기울어져 있다. 2~3% 정도 안으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매우 단단해 보인다. 하지만 이것만 갖고 그 성이 단단하지는 않다. 그렇기에 성벽의 중간중간에 적심돌을 하나씩 끼워놓는다. 적심돌은 크고 깊게 박혀있는 돌로 그 길이가 5m 정도로 안으로 들어가 있다. 한 마디로 성벽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는 돌이다. 이 적심돌을 찾아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가 있다.

 

화성을 돌아보면서 느낄 수 있는 재미는 쏠쏠하다. 하지만 이런 것을 모르고 그냥 걷기만 한다면 의미가 없다. 앞으로 화성을 걷는 일이 있다면, 이러한 것들을 보고 느끼면서 진정한 화성을 멋스러움에 취해보기를 바란다.

남한산성은 <여지도서>의 기록에 의하면, 영조 35년인 1759년에 성내 남동에 614호에 2,246명이 살았고, 성내 북동에 462호에 1,862명이 거주를 했다고 기록을 하고 있다. 당시 성안에는 1,076호에 4,108명이 거주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삼국 초기부터 주변에는 토성 및 석성을 구축하고 적의 침입에 방비를 했던 군사적 요충지이다.

 

정조 13년인 1789년에는 성안에 1,044호에 3,631명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혜종 2년인 1836년의 인구는 <남한지>에 의거하여 1,117호에 4,353명이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남한산성은 그만큼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이러한 남한산성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서장대 밑. ‘청량당이라는 당호가 보이는 작은 전각이 있다.

 

 

이회장군을 모신 사당

 

18일 일요일 오후. 녹지 않은 눈을 밟으며 찾아간 청량당. 이곳을 찾아온 것도 벌써 여러 번이다. 이곳에서는 매당왕신 도당굿이라는 굿이 펼쳐지기도 하는데, 사전 조사를 하러 처음 찾아간 것이 2002년이었으니, 벌써 10년이 훌쩍 지났다.

 

한때는 일제의 문화말살정책과 혹세무민의 미신이나 우상숭배로 몰리기도 하고, 더욱 종교적 사대주의에 기인한 박해로 인해서 중단이 되기도 했던 도당굿. 이 매당왕신 도당굿은 남한산성 축조의 중임을 맡았으나, 지정된 기일 안에 성을 쌓지 못하여 억울한 누명을 쓰고 참수가 된 이회장군과 그 부인 송씨의 넋을 위로하는 굿이다.

 

 

둘레 길을 따라 숨을 헐떡이며 힘들게 올라간 서장대. 굳게 닫혀있는 청량당의 문을 바라보며 조금은 아쉽다. 물론 예전 자료야 갖고 있지만, 새로운 모습을 소개하고 싶은 욕심이 있기 때문이다. 이회장군의 탱화를 모시고 있는 청량당은, 남한산성 내 일장산 정상에 있는 서장대 서편의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다.

 

누명을 쓰고 참수당한 이회장군

 

이회장군은 조선조 인조 2~4(1624~1626) 사이에 지세가 험악한 산성 동남쪽의 축조 공사를 맡아했는데, 워낙 지형이 험해서 제 날짜에 공사를 마감하지 못하자 장군을 시기하는 간신의 무리들의 모함에 빠졌다. 장군이 주색잡기에 빠져서 공금을 탕진해 공기를 맞추지 못했다는 모함으로 인해, 서장대 앞뜰에서 참수를 당하게 되었다.

 

 

이때 장군은 구차스런 변명을 하지 않고, '내가 죄가 없으면 죽는 순간에 매 한 마리가 날아오리라. 만일 매가 오지 않으면 내 죄가 죽어 마땅하지만, 매가 날아오면 죄가 없는 것이다'라고 했단다. 그런데 정말로 참형을 당하는 순간 매 한 마리가 날아와, 서장대 앞에 있는 바위에 앉아 죽임을 당하는 장군을 바라보고 슬피 울었다고 하여서 그 바위를 매 바위라고 불렀으며, 청량당 안에 매 바위의 화분(탱화)을 그려서 보관하고 있다.

 

이회장군은 성의 축조를 완고히 하기 위해서, 처첩을 삼남지방으로 보내 축성 비용을 모금케도 하였다. 축성자금을 마련하여 광주로 돌아오는 길에 장군의 비보를 들은 처첩은, 비분을 금치 못하고 송파 강 머리에 몸을 던져 순절하고 말았다고 하여 당 안에 같이 모셔져 있다.

 

 

1920년도 자료에 보이는 매당왕신

 

1920년대에 조사된 자료에 의하면 남한산성 안에는 매당왕신(鷹堂王神)’이라는 도당이 있었으며, 이는 남한산성을 축조할 때 억울한 누명을 쓰고 참수를 당한 홍대감을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남한산 위에 화주당을 세웠다고 했다. 또한 처인 산활부인은 그 비보를 듣고 뚝섬 교외 한강변의 저자도에서 자살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매가 날아왔다거나 성을 축조할 비용을 주색잡기로 탕진했다는 내용이 서로 일치하고 있어서, 매당왕신 도당이라는 것이 지금의 청량당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2002년도에 청량당을 들렸을 때, 당 안에는 이회장군과 남편의 참형소식에 강물에 몸을 던져 순절한 송씨부인, 첩실인 유씨부인, 승병을 이끌고 남한산성 축성을 한 벽암대사의 화분이 있었다.

 

 

그리고 무속신인 백마신장과 오방신장, 이회장군의 당을 지키던 나씨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화분으로 모셨다는 대신할머니, 군웅, 별상 등의 화분도 함께 모셨다. 2002년 당시 조사를 할 때, 마을 주민들은 대감당(청량당을 마을 어르신들은 대감당이라고 불렀다)을 조성하고 그 앞에 향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이런 전해지는 이야기로 본다면, 청량당이 지어진 것은 벌써 400여년이나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청량당. 꽁꽁 닫힌 전각 안에서 이회장군은 답답함을 호소할 듯하다. 장군이 참형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 슬피 날아간 매처럼, 문을 열어 훨훨 날아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어떨지.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