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에 소재한 송광사. 김제 금산사의 말사이면서도 사세는 어느 고찰 못지않다. 송광사는 많은 문화재가 있지만, 그 중 돋보이는 것은 당연히 조선시대에 축조된 보물 제1244호 종루이다. 송광사 종루는 십자각으로 지어진 종루이다. 중앙에 종을 매달고 동서남북 사방을 돌출시켜 열 십(十)자 모양으로 지어진 이층 누각을 말한다.

 

통일신라시대에 지어진 고찰 송광사

 

완주 송광사는 통일신라 경문왕 7년인 867년에 도의선사가 처음으로 창건했다고 한다. 신라 때의 승려 도의는 가지산파의 개조로 추앙을 받은 승려이다. 가지산파란 구산선문의 하나로, 헌덕왕 때 보조선사 체징이 도의를 종조로 삼고 가지산 보림사에서 일으킨 선풍을 말한다.

 

 

송광사는 그 뒤에 폐허가 되어가던 것을 고려 중기의 고승 보조국사가 중건을 하려고 했지만, 오랫동안 짓지 못하다가, 광해군 14년인 1622년에 응호, 승명, 운정 등이 중건을 했다고 한다. 이후로도 계속해서 절의 확장공사가 있었으며, 현재도 많은 불사를 하고 있는 절이다.

 

화려한 이층 누각으로 마련한 종루

 

송광사의 종루는 조선조 세조 때 처음으로 지었다고 한다. 그 뒤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던 것을 철종 8년인 1857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조선조에 세워진 수많은 건조물 중 유일한 이층 십자형 종각으로, 그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은 건조물이다. 이 종각은 중앙에 종을 매달고 돌출된 부분에는 각각 북과 목어, 운판을 걸어놓았다.

 

 

 

이 네 가지의 기물은 불당 앞에 위치하고 있어 '불전사물(佛前四物)'이라고 하고 있으며, 아침과 저녁 예불을 올리기 전에 울린다. 북은 땅 위에 사는 네발을 가진 짐승을 위해서, 목어는 물속에 사는 생명체를 위해서, 운판은 창공을 나는 모든 날짐승을 이해서, 그리고 종은 지옥에서 고통 받는 영혼들을 위한 것이다.

 

송광사 종루는 화려하면서도 소박하다. 자연석인 정평주초 석을 놓고 그 위에 기둥들은 원형기둥과 사각기둥이 섞여 있다. 그 중에는 자연적인 목재를 그대로 사용한 것이 있어, 소박함이 느껴진다. 누 위에 기둥들은 모두 원형기둥을 세워 놓았다. 송광사 종루의 공포는 화려하기가 이를 데 없다. 사방 팔작집으로 마련한 종루는 지붕 중심 용마루의 장식 또한 색다르다. 이러한 종각은 우리나라에 유일한 것이기에 그 가치가 더욱 크다고 하겠다.

 

 

 

 

 

볼수록 빠져드는 송광사 종루

 

요즈음은 참 일기가 가늠하기가 힘들다. 맑았다가도 비가오기도 하고, 여름 같은 날씨이기도 하다가 갑자기 가을이 온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완주군 소양면 방향으로 일을 보러나갔다가 송광사를 들렸다. 사월 초파일 준비로 한창인 경내에는 수많은 등에 여기저기 걸려 그 화려함을 자랑한다. 대웅전 앞에 자리한 이층 종루는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 전국의 고찰을 다니면서 수많은 종각을 보았지만, 송광사 중층 종각과 같은 것을 보지 못했다.

 

 

사방으로 뻗어나간 용마루 중앙에 올린 장식도 아름답지만, 귀공포의 화려함은 말로 형용할 수가 없다. 그리고 누마루 밑의 자연스런 기둥들. 제각각 그 모습을 달리한 기둥의 형상들이, 마치 각양각색의 인간들을 보는 듯하다. 그 많은 중생들이 서로가 불전사물을 받치고 예라도 올리는 듯한 모습이다. 송광사 종루를 볼 때마다 마음이 경건해지는 것도 그러한 이유다.

 

언제나 그 자리에 그 모양을 하고 서 있지만, 볼 때마다 빠져드는 송광사 종루. 오늘도 온 곳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수많은 생명들을 위해 사물에서는 저절로 소리가 울릴 것만 같다.

