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음력으로 정월 초4일 입춘이다. 이제 봄이 시작하는 날이다. 입춘은 24절기 중 가장 먼저 맞는 절기인데 그 해에 따라 드는 날이 많은 차이가 난다. 입춘은 어느 해는 섣달에 들기도 하고, 올해처럼 정월에 들기도 한다. 올해는 갑오년 정월 초사흘(24)에 들었다. 윤달이 끼면 12월과 정월에 입춘이 함께 들기도 하는데 이를 재봉춘(再逢春)’이라고 한다.

 

입춘은 24절기 중에 가장 먼저 드는 절기로 나름 중요한 의미를 갖는 날이다. 올해의 경우는 입춘이 갖는 의미가 색다르다. 정월 초하루에 설의 의식이 끝나고 나면 초이틀은 귀신날이라고 하여서 문밖출입을 삼갔다. 그리고 초사흘이 되면 하늘에서 토주의 신인 평신(坪神)이 내려오는 날이라고 해서, 각 마을마다 풍장패가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일 년의 안과태평을 기원하는 지신밟기를 시작한다.

 

 

보리뿌리 점치기를 아세요?

 

농촌에서는 입춘이 되면 바빠진다. 일 년 농사의 준비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농촌에서는 입춘이 되면 보리뿌리를 캐 보아서 그 해의 농작물에 대한 풍년과 흉년을 점치는 풍습이 있었다. 보리가 세 가작이면 그 해는 풍년이 들고, 두 가닥이면 평년작, 그리고 한 부리면 흉년이 든다는 속설이 있다.

 

또한 입춘에는 오곡의 씨앗을 전이 낮은 솥이나 철판 위에 놓고 볶는다. 이렇게 곡식의 씨앗을 놓고 볶을 때 가장 먼저 솥 밖이나 철판 밖으로 튀어나가는 곡식이 그 해에 풍년이 든다고 하였다. 입춘에는 일 년 동안 가내의 안과태평을 발원하고 재복이 왕성하게 해달라고 굿을 하는데 이를 입춘굿이라고 한다.

 

 

입춘축(立春祝)’은 무엇인가?

 

입춘이 되면 경향의 각지와 가정에서는 대문이나 기둥에 춘축(春祝)이라는 글귀를 써 붙인다. 이를 춘첩자(春帖子)’라고도 하는데. 상중인 가정은 이를 붙이지 않는다. 예전 대궐에서는 내전의 각 기둥에다 연상시(延祥詩)’를 첩자에 써서 붙인다. 연상시란 승정원에서 시종 당하의 문신을 뽑아서 홍문관 교학에 운을 내어 오언(五言)이나 칠언의 율시로서 시를 짓게 하여 이 중에 뽑힌 글을 말한다.

 

이렇게 연상시에서 뽑힌 글을 써서 내전의 기둥에 붙이는 것을 춘첩자라고 한다. 이 축원은 한 줄로 되어있으면 춘련이라 하고, 두 줄로 되어 있으면 대련이라고 하였다. 이런 글귀 중에 많이 쓰이는 글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입춘대길 건양다경

국태민안 가치인족

소지황금출 개문만복래

부모천년수 자손만세영

천하태평춘 사방무일사

등을 써서 붙인다. 이는 모두 한 해 동안 좋은 일이 있기를 바라는 절구로 새로 짓는 경우도 있지만, 옛 사람의 글귀를 따다가 쓰기도 했다.

 

갑오년 입춘은 음 정월 4일 오전 73분에 들었다. 물론 옛 절기가 이 시대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라고 반문을 할 수도 있지만, 과거 우리의 풍습은 모두가 공동체를 창출해 내는 일이었다. 옛것을 소중히 여기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나가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해야 힐 일이 아닐까? 입춘을 맞아 그 풍습 알아본다는 것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서구화된 문명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조선조 말기부터, 일제강점기의 강압적인 우리문화 말살정책으로 인해 수없이 사라져간 우리의 풍속들. 그 안에는 상원일이라고 하는 정월 대보름의 놀이들이 있었다. 공동체를 창출하고 마을과 마을 간의 단합을 일구어 낸 수많은 놀이들이, 단지 옛것이나 미신이라는 폄하로 인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사실 정월 대보름은 우리민족에게는 4대 명절 증 하나였다. 설날, 추석, 동지와 함께 정월대보름을 큰 명절로 잡은 것이다. 이렇게 정월 대보름을 큰 명절로 잡은 이유는 정월 초사흘부터 시작한 각종 공동체놀이들이, 정월 대보름을 기해 마무리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월 초하루에 설을 쇤 사람들은 초이틀은 귀신 날이라고 해서 근신을 하다가, 하늘에서 평신(平神)이 하강한다는 초사흘부터 지신밟기 등 각종 놀이를 즐기기 시작한다.

