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원래 드라마와는 거리가 먼 인사이다. TV를 볼 때도 뉴스나 다큐멘터리 외에 것은 잘 보게 되지 않는다. 그러다가 요즈음 새롭게 시작한 ‘신의’라는 드라마와 접하게 되고, 처음부터 끝까지 채널을 돌리지 않고 본 유일한 드라마이다.

 

SBS의 드라마 ‘신의’는 2012년 8월 13일부터 방송하는 월화 드라마이다. 이 드라마는 우리가 기존에 만났던 드라마와는 다른 IF의 가정설을 극화한 드라마이다. 사람들은 색다른 소재에 늘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런 점으로 볼 때, 이 신의는 첫 회부터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고 볼 수 있다.

 

 

김종학 연출 송지나 극본의, 신의는 고려 공민왕 1년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과거를 사는 무사 최영 역의 이민호, 조금은 푼수 같이 현대를 살아가는 속된 여의사 유은수 역의 김희선, 기철 역의 유오성, 공민왕 역의 류덕환, 노국공주 역의 박세영등이 열연을 한다.

 

상상 속으로의 여행이 주는 재미

 

이 드라마에서 우리가 주시해야 할 배우는, 한참이나 연기를 쉬었다가 브라운관을 통해 만나게 되는 여의사 유은수역의 김희선이다. 2012년 서울의 강남에서 병원이라도 개업하기 위해서는 돈 많은 남자를 잡아야한다는 조금은 너무나 시대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여의사 유은수는, 시공을 초월해 고려에서 현대로 온 최영에게 이끌려 고려로의 여행을 떠난다.

 

칼을 맞은 노국공주를 살려 낸 유은수는 다시 서울로 돌아오려고 하지만, 하늘 문이 닫혀버리게 된다. 유은수는 돌아갈 수가 없자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최영을 칼로 찌르게 되고, 다시 최영을 살려내기 위해 수술을 감행한다. 그리고 난 뒤 궁 안에서 온갖 팔푼이 같은 좌충우돌을 해가며 사람들을 난처하게 만든다.

 

푼수 여의사의 좌충우돌 고려생활

 

33세의 성형외과 전문의 유은수. 그녀는 외과전공이었지만, 외과가 돈이 안 된다고 하자 미련없이 성형외과를 택한 조금은 속물스런 요즘여자이다. 그런 유은수의 행동은 낯선 과거의 세계 고려의 사람들을 난처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오직 현대로 돌아가 3년만 고생을 해서 돈 많은 친구를 꼬드겨 강남에 개업의가 되는 것이 삶의 목표이다.

 

현대에서 하늘 문을 통해 660년 전의 고려로 최영에게 끌려간 여의사 유은수(김희선). 조금은 팔문이 같은 그녀의 연기가 드라마의 재미를 더한다.

 

29세의 고려무사 최영, 그 남자는 엑스트라 분장을 하고 여의사 유은수를 납치해 고려로 데리고 갔다. 그런데 이 푼수 끼 많은 여의사에게 무엇인가 조금씩 끌려가고 있다. 여의사 유은수도 이 660년의 시공을 뛰어 넘어 강남에서 고려로 자신을 데려간 젊은 무사의 눈빛 속에 깃든 슬픔을 보게 되고, 그런 젊은 우달치부대의 대장인 최영에게 마음이 끌린다.

 

판타지와 역사,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

 

사람들은 누구나 어려서부터 꿈을 꾼다. 어떤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보았다면, 꿈속에서 자신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그 나쁜 사람을 벌한다. 또는 하늘을 날아 역사 저 편으로 가서 활약을 한다거나,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상대적으로 많은 악한들을 혼내기도 한다. 드라마 ‘신의’는 그런 재미를 우리에게 주고 있다.

 

역사 속에서 가정은 늘 재미롭다. 만약에 그 시대에 내가 그곳에서 이렇게 적을 물리쳤다면, 혹은 악한들을 물리쳤다면, 과연 우리의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등의 꿈을 이루어 줄 수가 있다.

