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품을 파는 문화재답사를 한지가 벌써 20년째다. 그동안 숱한 문화재를 보고 다녔지만, 아직도 너무 많은 곳을 찾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늘 마음만 바쁘다. 일을 시작하고 보니, 요즈음은 시간이 더 빠른 듯하다.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가장 화가 나는 것은 꽁꽁 닫힌 문이다.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열 수 있는 방법이 없어 담장 밖에서 까치발을 딛고 보아야하기가 일쑤였다.


생활에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남아도는 것도 아니다. 내가 아니라도 많은 사람들은 문화재 답사를 하고 글을 올린다. 그래서인지 이제는 그만 두고 싶다는 생각을 가끔은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은, 아마 타고난 역마살 때문일 것이다.



닫힌 문 앞에 메모지 하나


충북 단양군 가곡면 덕천리에 가면 중요민속자료 제145호인 조자형가옥이 있다. 어렵게 길을 물어 찾아간 곳은, 좁은 마을길로 들어서야만 한다. 집 앞에 도착하니 문이 닫혀있다. 오늘도 또 공을 치나보다 하고 돌아서려니, 대문 사이에 웬 쪽지 한 장이 보인다. 가서 읽어보다가 왈칵 눈물이라도 쏟을 것만 같다.


‘주인은 외출중입니다. 천천히 둘러보시고 안녕히 가십시오.’



세상에 이런 배려를 하는 문화재도 있다. 문을 밀쳐보니 열린다. 안으로 들어가니 곳곳마다 이곳은 어디입니다. 이곳은 무슨 용도로 쓰이는 곳입니다. 그런 안내문구가 붙어있다. 어떻게 이렇게 자상할 수가 있는 것일까? 남들은 문화재를 보호한다고 사람이 있어도 문도 열어주지 않는데, 주인이 없다는 안내와 함께 문을 열어 놓고 천천히 돌아보란다.


집 안으로 들어가니 모든 것이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있다. 40평의 목조기와집은 조자형 가옥은 남향집이다. 집 앞으로는 남한강이 흐르고 뒤로는 산을 두르고 있는, 전형적인 배신임수의 형태를 띤 전형적인 민가이다. 집이 자연을 벗어나지 않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지어졌다. 주인의 심성을 닮아서인가 보다.

  



안채 대청마루와 안채 부엌의 까치구멍, 그라고 부엌 건너에 아랫방

1800년대 중부지방의 민가형태


이 집은 일제 때는 최씨가 살았고, 6,25 동란 후에는 박씨가 살았다고 한다. 1958년에는 조성락씨가 대대적인 수리를 하였으며, 1972년 현재의 주인인 조자형씨가 매입을 했다고 한다. 집의 전체적인 구조는 ㄱ 자형의 안채와 ㄴ 자형의 사랑차가 맞물려 튼 ㅁ 자 형으로 꾸며져 있다.


사랑채는 대문 쪽으로 사랑마루를 둔 조금은 색다른 형태로 꾸며졌으며, 사랑채의 안쪽은 행랑으로 삼았다. 사랑채와 대문을 두고 맞물린 곳은 광채로, 좁은 공간을 적절히 이용한 것이 특이하다. 중부지방의 전형적인 건물배치를 하고 있는 이 가옥은 부엌과 안방을 두고, 꺾인 부분에 대청마루와 건넌방을 두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부엌 아래에 별도로 아랫방을 한 칸 더 두었다는 점이다.  





대문을 사이에 두고 광채와 사랑채가 접해있다(맨위) 뒤뜰도 말끔하게 정리를 했으며, 장독대와 예전에 사용하던 풍구가 보인다.

집을 한 바퀴 돌아보고 이것저것 사진을 찍었다. 예전에 사용하던 여물통이며 디딜방아, 그리고 풍구 등도 그대로 말끔하게 손질이 되어, 제자리에 놓여있다. 마치 연대를 거슬러 올라, 이런 것들을 사용할 당시 그대로인 것만 같다. 곳곳마다 붙어있는 안내문구가 정말로 사람을 기분좋게 만든다.


수많은 문화재를 답사하면서 다녔지만, 20년 만에 가장 기분 좋은 하루가 된 날이다. 이렇게 주인이 없어도 개방을 하고, 사람들을 받아들여도, 훼손이 없이 더 잘 보존이 될 수 있다는 모범을 보이는 것만 같다. 집을 다 둘러보고 나서는 부엌 문 앞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방문해 주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둘러보시고 문은 닫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가시는 길 안전운행 하시고, 안녕히 가십시오.       


집 안 곳곳에 붙어있는 안내문구. 문화재 답사 20년 만에 가장 기분좋은 답사를 했다.

