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은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북한강로 등에 위치한 남양주 운길산 수종사 일원을 국가지정문화재인 명승 제109호로 지정하였다고 12일 밝혔다. 수종사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류하는 두물머리 하천경관을 바라볼 수 있고, 운길산 정상에서는 한강은 물론 서울 북동쪽지역의 산지경관을 조망할 수 있다.

 

특히 두물머리는 금강산에서 발원한 북한강과 강원도 태백시의 금대봉 검룡소(명승 제73)에서 발원한 남한강이 합쳐지는 장소로 사계절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이 아름답다. 이 일원은 계절에 따라 신록, 녹음, 단풍, 설경을 감상할 수 있으며, 시간과 날씨에 따라 일출, 일몰, 운무 등 아름다운 풍광을 볼 수 있는 경관가치가 큰 곳이다.

 

 

조선초기의 대문호 서거정도 극찬한 곳

 

조선 초기 학자 서거정(14201488)은 수종사를 동방에서 제일의 전망을 가진 사찰이라 하였으며, 인근에 생가가 있었던 정약용(17621836)은 일생을 통해 수종사에서 지낸 즐거움을 군자유삼락(君子有三樂)’에 비교할 만큼 즐겨 찾던 곳으로 역사문화적 가치가 큰 곳이다. 또 다선(茶仙)으로 일컬어지는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가 정약용을 찾아와 한강의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며 차를 마신 장소로서 차 문화와도 깊은 인연이 있는 곳이다.

 

남양주에 두물머리와 수종사가 있다면, 우리 수원에는 광교산과 창성사지가 있다. 수원시 상광교동 산41에 소재한 수원시 향토유적 제4호인 창성사지. 창성사는 고려 말의 국사인 화엄종사였던 진각국사(1305~1382)의 사리탑과 함께 조성이 된, 보물 제14호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가 있던 곳이다. 현재 비는 화성의 방화수류정 가까이에 옮겨져 있다.

 

 

창성사지는 지금도 옛 절터의 석축이 남아있고, 사지 안에는 우물과 함께 여기저기 석물들이 보인다. 이 창성사지는 고려 때의 절터라고만 알려져 있다. 창성사지에 올라 앞을 내다보면 눈앞에 펼쳐지는 산의 능선이 아름답다. 아마도 저런 경치 때문에 이곳을 절터로 잡은 것은 아니었을까?

 

창성사 복원할 수 있을까?

 

지난 511시부터 수원시의회에서는 제302회 임시회 제2차 본회의가 열렸다. 이날 수원시 향토유적 제4호인 창성사지를 문화재 발굴조사를 한다는 안건이 통과되었다. 창성사지는 수원시와 한울문화재연구원의 정밀지표조사를 통해 2008년 대략적인 현황이 파악된 바 있다. 이번 동의안은 수원지역 관련 학술연구의 전문성을 확보하고 업무의 효율성을 높이고자 책임성 있는 법인 또는 학술연구기관을 선정하여 문화재 조사를 실시한다는 것이다.

 

 

특히 창성사지의 발굴조사는 창성사지의 사역 및 건물지 확인, 보물 제14호인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의 원 위치 주변을 조사하여 창성사지의 가람배치 및 창건시기를 파악하는데 중점을 두고, 향후 연차적 발굴조사 계획 및 복원 정비를 위한 기초 자료로 활용한다는 방안 등이 포함되어 있다.

 

만일 창성사지의 문화재 발굴조사가 끝나고 이곳에 옛 건물대로 창성사가 복원이 될 수 있다면, 많은 절터가 있는 광교산도 명승으로 지정을 받을 수 있지는 않을 것인지. 특히 창성사를 오르는 길이나 사지에서 바라다 보이는 정경은 이곳이 명승이 되고도 남을만하다는 생각이다. 물론 이곳을 자주 찾아가고 이곳이 경치를 좋아하는 내 생각일수도 있겠지만.

 

 

문화재청에서 수종사 일원을 명승으로 지정했다는 소식에, 광교산 창성사의 소실이 안타깝다. 보물인 비도 있었던 것으로 보아, 옛 모습을 유추해 내기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듯해서이다. 오늘은 창성사지를 다시 한 번 찾아가보아야겠다.

창성사지, 수원 광교산에 있는 옛날 창성사라는 절터 이름이다. 이곳을 찾으러 9월 10일 산행을 시작했다. 창성사지를 찾기 위해 벌써 3번 째 산을 오르는 길이다. 광교산 입구에 있는 안내판을 보고 길을 들었다가, 엉뚱한 곳을 헤매기를 두 번. 이번에는 제대로 설명을 듣고 찾아가기 시작했다.