 

최영 역을 맡은 이민호. 많은 우려를 나았으나 그의 연기는 눈에서 보이는 슬픔으로 인해 한 역사를 이끌어가는 비운의 무사임을 잘 나타내고 있다

 

드라마 ‘신의’에는 긱양각색의 군상들의 모습이 보인다. 나라를 위해 자신을 버릴 수 있는 사람,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혼신을 다하는 사람, 그런가 하면 자신의 목적달성을 위해 미련 없이 사람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는 사람도 만날 수 있다. 그런 수많은 사람들 중에 나도 그 안에 존재시키는 재미를 느낄 수가 있다.

 

총 24부작으로 우리에게 수백 년의 시대를 뛰어넘어 만나게 되는 사랑을 보여 줄 드라마 ‘신의’. 서로가 추구하던 삶의 목적이 달랐지만, 이들은 시공을 초월한 순수한 사랑에 눈을 뜨게 된단다. 어찌 보면 드라마 ‘신의‘는 우리에게 주는 재미 외에도, 진정한 사랑을 잃어버린 이 시대의 군상들에게 사랑이 무엇인가를 깨우치기 위해 일침을 가하는지도 모르겠다. 여의사 유은수 역의 김희선의 연기가 기대되는 것도, 지금까지의 그녀와는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재미 때문일 것이다.(자료 사진은 SBS에서 인용하였습니다)

소를 타고 다녔다는 정승 고불 맹사성. 맹정승에 대한 이야기는 상당히 많이 전하는 편이다. 정승 고불 맹사성은 고려 공민왕 9년인 1360년에 태어나, 조선조 세종 20년인 1438년에 세상을 떠났다. 려말과 선초에 걸쳐 세상을 살다 간 맹사성은 본관은 신창이며 자는 자명, 호는 고불이다.

많은 벼슬을 거쳐 1427년에는 우의정이 되었으며, 1432년 좌의정을 지내고 난 후 1435년 관직에서 물러났다. 정승 황희와 함께 조선 초 우리 문화를 금자탑을 이룩한 양대 산맥으로 꼽히는 고불 맹사성. 시문에 능하고 음률에도 밝아 향악을 정리하기도 했다. 맹사성은 검소한 관리로 명성을 높였으며, 효자로 유명하여 효자정문이 세워지기도 했다.


청빈한 삶을 살다간 맹사성

충남 아산시 배방면 중리에 소재한 고불 맹사성의 옛집. 사적 제109호인 '맹씨 고택'은 맹사성이 살던 고려 때 지어진 고택과 더불어 맹사성이 심었나는 수령 600년이 지난 은행나무, 그리고 맹우와 맹희도, 맹사성의 위폐를 모신 세덕사가 있다.

평소 청빈한 삶을 살아 온 맹정승은 아랫사람이라고 하여 절대로 무시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집에 찾아오면 대문 밖까지 나가 맞아들이고, 언제나 상석에 앉혔으며 손이 떠날 때도 반드시 대분 밖까지 배웅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맹사성이 심었다고 전하는 ‘쌍행수’

고불의 고택이 있는 곳을 ‘맹씨 행단’이라고 한다. 행단은 은행나무가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돌담으로 양편을 쌓은 쪽문 안에는 <청백리 고불 맹사성 기념관>이라 쓴 현판이 걸려 있다. 밖으로 돌아 계단을 오르면 맹사성의 유적을 관리하는 사람이 살고 있는 듯, 솟을대문 안으로는 ㄱ 자 형의 집이 있다. 그 집을 바라보고 우측 계단으로 오르면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다.

고물 맹사성이 1380년경에 이곳에 심었다고 전해지는 은행나무이다. 두 그루 은행나무 중 우측의 은행나무는 외과 수술을 한 듯, 나무 가운데에 남성의 성기 같은 시멘트로 바른 죽은 가지가 보인다. 수령 630년이 지난 이 두 그루의 은행나무를 '쌍행수'라고 부르는데, 높이는 35m 둘레는 9m 정도에 이른다. 잎이 떨어져 가지만 남아 있어도 이렇게 위용을 보이고 있으니, 여름 무성한 잎을 달고 있다면 대단할 것 같다.