 

두레싸움은 서로 상대마을의 두레기에 달려들어 꼭대기에 꽂힌 꿩장목을 빼앗는다

 

3일부터 시작하는 대동놀이들

 

음력 초3일되면 각 마을마다 두레패가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지신밟기를 한다. 지신밟기는 마을마다 한 집도 빠짐없이 다니면서 고사덕담(告祀德談)’인 축원을 해주는데, 문굿서 부터 시작을 해 우물, 마구간, 부엌, 장독대 등을 돈 후 대청에 마련해 놓은 고사상 앞에서 덕담을 한다.

 

고사덕담은 그 집이 일 년 동안 안과태평하기를 바라는 축원굿으로 일 년 간의 액을 막아내는 홍수풀이부터, 농사가 풍년이 들기를 바라는 농사풀이 등 창자의 능력을 따라 다양한 소리를 한다. 지신밟기를 마치면 대청에 마련한 술과 떡을 나누고 난 뒤, 고사상에 올려 진 쌀과 돈을 갖고 다음 집으로 향한다. 그 쌀과 돈은 마을의 기금으로 사용을 하는 것이다.

 

예전에는 집집마다 먼저 지신밟기를 하기 위해 풍물패를 집안으로 끌어들였다고 하니, 우리민족은 정월에 하는 놀이가 풍농과 안과태평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만 같다. 이렇게 마을을 돌면서 지신밟기를 하던 두레패들이 길에서 만나게 되면, 상대방에게 먼저 기를 숙여 인사를 하라고 소리를 친다. 그러다가 급기야 상대 두레기의 기의 상단에 꽂힌 꿩장목을 뽑게 되는데, 이것이 정월에 열리는 '두레싸움'이다.

 

두례싸움에서 먼저 꿩 장목을 빼앗긴 마을은, 상대방의 마을을 '형님마을'로 일년간 대우를 하게 된다. 그리고 이긴 마을에서는 빼앗은 꿩장목을 기에 함께 달고 다니기도 했다. 진 마을에서는 일 년 동안 장목이 없는 두레기를 들고 다녀야만 한다. 

 

수원 고색동 코잡이 놀이( 사진 / 이용창)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줄다리기 

 

음력 정월 14일 밤이나 보름날 마을에서는 줄다리기를 벌인다. 줄다리기는 풍농과 다산, 마을의 안녕 등을 기원하는 기원성 대동놀이이다. 이 줄다리기는 처음부터 큰 줄을 갖고 줄다리기를 하기도 하지만, 처음에는 마을마다 작은 새끼줄을 갖고 줄을 당기고, 진 마을의 줄을 이긴 마을 줄에다가 더하게 된다.

 

그 줄을 갖고 이웃의 이긴 마을끼리 서로 줄다리기를 하면 조금 굵은 줄이 된다. 그것이 또 다른 마을과 시합을 하면서 자꾸만 더해져, 나중에는 얌용과 숫용이라는 거대한 줄이 된다. 이 줄을 암용의 용두는 넓게 하고, 숫용은 가늘고 뾰족하게 제작한다. 이 숫용의 용두를 암룡의 용두에 밀어 넣어 비녀라고 부르는 장목으로 고정시킨다.

 

이렇게 제작된 용을 당기게 되는데, 줄을 당기게 되는 이유와 용도는 마을마다 차이가 난다. 어느 곳은 여자와 남자로 나누어 당기기도 하는데, 이 때는 여자가 이겨야 풍농이 든다고 한다. 다산과 풍농이 필요한 시기에 나타난 속설이다. 또 이 줄을 마을 입구에 놓아 액을 막거나, 줄을 이용해 보를 막기도 한다. 어느 곳에서는 이 줄에 액송기를 꽂고 물에 떠내려 보내, 모든 액을 막아내기도 했다.

 

우리고장 고색동에는 코잡이놀이라고 하여 줄다리기가 전해졌다. 한 때 중단되었던 고색동 줄다리기는 인근 12개 마을에서 풍물패가 모여들어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삭전(索戰)이라고도 부르는 줄다리기의 기원은 아주 오래전에 기인한다. 고색동 줄다리기도 언제부터 시작하였는지는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무척 오래전부터였던 것으로 보인다.