 

입구 어느 곳 한 군데 하다못해 나무 판에 화살표라도 하나 해놓았으면, 이런 고생은 하지 않았을 텐데. 숲속에 들어가 모기와 전쟁을 하면서 찾아들어간 창성사지. 천천히 걸어 30~40분 정도면 찾을 수 있는 곳을 그동안 그렇게 고생을 했다. 안내판 없는 문화재 하나를 찾으려면, 이렇게 고생을 해야 한다. 문화재 안내판의 중요성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잡초더미에 쌓여있는 고려 때의 절터인 창성사지

 

여기가 창성사지, 해도 너무한다.

 

계곡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니 안내판이 보인다. 수원시 상광교동 산41에 소재한 수원시 향토유적 제4호인 창성사지. 창성사는 고려 말의 국사인 화엄종사였던 진각국사(1305~1382)의 사리탑과 함께 조성이 된, 보물 제14호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가 있던 곳이다. 진각국사의 탑비는 현재는 수원 화성 안 방화수류정 길 위편으로 옮겨져 있다.

 

그런데 이 창성사지를 보고 그 자리에 털벅 주저앉고 말았다. 세 번씩이나 찾아서 겨우 올라 온 곳인데, 사지라고 알아볼 수도 없을 만큼 잡초더미에 묻혀있다. 아무리 찾아오는 사람이 없고, 향토유적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것일까?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이런 꼴을 보면, 정말 부아가 치밀기 이전에 먼저 눈물이 난다.

 

창성사지의 아래편 석축. 600년이 넘는 세월을 그렇게 서 있었다 

석축 및 움막, 누가 무엇때문에 지은 것일까? 흉물로 되어버렸다.

 

도대체 이 창성사라는 곳의 가치는 알고 있는 것일까? 축대와 우물, 그리고 기단석과 주춧돌. 그 안에는 과거 창성사의 흔적이 남아있는데, 잡초더미에 쌓여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이다.

 

풀숲을 헤집고 창성사지를 돌아보다.

 

창성사지 안으로 풀숲을 헤치고 들어섰다. 옛 축대가 보인다. 높이 4 ~ 5m 정도의 축대로 보아, 이곳을 기점으로 아래 위에 전각이 들어서 있었을 것이다. 잡초 속에서 꽃 한 송이가 아름답게 피어있다. 그런 모습이 더욱 눈물겹게 만든다. 축대 밑으로는 누군가 이곳에서 기도라도 한 것일까? 다 찢어져 가는 움막이 있다.

 

 

이렇게 방치된 몰골로 서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은 아예 한 번도 정비를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더럽혀진 옷가지며 그릇들이 널브러져 있는 움막, 무엇을 하던 곳일까? 조금만 걸으려고 해도 풀이 발에 감겨 걷기조차 힘들다. 풀이 워낙 우거지다 보니, 그 밑에 무엇이 있는지조차 가늠하기가 어렵다.

 

현재 석축은 약 50m 정도가 남아있다. 석축으로 쌓은 기단은 2단으로 되어있는데, 아래층 기단의 위로 또 2m 정도의 석축의 흔적이 보인다. 이 위층 석축은 다 무너져 내린 형태이다. 그런 것 하나를 알아보는 것도 쉽지가 않다. 온통 풀로 뒤덮여 있기 때문이다.

 

창성사지 안에 풀숲에 가려진 기단석과 주추돌

 

석축으로 쌓은 우물, 맑은 물이 고여 있어

 

맨 위로 올라갔다. 200년은 됨직한 소나무 한 그루가 가지를 뻗고 서 있다. 사지 안으로 들어가니 돌로 쌓은 우물터가 보인다. 밑에는 흙이 쌓여 앙금이 졌지만, 지금도 맑은 물이 고여 있다. 아마도 이 터에 남아있었던 진각국사의 사리탑과 비 등으로 유추할 때, 창성사는 고려 초에 창건된 절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진각국사의 비에는 국사가 13세에 입문한 뒤 여러 절을 다니며 수행하고, 부석사를 중수하는 등 소백산에서 76세에 입적하기까지의 행적이 실려 있다. 입적한 다음 해인 우왕 12년인 1386년에 광교산 창성사 경내에 이 비가 세워졌다. 이 비의 내력만으로도 창성사는 625년이 지난 절이었으니, 아마 그 이전에 지어졌다고 보면 그 역사가 상당한 절이었을 것이다.

 

석축으로 쌓은 우물터. 아직도 물이 고여있다 

 

약 500평 정도의 규모를 가졌을 창성사지. 그 안 서북쪽의 대웅전지에는 장대석으로 조성한 기단석과 여기저기 주초로 사용했던 돌들이 보인다. 이곳에는 탑재편과 기단의 갑석 등도 보이는데, 어느 것 하나 잡초더미 때문에 제대로 알아보기가 힘들다. 위편 석축 끝으로 가서 산 아래를 바라다본다. 이곳에 절을 지은 이유를 알만하다. 저 멀리 아름다운 산의 능선이며 수원 시가지가 눈앞에 펼쳐진다.