최영장군도 살다 간 680년 역사의 맹씨 고택

은행나무 앞으로 자리하고 있는 고택 한 채. 바로 고불 맹사성이 살았던 고택이다. 이 집은 고려 충숙왕 17년인 1330년에, 최영 장군의 부친인 최원직이 지었다고 한다. 실제로 무민공 최영이 살았던 집이다. 최영장군과 고불 맹사성이 살았다는 고택 한 채. 이 집의 내력이 대단하다.

고불 맹사성은 최영 장군의 손자사위이다. 최초로 지어진 지 680년이나 된 이 고려 때의 고택은, 최영과 맹사성이라는 역사의 일면을 장식한 두 사람이 거처로 정했던 곳이기도 하다. 맹씨 고택은 성종 13년인 1482년, 인조 20년인 1642년, 그리고 순조 때인 1814년과 1929년에 각각 중수한 기록이 남아 있다. 집은 '공(工)' 자 형으로 꾸며져 있으며, 27.5평에 불과하지만, 고려 때의 고부재와 창호 등을 볼 수 있는 소중한 집이다.




집안 곳곳에 배어 있는 고불의 청렴

두 사람의 시대를 풍미한 인물이 살다 간 고택. 최영 장군은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고 했다. 고불 맹사성은 청백리로 소를 타고 다니며 직접 아궁이에 불을 땔 정도로 청렴한 정승이었다. 이렇게 세상의 탐욕과는 거리가 먼 두 분의 마음이 맹씨 고택에는 그대로 배어 있다. 기단은 커다란 자연석을 이용하였고, 주추도 다듬지 않은 덤벙주추를 놓았다. 중앙에는 두 칸의 마루를 놓고, 양편에는 길에 방을 드렸다. 그 방의 끝이 앞뒤로 삐죽이 나와 工 자 형의 모습을 이루고 있다.

방은 별다른 꾸밈없이 양편에 길게 들였는데, 뒤편을 막아 각각 윗방을 들였다. 이 집의 아궁이는 별다르게 부엌을 만들지 않고, 앞면 담 밖에 아궁이를 놓았다. 이런 아궁이의 형태는 밑에 사람을 쓰지 않고, 직접 불을 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불 맹정승의 청빈한 삶을 그려 볼 수 있는 것이다.



700년 가까운 세월. 그렇게 청빈한 주인들이 살다 스러져간 고택 한 채. 그 집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남다르다. 요즈음 돈푼께나 있고, 권력께나 가졌다는 자들은 앞을 다투어 고래등같은 집을 짓고 자기자랑을 하고자 할 때, 그저 작은 집 하나로 비바람을 피했다. 그 청빈하고 세상에 찌들지 않은 마음 하나를, 비워놓은 내 마음에 담아간다.

충남 연기군 남면 나성리 산 59에는 전서공 임난수 장군의 부안임씨 가묘가 있다. 연기군 향토유적 제42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가묘는 고려 말 최영 장군과 더불어 탐라를 정벌하는데 큰 공을 세운 임난수 장군을 기리는 가묘이다. 임난수 장군은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세우자,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하여 벼슬을 버리고 현 남면 양화리에 은거하였다.

연기군 나성리에 있는 문화재를 답사하는 중에, 마을주민들이 가묘 뒤에 석불입상이 있다고 이야기를 한다. 연기군 홈페이지에서는 석불입상에 대한 문화재 정보가 전무하다. 그래도 혹 모른다는 생각에 길을 물어 찾아보기로 했다. 답사 증에 새로운 것을 찾는다는 것은, 답사를 하는 사람에게는 늘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전설을 갖고 있는 석불입상. 30분이 넘게 덩굴을 헤치고 찾아다녔다.
 
환삼덩굴을 30분이나 헤집고 다니다

가묘 뒤라고 해서 찾아보았다. 그러나 가묘 뒤로 길이 보이지를 않는다. 주변은 여름내 자란 풀들이 허리까지 차오른다. 거기다가 환삼덩굴은 가시가 있어 맨살에 스치면 금방 살이 부르트기 일쑤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찾아보았으나, 석불입상은 보이지가 않는다. 땀은 비오듯 쏟아지는데, 옷은 살에 감겨든다.