 

1796년 수원 화성의 축성 이후에는 양반과 평민이 나누어 줄을 당겼다고 전해지고 있는 고색동 줄다리기는, 일제 강점기는 1960년대 까지도 전승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의동 길마재줄다리기 역시 영통구 길마재와 용인시 수지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줄다리기를 하였다. 남자들은 동쪽 줄인 숫줄을 잡고 여자와 이이들은 서쪽 암줄을 당겼는데, 결과는 늘 암줄이 이겼다고 한다. 이는 여자들이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장치기는 겨우내 움츠렸던 몸을 활달하게 하기 위한 놀이였다

 

한 겨울의 움츠려든 몸을 푸는 장치기

 

장치기는 마상유희인 격구에서 비롯했다고 한다. 정조대왕 당시 펴낸 <무예도보통지>의 무예 24기에도 마상무예 중 격구가 포함되어 있다. 격구는 고려조에 들어서 여자들도 즐겼으나, 너무나 요란한 치장으로 인해 중지를 시키기도 했다. 그러한 격구가 민간놀이로 변하게 된 것이 장치기라고 본다.

 

장치기는 간단하게 공을 몰고 다니는 이라는 나무막대와, 소나무공이나 짚을 이용해 만든 얼레공만 가지면 누구나 즐길 수가 있다. ‘얼레공치기라고도 부르는 장치기는 수원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193121일자 <동아일보>는 서탄면 황구지천에서 전국의 32개 남여 팀이 참가한, '전 조선 얼레공대회'가 열렸다고 보도했다. <동아일보> 사보 124일자부터 30일자까지에는 수원군 양감면 용소리 앞 냇가에서 얼레공대회를 개최한다는 예고가 실렸으며, 참가할 각 팀의 선수는 5명으로 한다고 하였다.

 

양감면 용소리 앞 냇가에서 열기로 한 전조선얼레공대회에, 구경꾼들이 너무 많이 몰려들어 장소를 서탄면 황구지천으로 이동을 했다는 것이다. 예전 수원은 장치기를 재현시켜 전국민속경연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한 겨울동안 움츠려들었던 몸을 풀고, 봄을 맞이하여 농사를 지을 힘을 비축하기 위한 놀이로도 많이 이용을 한 것이 장치기였다.

 

액송기를 꽂은 줄을 강물에 띄워보내는 액송의식 

 

그 외에 사라진 놀이

 

정월 열나흘이 되면 마을의 공터에 달집을 세운다. 대나무와 솔가지, 짚을 이용해 쌓은 달집은 보름을 맞아 농사를 짓기 전에 해충을 없애는 기능을 갖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해동(解冬=겨울을 녹인다)’의 뜻이 더 깊다. 쥐불놀이와 함께 대보름을 맞이하기 전에, 모든 재액을 태워버린다는 속설을 갖고 있기도 하다.

 

사람들은 라는 짚단으로 만든 것을 손에 들고 있다가, 달이 뜨기를 기다려 제일먼저 달이 뜬 것을 본 사람이, ‘망월(望月)이여를 외치면서 달집으로 달려가 불을 붙인다. 달맞이를 할 때는 임산부인 여자가 먼저 보면 남자아이를 낳고, 병자가 먼저 보면 병이 완쾌된다고도 한다. 처녀가 먼저 보면 시집을 가고, 총각이 먼저 보면 장가를 간다고도 한다.

 

달집태우기(사진 / 이용창)

 

이렇게 다양한 우리들의 상원일의 놀이는 이 외에도 마을과 마을이 벌이는 횃불싸움이나, 수원의 여러 마을에서 나타났던 석전(石戰=돌싸움), 그리고 일 년 동안 건강한 몸과 다리를 튼튼하게 한다는 다리밟기 등 많은 놀이가 전해지고 있었다.

 

정월 보름날 아침에는 연에다가 서원을 적거나, 집안의 애환을 적어 날려 보내는 액연날리기도 있었다. 이렇게 다양한 정월 대보름의 놀이들은 모두가 풍농과 풍어, 마을의 안녕, 가내의 안과태평 등의 속성을 지니고 있었다. 우리민족은 그 안에서 공동체를 창출했으며, 놀이를 하면서 이웃과 하나가 되는 우리라는 단단한 결속력을 다졌던 것이다.

 

그러나 작금에 들어 재현이 되는 많은 놀이들을 보면서,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사고는 사라진 채 단순히 보여주기 위한 전시성민속이 되어가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우리민족의 상원일의 놀이는 단순한 연희가 아닌, 그 내면에 깊은 사고를 지닌 놀이였기 때문이다.