충남 서천군 기산면 신산리 120에 소재한 이하복 가옥은 중요민속자료 제197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하복 가옥은 한산이씨 중시조인 목은 이색선생의 18대손인 이병식(중추원의관)이 조선조 말인 19세기말에 안채 3칸을 짓고, 그 후 대를 이어 20세기 초에 사랑채와 행랑채, 아래채 등을 새로 지었다.

이하복 가옥은 안마당을 중심으로 ㄱ자형의 안채와 그 앞쪽으로 一자형의 사랑채, 안채의 앞 우측으로 광채가 있어 튼 ㅁ자형 배치를 하였다. 또한 안채를 드나드는 중문 밖으로는 사랑채와 대문으로 연결이 된 행랑채와 그 뒤편에 아래채가 자리하고 있다. 중부지방의 전통적인 농가로 안채의 앞쪽지붕이 뒤쪽보다 길게 처리가 되어있으며, 중문 밖으로 며느리의 독립적인 공간을 마련해 준 것이 특이하다.



주인의 설명을 받아 돌아 본 옛집

이하복 가옥을 찾아갔을 때는 대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인기척에 사랑채에 거주하시던 어르신이 몸소 나오시어 대문을 열어준다. 대문 안으로 들어가면 우측으로 사랑채와 연결이 된 행랑채가 - 자형으로 배치가 되어있고, 그 맞은편에는 아래채가 자리하고 있다. 특이한 집 구조이다.

“이 아래채는 나중에 지은 것인데, 집에서 며느리를 들이면 이곳에서 생활을 하게 했던 곳입니다”

어르신의 설명이다. 중문을 지나 안채로 들어갔다. 안채는 원래 부엌과 방 2개로 구성된 3칸 집이었다고 한다. 나중에 왼쪽의 부엌을 늘리고 오른쪽으로 대청과 방, 그리고·부엌 겸 헛간으로 사용하는 헛청을 덧달았다. 사랑채는 왼쪽에 대문을 내고, 부엌과 사랑방으로 구성되었다. 사랑채의 우측 부엌에는 작은 쪽문을 내어 밖으로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사진 위로부터 대문, 중문, 안채, 아래채

전체적인 구성은 길게 - 자 형의 두 줄로 나열된 집이지만, 공간 구성이 특이하고 살아가는데 있어 불편함을 주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를 한 것이다. 아마 새로 시집을 온 며느리가 생활을 하기에 불편함이 없도록 마음을 쓴 흔적이 역력하다.

집안에 사용하던 가재도구가 그대로 박물관

대문 입구에는 ‘재단법인 청암문화재단’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안으로 들어가 집안을 돌아보면서 입을 다물지 못한다. 수많은 책들과 많은 농기구들. 그리고 광채에 놓여진 그릇들이며 각종 집기들. 도대체 이 많은 것들이 왜 이 고택에 있는 것일까?





위로부터 안 광채, 아래 광채 그리고 전시가 되어있는 각종 기물

“이것들은 모두 어디서 구해오셨어요”
“예전부터 집에서 사용하던 것인데 물량이 너무 많다보니 이렇게 정리를 했어요.”
“이것만 해도 말할 수 없을 만큼의 가치가 있을 듯합니다”
“사람들은 옛 것이라고 자꾸만 버리지만, 그것이 우리의 실생활에서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죠.”

할 말이 없다. 이렇게 하나하나 정리를 하고 진열을 해 놓으면 훌륭한 교육자료가 된다. 역사 속에서 우리네와 함께 생활을 해온, 손때가 묻은 것들이다. 몇 번이고 주변을 돌아보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이리 방대한 자료를 본 적이 없다. 고택기행을 하면서 이하복 가옥의 남다른 점이 바로 이렇게 많은 생활도구 때문이다.

“정말 좋은 구경을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날은 덥고 땀은 흐르지만, 이보다 더 값진 선물은 없을 듯하다.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고 길을 떠나면서 ‘고맙습니다’를 속으로 되뇐다.




중문으로 내다 본 아래채와 장독, 그리고 안채 굴뚝 

벌써 두어 달이 지났나 보다. 이천시 율면에 있는 어재연장군 생가를 답사하기 위해 가보니, 한창 공사 중이었다. 안내판에 2009년 5월 29일부터 11월 25일까지 지붕보수를 한다고 적혀 있다. 복잡한 공사 중인 집을 촬영할 수가 없어 그냥 돌아왔다. 12월 6일이니 공사를 마쳤을 것 같아, 다시 이천시 율면 산성리 74번지 중요민속자료 제127호인 생가로 향했다. 올 들어 가장 춥다는 날씨답게, 걷는 길이 쉽지가 않다. 어재연장군 생가가 보이는 소롯길로 접어들었는데, 이게 웬일인가? 지붕 위에 파랑색이 보인다. 공사기간이 10일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공사가 끝나지 않았다. 마침 일요일이라 공사는 하지 않고 있긴 하지만, 이런 낭패가 어디 있을까?