30여분을 길도 없는 덩굴을 헤치면서 다니다가 보니, 저만큼 무엇인가가 보인다. 거미줄과 덩굴더미를 헤치고 가보니 정말로 석불입상이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이곳에 서 있었다는 주민들의 말처럼, 석불입상은 보기에도 범상치가 않다. 뒷면은 그냥 돌을 쪼아낸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높이는 2m 정도가 되는 이 석불입상은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지 않아, 풀숲에 그대로 방치가 되어있다.


낮은 곳은 무릎까지 깊은 곳은 가슴까지 덩굴이 우거져 있다. 아래사진 가운데 흰 것이 석불입상이다.

지방의 장인에 의해 제작된 듯

석불입상은 눈썹이 굵게 표현하였다. 눈은 가늘고 길게 옆으로 -자로 팠는데, 쪼아낸 흔적이 보인다. 코는 뭉툭하게 표현을 하였다. 입은 작고 양끝이 약간 위로 치켜 올려졌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한 것으로 보아, 석불입상이 틀림이 없다. 경기 남부와 충청지역에서 많이 나타나는 고려 때의 거대석불과 같은 형태로 제작이 되었다.

귀는 어깨까지 내려왔으며, 가슴에는 손의 형상을 조각하다가 만듯하다. 전체적인 모습으로 볼 때 미완성인 석불입상과 같은 모습이다. 머리는 이마위로 잘려나갔다. 아마 그 위에 보개석이라도 얹을 생각이었나 보다. 그런데 어떻게 이 석불입상이 이런 곳에 서 있게 되었을까? 혹 전서공 임난수 장군과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다. 이런 형태로 보아 고려 시대에 재작하다가 미완성으로 남아있는 듯하다.

마을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마을 주민들이 이야기로 들려주는 이 석불입상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옛날에 이곳에 한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아들을 두지 못하여 대가 끊길 것을 생각하고 큰 걱정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백발 노승이 찾아와 시주를 달래서 후히 대접하고 가정 이야기를 하였더니, 노승이 그 석불입상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며 정성껏 예불을 드리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했단다. 그 부부는 음식을 차려놓고 한 달 동안 정성을 다해 예불을 드리자, 어느 날 저녁 그 부처님이 꿈에 나타나 “그대들의 지성이 지극해서 아들을 점지하니 잘 길러서 장차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하라. 그리고 어려운 일이 있거든 날 찾아라.”라고 말을 했다. 꿈을 꾸고 난 뒤 태기가 있어 열 달 만에 아들을 낳았다. 이 아기가 자라서 나라에 큰 공을 세웠다.

그런데 단란하게 살던 노부부가 모두 병으로 죽게 될 처지가 되었다. 지난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찾아라.”라는 꿈에서 본 부처님을 회상하고 아들에게 그 말을 하였더니, 아들은 곧 석불입상을 찾아가 부모님의 병이 낫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랬더니 이번에도 부처님이 꿈에 나타나 “내일 아침 일찍 산에 올라가 보면 둥근 바위가 있는데, 그 밑에 큰 더덕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캐서 부모님께 달여 드리면 병이 곧 나을 것이다. 만일 내일이 지나면 그 더덕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니 날짜를 어기지 말라.”라고 하였다. 다음날 아들이 산에 올라가 바위 밑을 보니 정말로 거기에 커다란 더덕이 있었다. 아들이 그것을 캐어 부모님께 달여 드리자 곧 완쾌되었다.(자료 / 연기실록)



맨 아래 사진이 부안 임씨의 가묘이다.

전설은 여기서 그치지를 않는다. 마을에 사는 불효자가 그 말을 듣고 석불입상에 빌러 큰 돌을 얻었는데, 어려운 사람을 돕지 않고 부모에게 효도를 하지 않았다. 그러자 돈이 모두 뱀이 되어 불효자의 온몸을 감아 질식해 죽였다고 한다. 나성리 마을 뒤편에 서 있는 미완성인 석불입상. 지정은 되지가 않았지만 그보다 더 큰 아름다운 지니고 있었다. 땀을 흘리며 덩굴을 헤치면서 찾아낸 석불입상. 그런 아름다운 전설을 간직한 채, 말없이 오랜 시간을 주민들과 무언의 대화를 하며 그 곳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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