수많은 사람들이 글을 썼다. 글마다 광한루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 광한루는 조선조 세종 원년인 1419년에, 황희가 '광통루'라는 누각을 짓고 산천경계를 즐기던 곳이었다. 1444년에는 전라도 관찰사 정인지가 광통루를 거닐다가 아름다운 경치에 취하여, 이곳을 달나라 미인이라는 '항아'가 사는 월궁속의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라 칭한 후 ‘광한루’라 이름을 고쳐 부르게 되었다.

그 후 광한루는 1461년 부사 장의국에 의해 보수가 되고, 1582년에는 전라도 관찰사인 정철이 광한루를 크게 지었다. 현재의 광한루는 정유재란 불에 탄 사라진 것을, 인조 16년인 1639년 남원부사 신감이 복원하였다. 광한루원 전체는 명승 제33호로 지정이 되어있지만, 광한루만은 보물 제281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호남제일루'라 명성을 얻어

'호남제일루', 광한루는 그런 명성에 조금도 뒤처지지 않는 누각이다. '누(樓)'란 사방을 트고 마루를 한층 높여 지은 누각을 말한다. 밑으로는 사람이 서서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높인 전각이다. 광한루의 규모는 정면 5칸에 측면이 4칸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누마루 주변에는 난간을 둘렀고 기둥 사이에는 4면 모두 문을 달아 놓았는데, 여름에는 사방이 트이게끔 안쪽으로 걷어 올려 걸 수 있도록 해 놓았다.

또한 누의 동쪽에는 정면 2칸, 측면 1칸의 부속건물인 날개채를 들였다. 주위로는 툇마루와 난간을 둘렀고 안쪽은 온돌방으로 만들어 놓았다. 뒷면 가운데 칸에 있는 계단은 조선 후기에 만든 것이다. 춘향전의 무대로도 널리 알려진 강한루.앞으로는 넓은 인공 정원과 인공 섬, 그리고 정자들이 서 있어 한국 누정의 대표가 되는 문화재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광한루 뒤집어 보기, 문화재 관리의 양면성

누구나 광한루를 가면 그 누정에 올라 춘향이와 이몽룡의 사랑을 한 번쯤 흉내를 내보고 싶어한다. 한 때는 광한루를 개방하였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소중한 문화재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어째 우리나라 문화재의 보존 관리는 공무원들의 사고에 의해서 멋대로 바뀌는 것인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출입을 시켰을 때는 문화재 보호가 되지 않는 것인지.

그렇게 문화재 관리를 통제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면 입장료 받고 광한루원에도 출입을 시켜서는 안되는 것이 아닐까? 정작 광한루원은 돈을 받고 출입을 시키고, 광한루는 보존을 해랴하기 때문에 출입을 시킬 수 없다는 것은 납득이 가질 않는다.




광한루의 주추는 특이하다. 밑에는 네모난 덤벙주추를 놓고 그 위에 막다듬은 장초석을 올렸다. 다시 원형의 기둥을 놓고 누마루를 받치게 하였다. 일부는 장초석으로 대신하기도 했다. 동편에 붙여지은 날개채는 온돌방이다. 그런데 그 밑에는 네모난 장초석으로 받쳐놓고 있다. 그 날개채 밑을 한 바퀴 돌아본다. 그러나 온돌방 밑에 있어야 할 아궁이가 보이지 않는다. 모두 돌 담으로 막아 놓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아궁이만 볼 수 있어도 한결 문화재를 아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문화재 관리의 양면성을 본다. 한편에서 보존이라는 허울아래 출입을 통제시키면서, 정작 온돌방의 밑 부분은 모두 돌담을 쌓아 막아버리다니. 이런 양면적인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씁쓸하다. 아마도 저 막아버린 돌담 안에는 한편을 높게 싼 아궁이가 있었을 것이다.




아름다운 광한루, 월궁의 선녀인 항아가 노닐만 하다는 곳. 그리고 춘향전의 무대가 되었던 곳. 그 무대 주변만 맴돌다가 결국엔 열어서 위로 붙들어 맨 창틀만 찍고 말았다. 느껴야만 하는 문화재를 보존이라는 명목으로 단절시키는 이런 행위, 이것만이 정말 보존일까? 제대로 된 문화재 정책이 아쉽다. 어느 곳은 보물인데도 사람들을 출입시켜 더욱 마루가 반들거리고 보존만 잘 되던데...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