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은 어디서 불어와 어디로 갈까? 나는 늘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이런 질문을 해왔다. 그러다가 한낮의 더위를 피해 찾아간 작은 정자에서, 흐르는 땀을 씻어주는 바람을 만났다. 그래서 난 정자를 '바람이 머무는 곳'이라고 표현을 한다. 바람은 정자 곁을 흐르는 물을 따라 불어온다.

 

그 물길을 따라오면서 시원한 바람을 만들어 주고, 그 바람은 정자를 치받쳐 오른다. 그래서 정자가 더 시원한 것은 아니었을까? 전국을 답사하면서 만난 아름다운 정자들. 그 정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암벽 위에 걸터앉은 정자

 

경북 예천군 용문면 죽림리 350에 소재한 초간정. 내를 끼고 선 암벽 위에 지어진 초간정은 멀리서도 사람의 발길을 끌어당기는 마력을 지녔다. 행여 누가 뒷덜미라도 낚아챌 것 같아 한달음에 달려간다. 정자는 아름다운 경관을 필요로 한다. 어디를 가서 보거나 정자들은 주변 경관이 빼어난 곳을 택해 자리를 잡고 있다.

 

정자는 민초들과는 거리가 멀다. 대개 반가의 사람들에 의해서 지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정자를 바라다보는 내 시각은 다르다. 그것을 지은 사람들이 누군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떻게 이렇게 빼어난 경관을 택했느냐는 물음을 항상 하고는 한다. 그래서 이렇게 덥거나 춥거나 쉴 수 없는 여정에 만나는 정자가, 더 반가운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작은 정자의 출입문, 주인의 심성을 닮아

 

정자로 출입하는 문이 작고 좁다. 이 정자를 지은 권문해(1534 ~ 1591) 선생의 마음을 읽어낸다. 작은 문으로 겸손하게 들어오라는 뜻일 것이다. 도포자락을 휘두르며 거만을 떨지 말고, 두 손 공손히 모으고 다소곳하게 문을 통과하라는 뜻일 것이다.

 

 

 

양반가의 사람들은 어디를 가나 거들먹거린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에 금력이 있으면, 겸손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초간 권문해 선생은 그런 것을 싫어했는지. 작은 문을 만들어 놓고 스스로 심신을 수양하기 위해 초간정을 지었다. 1582년인 조선 선조 15년에 처음 지어진 이 초간정은 그런 마음을 담고 있다.

 

안으로 들어가니 화려하지 않은 정자다. 정자의 뒷편과 우측은 절벽이다. 그 밑으로 맑은 물이 감돌아 흐른다. 마루 벽 한편에 문을 내어 난간으로 나갈 수 있게 하였다. 난간 밑에는 맑은 물이 고여 작은 소를 이루고 있다. 맑고 찬 물애 발을 담구면, 오장육부가 다 맑아질 것만 같다.

 

 

 

빈 낚싯대 늘이고 바람을 낚아

 

위를 보니 석조헌(夕釣軒)이란 현판에 걸려있다. 저녁에 낙시를 하는 마루란다. 이 현판을 보고 무릎을 친다. 정자 주인의 마음이 거기있기 때문이다. 아마 초간 권문해 선생은 실은 물고기를 잡을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그저 심신을 단련하기 위해 낚시를 드리우고, 눈을 감고 세상 시름을 끊는 공부를 했을 것이다. 그래서 해가 설핏한 저녁에 낚시를 한 것이 아닐까?

 

 

정자를 둘러보고 주인인 초간 권문해 선생의 마음을 느낀다. 참 소탈하다. 참 그 마음에 자연이 있다. 그런 생각을 한다. 정자문을 나서 새로 놓은 철다리를 건너려는데, 초간정을 감돌아 흐르는 내에서, 천렵을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참으로 한가한 정경이다. 사람이 사는 멋이 바로 저런 것은 아니었을까?

 

바람이 감돌아 쉬어가는 정자. 그 정자에는 사연도 많겠지만, 그 보다는 그 주인의 심성을 엿볼 수 있어 더욱 좋다. 그래서 바람 길을 따라나서는가 보다.

 

정자는 어느 곳에 세울까? 당연히 경치가 좋은 곳에 세운다. 그리고 물이 있고, 숲이 있어야 한다. 가장 기본적인 정자의 입지조건이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정자는 사람의 마음이다. 정자를 처음 그 자리에 세우는 사람들의 마음을 닮는다. 때로는 허전한 벌판가에도 정자는 있을 수가 있다. 볏단으로 지붕을 인 모정같은 것은 논 한가운데 자리를 한다. 그것은 농사를 짓는 농군들이 쉴수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5년 동안을 돌았나보다. 지나는 길목마다 서 있는 정자에 들린다. 일부러 정자를 찾는 일은 거의 없지만, 지나는 길에 정자가 보이면 어떻게 해서든지 들려보고는 했다. 이제 그동안 들린 정자가 200곳은 넘었나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있는 수많은 정자에 비하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 중 올 가을 여행지로 좋은 곳 10곳을 둘러본다. 물론 올 가을이 아니라도 좋다. 정자는 사시사철 바라보는 그 느낌이 다르기 때문이다.


강릉 해운정

강릉시 운정동에 자리하고 있는 보물 제183호이다. 정자가 보물로 지정이 된 예는 극히 드물다. 해운정은 그만큼 소중한 문화재이다. 뒤편으로는 소나무 몇 그루가 서 있고, 앞으로는 연꽃을 심었다. 요즈음에는 주변에 초당두부집들이 늘어서 있어, 새로운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그저 주변만 둘러보아도 즐거운 곳이다.