 

 

공사 중인 어재연장군 생가, 멀리서 온 분들의 불평

 

어재연 장군 생가를 들어가니 멀리서 왔다고 하는 분들이 안을 둘러보고 계시다. 이분들도 나처럼 황당하다고 한다. "공기를 적었으면 책임지고 공사를 마쳐주어야지, 무엇하러 안내판에 공사기간을 적어요. 의미도 없는 기간을"이라며 볼멘소리를 한다. 이렇게 어지럽게 널려있는 상황에서 무엇을 제대로 촬영이나 할 수 있을까? 그래도 어쩔 것인가. 여기까지 두 번이나 찾아왔는데, 볼썽 사납기는 하지만 그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생각이다. 할 수 없이 몇 바퀴 집안을 둘러본다.

 

  
▲ 안내판 공사 안내판에는 2009년 11월 25일까지 공사를 한다고 적혀있다.

 

350년 된 안채, 평범함 속 돋보이는 미

 

어재연장군 생가는 초가로 지어진 조선 후기 살림집 형태이다. 대문을 마주하고 좌측으로는 사랑채와 헛간채가 - 자로 자리하고, 대문을 들어서면 문간방과 광채가 ∣자로 배치가 되어 있다. 사랑채와 광채를 마주 하고 ㄱ 자형 안채가 자리하고 있어, 전체적으로는 튼 ㅁ 자형 가옥구조다.

 

안채는 조선조 현종 1년인 1660년에 지어졌으니, 벌써 350년이나 되었다. 안채는 건넌방과 두 칸 마루, 그리고 안방이 일렬로 배치가 되었고, 꺾인 곳에 부엌과 광이 있다. 대청은 방에 비해 꽤 넓게 자리를 잡았다. 대청에는 두 곳 문을 내어 바람을 통하게 하였다. 그런데 건넌방 앞에 있는 문 위에, 세 개의 작은 창이 보인다. 무엇이었을까? 열어보니 다락이다. 이렇게 대청에 작은 다락을 만든 용도가 무엇일까?

 

  
▲ 대청의 창호 대청 뒤편에 난 문과 그 위에 작은 창호

  
▲ 다락 윗부분만 있는 다락. 대청에 있어 많은 용도로 사용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뒤쪽으로 돌아가 보니 윗문이 있는 곳이 돌출이 되어 있다. 밑은 나무로 지줏대를 만들고, 그 위 벽을 돌출된 다락과 같은 형태로 만들었다. 여름에도 집 뒤쪽에 있으니 시원하게 바람이 소통될 듯하다. 대청에 있고, 습기가 차지 않는다는 점, 바람이 잘 통한다는 점에서 돌출된 작은 다락 용도를 생각해보면, 과일이나 습기에 약한 비싼 천 가지를 보관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어릴 적 시골 친척집에 갔다가 이런 대청에 붙은 다락에서, 친척할머니께서 과일을 꺼내는 것을 본 기억이 난다.

 

  
▲ 문틀 안채의 안방 뒤. 가로지른 문틀의 나무가 다듬지 않은 자연 그대로이다.

 

안채를 돌아보다가 안방 뒤쪽으로 돌아갔다. 안방은 길게 놓여있는데 뒷문이 두 개나 나 있다. 그 뒷문 문틀을 보고는 한참이나 서 있었다. 자연스럽게 휜 나무를 그대로 사용해 문 밑에 틀인 가로기둥을 삼았다. 흙벽으로 바른 안방 벽에 가로지른 문틀. 그 하나의 여유가 이렇게 사람을 푸근하게 할 줄이야. 그래서 사람들은 다듬고, 자르고, 가꾸기보다, 자연 그대로가 더 아름답다고 하는 것일까? 아마 성형미인이 아무리 예쁘다고 해도, 자연 그대로 미인보다 떨어진다는 것이 그래서인지. 괜히 비교도 안되는 것을, 억지로 비교를 해가며 혼자 웃는다.           

 

사랑채와 대문간의 여유

 

어재연장군 생가의 사랑채는 6칸 규모다. 사랑방과 대청 앞뒤에 개방된 툇간이 있다. 그리고 4칸의 헛간이 연결되어 있어 전체적으로는 10칸 규모다. 사랑채 앞에 놓인 대청은 시원하게 만들어졌다. 문도 없고 그대로 개방이 되어 있다. 대문과 연결 된 곳에는 작은 골방이 있다. 방들이 전체적으로 작은 것은, 겨울철 방을 따듯하게 보온하기 위해서이다. 대개 민가의 초가집은 방이 작고 천정이 얕다.