 

길을 안내하는 표시판 하나 없이, 잡초에 묻혀있는 고려 때의 절터인 창성사지. 이렇게 내버려둘 것 같으면 왜 향토유적 지정은 한 것일까? 돌아서는 내내 고개를 돌려 바라본다. 가슴이 미어지는 문화재 답사는 더 이상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창성사지에서 바라다 본 능선. 저 멀리 수원이 희미하게 보인다.


수원 화성의 방화수류정에서 차도를 따라 삼일공고 쪽으로 조금 올라가다 보면, 도로 좌측에 작은 비각이 하나 서 있다. 그저 알 수 없는 사람들은, 신경을 쓸 일도 없이 지나쳐버리기 쉬운 그런 비각이다. 이 비각은 바로 보물 제14호인 창성사진각국사대각원조탑이다. 안내판이 없다고 하면, 아무도 이 작은 비각 안에 서 있는 탑비의 존재를 알 수가 없다.

 

진각국사의 행적을 알리는 소중한 문화재

 

진각국사조탑비는 창성사 터에 서 있었다고 한다. 이 탑비는 고려 우왕 12년인 1386년에 명승인 진각국사(1307 ~ 1382)의 행적을 기록한 탑비로, 원래는 수원 광교산 창성사 경내에 건립한 비이다. 진각국사는 충렬왕 33년에 출생하여 13세에 화엄종 반용사에 들어가, 19세에 상풍선에 오른 고려 말의 화엄종사이다. 왕은 <대화엄종사 선교도총섭>이라는 칭호를 주었다. 창성사가 폐사되어 1965년도에 이비를 매향동 현 위치로 옮겼다.

 

 

이 탑비는 진각국사의 행적을 알리는 탑비로, 직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몸돌을 세운 다음, 덮개석인 우진각 형태의 지붕돌을 올려놓았다. 진각국사의 행적을 새긴 몸돌은 마멸이 심하고, 오른쪽 모서리가 떨어져 나갔다. 지붕돌의 경사면이 완만하며, 전체적으로 보면 단순한 형태로 구성이 되었다.

 

창성사 터로 돌아가야 해

 

광교산에 있는 창성사 터엔 많은 문화재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주춧돌이며 축대의 부분이 남아있다. 농사를 짓고 있어 석물들이 제자리를 떠나 함부로 훼손을 한 흔적이 역력하다. 소중한 문화유산의 현장이 마구잡이로 훼손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 창성사 터에 서 있어야 할 탑비가, 왜 현 위치로 옮겨져야 했을까? 어떤 문화재이든지 그것이 제자리에 서 있을 때 그 가치가 더 높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관계도 없는 방화수류정의 한 편에 와서, 서 있는 보물 제14호 창성사진각국사대각원조탑비를 이해할 수가 없다.

 

 

 

지금이라도 광교산에 있는 창성사 터로 돌아가 제자리를 지키면서, 그곳의 유적발굴이 더 시급한 것은 아닐까? 비문에는 진각국사가 13세에 입문한 뒤 여러 절을 다니며 수행하고 부석사를 중수하는 등, 소백산에서 76세에 입적하기까지의 행적을 적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비의 몸돌은 마모가 심해 글자를 알아보기조차 어려운 실정이다.

 

소중한 문화유산 대책이 아쉬워

 

이 창성사진각국사대각원조탑비는 고려 후기의 단순화된 석비의 형식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형태의 비는, 보물 제229호인 여주 신륵사의 보제존자석종비와 같은 형태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여주 신륵사의 보제존자석종비는 제자리에 있으면서, 그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비문의 글자도 아직 그대로 남아있다.

 

 

 

이색이 비문을 짓고 권주가 글씨를 새긴 창성사조탑비. 지금의 위치는 이 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곳이다. 차라리 박물관 안에라도 있었다고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이라도 가져주지는 않았을까? 지나는 사람들조차 관심 없이 지나쳐버리는 소중한 문화유산. 이곳에 있어야 할 이유도 없고. 이곳과는 전혀 관계도 없다. 그러한 소중한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를 옮겨, 아무런 관계도 없는 곳에 세워놓은 것은, 엄밀히 따지면 문화재의 또 다른 훼손이란 생각이다.

 

창성사의 발굴이 시급하듯이, 이 탑비 역시 창성사터로 돌아가 제자리를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저 보존이라는 명분으로 아무런 연관도 없는 곳에 갖다 세워놓은 탑비 한 기가,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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