옛 말에 이란 말이 있다. '굿이나 보고 떡이자 먹자'는. 과연 이 말은 맞는 이야기일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맞는다'가 정답이다. 예전 굿판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지금은 굿을 하번 과일, 육고기 등 음식을 많이 차리지만, 예전에는 전과 떡을 수북히 쌓아놓았다.

이렇게 음식을 많이 준비를 하는 까닭은. 굿은 열린 축제이기 때문이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굿판을 모두에게 개방이 되어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느 집에서 굿을 한다고 하면, 그 집으로 발길을 옮기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많은 떡과 전을 준비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을 먹이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굿판에 가면 '굿을 보고 떡을 먹는' 것이 그 당시의 풍습이었다.


굿, 어떻게 다가서야 할까?

요즈음 일부 종교인들은 '굿'을 '미신'이나 ;우상숭배' 혹은 '마귀' 등으로 표현을 한다. 난 당연히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굿에서 보이는 많은 신들이 미신이고 우상숭배 혹은 마귀라고 친다면, 세상의 모든 신격들은 다 우상숭배요 마귀가 된다. 왜 유독 굿판에 현신하는 신격들만이 그런 이야길 들어야 할까? 그것은 굿을 잘 모르고 하는 무식의 소치이다. 또한 굿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고, 그, 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태초 이래서 굿을 해왔다.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예의 무천 등 이 모든 것을 '맞이굿'이라고 불렀다. 가끔 드라마에서 보이는 천관이나 천녀들이 지금 우리가 보는 굿을 하던 사람들이었다. 맞이굿이란 하늘의 신인 '천신'을 맞아들이는 의식이다. 이런 의식을 할 때는 3일 밤낮을 먹고 마시고, 춤을 추며 노래를 했다.

이런 굿이 시대가 흐르면서 연
희적 성격을 접고, 신성만 강조하다보니 지금과 같은 형태로 변질이 된 것이다. '굿' 그 자체는 정말로 'good'이다. 이런 굿판에서는 항상 먹을 것이 넘치고 사람들은 밤새 웃고 떠들고 같이 울고는 했다. 굿을 하는 주인집에서는 문고리마다 떡을 끼워 놓는다. 굿판에 모인 아이들이 다니면서 그것을 막게 하기 위함이다. 나눔의 장소, 그곳이 바로 굿판이었다.

좋은 날도 없는데 굿판이나 한 번 벌려봐!

사람들은 왜 긋을 할까? 물론 굿을 하는 무격들의 인격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사회에 문제를 야기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많은 무격들 중에는 없는 사람을 도와주고, 30년 가까이 혼자거 300여명이나 되는 어른들을 모시고 봄, 가을로 경로전치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문제는 굿, 그 자체가 아니라, 굿을 하는 사람들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옛날부터 전해지는 '굿니아 보고 떡이나 먹자'라는 말은 그만큼 우리에게는 좋은 의미이다. 굿판에 가서 즐길만큼 즐기고, 그러고도 배불리 먹을 수가 있다면 이보다 좋은 것이 어디 잇을까? 그래서 굿판을 '열린 축제의 장'이라고 표현을 한다.

굿 중의 굿, 안택성주굿

굿판에는 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답답한 마음을 시원하게 만드는 곳이 바로 굿판이기 때문이다. 안택성주굿은 집안의 가신 중에서 가장 으뜸인 성주를 모시는 굿이다. 일부러 성주굿만 하는 경우도 있다. 집안의 가장의 나이가 29, 39. 49. 59. 69 살이되면 성주를 맞아 모신다. 이렇게 9이라는 숫자에 성주를 모시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 속설에 '아홉수를 넘기기 힘들다'고 하기 때문인가 보다.

성주를 받는 모습이다. 성주신이 내리면 성주대가 움직이고, 성주를 모실 자리를 알려준다. 

이 성주굿은 정말로 흥이 난다. 대청에 두 사람이 마주 앉는다. 한 사람은 징을 치고, 또 한 사람은 참나무로 만든 성주대를 잡고 앉는다. 축원을 하면 성주대가 움직여 성주를 달 곳을 알려준다. 성주신은 집안의 대들보나 안방의  위에 자릴 잡는다. 성주를 모시고나면 대천에서 길게 소창을 늘여 놓는다. 성주풀이를 하면서 지신을 밟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밤새 웃고 마시고, 울고 떠들고 춤을 추면서 지새우는 것이 바로 굿이다. 이런 굿의 진가를 모르는 무지한 인간들이 괜한 소리를 한다. 요즈음은 이런 굿판 보기도 쉽지가 않다. 하도 떠벌리는 인간들이 많으니 점차 산 속으로 숨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 살기 멋같은 요즘 같은 세상. 걸진 굿판이나 벌렸으면 좋겠다.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게.