 

  
▲ 사랑채 공사중으로 어수선하다. 대문과 연결된 사랑채의 대청은 문이 없이 개방이 되어있어, 시원하개 보인다.

  
▲ 문간방의 담 문간방 앞에 돌로 담을 쌓았다. 안채를 직접 보지 못하게 한 가림벽이지만 바람벽의 구실도 함께 한다

 

광채 끝에 마련한 문간방 앞에는 돌담을 쌓았다. 안채를 직접 보지 못하는 가림벽 용도로도 사용했지만, 바람벽이기도 하다. 초가집의 이런 오밀조밀함이 고래 등 같은 기와보다 오히려 정겹다. 그런 돌담 하나를 두었다고 안채가 전혀 들여다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작은 것 하나를 갖고도 마음의 편안함을 느낄 수가 있다는 것에 대해, 우리 선조들의 여유가 어느 정도인가 가늠이 된다.

 

돌로 붙인 담벼락이 투박하다고

 

사랑채와 안채, 그리고 광채 바깥벽 아랫부분은 돌로 담벼락을 만들었다. 기존 벽을 두고 그 위에 돌을 절반쯤 올려붙인 것이다. 진흙과 함께 바른 돌들이 그대로 문양이 된다. 높이는 어른 가슴 정도지만, 돌출된 돌 담벼락이 아름답다. 누군가 내가 우리 고택을 돌아보면서 이런저런 모습을 아름답다고 했더니, 별걸 다 아름답다고 감탄을 한다고 한마디 한다. 그러나 난 이런 작은 것 하나가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든다는 것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살고 싶지는 않다고 늘 생각을 한다.

 

  
▲ 담벼락 돌로 문양을 넣은 담벼락. 기존의 담벼락에 덧붙여 보온의 효과를 높였다.

 

이것이 단지 담벼락을 아름답게 치장하기 위해서 붙인 것일까? 아니다. 이렇게 이중으로 아랫부분을 만들면 그 담벼락의 두께가 두꺼워지고, 그만큼 찬 겨울에 보온이 된다. 외부의 바람과 맞닿는 곳에 이런 담벼락을 만든 것도, 알고 보면 과학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어재연장군 생가는 야산 기슭에 북서향으로 위치하고 있으며, 앞으로는 바람을 막을 구조물이 하나도 없다. 주변에도 집이 들어서 있지를 않아, 바람에 그대로 노출이 된다. 그런 집의 구조상 이중의 담벼락이 보온에 상당한 효과가 있을 것이다. 아름다움에, 방한의 효과까지 있다면 금상첨화가 아닐까?

 

돌담에 초가를 올렸다.

 

어재연 장군은 조선조 말기 무장이다. 순조 23년인 1823년 이 집에서 태어나 고종 8년인 1871년에 고아성보 전투에서 세상을 떠났다. 어재연 장군은 신미양요 때인 1871년, 로저스 제독이 이끄는 미국 아시아 함대가 조선에 쳐들어오자, 4월 15일 진무중군에 임명되어 600여 명의 각 영 포군을 이끌고 광성보로 나가 적과 대치를 하였다. 4월 23일과 24일, 초지진과 덕진진을 함락한 미군은, 4월 25일 광성보를 공격해왔다. 미군이 수륙양면에서 광성보로 돌입하자, 치열한 백병전을 벌이며 적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를 하였다. 어재연 장군의 생가 맞은편에는, 장군과 형제인 재순 등의 위폐를 모셔놓은 충장사가 자리하고 있다.

 

  
▲ 돌담 돌담 위에 용마름을 틀어 짚으로 지붕을 만들어 올렸다. 어재연장군 생가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멋이다.

 

어재연 장군의 생가에서 보는 또 하나의 색다름은 바로 담장이다. 안채 뒤편에는 돌로 축대를 쌓아 만든 밭이 있고, 담장을 둘러놓았다. 이 담장은 돌과 황토를 섞어 만들고, 그 위에 용마름을 엮어 초가를 올렸다. 용마름을 얹은 담장. 지금은 정비가 되지 않아 조금은 지저분하게 보이지만, 공사를 마친 후에는 이 또한 색다른 멋으로 다가올 것이다. 공사를 다 마치고 나면, 다시 한 번 이곳을 방문하리라 마음을 먹는다. 겨우겨우 촬영한 몇 장의 사진이 어재연 장군의 생가를 소개하는 데는 버겁지만, 그래도 이 초가로 된 고택의 아름다움은 조금은 소개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출처 : 오마이뉴스 / 2009, 1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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