경주 독락당 계정

경주 안강읍에 소재한 독락당은 보물 제413호로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소재하고 있다..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년∼1553년)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지은 집의 사랑채이다. 이 독락당 한편으로는 계곡이 흐르는 곳에 계정이라는 정자가 서 있다. 이름 그대로 계곡에 서 있는 정자라는 뜻이다. 이 계정의 한편에는 방을 들이고, 부엌은 암벽 위 담에 두었다. 정자에 올라 앞으로 흐르는 물소리를 듣는 기분은 어떠할까?


고성 청학정

고성 청학정은 고성 팔경의 한 곳이다. 앞으로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있고, 그곳에 부딪치는 파도소리가 즐거운 곳이다. 멀리는 고기잡이를 하는 고깃배들이 까만 점처럼 보인다. 이 청학정은 고성에 있는 정자 중 한곳이지만, 관동팔경이라는 청간정보다 오히려 운치면에서는 뛰어난 곳이다.
    


남원 광한루


광한루에 대한 설명이야 굳이 필요가 없다. 춘향이와 이도령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보물 제281호인 광한루는 호남제일루라는 명성을 얻고 있는 곳이다. 정자는 입구에 층이 진 계단을 놓아 멋을 더했고, 앞으로는 삼신산을 꾸며놓았다. 한편에는 방을 들여 겨울에도 주변 경치를 즐길 수 있도록 하였다. 사시사철 언제 찾아가도 그 멋을 잃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대전 옥류각

계족산을 오르다가 만나는 옥류각은 송준길(1606∼1672) 선생이 학문을 연구하던 2층 누각 형식의 건물이다. 조선 인조 17년인 1639년에 계곡의 바위 위에 지은 건물로, 골짜기에는 4계절 옥같이 맑은 물이 흐른다고 하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정자는 계곡물이 흐르는 위에 자리를 잡았는데, 가을 은행잎이 물들때 찾아가면 정말 아름다운 옥류각을 만날 수가 있다. 대전시 유형문화재 제7호이다.


보성 열화정

전남 보성군 득량면 오봉리 강골마을에 있는 중요민속자료 제162호이다. 헌종 11년인 1845년에 이재 이진만이 후진양성을 위해 건립하였다. 영화당은 앞으로 연못을 두고 정자의 한편을 돌촐시켜 연정이라 이름을 붙였다. 영화촬영을 수차례 하기도 한 정자로 가장 아름다운 정자 중 한 곳이다. 열화정은 스스로가 자연이 되어, 자연 속에 파묻혀 있는 정자이다. 그만큼 스스로 드러내지를 않는다. 열화정을 제일로 손 꼽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주 취한대

영주 소수서원 입구를 들어서 송림사이를 지나는 길, 솔향이 코끝을 간지럽힌다. 이런 좋은 송림에서 사람들은 노송의 자태를 닮아 푸른마음을 가졌을까? 소수서원 건너편에, 내 건너 노송 몇 그루와 함께 어우러진 정자가 보인다. 취한대, 조선조 명종 5년인 1550년 당시 풍기군수이던 이황선생이 처음으로 지은 정자다. 이 아름다운 곳에 정자를 짓고, 소수서원의 원생들이 시를 지으면서 청운의 꿈을 키우도록 한 것이다. 취한이란 큰 뜻을 품으라는 것이었을까? 그 자태가 그대로 아름다움이다.


예천 병암정

예천군 용문면에 자리한 병암정. 황진이의 애틋한 사랑을 그려낸 곳으로 더 유명하다. 정자는 커다란 수직의 암벽 위에 자리하고 있으며, 주변에는 노송이 서 있다. 정자 앞 암벽 밑으로는 연못이 있고, 그 앞으로는 너른 들판이 펼쳐진다. 그래서 이곳이 황진이의 촬영지로 선정된 것일까? 보는 눈은 누구나 동일하다. 이 아름다움에 어찌 손을 꼽지 않을 수가 있을까?


예천 초간정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대동운부군옥』을 지은 초간 권문해(1534∼1591) 가 세운 정자이다. 예천군 용문면 죽림리에 자리한 초간정은 권문해가 심신을 수양하던 정자이다. 초간정은 개인적으로는 나이가 먹어 쉴만한 곳을 꼽으라고 한다면 첫째로 꼽을만한 곳이다. 정자를 감싸고 있는 계곡이 아름답기도 하려니와 정자 끝에 모인 소 또한 맑은물이 고여있다. 어찌 이런 곳에서 낚시를 하지 않을손가? 정자의 난간에서 낚시를 내리고 싶은 곳이다.


함양 거연정

맑은 물이 정자를 감싸고 돈다. 정자 뒤편 낮은 암벽에서 떨어지는 물은 깊은 소를 만든다. 그리고 그 바위 위에 그림같이 서 있는 거연정. 화림동 계곡에 서 있는 정자 중 가장 위편에 있는 거연정은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다. 숲길을 걸어 구름다리를 건너야 들어갈 수 있는 정자. 가을에 그 숲길은 또 어떤 자연의 멋을 보여주려나? 아름다움은 끝이 없다. 그래서 정자는 늘 그곳 바람결에 머물고, 난 발길을 그리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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