 

성주를 모시고 나면, 소창을 잡고 한바탕 춤을 추면서 지신밟기를 한다. 누구나 다 이집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굿판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열린 축제의 장'이고 끈끈한 공동체가 살아있는 곳이다. '굿이나 보고 떡을 먹는 곳'이기도 하다. 

고사로다 고사로다 고사덕담을 들어보소(중략)

천지간 가져갈 때 하늘 열려 땅 생기니

일월성신 갖추었구나

만물이 생겨나고 모든 생명 피어날 때

하늘에 명을 얻어 우리조상이 생겼구나
(경기민요 예능보유자 김혜란 창)


천지현황 조판 후에 혼돈세계 길탄말가

일대국이 건설되고 건부곤모 가결하니

음과 양의 조화로다. 태양태음이 일월이요

산수조공을 살펴보니 인황씨가 조종이라

학을 눌러 대궐 짓고 대궐 앞에는 육조로다

육조 앞에는 오영문, 오영문 앞에는 삼각산인데

각도 각읍을 마련할 제 인왕산이 주산이요 종남산은 안산이라

(가장 보편적인 고사덕담의 사설)



‘고사덕담’이 있다. 말 그대로 고사를 드리면서 덕담을 하는 것이다. 고사덕담은 대개 정초에 집안에서 이루어지는 지신밟기를 할 때, 마을의 풍물패 중에서 소리를 잘하는 사람들이 즐겨 부르고는 한다.


말 그대로 일 년의 평안을 축원하다.


고사덕담을 정월에 하는 이유는, 이렇게 정월에 덕담을 들어야 그 해가 평안하다는 속설 때문이다. 고사덕담을 할 때는 북이 옆에서 장단을 넣어준다. 고사덕담은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처음에는 그 가정이 생긴 내력부터 먼저 시작한다. 그리고는 이어서 자손축원과 액을 막아주는 달거리인 홍수맥이를 한 후, 풍년을 축원하는 농사풀이로 이루어진다.


이렇게 고사덕담을 할 때는 집집마다 대청에 고사상을 차린다. 고사상은 소반에 쌀말이나 함지박에 쌀을 가득 담고, 그 위에 촛불을 켠다. 북어를 한 마리 꽂은 후 실타래를 걸쳐놓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시루떡을 해 같이 올리기도 한다. 이때 올려지는 쌀은 모두 풍물패들이 가져간다. 주인은 특별히 풍물패를 위하여 음식을 준비해주기도 한다.


쌀을 올려놓는 것은 집안의 풍요와 풍농을 기원하는 것이며, 북어는 만복을 기원한다. 실타래는 자손들이 수명장수 하기를 바라는 것이고, 시루떡은 축귀를 의미한다. 이렇듯 그 하나하나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풍물패들은 고사덕담을 하면서 그 집안의 평안과 풍농, 그리고 자손창성을 기원한다.


이댁 가중 전에 어린 아기씨

날이면 물이 맑고 밤이 되면 불이 밝아

부귀공명 발원이요. 자손창성 축원이라

부모님께는 효자동이 형제간에는 우애동이

친척 간에는 화목동이 이웃 간에는 귀염둥이



서로에게 나누어 주는 덕담


그렇게 준비를 한 음식과 술은 마을사람들이 모두 모여 잔치를 벌인다. 그리고 쌀과 축원에서 나온 돈은 마을을 위하여 사용을 한다. 고사덕담 안에는 마을 전체가 함께 잘 되기를 바라는 공동체가 있다. 누구나 함께 한다는 공동체 속에, 무엇 하나라도 나눈다는 ‘우리‘가 있는 것이다.


고사덕담은 애가 복을 갖는 것이 아니다. 마을 집집마다 고루 복을 받을 수 있도록 나누어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민족의 심성이다. 이런 우리의 전통적인 정초 문화가 사라진 지금, 우리는 이기주의와 물질숭배주의가 팽배해 있다. 본연의 우리모습을 잃은 것이다. 올 신묘년 한 해 모든 가정에 고사덕담을 축원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본질을 찾았으면 하는 바람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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